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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시위를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할:
톈안먼 항쟁과 그 유산

이 글은 12월 14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일곱 번째 시간이었다.

약 2주 전(지난 11월 말) ‘제로 코로나’ 봉쇄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시진핑은 제2의 톈안먼 항쟁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시진핑은 서둘러 부분적인 양보를 했습니다.

1989년 톈안먼 항쟁 이후 매년 6월 4일 즈음이면 톈안먼 광장이 폐쇄되곤 합니다. 중국 지배자들에게 톈안먼 광장은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신성한 장소가 아니라 반란의 장소가 됐습니다.

중국 지배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톈안먼 항쟁의 직접적 원인은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 덩샤오핑을 포함한 8원로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었습니다.

그러나 톈안먼 항쟁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1980년대 개혁·개방이 초래한 모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국가와 당의 관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특히, 저렴한 관리가격으로 재화를 확보해 비싼 시장가격으로 내다파는 불법 전매행위 ─ 관다오(官倒)라고 합니다 ─ 를 통해 축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인민들은 치솟는 인플레 때문에 생활수준이 하락했습니다. 1988년에 정부가 물가 통제를 한다며 긴축 정책을 실시하자 인민 대중의 생활수준은 더 악화됐습니다. 이런 인플레와 대규모 부패 때문에 1980년대 후반쯤엔 경제 개혁이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톈안먼 항쟁을 촉발한 중국 학생들의 처지도 일반 인민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1985년부터 추진된 대학 개혁으로 직업할당 제도 대신에 쌍향선택(雙向選擇)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쌍향선택 제도란 대졸자 노동력 시장에 경쟁과 수요공급의 법칙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88~1989년에는 경제가 침체돼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대학생들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지방대생들과 여학생들이 피해가 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성적보다는 ‘꽌시’, 즉 인맥과 가족 배경이 취업에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톈안먼 광장의 단식농성 학생들 중에는 지방대생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경과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대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규모가 3000명이 넘었습니다. 시위 학생들은 언론 자유 보장, 교육 예산 증액, 인민 생활수준의 안정 등을 핵심적으로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학생들은 부유층 거주 지역의 입구인 신화먼(新華門)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연좌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이에 격분해 동맹휴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4월 24일 베이징 대학생 자치연합회의 설립을 준비하는 조직이 구성됐고, 그 다음날에는 각 학교 대표자 회의가 열려 시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4월 26일자 중국 관영 〈인민일보〉의 사설은 학생들의 집회를 “계획적인 음모이고 동란”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는 엄중한 정치투쟁이다.”

다음날인 4월 27일, 정부의 이런 비난에 분노한 학생 10만 명이 톈안먼 광장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동란’ 비난을 철회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애국민주운동’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잠시 소강 국면이던 항쟁은 일부 학생들의 단식농성을 계기로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단식 농성에 들어가 이목을 끌었습니다. 5월 13일경 단식 농성 학생들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고르바초프가 방문한 5월 15일 톈안먼 광장에는 수십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톈안먼 광장에서 하려던 고르바초프 환영 행사를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치러야 했습니다.

5월 17일에는 베이징 곳곳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을 포함해 시민 100만 명이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베이징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항의 투쟁이 벌어져 운동은 최고조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상하이에서는 3만 명의 학생들이 도심지에서 철야농성을 했고, 난징에서는 10만 명이 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5월 18일에는 구이양에서 1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네이멍구 자치구의 성도 후허하오터에서도 1만 5000여 명이 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윈난성 성도 쿤밍, 쓰촨성의 주요 도시, 티베트의 라싸, 안후이성의 성도 허페이 등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농성과 거리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때쯤에는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노동자들의 참여가 돋보였습니다. 5월 17일과 18일 베이징 기중기공장 노동자 1000여 명이 “학생이 굶으니 형님은 마음이 아프다”는 배너를 들고 참가했습니다.

심지어 국가 통제 노조인 중화전국총공회(전총)조차 학생 시위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전총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생산을 위해 더 많이 일하도록 독려하는 친정부 조직인데도 말입니다.

시위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자 지배 관료들은 항쟁의 요구를 수용할지 아니면 거부하고 톈안먼 광장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강제 해산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5월 17일 밤 그들은 계엄령을 발동하기로 결정하고, 이틀 뒤에 계엄령 선포 시기를 5월 20일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공자련)는 즉시 긴급 회의를 소집해 ‘노동자 결사대’를 조직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수도 노동자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24시간 내에 단식 농성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으면 계엄령 발효와 동시에 베이징 시 노동자 전체가 24시간 파업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예정대로 5월 20일(토)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군이 베이징에 들어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 시민들과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으며 저항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를 박차고 나와 이에 참여했습니다.

계엄군은 톈안먼 광장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사병들을 설득해 사병들이 동요했기 때문입니다. 5월 23일 결국 계엄군은 베이징 교외로 철수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학생들이 단식농성에 합류했습니다. 5월 25일에는 톈안먼 광장에 100만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특히, 베이징 이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5월 16일부터 26일 사이에 17만 2000여 명의 지방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징 진입을 시도하다가 물러났던 계엄군이 5월 말부터 다시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6월 2일과 3일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여기저기서 벌어졌습니다. 대학생 자치연합과 노동자 자치연합은 “무기를 들고 리펑 반혁명 정부를 무너뜨리자”고 호소했습니다.

6월 3일 당시 총리 리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젯밤부터 수도에서는 사실상 반혁명 폭란이 발생했다. 오늘밤 우리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 반혁명 폭란을 진정시켜야 한다.”

