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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주의 비판 제1부: 고전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비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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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시 자신의 정부를 “국민주권정부”로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국민주권주의(popular sovereignty)는 헌법 1조에 명시돼 있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유주의 이념은 국민주권주의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본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가 말하는 국민주권이 현실에서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비판한다. 헌법상으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실제 권력은 지배계급(자본가들과 국가 관료)에 집중돼 있으며, 선거만으로는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국민주권이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계급사회에서는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이 글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이루는 핵심 텍스트 세 편, 즉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1844), 『프랑스 내전』(1871), 『고타강령 비판』(1875)과 이를 계승한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에 대한 독해를 바탕으로 국민주권주의를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한 비판의 초점은 세 가지다. 첫째, 정치적 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경제적 불평등이 온존하는 한 국민주권은 현실에서 제한된다(1844).
둘째, 의회주의적 대의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관료 기구와 군대가 국민 위에 군림한다(1871).
셋째, 국가는 언제나 계급 국가이며 국민 전체의 국가라는 개념은 착각이다(1875).
여기에 필자는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에 대한 레닌의 반박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1918)를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총괄하는 의미로 추가했다. 1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용어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치철학 번역 분야에서 국민(國民)과 인민(人民)은 어감의 차이가 있다. 단순히 분단과 냉전의 이데올로기 유산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넘어, 두 단어가 함축하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People’은 국가라는 울타리가 없어도 존재하는 독립적인 자연인들의 집합(인민)이다. 반면 ‘국민’은 민족국가 형성기에 정착한 단어로, 민족(애국)주의적 뉘앙스가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people’을 그냥 ‘인민’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루소, 홉스, 로크 등 서양 정치철학과 마르크스주의 담론을 번역하거나 논할 때는 ‘인민’을 그대로 쓰는 것이 번역 관행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 대용으로 ‘시민’이라는 낱말을 써서, 권리와 의무를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개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한편, ‘대중’은 정치적 의미를 걷어내고 단순히 불특정 다수를 뜻하기도 하지만(예: 대중문화), 다른 경우에는 노동계급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1. 정치적 평등과 공허해진 인민주권: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1844)
이 논설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핵심은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의 구별이다. 2 마르크스는 브루노 바우어가 유대인 해방 문제를 종교 문제로 환원한 것을 비판하며, 그 문제를 국가 일반의 본성이라는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바우어의 오류는 기독교 국가만 비판하고 ‘국가 일반’을 비판하지 않아,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의 관계를 검토하지 않은 것이다.
마르크스 논증의 결정적 대목은 근대 국가가 사회적 구별을 폐지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부분이다.
“국가는 출생, 신분, 교양, 직업이 비정치적 구별이라고 선언할 때, 이러한 구별과 무관하게 인민의 모든 성원이 인민주권의 평등한 참여자라고 선포할 때, 자신의 방식으로 출생·신분·교양·직업의 구별을 폐지한다. 그럼에도 국가는 사유재산, 교양, 직업이 각자의 방식대로, 즉 사유재산으로서, 교양으로서, 직업으로서 작용하고 그 특수한 본성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국가는 이러한 현실적 구별들을 폐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존립한다.”(「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제1부) 3
여기에 저작의 주제 전체가 압축돼 있다. 정치적 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의 실질적 폐지가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무시하는 선언적 추상에 불과하며, 국가는 바로 그 무시된 불평등 위에 존립한다. 선거권의 재산 자격 제한에 대한 논평이 이를 예증한다. 북미 여러 주처럼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재산 자격이 폐지되면 정치적으로 사유재산이 폐지됐다고 선언하는 것이지만, “사유재산의 정치적 폐지는 사유재산을 폐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한다.” 이로부터 인간의 이중생활 테제가 도출된다. 정치적 국가가 완전히 발달한 곳에서 인간은 사유 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중의 삶을 산다. 하나는 정치 공동체 속의 천상적 삶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공동 존재로 여긴다.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 속의 지상적 삶이다. 여기서 인간은 사적 개인으로 행위하고, 타인을 수단으로 삼으며, 자신을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낯선 힘의 노리개가 된다. 이어 인민주권의 성격에 관한 가장 신랄한 진술이 이어진다.
