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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극우 팔레스타인 윤석열 탄핵 운동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한국전쟁 75주년:
동서 제국주의 열강의 첫 격전지가 된 한반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5년이 흘렀다. 그러나 미·소 냉전 속에서 분단된 남북한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여전히 ‘정전’ 상태로 남아 있다. 남북한 지배자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핑계 삼아 사회를 통제해 왔다. 한국전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뜨거운 쟁점인 이유다.

우파는 한국전쟁을 ‘6·25전쟁’으로 부르며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먼저 공격했음을 강조한다. 한국전쟁을 남한군과 유엔군(미군)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치른 전쟁으로 미화하려는 것이다.

한미동맹 우산 속에 남한 자본주의가 발전해 왔기에 친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 정부도 우파의 주장을 근본에서 부정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이라크에 파병했고, 문재인은 미국을 방문해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헌화하며 미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재명은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자 나토 정상회의에 불참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한미동맹을 중시하기에 그의 앞날은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될 것이다.

한편, 좌파 일각은 한국전쟁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진영 대결로 보며, 미군정과 남한보다 소련과 북한이 진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련과 그 체제를 이식한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전혀 아니고,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

중국의 션즈화 교수는 자신의 저서 《조선전쟁의 재탐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초기의 조선전쟁은 ‘조선인 사이의 내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가 없이는 ‘내전’이 발발할 수 없으며, 미국은 조선전쟁 첫날 무력 개입을 결정[했다.]” 즉, 한국전쟁을 ‘국제성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도 《한국전쟁 전사》에서 한국전쟁을 남북한 간의 전쟁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하에 북한의 계획된 선제 공격으로 개시된 ‘내전’이 ‘국제전’, 즉 ‘중미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라며,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초기에는 ‘준세계전쟁’)으로 규정한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역작이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사례로 들며, 한국전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쐈는가’ 하는 문제는 핵심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전쟁의 성격을 규정할 때 중요한 것은 참전 국가들의 성격, 전반적 정세에서 전쟁이 수행하는 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내전처럼 보이지만, 근본에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벌인 냉전의 산물로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미 3년을 넘어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도 강대국인 러시아가 약소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며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제국주의 대리전이다.

냉전과 분단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화된 미·소 냉전의 산물이다.

전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은 얄타에서 세계를 자신들의 뜻에 따라 나누는 세력권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포츠담에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소련 군대가 만주와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에 맞서 진공을 펼칠 때, 미군은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의 갑작스런 붕괴로 한반도에서 권력의 진공 상태가 벌어졌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반명령 1호를 통해 38선을 제안했다. 소련군은 이미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명령을 받은 후 38선 이북으로 재빨리 철수했다. 이렇게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권 경계가 획정됐다.

세력권 분할을 위해 얄타회담에 모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한반도의 운명은 한국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제국주의 열강이 결정했다

해방 후 남한은 각 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으로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 메릴 베닝호프가 “불꽃을 대면 즉시 폭발할 준비가 돼 있는 화약통”에 비유할 정도로 완전한 독립과 해방을 바라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까지 세력권 조정 협상을 하고 있었다.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미군정에 협력했다. 이로 인해 해방 후 급진화된 운동은 급속하게 사그라들었다.

1947년에 냉전이 시작돼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그리스와 터키를 지원하겠다며 “세계 각국은 이제 양자택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본격화했다. 곧바로 마셜플랜도 발표했다.

