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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내란 청산과 극우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중국 문화혁명 60주년:
사회주의와 무관했던 관료들의 권력 투쟁이 본질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는 칭화대학교 물리학과의 한 교수에 대해 그 학과 학생들이 벌이는 인민재판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친 게 반동이라는 이유에서 그는 맞아 죽는다.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문화혁명 당시 흔했던 한 장면이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 같은 일이 중국 현대사에서 벌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중국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문화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소위 5.16 통지)로 시작됐다. 그 내용인즉 당, 정부, 군대, 그리고 문화계 전반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부르주아 계급”(소위 주자파)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자파’로 몰렸던 사람들과 문화혁명을 이끌었던 세력들(보황파나 조반파) 사이에는 경제 비전이나 계급적 관점의 차이는 없었다. 주자파로 몰렸던 사람들 대부분은 문화혁명이 끝난 뒤에 복권됐다.

문화혁명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을 상실한 마오쩌둥의 권력 쟁탈로 시작됐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의 대약진운동은 후진국이던 중국을 급속하게 발전시켜 영국이나 미국을 단시일 내에 따라잡으려는 시도였고, 그것이 실패하면서 적어도 3,000만 명 이상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직후 실권을 쥐게 된 국가 주석 류사오치와 당 서기 덩샤오핑 등을 겨냥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1967년 상하이에서 행진하는 홍위병 ⓒ출처 Wikimedia Commons

당과 정부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주자파가 있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대학생과 청소년 그리고 젊은 노동자들에게서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신중국 등장 이래 학교와 공장에서 나타난 특권과 권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들에게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문화혁명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문화혁명 추종 세력 간의 대립이 무장 투쟁으로 번져 내란이 일어나자 이제 권력을 되찾은 마오쩌둥은 1967년 1월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확산시키자는 분파를 단속했다. 이번에는 수많은 홍위병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968년 여름에는 도시의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 재교육을 받게 하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펼쳐 홍위병 세력을 와해시켰다.

한편, 마오쩌둥에 대한 환상에 기초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집단도 등장했다. 성우롄(省無聯, 후난성무산계급혁명파대연합위원회)이 대표적이다. 1968년에 이들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새로운 형태의 착취 계급, 즉 붉은 자본가 계급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새로운 혁명을 통해 1871년 파리코뮌 같은 대중 자치기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성우롄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마오쩌둥, 장칭, 야오원위안 등 문화혁명 지도부는 성우롄의 사상이 ‘트로츠키주의’, ‘아나키즘’이라고 비난했다.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동원해 정적들을 제거한 다음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문화혁명 세력들을 거세한 뒤로는 지배계급 내 분파 갈등만 남았다. 그 당시 2인자였던 린뱌오가 1971년 석연찮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마오쩌둥의 후원으로 4인방(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자 한 달 뒤인 10월에 4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혁명은 막을 내렸다.

문화혁명 당시 서구의 많은 좌파들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중국이 세계사회주의를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공산당원이었던 루이 알튀세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문화혁명에는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추동력인 ‘문화’(사상이나 이데올로기)도 없었고, 사회를 바꾸는 ‘혁명’도 없었다.

1981년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이 “가장 뼈아픈 과오”라는 평가를 담은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을 비판했지만 체제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고려했다. 그래서 이 결의안은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중국 사회에 기여한 정도는 7할이고 개인적 과오는 3할(功七過三)이라고 정식화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이래로 중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고, 사회복지는 더 후퇴했다. 이런 변화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나 학생 중에는 마오쩌둥에게서 대안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주도해 건설한 1949년의 신중국은 모종의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당시 청년들이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느꼈고 그래서 마오쩌둥의 선동에 쉽게 호응을 했던 것처럼, 신중국은 특권과 관료주의가 만연한 계급사회, 즉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생각을 제대로 구현했어도 진정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혁명의 역사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면,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마오쩌둥주의는 중국 지배자들이 가하는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시 성우롄이 언뜻 포착했듯, 중국 사회가 한국이나 미국 같은 서방 사회와 다를 바 없는 계급 사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에 기반해 혁명 정치를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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