“인간이 유적 존재로 간주되는 국가에서 인간은 상상된 주권의 상상된 성원이며, 자신의 현실적 개인 삶을 박탈당하고 비현실적 보편성을 부여받는다.”(「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제1부) 4
인민주권은 존재하지만, 시민사회의 현실적 삶(재산, 노동, 궁핍)이 그대로 온존하는 한에서는 환상적 주권일 뿐이다. 인권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민의 권리와 구별되는 이른바 인간의 권리(인권)는 “시민사회 성원의 권리, 즉 이기적 인간, 다른 인간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권리일 뿐이다.” 자유는 “고립된 단자(單子)로서 자기 안으로 움츠러든 인간[원자화된 개인]의 자유”다. 그 실천적 적용이 사유재산권이며, 평등은 그렇게 정의된 자유의 평등이고, 안전은 “이기주의의 보험”이다. 심지어 정치 공동체 자체가 이른바 인간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한 한낱 수단으로 격하되고, 시민은 이기적 인간의 하인으로 선언된다. 5
물론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을 폄하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은 물론 커다란 진보다. 그것은 인간 해방 일반의 최종 형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 내부에서는 인간 해방의 최종 형태다.” 6 그러나 바로 그 한계 규정이 핵심이다. 보통선거와 법 앞의 평등이 완성돼도 부의 소수 지배와 시장의 강제가 시민사회에 온존하는 한, 인민주권은 현실의 사회적 권력 관계에 의해 안으로부터 제한된 형식적 주권에 머문다. 해방의 완성은 국가 영역을 넘어 사회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
“현실의 개별 인간이 추상적 시민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개별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일상생활과 특수한 노동, 그리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유적 존재로 거듭날 때,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더는 사회적 힘을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 해방은 완성될 것이다.”(「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제1부) 7
2. 의회주의적 대의민주주의 국가의 실체: 인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군사 기구: 『프랑스 내전』(1871)
1844년의 철학적 비판은 1871년에 이르러 국가기구에 대한 역사적·구조적 분석으로 구체화된다. 8 파리 코뮌의 경험에서 마르크스가 끌어낸 첫 번째 결론은 유명하다.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인수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9
왜 그런가. 마르크스는 근대 국가권력의 계보를 그린다. “상비군, 경찰, 관료, 성직자, 사법부처럼 도처에 존재하는 기관을 갖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은 절대군주제 시대에서 비롯했다. 체계적·위계적 분업 설계에 따라 주조된 이 기관들은 태동하던 부르주아 사회가 봉건제에 맞서 싸우는 강력한 무기로 쓰였다.” 그러나 이 기구는 의회의 통제 아래 놓인 뒤에도 인민의 도구가 되기는커녕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의회의 통제, 즉 유산계급의 직접 통제 아래 놓인 정부는 [...] 근대 산업의 발전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 적대를 발전·확대·격화하는 흐름에 발맞춰, 점점 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적[국가] 권력, 사회적 예속을 위해 조직된 공적 폭력, 계급 독재의 기구라는 성격을 띠었다. 계급투쟁의 진보적 측면을 보여 주는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국가권력의 억압적 성격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프랑스 내전』 세 번째 연설) 10
제2제정은 그 논리적 종착점이었다. 그 국가는 “태동하던 부르주아 사회가 봉건제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수단으로 만들기 시작해, 성숙한 부르주아 사회에 이르러 마침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예속 수단으로 바뀐 국가권력의 가장 타락하고도 궁극적인 형태”였다.
부르주아 대의제의 실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규정은 ‘대표성’의 허구성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3년 또는 6년에 한 번씩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왜곡 대표할지 결정하는 대신, 보통선거권은 코뮌으로 구성된 인민을 위해 쓰여야 했다.” ‘대표하다’가 아니라 ‘왜곡 대표하다’라는 단어 선택 자체가 핵심이다. 11 형식적으로는 인민을 대표한다는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제로 사회 위에 군림하는 것은 상비군과 관료 체제다. 국가는 “인민 자신으로부터 독립해 그 위에 군림하며, 인민 통합의 화신을 자처하는 기생적 혹”에 불과하다.