소련의 스탈린도 곧바로 맞대응에 나섰다. 션즈화는 이렇게 지적했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한 부분은 미국이 마샬플랜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을 서방 세력의 영향에 놓이게 하고 독일에서 서방 점령지역의 재건을 통해 소련의 숙적을 다시 만드는 점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독일 처리를 놓고 대립하며 긴장이 쌓였고, 마침내 소련이 미국·영국 등이 장악한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미국이 핵무기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냉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1947년 냉전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남북한에 각기 정권이 들어서며 분단이 확정됐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 이승만과 미군에 의해 민간인 수십만 명이 살해됐다. 제주 4.3항쟁이 대표적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항쟁과 보도연맹사건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오늘날까지 고통 받고 있는 역사적 현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948년 한반도 남북에서 수립된 두 정권은 서로 경쟁하는 체제였다. 남한은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상관없는, 이승만이 지배하는 끔찍한 경찰국가였다. 북한도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김일성과 그의 공산당 관료가 통제하는 국가자본주의 국가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분단된 두 체제의 지도자 모두 전쟁을 원했다.

김일성은 ‘국토 완전 정복’을 위해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과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다. 마오쩌둥에게는 중국군 소속 조선인 부대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의 무력통일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승만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승만은 종종 주인이 줄을 잡고 있는데도 목걸이에 걸려 거의 질식할 정도로 뛰어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냥개처럼 보였다.”

1948년 12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철수했다.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미군도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철수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았는데, 그 대부분은 무상원조였다. 1951년 남한의 국가예산 총액은 1억 2,000만 달러였다. 미국 ECA(경제협력국) 원조와 주한 미군사고문단 파견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남북한 군사력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됐다. 남북은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군사력 증강 준비를 했고, 38선 부근에서는 마찰과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 충돌은 각각 미국과 소련에게 통일전쟁을 지원해 달라는 일종의 시위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던 1949년 8월 소련이 처음으로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공포의 균형’이 확립됐다.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미국의 핵독점이 무너지자,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은 더 공세적으로 됐다.

무엇보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중국을 장악하자 김일성은 크게 고무됐다. 와다 하루키는 “북조선 지도부가 여기서 강한 인상을 받아 행동 준비를 결단했다”고 봤다. 미국은 동아시아 전략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꿔야 했다. 얄타와 포츠담 합의를 무시하고 일본 점령에서 소련을 사실상 배제하려 했다. 미국은 소련을 무시한 채 일본과 단독강화를 추진하며 일본을 재무장시켰다.

이에 맞서, 1950년 2월 중·소동맹이 체결됐다. 션즈화는 《아시아에서의 냉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 및 부동항을 보유한 남한이 중국의 동북지역을 대신하여 아시아에서 소련의 정치, 경제적 권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김일성의 조선반도 무력 통일 계획에 동의한 중요 원인[이다.]”

또한,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설사 개입하려 해도 그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이 중국 장제스 정부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설령,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전쟁에서 타격을 입는 것은 중국의 신생 공산당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불신했고 한반도에서 미국과 대결을 벌이면 마오쩌둥을 제어하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봤다. 스탈린의 전기를 쓴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마오쩌둥에 대해 “잠재적 경쟁관계의 관점에서 행동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1950년 3월에 스탈린이 전쟁을 최종 승인했다. 이즈음 스탈린은 동아시아 정책을 더 공세적으로 전환했다. 스탈린은 일본 공산당을 향해 ‘평화 노선’을 버리고 미국에 맞서 과감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5월에 마오쩌둥도 한국전쟁을 승인했고, 중국 내전에 참전한 중국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보내며 지원했다. 대륙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군대가 대규모로 충원되면서,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주력의 상당수가 이들로 채워졌다.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남진했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남한군의 패주가 두드러졌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이 임박하자 이승만이 도망치면서 한강철교를 폭파해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다. 우파는 이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미국은 즉각 전쟁에 개입했다. 7월 7일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군대를 대규모로 파병했다.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을 결정한 것은 “한국의 사태를 좌시하면 타이완이나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서유럽, 특히 독일에서 미국의 위신은 현저하게 손상될 것”이라는 트루먼의 걱정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 애치슨 또한 “남한은 미국의 점령하에 있는 일본의 안전에 중요한 지역”이며 “이 도전을 회피한다면 미국의 권력과 위신은 극대한 손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패주하던 남한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많은 피난민이 희생됐다

소련은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군사 원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1950년 2월 중소동맹에 따라 극동에 32개 사단 46만 8,000명, 항공기 5,300대로 이뤄진 거대한 군대를 한반도 근처에 집중 배치했다.

