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교열본)
실용주의 정치는 실용주의 철학의 통속화:
실용주의 철학 비판: 존 듀이의 결정판을 중심으로
실용주의 정치는 실용주의 철학의 통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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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 같은 필자의 기사 ‘이재명 정부 1년: 모자라고 보수적인 정치적 실용주의’(〈노동자 연대〉 585호, 2026.05.24)를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된다.
정치적 실용주의는 철학적 실용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정치인들의 실용주의는 대개 “이념보다 결과”, “명분보다 민생”, “좌우 진영보다 쓸모 있는 정책”이라는 정치적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사와 시정연설에서 “유연한 실용정부”,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 “이념과 구호가 아닌 경제와 민생을 살리는 실천” 등을 강조하며 실용을 언급했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유용하다면 구별 없이 쓰겠다”는 발언은 이 노선을 집약해 보여 준다. 즉, 여기서의 실용주의는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의 철학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기존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정책 수단을 선택하겠다는 정치적 수사다.
그러나 정치적 실용주의와 철학적 실용주의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철학적 실용주의는 포괄적으로 정의해 “사유와 지식은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관념의 의미는 그것이 낳는 실제적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 “진리와 판단은 탐구·검증·수정의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전통을 의미한다. 온라인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도 실용주의를 “세계를 아는 것이 세계 안에서 행위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전통으로 정의한다. 아울러 실용주의 진리론은 진리를 추상적 대응 관계보다 탐구·주장·검증의 실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기술한다.
따라서 정치적 실용주의는 철학적 실용주의가 아주 얕고 통속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기 십상이다. 철학적 실용주의의 핵심이 “결과를 보라”, “현실의 문제 해결 속에서 생각을 검증하라”는 것이라면, 정치적 실용주의도 표면적으로는 이와 유사한 논리를 편다. “좋은 정책이면 누구의 것이든 활용한다”, “국민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면 채택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철학적 실용주의는 ‘효과가 있으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는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이 뒤따른다. 무엇을 효과라고 볼 것인가? 누구에게 효과가 있는가? 단기 효과인가 장기 효과인가? 그 효과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실패하면 수정할 수 있는가?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토론과 검증 과정에 참여하는가? 특히 듀이식 실용주의라면 민주적 숙의와 사회적 실험, 공적 검증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철학적 실용주의는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반면 정치적 실용주의는 ‘그때그때 되는 대로 하는 정치’, ‘원칙 없는 중도 자리 잡기’, ‘자본·관료·동맹국·시장의 압력에 적응하는 정치’로 전락하기 쉽다. 철학적 실용주의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반(反)교조주의라면, 정치적 실용주의는 종종 기성 질서 내 충돌을 완화하는 관리 기술에 머문다. 정치적 실용주의와 철학적 실용주의는 유사한 언어를 공유할 뿐, 본질은 다르다.
따라서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가 철학적 실용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정치적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데 모순은 없다. 이는 정치인이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을 탐독하지 않고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같은 공리주의적 언사를 늘어놓거나, 마키아벨리를 읽지 않고도 마키아벨리즘적 권력 정치를 펴는 것과 같다. 철학적 개념은 정치의 언어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대개 단순화된다.
문제는 그 단순화가 무엇을 은폐하는가이다. 이재명식 실용주의를 철학적 실용주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핵심 질문은 “그는 실용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유용성의 기준으로 삼는가?”이다. 경제 성장, ‘민생’(더 구체적으로 어떤 국민의 생활인가?), 재정 안정, 기업 투자 활성화, 서민 생활 개선, 동맹 관리, 사회적 평등 중 무엇인가? ‘실용’이라는 말만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실용주의는 언제나 ‘무엇에 유용한가’라는 목적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좌파적 관점에서는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정치적 실용주의는 흔히 계급적 선택을 중립적인 문제 해결처럼 포장한다. 예컨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실용’이라고 할 때, 그것이 기업 이윤과 투자심리 회복을 우선하는지, 아니면 노동자 임금·고용·공공서비스를 우선하는지 구분해야 한다. 둘 다 ‘실용’이라 부를 수 있으나, 실제 효과는 계급별로 판이하기 때문이다.