코뮌의 조치들은 이 진단과 정반대되는 모습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코뮌의 첫 포고는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코뮌은 보통선거로 선출되고 임기가 짧으며 소환 가능한 시의원들로 구성됐다. 그 다수는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자였으며, “말만 하는 의회적 기구가 아니라 집행과 입법을 겸하는 일하는 기구”여야 했다. 경찰은 정치적 속성을 박탈당한 채 코뮌에 책임을 지고 언제든 소환 가능한 기관으로 바뀌었다. 다른 모든 행정 기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뮌 위원부터 일선 실무자까지 공공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모두 일반 노동자 수준의 임금만 받아야 했다. 사법 관료조차 “역대 모든 정부에 대한 비굴한 종속을 가리는 데 봉사했을 뿐인 저 가짜 독립성”을 벗고 선출, 책임, 소환의 원리에 종속됐다. 요컨대 코뮌은 국가가 사회로부터 찬탈한 힘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기구였다. “코뮌 헌법은 지금까지 국가라는 기생물이 흡수해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먹어치우고 가로막던 모든 힘을 사회적 기구로 회복시켰던 것이다.”(『프랑스 내전』 세 번째 연설) 12
이어 이 기구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총괄이 이어진다. “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고, 생산하는 계급이 전유하는 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13 아울러,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는 그의 사회적 노예 상태의 영속화와 공존할 수 없다”는 명제는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예속의 공존이야말로 부르주아 국가의 정상 상태’라는 1844년 저작의 명제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3. ‘자유 국가’·‘인민 국가’라는 착각: 『고타강령 비판』(1875)
고타강령 초안은 “자유로운 국가의 기초”를 내걸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응답은 단호하다. 14 “자유 국가 — 이것은 무엇인가? 신민의 비굴한 심성을 벗어던진 노동자들의 목표는 결코 국가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독일제국에서 ‘국가’는 러시아에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자유’롭다. 자유는 국가를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에서 사회에 종속된 기관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며, 오늘날에도 국가형태들은 ‘국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도에 비례해 더 자유롭거나 덜 자유롭다.”(『고타강령 비판』 제4부) 15
이어 마르크스는 문제의 이론적 근원을 짚는다. 고타강령은 현존 사회를 현존 국가의 토대로 다루기보다, 국가를 “자신의 지적·윤리적·자유주의적 기초를 소유한 독립적 실체”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 국가론의 반대 극, 즉 국가를 계급 위에 선 중립적 실체로 보는 착각의 전형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흥미로운 이중 규정을 제시한다. “‘현재의 국가’는 국경에 따라 바뀐다. 프로이센-독일제국의 국가는 스위스 국가와 다르고, 영국 국가는 미국 국가와 다르다. 따라서 ‘현재의 국가’는 허구다. 그럼에도 상이한 문명국의 상이한 국가들은 모두 근대 부르주아 사회라는 지반 위에 서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16 형태[군주제, 의회제, 군부독재 등]는 다양해도 계급적 토대는 하나라는 점은 “국가는 언제나 계급 국가”라는 명제와 짝을 이룬다.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토대다.
