1905년 혁명 120년:
1917년 10월 혁명의 리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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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인 1905년 1월 9일(구력 기준, 오늘날 달력으로는 1월 22일)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이 차르의 궁궐로 행진했다. 신민의 삶을 굽어살펴 달라고 청원하는 이 평화 시위대에 차르는 발포를 명령했다. 4000명이 죽었다.
훗날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러시아 제정을 붕괴 직전까지 내몬 혁명의 서막이 됐다.
반동의 보루
러시아 제정은 19세기 초 서유럽의 혁명들에 맞서 구체제의 부활을 주도한 이래로 유럽에서 줄곧 반동의 보루 구실을 했다. 그래서 가장 온건한 자유주의자들도 차르 정권을 혐오했다.
제정 치하에서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은 봉건적 굴레에 매여 굶주리고 헐벗었다.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억압받았고 그래서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제정 러시아를 “민족들의 감옥”으로 불렀다.
동시에 몇몇 대도시에서는 산업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대규모인 공장들이 잇달아 세워졌고, 철도가 신설돼 급성장하는 도시들을 연결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러시아의 산업 노동자 수는 갑절로 늘었다. 노동자들은 전체 인구 대비 소수였지만, 저임금과 끔찍한 노동 조건에 맞선 그들의 잇따른 파업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1904년 말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었다. 전쟁 반대 정서가 노동자들의 분노와 결합됐고, 패전으로 망신살이 뻗친 제정은 국내 반발에 취약해졌다.
1904년 12월에 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기계 공장에서 노동자 네 명이 해고됐다. 러시아정교회 신부 가폰(경찰 첩자이기도 했다)이 이끄는 반(半)공인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05년 1월 3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그 파업이 삽시간에 번져서 일주일도 안 돼 페테르부르크 382개 공장의 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가폰은 사태 ‘정상화’를 기도했다. 가폰의 계획은, 노동자들이 몇몇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청원하면 차르가 자비로운 말 몇 마디로 노동자들을 달랜다는 것이었다. 가폰이 주도한 청원서에 노동자 13만 명이 서명했다.
1월 9일 가폰은 노동자·농민 20만 명을 이끌고 행진을 시작했다. 차르의 성상과 초상화를 든 대열은 “신이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차르는 타협할 생각이 없었고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노동자들은 차르가 압제의 우두머리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대중 파업
총파업으로 페테르부르크가 완전히 마비됐다.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그 과정을 목격한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페테르부르크 사태에 자극받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1월에 일으킨 전면적 항쟁은 … 마치 전기충격처럼 수많은 대중에게 계급 감정과 계급 의식을 각성시켰다.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묶여 몇십 년 동안 감내해 온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됐다.”
파업은 러시아 전역으로 번졌다.
평생 동안 권위에 굴종해 온 노동자들이 불과 몇 달 만에 평등을 요구하게 됐다.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과 각종 권리를 요구하며 파업했고 군경과 충돌했다.
경제 파업이 다수 작업장의 정치 파업으로 전환됐고, 그 정치 투쟁은 다시 새로운 부분의 경제 파업을 고무했다. 이들도 얼마 안가 정치 투쟁에 합류했다.
여름이 되자 흑해 함대에서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노동자 항쟁에 자극받은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켜 대지주의 토지를 점거했다. 억압받던 소수 민족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제정은 노동자·농민을 대거 처형하고 탄압했다. 당국의 묵인 하에 극우 단체들이 유대인을 학살했다.
하지만 ‘질서’는 회복되지 않았다.
8월에 차르는 양보안을 내놓았지만 그 안은 기만적인 것이었다. 차르가 인정하겠다는 ‘의회(두마)’는 입법권이 없는 자문 기구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인 하루 8시간 노동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두 번째 대중 파업이 분출했다. 파업 물결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돼 다른 도시로 확산됐고, 10월 13일에는 파업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에 이르렀다.
나흘 후 차르는 헌법 제정과 몇몇 시민적 권리의 보장을 약속했지만, 이런 어정쩡한 양보가 되레 노동자들의 투지를 자극했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여러 부문의 파업을 조율하기 위해 평의회(러시아어로 ‘소비에트’)를 꾸렸다. 소비에트는 1905년 11월 그해 세 번째 대중 파업을 주도했다.
소비에트는 파업뿐 아니라 물자 유통과 도시 치안 등도 관리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롭게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관련 기사 본지 210호 ‘왜 소비에트가 중요한가?’)
소비에트의 출현으로 러시아에는 ‘공식’ 권력(제정)과 ‘비공식’ 권력(소비에트)이 나란히 존재하게 됐다. 둘 중 어느 쪽이 사회를 운영할지는 결국 정면 대결로 판가름날 터였다.
190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 봉기가 승리할 조건은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수적으로 열세고 무장도 열악했으며, 병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문제는 모스크바 밖에서 훨씬 심각했다.
2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제정은 봉기와 소비에트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몇 년간 혹독한 국가 탄압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제정은 노동계급에게서 혁명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917년에, 1905년 혁명을 낳은 요인들, 즉 전쟁, 대중 파업, 소비에트, 사병 반란, 농민 반란, 소수민족 반란 등이 더 강력히 결합돼 제정을 무너뜨렸다.
전략의 차이
1905년 혁명은 제반 세력들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냈다.
자유주의자·자본가들은 1월에 차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칭찬했지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확대하고 이윤을 위협하자 재빨리 차르 편에 붙었다. 그들은 제정보다 노동계급을 훨씬 두려워했다.
노동자 정당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두 분파인 멘셰비키·볼셰비키 간의 차이도 뚜렷해졌다.
멘셰비키는 혁명의 과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수립이므로 그 혁명을 이끄는 세력은 자유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들을 겁먹게 할 계급투쟁을 삼가야 한다고 봤다.
혁명 패배 후 멘셰비키는 제정이 용인하는 협소한 정치 공간에서 활동하고 의회(두마)에 선출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도 1905년 혁명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봤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적 과제를 성취하려면 부르주아와 연합할 것이 아니라 인구의 다수인 농민과 함께해야 한다고 봤다. 혁명으로 노동자·농민의 정부를 수립해 민주주의적 과제를 수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볼셰비키는 1905년 혁명이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혁명적 정당, 즉 세력 균형을 바꾸기 위해 투쟁에 개입하고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정치 조직의 중요성을 보여줬다고 여겼다. 볼셰비키는 그런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 매진했고 1917년 혁명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한편, 1905년 혁명 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됐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혁명을 평가하며 독자적 분석을 제시했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참여가 혁명을 ‘연속적’(마르크스의 용어다)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과제를 쟁취하려는 투쟁도 노동계급이 주도해야 성공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수립에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연속혁명’ 전략).
이후 1917년 혁명으로 트로츠키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