Ⅰ. 실용주의의 집대성, 존 듀이
본 기사는 여러 실용주의 조류 중에서도 특히 존 듀이(1859~1952)가 집대성한 실용주의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검토한다. 철학적 실용주의는 과학 이론의 타당성을 실천적 결과로 판정하는 이론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비록 마르크스주의가 실천과 무관한 관조적 이론은 아니지만, 실천의 성공 가능성은 객관적 현실(실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달려 있다.
실용주의를 대중화해 해설한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 자본주의가 급격히 부상하며 제국주의로 진입하던 1890년대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자유주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이후 그와 존 듀이의 철학은 미국의 국가 철학에 준하는 지위를 획득했다.
존 듀이의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방임주의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인주의적 사회관을 비판했다. 1930년대에 듀이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객관적 실재(현실)의 선행성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인식론적 주관주의와, 모순과 법칙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도구주의 논리는 과학적 사회 분석을 가로막는 한계를 가졌다. 계급 적대 관계를 도외시한 채 점진적 사회 통합만을 도모하는 정치적 유토피아주의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부유하는 순수한 사유의 유희가 아니다. 철학은 특정 시대와 사회의 물질적 토대, 그 속에서 충돌하는 계급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19세기 말부터 미국 사상계를 지배해 온 실용주의, 특히 존 듀이의 사상은 단순한 학술 사조를 넘어선다. 실용주의는 미국인의 삶과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사실상의 국가 철학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의 역사적 승리와 번영을 기반으로 확립된 이 사상은 낡은 형이상학과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과학과 실천을 결합한 진보적 사유 방식을 자처했다.
실용주의는 단순한 철학 학파가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이행하던 시기에 형성된 이데올로기다. 즉, 제국주의 권력과 전투적 노동운동 사이에서 동요하던 전문직 중간계층과 새뮤얼 곰퍼스 같은 경제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의 불안과 기대를 이론적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실용주의는 귀족적·관조적인 구시대 사유에 반발하면서도,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점진적 개혁과 제도 개선을 추구하는 노선에 안주했다. 이 점에서 실용주의는 단순한 ‘실천의 철학’을 넘어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관리 가능한 문제로 축소하려는 개혁주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본 기사는 마르크스주의가 실용주의를 비판하는 핵심 논거를 재구성하는 데 목적을 둔다. 분석은 특히 다음 측면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첫째, 실용주의 인식론·방법론이 지닌 한계.
둘째, 실용주의 사회관·역사관이 지닌 계급적 성격.
셋째, 실용주의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
이러한 분석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한 대안적 철학에 그치지 않고, 실용주의가 포착하지 못한 현실 구조와 법칙을 더 높은 수준에서 종합하는 과학적 이론임을 밝히고자 한다.
Ⅱ. 인식론 비판: 경험주의의 한계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식론 분야에서 특히 정밀하게 전개돼야 한다. 듀이는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분리를 극복하고자 경험이라는 범주를 자신의 철학 체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듀이는 전통 철학이 경험의 의미를 왜곡했다고 비판하며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열었다. 전통적 철학자들은 경험을 ‘주관적 의식의 사적 내용’이나 ‘원자론적 감각 데이터’로 좁게 해석했다. 듀이는 이러한 관점이 마음과 몸,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오류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경험’은 단순히 정적인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유기체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삶을 지탱하는 능동적인 도구다. 감각과 인식은 고립된 마음의 파편이 아니고, 경험은 주체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경험은 환경과 유기체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행함’과 ‘겪음’의 연속체다. 유기체는 환경을 바라보는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다.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실험하며 혁신해 나가는 주체다.
경험은 단순히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유기체가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를 인과적으로 연결할 때 경험은 비로소 ‘실험적’이 된다. 실용주의는 이 과정의 결과를 ‘배움’이라 부른다.