그렇다면 ‘전 인민의 국가’는 왜 착각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변형을 겪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오직 과학적으로만 답할 수 있다. “‘인민’이라는 단어를 ‘국가’라는 단어와 천 번 조합해도 문제에 벼룩 한 뜀만큼도 다가서지 못한다.” 계급이 존속하는 한 국가는 특정 계급의 지배 도구이므로 ‘전 인민의 국가’일 수 없다. 계급이 소멸하면 국가 자체도 소멸하므로 ‘인민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놓인 시기는 이행기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에 조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며, 이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고타강령 비판』 제4부) 17
즉, 이행기 국가조차 ‘인민 전체의’ 국가가 아니라 공공연한 계급 국가다. 다만 이번에는 다수 생산자의 국가라는 점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고타강령의 정치적 요구들이 이 문제를 완전히 회피했다고 비판한다. 그 요구들은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고(보통선거), 인민이 직접 법을 만들며(직접입법), 억압적인 정규군을 없애고 인민 스스로 방위를 맡자(인민군)는 등 누구에게나 익숙한 낡은 민주주의 목록”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미 스위스나 미국 등지에서 실현된 제도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요구를 내놓는 대상이다. 독일제국은 “의회적 형태로 장식되고 봉건적 혼합물이 섞였으며, 이미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받고 관료적으로 짜 맞추어진, 경찰이 지키는 군사 독재에 지나지 않는” 국가다. 그럼에도 고타강령은 이 국가에 민주공화국에서나 의미가 있는 요구들을 “합법적 수단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자임한다. 결국 “강령 전체는 그 민주주의적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라살레파의 비굴한 신뢰나, 그에 못지않게 나쁜 민주주의적 기적 신앙에 철두철미 물들어 있다.” 18
이 비판과 함께 묶여 출판된 엥겔스의 베벨 서한(1875년 3월 18~28일)은 논지를 완결한다.
“‘인민의 국가’는 아나키스트들이 지겹도록 우리 면전에 내던져 왔다. (...) 국가는 투쟁과 혁명에서 적을 힘으로 억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한낱 과도적 제도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민의 국가를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아직 국가를 이용하는 한,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국가 자체는 존재하기를 그친다.”(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서한, 1875년 3월) 19
‘인민 전체의 국가’는 형용모순이다. ‘인민 전체’가 실현되는 조건(계급 소멸)에서는 ‘국가’가 사라지고, ‘국가’가 존재하는 조건(계급 존속)에서는 ‘인민 전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4. 정치적 형식과 계급적 내용
위에서 언급한 마르크스의 세 문헌은 31년에 걸쳐 집필됐으나 하나의 문제, 즉 정치적 형식(평등, 대표, 주권)과 사회적 내용(계급 분할, 착취) 사이의 괴리를 세 단계로 분석한 셈이다.
첫 번째 문헌(1844)은 개념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 국가는 시민사회의 불평등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선언하며 성립한다. 따라서 인민주권은 처음부터 추상의 영역에 갇힌 주권이자 ‘상상된 구성원’이 가진 ‘상상된 주권’이다. 여기에 이미 결론의 단초가 있다. 사회적 권력(힘)과 정치적 권력(힘)이 분리돼 있는 한, 해방은 미완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문헌(1871)은 구체적인 ‘국가기구’ 비판으로 나아간다. 1844년에 추상적인 수준에서 분석됐던 국가는, 1871년에 이르러 상비군·경찰·관료·사법기관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장치로 모습을 드러낸다. 청년기의 저작(1844)이 “국가는 시민사회를 전제한다”고 선언하는 데 그쳤다면, 『프랑스 내전』은 그러한 전제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규명한다. 즉, 의회주의라는 외피 아래에서 국가기구가 어떻게 “노동을 억압하는 자본의 공적[국가] 권력”이자 “사회에 기생하는 혹” 노릇을 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아가 코뮌은 1844년의 요청인 ‘사회적 권력(힘)의 재전유’에 최초로 경험적 형태를 부여했다. 공직자 소환제, 노동자 임금, 상비군 폐지, 입법과 집행의 통합은 모두 국가와 사회의 분리 구도를 허무는 장치다. 마르크스가 코뮌을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 번째 문헌(1875)은 특정 강령 비판이다. 이는 앞선 두 분석을 노동운동 내부의 이데올로기에 적용한 것이다. 당시에 라살레주의가 말하는 ‘자유 국가’나 ‘인민의 국가’는 1844년에 이미 분석·폭로된 착각을 좌파적으로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즉, 국가를 사회의 산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실체로 보는 착각이자, 기존 국가기구는 인수할 대상이 아니라 해체해야 할 대상이라는 1871년(파리 코뮌)의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다양한 국가 형태의 이면에 놓인 계급적 토대의 동일성을 규정하고, 이행기 국가를 ‘전 인민의 국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명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계급이 존재하는 한 ‘계급 초월적 국가’는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합 주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인민의 지배(인민주권·대의제·‘전 인민의 국가’)는 형식으로만 존재하며, 그 형식은 계급 지배라는 실체를 폐지하기는커녕 은폐하고 재생산한다. 따라서 해방은 이 형식의 완성(더 많은 참정권, 더 자유로운 국가)이 아니라, 국가가 흡수한 사회적 권력(힘)을 생산자들이 되찾아 국가와 사회의 분리 자체를 지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1844년의 ‘추상적 시민의 재흡수’, 1871년의 ‘사회적 기구로 권력의 회복’, 1875년의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에서 사회에 종속된 기관으로 전환’은 동일한 운동을 가리키는 세 가지 표현이다. 세 문헌을 관통하는 방법론적 일관성도 분명하다. 국가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시민사회’(1844), ‘계급투쟁의 역사’(1871), 생산관계라는 토대(1875)로부터 설명하는 것, 즉 정치의 비밀을 정치 외부에서 찾는 일이다.
