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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냉전이 열전으로 비화했을 때 — 중·미 간 국제전으로 확대되다

최근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한국전쟁 전사》(청아출판사)가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의 초판은 일본에서 1995년에 출간됐고, 한국에서는 2000년에 《한국전쟁》으로 출간된 바 있다. 1990년대에 공개된 소련 비밀자료를 반영해 2002년 개정판이 나왔고, 《한국전쟁 전사》는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후 70년이 지났다. 지난 8월 1일 동북아역사재단 초청으로 열린 강연회에서 와다 하루키는 70년이 지났지만 “특수한 적대 상태로 인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은 결국 남북의 사람들”이라며 그 아픔을 공감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부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 조선의 역사에 눈을 돌렸다. 소련·러시아 역사와 남북한 현대사 등 동북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해 온 진보적 학자다.

전쟁의 기원과 성격

와다 하루키의 연구는 한국전쟁에 대한 우파적 시각에 도전했다. 윤석열 같은 우파들은 여전히 이 전쟁을 “공산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여긴다.

저자는 1950년 북한이 일제히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 또한 북진통일에 적극적이었음도 함께 지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군사적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결의를 남북 모두가 똑같이 가졌다고 본다. 이런 상황이 미·소 대립과 결합하면서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등에 업은 북한의 공격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한국전쟁의 기원》(글항아리)을 쓴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다만 브루스 커밍스가 전쟁의 기원을 일제 시대부터 존재한 한반도의 내부 갈등에서 찾는 것과 달리, 하루키는 그 기원을 1948년 남북에서 두 국가가 탄생한 것에서 찾았다.

“한반도에 통일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민족의 염원은 좌절됐고, 1948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이 땅의 유일한 정통 국가라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가 한반도의 서울과 평양에 탄생했다. ... 한반도 전역을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상대방을 자국 영토의 일부에 자리 잡은 외국의 괴뢰로 치부하는 대항적인 두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 이는 필연적으로 남북 모두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 국가를 제거한다는 목표를 갖도록 했다.”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고 38선을 제안했고, 소련은 향후 일본 점령에서 지분을 얻으려고 그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미·소 사이에 제국주의적 갈등이 점증해,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 봉쇄 정책을 선언하며 “세계 각국은 이제 양자 택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공언해 냉전이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남북한에 두 국가가 탄생한 것은 바로 이 냉전의 산물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남북한 간의 전쟁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하에 북한의 계획된 선제 공격으로 개시된 ‘내전’이 ‘국제전’, 즉 ‘중미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초판에서는 ‘준세계전쟁’)으로 규정한다.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동북아시아 전쟁이다. 중국 혁명과 이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됐다. 남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중국, 소련의 관계, 더 나아가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가 확정됐다. 또 이 전쟁으로 미소 대립은 결정적인 단계로 진입하여 초강대국의 군사 대치라는 냉전 체제가 본격화됐다.”

일본의 전쟁 기지와 일본 공산당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일본의 전쟁 기지 구실과 일본 공산당의 활동을 함께 설명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미국의 병참·출격 기지였던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고도 경제성장’의 토대를 다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은 미군 특수와 수출 증가로 호황을 맞이했다. 특수 규모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년간 최대 4억 8000만 달러나 됐다. 일본의 외화 보유액은 1950년 초 2억 달러에서 1951년 말 9억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 사령부를 설치했고 일본 해상보안청, 지자체, 일본적십자사의 간호부 등이 후방 지원에 동원됐다. 일본 철도와 선박이 군사 수송에 협력했다. 일본은 B-29 폭격기 등 미공군의 출격 기지가 됐다.

일본 해군 장교 출신 해안보안청 직원 50명이 원산·부산·인천 등 전투 지역의 기뢰 제거 작업에 투입됐고 그중 3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해병대원의 79퍼센트(47척 중 37척)를 일본인 선원이 상륙 지점까지 실어 날랐다. 한반도 전선에 동원된 미군은 최대 35만 명인데, 그들 모두는 일본을 통해서 한반도로 투입됐다.

전진 기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덕분에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죄해 줬다. 당시 미국 국무부 고문 덜레스는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은 일본과 정식으로 교전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의 이익은 미국이 대변하고 있다”며 한국의 조약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뒤늦게 일본공산당의 ‘평화혁명론’을 비판하고, 미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 일본공산당에 평화혁명론을 지시한 장본인은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전후 질서 재편을 둘러싸고 미국과 협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 점령군은 일본 내 급진적 변화 열망을 경계하며 한국전쟁 발발 전에 이미 재일조선인 운동과 일본공산당을 탄압했다. 결국 일본공산당 계열 중 가장 급진적인 단체로 꼽힌 재일조선인연맹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 조직에 속한 재일조선인은 3만 명이었고 간부 전원이 일본 공산당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공산당은 분열됐고 노사카 산조로 대표되는 주류파는 베이징에서 망명 지도부를 구성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폭력혁명 추진이라는 새 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미군의 요코타 공군 기지 그리고 그곳과 연결된 철도 노선 등 핵심 표적을 겨눈 행동은 일본 국민의 감정을 고려해 중단됐다. 전쟁을 확전하지 않겠다는 트루먼의 말을 중시해 미군 기지에 대한 파괴 공작을 중국공산당이 자제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일본공산당의 활동을 통제했다. 아쉽게도 저자는 이런 점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전쟁과 전후 동북아시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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