이러한 경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 인식론에서 ‘앎’이나 ‘지식’의 정의는 완전히 바뀐다. 지식은 멀리 떨어진 고정된 궁극적 실재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지식은 미래의 경험을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예측·통제·안내)하기 위해 유기체가 사용하는 역동적인 도구다. 지식의 가치와 정당성, 진리를 측정하는 기준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활동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끄는 데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진리도 인간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공허한 공간에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성질이 아니다. 진리는 인류가 공유하는 발전적 경험 속에서 축적된 지혜이자, 더 나은 탐구를 지속하도록 돕는 신뢰할 만한 자원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실용주의 인식론은 추상적인 철학적 가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인간이 실제로 노동하고 만족하며 고통받는 ‘가공되지 않은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해, 도출된 지식을 다시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경험주의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또 논리적으로도, 경험주의는 객관적 실재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주관적 관념론의 변형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
첫째, 실용주의는 자연의 존재론적 선행성을 모호하게 다룬다. 유물론과 자연과학은 인간의 의식과 경험이 발생하기 수십억 년 전부터 객관적인 물질 세계가 인간 의식과 독립해 존재하고 운동해 왔음을 보여 준다. 반면 듀이는 자연이 경험에 앞서 존재한다는 물질적 사실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이를 무익한 형이상학적 탐구로 치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결국 물질의 객관적 선차성을 박탈하고 세계를 인간 경험 내부로 끌어들이는 주관주의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듀이가 노골적인 관념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위에서 봤듯이) 경험을 환경과 유기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해 관념론적 주관주의를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연의 객관적 선행성과 독립성을 분명하게 이론적 기초로 세우지 않는 한, 경험주의는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 사이의 관계를 흐릴 수밖에 없다.
둘째, 감각과 인식의 관계에서도 한계가 드러난다. 존 로크를 필두로 한 고전 경험론은 감각을 외부 대상의 투영이자 지식의 근간으로 규정했다. 반면 존 듀이는 감각의 고유한 인지적 가치를 축소해, 이를 행위를 유발하는 생물학적 자극 수준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오감을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와 노동 과정 속에서 환경의 객관적 속성을 비교적 확신 있게 포착하도록 발달한 인지적 도구로 본다. 감각의 인지적 성격을 약화시키면 대상을 파악하는 지식이 탐구 주체의 사후적 추론과 조작에 의해 구성되는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칠 우려가 있다. 이 경우 인식의 능동성은 강조되지만 객관적 수용성은 약화된다. 실용주의가 인식의 실천적·능동적 성격을 포착했다는 장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객관적 대상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기초를 충분히 견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셋째, 인과율과 과학 법칙에 대한 도구주의적 왜곡이 있다. 듀이는 자연의 본질적 속성을 법칙적 필연성보다는 우연성과 미결정성에서 찾았다. 그에게 인과율이란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생산적·필연적·물질적 연관이라기보다 인간이 사건의 전후 맥락을 정리해 질서를 부여하고자 고안한 논리적 장치에 가까웠다. 과학 법칙도 사물의 내적 본질과 필연적 구조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진리라기보다 사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작업 가설로 축소될 우려가 있다.
흔히 실용주의의 핵심 명제를 ‘진리는 유용한 것’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명제가 지닌 일면성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를 실천적 유용성에 종속시키면 진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기준으로 전락하고, 과학적 법칙과 사회적 필연성의 객관성이 약화돼 이론은 단지 도구로 격하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인간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객관적 실재(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진리는 유용하기 때문에 참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유용하다. 이는 의학의 질병 원인균 규명 과정이나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검증 사례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과학이 현실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이론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의 내재적 법칙을 일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단지 문제 해결의 효과성이나 ‘보증된 주장 가능성’으로 한정하는 도구주의 인식론은 결과적으로 진리의 객관적 기준을 약화시킨다. 이는 결국 임시방편적 미봉책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지적 취약성을 낳는다.