나아가 세 문헌 사이의 강조점 차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44년의 마르크스가 정치적 해방을 ‘커다란 진보’로 인정하면서 그 한계를 짚는 데 머물렀다면, 1871년과 1875년의 마르크스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적극적 대안(노동자 국가)을 제시한다. 즉, 인민주권 비판은 정치적 평등의 폐기론이 아니라, 정치적 평등이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못한 바, 즉 현실 사회생활에서 인민의 자기통치를 실제로 실현할 형태에 대한 탐구로 전개된다. ‘전 인민의 국가’가 착각인 이유는 인민의 지배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분리된 특수 기구인 ‘국가’라는 형태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5. 레닌의 계승과 체계화: 『국가와 혁명』(1917)
5.1 마르크스 사상의 발굴과 복원
레닌은 임시정부의 탄압을 피해 은신하던 1917년 8~9월에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20 이 책은 1916년 말부터 준비한 청색 표지의 노트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바탕으로 한다. 이 노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 관련 언급을 비롯해 카우츠키, 판네쿡,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발췌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저술 동기는 서문에 명확히 드러난다. 제국주의 전쟁이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레닌은 “국가적 독점자본주의”라고도 불렀다)로의 이행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이 결탁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혁명적 본질’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레닌은 관련 문헌이 작성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왜곡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발굴 작업’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토로했다. 21 따라서 이 책의 일차적 성격은 새로운 창조가 아닌 원전의 복원이다. 그런데 복원 방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체계화였다. 레닌은 1848년 『공산당 선언』부터 1852년 『브뤼메르 18일』, 1871년 『프랑스 내전』, 1875년 『고타강령 비판』, 1890년대 엥겔스의 후기 저작에 이르기까지 문헌들을 연대순으로 재구성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국가론은 고정된 교리가 아니라 계급투쟁, 특히 파리 코뮌의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보완되며 발전하는 이론으로 제시된다. 이 발전 논리를 복원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혁명』 체재(體裁)의 핵심을 이룬다.