결국 6월 4일 아침 계엄군의 유혈 진압이 시작됐습니다.

6월 4일 대학생 자치연합은 이렇게 촉구했습니다. “전국 인민은 파시스트식의 잔혹한 도살을 참을 수 없다. 피를 헛되이 흘릴 수 없고, 투쟁을 멈출 수 없다. 각 도시의 시민들은 파업과 동맹휴업에 즉시 돌입해 달라.”

당일인 6월 4일 63개 도시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5일부터 10일 사이에도 181개 도시에서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6월 9일 덩샤오핑은 진압 부대를 방문해 치하하면서 “반혁명 폭란”을 진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영향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들이 나왔습니다. 당시 칭화대학 학생자치회는 사망자가 400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최근 연구와 증언들에 의하면 사망자만 1만 명이 넘는다는 추산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상자 외에도 항쟁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적어도 400만 명의 당원들이 조사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고 단순 집회 참가자조차 반성문을 쓰고 진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혀야 했습니다.

중국 지배자들은 톈안먼 항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1990년대에 시장 지향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이 동유럽과 소련과 달리 지금까지 국가자본주의가 강력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톈안먼 항쟁을 분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톈안먼 항쟁은 중국 지배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항쟁 진압 이후 중국 정부의 다음과 같은 공식 발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번 동란의 특징은 단지 대학이나 베이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 일부 사람들이 중학교, 공장, 상점, 농촌으로 들어가 서로 교류하고 거리에서 연설하고 전단을 뿌리고 표어를 붙이고 모금을 벌이면서 사태를 확대했다.”

톈안먼 항쟁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됐지만 노동자 등을 포함한 많은 사회집단들을 참여시키고 각성시켰습니다.

학생들의 투쟁은 노동자들을 자극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시위와 바리케이트 저항에 참여했고, 그 과정 속에서 노동자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노동자 자치연합, 즉 공자련의 중심 인물인 한둥팡은 경찰의 학생 폭행을 보고 격분해 노동자 조직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련은 톈안먼 항쟁의 중심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베이징 공자련과 비슷한 조직들이 상하이, 항저우, 시안, 톈진, 광둥 등지에서도 생겨났습니다. 처음으로 국가와 경영자로부터 독립적인 노동단체들이 여러 도시들에서 결성된 것입니다.

항쟁이 패배하면서 공자련은 사라졌지만, 2010년 이후부터는 농민공들의 투쟁에 힘입어 독립 노조들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의미

톈안먼 항쟁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톈안먼 항쟁이 권위주의적인 중국 국가를 비판하고 서구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대안으로 삼은 투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학생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왕단과 노벨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 등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 항쟁이 민주적 권리들을 요구한 것은 맞지만 서방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삼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말이 아닙니다. 항쟁 지도자들의 일부가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환상을 가졌다는 것은 참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항쟁의 목표와 지향에 대해 모호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적 권리들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항쟁 참가자들은 생활수준의 안정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는 사회경제적 요구로, 자유민주주의의 일부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평가는 항쟁이 개혁파의 시장화 정책에 대한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 신좌파가 이렇게 평가합니다. 당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개혁개방이 초래한 모순들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취와 권위주의적 억압을 하는 관료의 지배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배계급의 다른 분파가 대중의 요구에 응답하리라는 기대는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당시 심각한 위기 속에서 변화를 제공할 수도 양보를 할 수도 없던 지배계급은 진퇴양난 속에서 피의 학살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신좌파의 평가는 중국 체제와 공산당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중국 신좌파 대부분은 2000년대에 국민국가간 경쟁에서 자국 편을 들었고, 마침내 국유기업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해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중국 정부는 여전히 톈안먼 항쟁이 “외부 세력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다고 비난하고, 당시 학생 시위를 ‘동란’이라고 규정한 것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톈안먼 항쟁은 민주주의를 염원한 학생들과 이에 고무 받은 노동자들의 대체로 자발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지배 관료들의 부패와 불평등에 반대하며 민주적 권리와 생활수준의 안정을 요구했고, 지배계급을 위협하는 거대한 힘을 보여줬습니다.

톈안먼 항쟁은 위대했지만, 약점과 한계도 있었습니다. 계엄령에 맞서 5월 22일 총파업을 하자는 공자련의 제안이 학생 지도부에 의해 거부된 것이 그런 사례입니다. 만약 총파업이 철회되지 않고 실행됐다면, 그래서 노동계급 고유의 경제적 힘이 발휘됐다면, 항쟁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바이케이트 저항에 밀려 일시 후퇴했던 정부가 다시금 공세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톈안먼 항쟁에서 학생들이 보여 준 투쟁의 역동성과 노동자 대중이 살짝 보여준 집단적 힘은 중국에서 진정한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공자련은 강령에 해당하는 임시장정에서 민주주의 요구와 더불어 국유기업에 대한 통제권과 일터 민주주의 같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보여 주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장악한 베이징 거리는 당시 중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중국 지배자들은 1989년 노동자와 학생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언제 다시 그런 저항이 벌어질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톈안먼 항쟁을 발생시킨 원인들을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해 눌러 놓은 데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루무치나 라싸에서 소수민족의 반란이 벌어질 때, 농민공들이 파업을 벌일 때,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저항할 때마다 지배 관료는 톈안먼 항쟁의 유령이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현실을 보면 제2의 톈안먼 항쟁이 벌어질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이 현실이 되도록 또 그 투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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