Ⅲ. 방법 비판: 도구주의 논리
실용주의는 경험과 실험을 강조한다. 이는 낡은 형이상학과 사변적 관념론에 맞서 진보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극단화되면 반(反)이론주의로 전락한다. 실용주의는 일반 이론과 원리를 경시하고 시행착오 방식을 선호한다. 이는 단기적 성공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 구조적 원인보다 표면적 결과에 집중하게 하며, 나아가 장기적 전망과 역사적 경향에 대한 분석을 약화시킨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실천은 단순한 문제 해결 기술이 아니다. 실천이란 인간이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고 변혁하는 총체적 활동이다. 실용주의의 실천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효과적 해결책을 찾는 적응적 활동에 머무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은 조건 자체를 변혁하는 활동까지 포괄한다. 여기서 두 사상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실용주의가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왜’, ‘무엇에’ 효과가 있는지, 그리고 ‘그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함께 질문한다.
듀이는 논리학적 사유의 기원을 형이상학적 원리나 불변의 법칙이 아닌, 유기체가 실생활의 난관을 해결해 나가는 실질적 탐구 과정에서 찾았다. 사유는 일상의 평온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불확실한 상황을 통제 가능한 확정적 상황으로 재구성하려는 도구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지능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이 (도구주의적) 논리는 세계의 객관적 모순 구조를 포착하지 못한다. 듀이에게 모순과 대립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 명제 간의 주관적 불일치나 불확정적 상황의 징후에 가깝다. 또한 그러한 대립은 낡은 질서를 해체하는 혁명적 도약이 아니라, 상호 양보와 조정을 통한 재구성과 화해로 해소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유물 변증법은 현실을 변화의 과정인 동시에 구조적 실체로 이해한다. 우연과 필연은 상호 배제되지 않고 통합되며, 모순은 사물과 사회 발전의 객관적 역학으로 작용한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그 자체로 대립물의 통일체다. 모순의 축적과 상호 투쟁은 질적 도약과 급진적 변화를 이끈다. 반면 실용주의는 ‘변천’과 ‘유동성’만을 강조할 뿐, ‘구조’와 ‘필연성’, ‘모순의 객관성’을 포착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는 사회적 위기 국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19세기 후반과 1930년대 미국의 계급투쟁은 타협과 점진적 조정이라는 온건한 처방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극단적 모순에 도달해 있었다. 그 모순은 결국 한쪽 계급의 패배를 목표로 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대결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사회 구조 내부의 비약과 단절을 설명하지 못하는 실용주의의 점진주의적 논리가 지닌 한계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실용주의 논리는 계급 대립이 상대적으로 완만한 평화적 시기에는 일정하게 작동할지 모르나, 체제 모순이 폭발하는 위기 국면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의 불확실성을 다루는 임시방편적 기술은 될 수 있어도, 구조적 모순을 해명하고 변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Ⅳ. 사회관·역사관 비판
실용주의의 사회관과 역사관은 계급 개념 문제를 약화시키는 경향을 띤다. 듀이는 사회를 유연하고 조정 가능한 대상으로 봤다. 그의 정치적 다원주의는 사회를 이질적인 이익집단들의 평화로운 모자이크로 파악해, 국가를 갈등을 중재하고 공익을 도모하는 중립적인 공적 기구로 본다. 이에 따라 갈등은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하고 제도는 점진적으로 개선돼, 사회는 합의와 교육을 통해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핵심 역학으로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과 조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와 지배를 둘러싼 계급 적대 문제다. 자본주의 국가는 평등한 개인·집단 사이의 중립적 중재자가 아니라, 계급 지배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장치다. 이 때문에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조정이나 도덕적 설득만으로 해결될 수 없고, 생산관계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된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결코 중립적인 심판관이 아니다. 대기업 경영진과 큰 틀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 관료가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상황에서, 사회를 평등한 이익집단들의 자발적 합의체로 보는 실용주의 정치는 자본가 계급 지배의 현실을 은폐하는 민주주의적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Ⅴ. 실용주의의 역사적 형성 조건과 계급적 성격
실용주의가 미국의 지적 풍토를 지배한 원동력은 개인의 탁월한 사유 능력보다 역사 발전 과정이 조성한 특정한 물질적 토대와 환경에 있다. 미국은 유럽의 전(前)자본주의적 속박과 봉건적 질곡에서 벗어나 곧바로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다. 광활한 대륙을 정복하는 개척자 정신, 부단한 시행착오를 수용하는 실험적 태도, 그리고 산업 기술의 폭발적 성장은 미국인의 심성에 ‘이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가’, ‘무엇에 유용한가’를 따지는 공리주의적 습관을 각인했다.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를 비롯한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미국인들의 삶에 배태된 파편적이고 본능적인 실용적 삶의 방식을 학술적 언어로 포착해 정립했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추상적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다. 그것은 20세기 초·중반 미국 자본주의의 활력과 기술적 낙관주의, 그리고 제도 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철학의 언어로 표현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에 실용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 경제주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철학 형태였다. 남북전쟁 이후 독점 대기업이 국가와 유착하고 부패와 불평등이 심화하자, 이에 저항하는 농민과 도시 중간계급, 노동계급의 개혁 염원이 진보적 포퓰리즘 운동으로 분출했다. 실용주의는 바로 이 ‘진보’ 운동의 지적 사령탑 역할을 해 부상한다.