5.2 마르크스의 1844년 문제의식 재등장: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계급적 협소함
먼저 문헌학적 사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국가와 혁명』은 마르크스의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를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1844년 『독불연보』에 실린 이 초기 논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마르크스주의 주요 문헌 목록의 주변적 지위에 있었고, 레닌의 발췌 작업도 1848년 이후의 국가론 텍스트에 집중됐다. 그러나 사상의 계승은 단순한 인용 여부가 아니라 문제의식의 공유에 있다. 정치적 평등이라는 형식 아래 경제적 불평등이 온존하며, 이로 인해 인민주권이 현실에서 제한된다는 1844년의 핵심 논제는 『국가와 혁명』 제5장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분석에서 다시 등장한다. 다만 청년 마르크스의 철학적 언어가 여기서는 사회·정치적 언어로 변환돼 서술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발전한다는 전제 아래, 민주공화국이라는 거의 온전한 민주주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착취가 설정한 좁은 한계에 갇혀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언제나 소수, 즉 유산계급과 부자만을 위한 민주주의로 남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는 고대 그리스 공화국[도시국가]의 자유, 즉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와 대체로 같다.”(『국가와 혁명』 제5장 2절) 22
레닌은 이 협소함이 헌법 조문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세부 사항을 통해 관철된다고 분석한다. 선거권의 각종 자격 제한, 집회의 실질적 장애물,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일간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제한의 총합은 노동계급 사람들을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능동적 참여에서 배제하고 밀어낸다. 그 경험적 증거로 그는 반세기 동안 합법 활동이 보장된 독일의 사례를 든다. 당시 독일은 임금노동자 1,500만 명 중 사회민주당원이 100만 명, 노동조합 조합원이 300만 명에 불과했다. 이는 국가가 재산을 ‘비정치적 구별’로 선언할 뿐, 재산이 재산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1844년 마르크스 명제의 20세기적 검증이다. 나아가 레닌은 “민주주의는 형식적 평등만을 의미한다”고 규정한다.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을 달성한 뒤에야 “형식적 평등에서 실제적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술은,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이라는 1844년의 상반된 두 개념을 민주주의론의 언어로 번역한 결과다. 마르크스는 코뮌 분석에서 “피억압자는 몇 년에 한 번씩 억압 계급의 대표 중 누가 의회에서 자신을 대표하고 짓밟을지 결정하도록 허락받는다”고 꼬집었다. 레닌이 이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을 훌륭하게 포착한 것”으로 평가하는 대목에서, 1844년의 형식적 주권 비판과 1871년의 대의제 비판은 하나로 이어진다.
레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협소함을 벗어나는 길은 자유주의자들과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의 믿음처럼 ‘점점 더 큰 민주주의’를 향해 매끄럽게 전진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경유한다. 이 독재는 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사상 처음으로 인민의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를 거대하게 확장하고, 착취자를 강제적으로 배제하는 결합이다. 형식적 평등에 대한 비판이 민주주의 자체의 폐기가 아니라 계급적 내용의 변화로 귀결된다는 논리다. 이는 앞서 확인한 마르크스의 노선, 즉 정치적 평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미이행된 약속을 실현하려는 노선과 궤를 같이한다.
5.3 ‘분쇄’(부스러뜨리기)와 반(半)국가: 『프랑스 내전』의 주석
『국가와 혁명』 제3장은 통째로 『프랑스 내전』에 대한 주석이다. 레닌의 해설은 몇 겹으로 돼 있다.
첫째, 레닌은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단순히 인수할 수 없다’는 명제를 부각시킨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코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산당 선언』에 가한 유일한 교정이다. 레닌은 이 교정을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점진주의로 이해하는 당시의 기회주의적 해석을 뒤집는다. 실상은 정반대다. 마르크스의 본뜻은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단순히 인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쇄해야(부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코뮌이 한창이던 1871년 4월 12일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를 제시한다. 프랑스 혁명의 다음 과제는 관료적·군사적 기구를 단순히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분쇄하는 것이며, 이것이 ‘대륙의 모든 진정한 인민 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다. 23 레닌은 마르크스가 덧붙인 ‘대륙’이라는 한정이 1914~1917년 제국주의 전쟁을 거치며 무효화됐다고 선언한다. 1871년 당시에 영국은 군벌과 관료제가 없는 이례적 국가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과 미국도 ‘관료적·군사적 제도의 전 유럽적 진창’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래서 국가기구의 분쇄는 보편적 전제조건이 됐다. 이것이 체계화가 지닌 첫 번째 의미다.
둘째, 분쇄된 기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레닌은 코뮌의 조치들(상비군 폐지와 인민 무장, 전 공직의 선출·소환제, 공직자 봉급의 노동자 임금 수준)을 단순한 ‘민주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질적 전환으로 해석한다.
“이는 정확히 ‘양의 질로의 전화’의 한 경우다.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일관되게 도입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국가(특정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에서 더는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닌 어떤 것으로 전화한다. [...] 다수 인민이 직접 억압자들을 억압하는 이상,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은 더는 필요하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시들기[이하 사멸] 시작한다.”(『국가와 혁명』 제3장 2절) 24
여기서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닌 이행기 국가를 뜻하는 ‘반(半)국가’ 개념이 세심한 표현으로 제시된다.