북한의 군사행동은 스탈린 주도하에 계획했으며, 북한 군대는 모두 소련 군사고문들이 훈련했다. 무기와 장비 또한 소련으로부터 받았다. 스탈린은 7월 10일 전까지 북한의 탄약과 기타 군수품 수요를 충족시켜 주도록 지시했다. 이후에도 “[1950년] 10월 13일 스탈린과 모택동은 상호협조 관계를 확인하고 중국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그 외 소련 비행사의 한국전 참전은 물론, 소련은 휴전논의를 주도[했다.]”(이용건, ‘한국전쟁기 소련의 역할’, 《한국과 러시아 관계》)

1950년 8월 미국의 군사 개입이 점차 확대됐다. 북한의 전방부대는 손실이 매우 컸고, 낙동강 일대에 대한 공격도 어려움에 처한다.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군은 빠르게 재건됐고, 미군과 남한군을 합치면 북한군보다 훨씬 많아졌다.

맥아더는 8개 보병사단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북한을 38선 이북에 돌아가게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을 소멸하고 나아가 한국을 통일하는 것[이다.]”

트루먼은 8월 말 북진을 승인했다. 이 시기 북진에 대한 반대파를 찾으려면 고성능 현미경이 필요했다는 말처럼 미국 내 대부분의 세력들이 북진을 지지했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곧 서울을 탈환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중국은 미국이 38선을 넘는 것에 절대로 방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맥아더는 승리에 눈이 멀어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38선 이북의 실질적인 점령 통치는 대부분 한국 경찰과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우익 청년 단체가 맡았다. 당시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38도선 이북의 9개 도시 점령 임무를 위해 3만 명의 특수부대를 보충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이 북한 지역에서 15만여 명을 처형하거나 납치했다고 추정하는 일본 측의 자료도 있다. 북한을 점령하는 동안 벌어진 잔혹 행위에는 미군도 공모하고 관여했다.

10월 25일, 중국은 ‘항미원조’의 명목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스탈린은 중국 군대가 지원군의 방식으로 참전해 38선 이북 지역에서 방어를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도 출병에 동의했다. “지금 적은 이미 평양을 포위했다. 며칠만 지나면 압록강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원군이 도강해 북한을 원조하는 것을 바꿀 수 없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제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열강들의 싸움터가 돼 버렸다. 주력군은 중국군이었고, 북한군 통제권도 중국 측으로 넘어갔다. 남한군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북한의 몰락을 안보위협으로 여겼다. 저우언라이의 표현처럼 “한반도는 중국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가 될 수 있었다. 북한은 중국의 동북지역을 방위하는 전초기지로서 중요했다. 또, 당시 중국의 공업 지역인 만주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압록강의 수력발전소를 보호하고자 했다.

중국은 유엔 가입 문제에서 프랑스의 협력을 얻으려고 베트남 호치민 정권에 미온적 태도를 취하던 것을 철회하고 군사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는 병력 4만 명을 동원해 티베트를 침공했다.

11월 1일에는 소련 공군(중국군으로 위장)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에서 전투에 투입됐다. 전쟁 기간 동안, 소련 공군 12개 사단이 공중전에 투입됐고, 참전 병력 총수는 7만 2,000명이나 됐다.

11월 29일 애치슨은 중국의 행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평가했고, 30일 트루먼은 ‘미국은 무기고에 있는 어떤 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면서 핵폭탄 사용을 거론했고,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맥아더도 핵무기 사용을 승인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소련은 중국 동북부로 폭격기 200대를 이동시켰으며, 만주가 공격받는다면 응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행히 미국의 핵무기 사용 계획은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실행되지는 않았다.