특히 듀이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20세기 전반기 대기업의 전횡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독립적이고 급진적인 투쟁 노선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극단주의로 규정해 거리를 뒀다. 실용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은 채 내부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개혁주의적 철학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은 이와 달랐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철학에 특정한 계급 기반이 있다고(이 기반은 바뀔 수도 있다) 본다. 실용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실용주의는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보편적 이론이 아니라, 대자본의 억압과 전투적 노동운동 사이에서 동요하는 전문직 중간계층과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특수한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모순인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은폐하거나 완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실용주의의 핵심적 난점은 명확하다.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적 소유와 시장경제라는 근본 토대를 유지한 채, 개혁 정부와 지식인의 선의에 기댄 제도 조정과 개혁 입법만으로 체제 모순을 완화하고 마침내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초계급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이성을 대변한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사회 안정을 갈구하는 노동조합 고위 관료층과 전문직 중간계층의 불안정한 위치를 철학적으로 합리화했을 뿐이다.
실용주의는 20세기 전반기 미국 사회의 발전 경험을 성급히 일반화해, 점진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러한 낙관주의는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한다는 믿음, 위기를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관점, 혁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태도를 낳았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위기를 초래하며, 그 위기가 체제 전복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분석한다. 오늘날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며 구조적인 위기 상황에서, 어떤 이론이 옳았음이 입증됐는가?
Ⅵ. 정치와 실천의 역사적 검증
실용주의자들은 ‘이론은 실천적 결과로 검증돼야 한다’는 명제를 사회·정치 운동 영역에서 가장 가혹하게 시험받았다. 역사적 위기 때마다 실용주의는 자신의 방법이 현실을 실질적으로 해명하고 변혁할 수 있는지 검증받아야 했고, 그 결과는 실용주의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첫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존 듀이를 비롯한 주류 실용주의자들은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과했다. 그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참전 결정이 전 세계 민주주의를 고양할 실험적 계기가 되리라는 환상에 따라 전쟁을 지지했다. 그래서 듀이의 컬럼비아대학 제자였던 랜돌프 본은 실용주의 지식인들이 자본의 전쟁 기구에 동조·협력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위기 상황에서 지배 권력에 대한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순응해 버리는 실용주의 철학의 파산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둘째, 1929년 대공황 전까지 자본주의의 영속적 안정을 믿었던 실용주의자들은 전대미문의 대공황에 직면하자 일시적으로 좌선회해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자, 그들은 체제 전복의 혁명적 사유를 즉각 철회하고 뉴딜의 이데올로기적 옹호자로 복귀했다. 이는 계급투쟁의 한복판에서 개혁주의자와 지식인층의 사상이 정세의 부침에 따라 얼마나 쉽게 동요하는지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셋째, 듀이가 심혈을 기울인 진보 교육 운동의 좌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듀이는 아동의 주체적 흥미와 협동적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시하는 교육 제도 혁신을 통해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점진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교육은 사회 생산관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부구조의 일부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와 학교 제도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견고하기 때문에, 학교 내부의 민주적 실험은 기성 사회질서와 경쟁 원리에 의해 상쇄되거나 사유화된 엘리트 교육의 장식물로 전락한다.