셋째, 레닌은 마르크스의 의회주의 비판을 복원하되 그 정확한 사정거리를 확정한다. “의회주의로부터의 출구는 대의 기구와 선거 원리의 폐지가 아니라, 대의 기구를 수다 떠는 곳에서 ‘일하는’ 기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의회주의 폐지와 대의제 보존이라는 구별은 아나키즘과의 경계선인 동시에, 의회주의 비판을 모두 아나키즘으로 몰아 봉쇄해 온 제2인터내셔널 기회주의와의 경계선이다.
넷째, 베른슈타인이 코뮌 강령을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동일시한 것에 맞서, 레닌은 마르크스가 바쿠닌과 일치한 지점(국가의 폐지)과 불일치한 지점(연방주의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을 명확히 구분한다. 마르크스의 중앙집권주의는 군사적·관료적 중앙집권주의가 아니라 코뮌들의 자발적 통합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였다.
다섯째, 레닌은 코뮌 형태의 현대적 등가물을 지목한다.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상이한 정세와 조건에서 코뮌의 사업을 계속하며 마르크스의 탁월한 역사 분석을 확증한다”고 본다. 즉,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바로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의 재발견이다. 이로써 『프랑스 내전』의 역사 서술은 1917년 10월을 향한 실천 강령으로 바뀐다.
5.4 이행기와 국가 사멸의 물질적 토대: 『고타강령 비판』의 주석
『국가와 혁명』 제5장은 『고타강령 비판』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이 지적했듯, 이 저작의 논쟁적 부분(라살레주의 비판)이 적극적 부분인 ‘공산주의 발전과 국가 사멸의 연관성 분석’을 가려 왔기 때문이다. 레닌의 독해는 다음 순서로 전개된다. 먼저 그는 마르크스의 ‘현재의 국가는 허구다’라는 구절과 ‘인민+국가’ 조합에 대한 조롱(‘벼룩 한 뜀’)을 복원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미래를 도덕적 요청이 아닌 자본주의로부터의 발생사로 다루는 과학적 문제 설정의 모범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자연과학자가 새로운 생물 변종의 발전을 다루듯’ 다뤘다는 설명이다.
이어 레닌은 겉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불일치를 해소한다. 엥겔스는 베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라는 말 대신 ‘공동체’를 쓰자고 제안한 반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미래 국가성[순전한 사회적·공공적 관리 기능을 가리킴]’을 언급했다. 레닌은 두 사람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표현은 사멸 과정에 있는 국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국가에 대한 통속적 편견의 부조리를 선명하게 보여 주려 했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이라는 다른 주제를 다뤘을 뿐이다. 이 체계화 작업은 산발적인 발언들을 정합적인 하나의 교훈으로 엮어 내는 과정이다.
본론은 이행기와 ‘두 단계’론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가 존재한다’는 구절을 『국가와 혁명』 전체의 이론적 축으로 삼는다. 그에 앞서 제2장에서 그는 이를 ‘계급투쟁의 인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정으로까지 확장하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유명한 판별 기준으로 벼려냈다. 25 이어 마르크스가 라살레의 ‘노동 전 수익’ 문구를 비판하며 전개한 분배 분석에서 국가론적 함의를 끌어낸다.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된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에 따른 분배가 지배하며, ‘동등하지 않은 개인들에게 실제로 동등하지 않은 노동에 대해 동등한 양의 생산물을 주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지평이 존속한다. 그러나 권리는 이를 강제할 기구 없이는 아무런 힘이 없기에, 결론은 역설적이다.