트루먼은 12월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비를 대폭 늘렸다. 미국 국방비는 180억 달러에서 490억 달러로 늘어났다. 1950년 6월의 4배 수준이었다.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또 다른 신무기인 네이팜탄을 대량으로 투하해 북한 도시들을 파괴했다. 그 결과 북한은 “달의 표면처럼” 파괴됐다.

미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시 북한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달의 표면처럼" 파괴됐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대량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북한의 민간인 사상자는 200만 명 정도로 전쟁 이전 인구의 20퍼센트나 됐다. 이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군인·민간인 전사 비율(3퍼센트, 200만 명 정도)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과 폴란드의 전사자 비율보다도 훨씬 높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은 시작된 곳과 거의 같은 장소에서 교착됐다. 이미 1951년 2월 즈음에는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군사력을 오랫동안 한국전쟁에 붙잡아 둠으로써 유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은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도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한국전쟁에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다. 그러는 동안 양측 군대는 한반도 중부에서 살육전을 벌이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허비했다.

결국 1953년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전쟁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끝날 때도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결정으로 종결됐다.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터가 되면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희생됐다

이후 제국주의간 경쟁에 미친 영향

한국전쟁의 결과 냉전 질서는 강화됐고 미국은 서방을 결속시킬 수 있었다. 애치슨은 “한국전쟁이 우리를 구했다”고 한 적이 있는데, 한국전쟁이 미국의 군비를 대폭 증강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과 소련은 본격적인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옛 질서를 재건하고 경제 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국전쟁을 “하늘의 도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 사령부를 설치해 후방 보급 기지로 삼았다. 일본은 B-29 폭격기 등 미공군의 출격 기지가 됐다.

“특수 규모가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년간 최대 4억 8,000만 달러나 됐으며, 일본의 외화 보유액은 1950년 초 2억 달러에서 1951년 말 9억 달러로 급증했다”고 와다 하루키는 평가한다. 이후 일본은 전쟁 특수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에 주력해 세계 최대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전진 기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덕분에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죄해 줬다. 요시다와 장제스도 미국의 압력 아래 ‘일화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집단안보체계의 구상을 완성했다.

피카소의 1951년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

다른 한편, 소련은 중국을 앞세워 미국을 상대로 대리전을 벌여 이득을 취했다. 물론 김일성과 마오쩌둥도 전쟁을 벌일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동기와 경제적,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동안 외부의 위협을 내세워 내부의 억압을 강화하고 급속한 자본 축적을 위한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션즈화는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은 조선전쟁을 기화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 군대 무장을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초보적 현대화를 실현했다. 동시에 중국의 사회 및 경제는 정상을 회복하고 제1차 5개년계획의 준비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이른바 반둥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남북한 지배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독재 정권의 틀을 닦았다. 이승만은 1953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한미군 수만 명을 상시 주둔시켰다. 남한의 군대는 1950년 10만 명에서 1953년 60만 명 이상으로 팽창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런 군대의 팽창이 “전후 수십 년 동안 남한 정치에서 군부가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남한은 한·미·일 공조 체제를 통해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 해결은 무시됐다. 오늘날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 속에서 한·미·일 동맹 강화는 지정학적 위기를 더욱 높이고 있다.

한국전쟁은 우파가 주장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좌파 일각의 주장처럼 모종의 해방전쟁 또는 계급전쟁도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분쟁 상황을 이용한 열강 간의 힘겨루기였을 뿐이었다.

당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는 동서 양 진영 중 어느 하나를 따르지 않고 제국주의 체제 전체에 반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라는 모토를 내놓았다.

이런 교훈은 오늘날 미·중 갈등을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에서 미·소 제국주의 중 한 편을 지지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미·중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이란으로 전쟁이 확대됐다. 한국전쟁 직전 결성된 나토는 오늘날까지 미제국주의의 세계 패권을 위한 도구로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다중의 위기와 전쟁의 시대, 제국주의 동학에 대한 이해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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