교육이 사회를 자동으로 개혁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진보 교육 실험의 한계를 규정한다는 사실은 실용주의적 개혁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생산관계의 철저한 변혁이 선행되지 않는 교육 개혁은 부분적 의의는 있을지언정 사회 전체의 불평등과 계급 지배를 해체하지는 못한다.
Ⅶ. 이데올로기 비판: 실용주의의 사회적 기능
실용주의는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다. 실용주의는 점진적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철학적 표현으로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며, 근본적인 체제 비판을 무력화하는 역할을 한다.
실용주의는 근본적 변화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오직 개혁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해 결과적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현실에 대한 유연하고 실천적인 접근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관리 가능한 지엽적 문제로 축소한다. 그 결과 실용주의는 체제 비판의 언어가 아닌 체제 땜질의 언어로 전락하고 만다.
이 점에서 실용주의의 반(反)형이상학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귀결된다. 실용주의는 낡은 사변철학의 초월적 원리를 비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특정한 계급 지배 형태가 아니라) 그저 조정 가능한 주어진 사회 환경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용주의의 진보성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Ⅷ. 마르크스주의적 대안: 유물 변증법
과학 이론이 실천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유용성의 근거는 단지 ‘쓸모 있음’ 자체가 아니라 이론이 실재(현실)의 구조를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지에 있다. 과학 이론을 실천적 결과에 따라 수용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은 실재론을 약화시킨다. 비록 존 듀이 등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이 세계와 분리된 고립된 방이 아니고 마음은 유기체가 외부 환경 및 문화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활동 자체이므로 나 홀로 떨어진 유아론적 세계관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지만, 실용주의는 실재론을 부정하면서 결국 유아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유아론은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해, 일단 나 빼고 다 의심해 보자’거나 ‘설령 바깥 세계가 존재하더라도 인간 지각의 한계상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은 내 주관적 경험뿐’이라는 입장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자연과 사회 속에 실재하는 경향과 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실천적 효과’만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판단해서도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일 근거는 자본주의 사회를 기존의 친자본주의 사회과학들보다 더 정확히 설명하고 반영한다는 점에 있다.
Ⅸ. 결론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볼 때, 실용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한 시기가 있었다. 실용주의는 구태의연한 형이상학과 관념론을 비판하며 경험과 실험, 실천과 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미국 자본주의 확장기에는 과학적 사고와 사회개혁을 독려하는 사상적 추진력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진입하고 체제 모순이 본격적으로 분출하자, 실용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선도하는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는 사상적 족쇄로 변했다. 실용주의의 한계는 객관적 진리 개념의 약화, 이론과 구조 분석의 결여, 계급 모순의 무시, 체제 내 개혁으로의 고착으로 요약된다.
실용주의는 원칙 없는 유연성과 편의를 과학의 미덕으로 찬양해, 기성 질서의 영속화를 은폐하는 세련된 지적 연막 노릇을 하게 됐다. 계급적 적대를 도외시한 채 이익집단 간의 조화와 화해만을 주문하는 윤리와 정치는 오늘날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현대 사회의 발전과 모순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실용주의를 넘어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요구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용주의를 단순히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용주의가 부분적으로 포착한 실천, 경험, 변화의 문제를 더 높은 차원에서 유물론적·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의 객관적 구조와 법칙을 밝히고, 그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계급적 주체와 실천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자본주의 사회와 그 지적 풍토가 정체와 퇴행에서 벗어나 인간의 진정한 해방으로 향하려면, 점진적 사회개혁 지향성에 머무르는 실용주의의 가설적 상대주의를 과학적 진리와 계급적 편파성에 기초한 마르크스주의 유물 변증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가설적 상대주의는 진리를 객관적 실재가 아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임시 도구로 보는 실용주의의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원칙 없는 유연함일 뿐이다.
역사 발전의 객관적 역학인 생산관계와 계급투쟁을 명확히 파악하고 노동계급의 주체적·변혁적 실천에 입각할 때,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실용주의의 미완의 약속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과 실천의 지평 위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