“공산주의 아래에서도 한동안은 부르주아적 권리뿐 아니라, 심지어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까지 잔존한다! [...]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한 조각을 공산주의에 자의적으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나오는 사회에서 경제적·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국가와 혁명』 제5장 4절) 26
이로써 국가 사멸은 도덕적 소망이 아니라 경제적 성숙에 따른 필연적 산물이 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소멸하고, 노동이 삶의 일차적 욕구로 자리 잡으며, 생산력이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함께 증대해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가 실현될 때, 그제야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지평을 완전히 넘어서며 국가는 완전히 사멸한다. 레닌은 이를 엥겔스의 세심한 진술과 연결시켜 요약한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을 때 국가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과정의 점진성과 자생성을 동시에 시사하는 ‘사멸(시들어 죽기)’이라는 표현의 정확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그는 사멸론이 국가 일반 폐지론(아나키즘)은 물론이고, 사멸의 무한 연기론과도 구별됨을 분명히 한다. 당시에 “국가 사멸 무한 연기”론은 국가 사멸을 먼 미래의 추상적 약속으로 남겨 두면서,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기존 국가기구의 분쇄, 관료제 해체, 노동계급 대중의 직접 통치, 공직자 소환제 같은 조처들을 회피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리켰다. 그 대변자는 카우츠키였고, 더 넓게는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중간주의 지도부 전체였다.
5.5 체계화와 논쟁
이상을 종합하면 레닌의 작업이 ‘계승’을 넘어 ‘체계화’로 평가받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첫째, 그는 마르크스의 세 텍스트에 흩어져 있던 요소들을 하나의 전략으로 통합했다: 부르주아 국가(형식적 민주주의 아래의 계급 독재) → 혁명에 의한 기존 국가의 분쇄 → 코뮌형 프롤레타리아 반(半)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 =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 + 소수 착취자의 억압) → 부르주아적 권리의 소진에 따른 국가의 완전한 사멸. 이 전망 안에서 1844년의 계기는 출발점(입헌민주주의 국가의 계급적 협소함)으로, 1871년의 계기는 매개(분쇄와 대체 형태)로, 1875년의 계기는 이행의 역학(독재, 두 단계, 사멸의 물질적 토대)으로 각각 자리 잡는다. 마르크스의 삼중의 비판 구조(형식 비판, 기구 비판, 강령 비판)가 레닌에 이르러 시간 축 위의 단일한 과정으로 재배열된 셈이다.
둘째, 이 체계화는 이중 전선에서 벌어진 논쟁 속에서 수행됐다. 한편으로는 개혁주의(카우츠키를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에 맞서 ‘분쇄’ 테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복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나키즘에 맞서 이행기 국가의 필요성, 대의제 보존,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를 옹호했다. 레닌에 따르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변화가 이뤄질 정치 형태를 ‘발견’하는 데 골몰했고, 아나키스트들은 정치 형태라는 문제 자체를 기각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대의제 국가를 넘을 수 없는 한계로 받아들이며 그 ‘모델’ 앞에 머리를 숙였다. 대중 운동의 경험에서 형태를 배우는 마르크스의 길을 복원한 것이 『국가와 혁명』의 방법론적 정수였다.
셋째, 이러한 체계화에는 대가도 따랐다. 레닌은 자본주의가 국가 행정 기능을 ‘기록, 등록, 검사’라는 단순 작업으로 축소했기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동자 임금을 받으며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낙관은 코뮌·소비에트 형태의 실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논거였으나, 이후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내전 속에서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올랐다.
5.6 카우츠키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에 대한 레닌의 반박
『국가와 혁명』이 이론적 복원이었다면, 실천적 속편은 이듬해 벌어진 논쟁이다. 1918년 8월 빈에서 카우츠키의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출간됐다. 27 러시아 10월 혁명 1년 후, 제2인터내셔널 최고의 이론적 권위자(당시에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었다)가 신생 볼셰비키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같은 해 10~11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발표하며 응수했다. 28 이 논쟁의 진정한 쟁점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인가?’였다.
카우츠키의 논지는 이렇다. 볼셰비키와 비볼셰비키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방법, 즉 독재적 방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의 대립”이며(S. 3), 사회주의는 보통선거·의회·소수보호라는 민주주의적 방법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마르크스가 “1875년 한 편지에서 한 번 사용한 낱말 하나”에 의존한 것에 불과하다(S. 20, 60). 마르크스는 “유감스럽게도 이 독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더 자세히 보여 주기를 소홀히 했”으나, ‘계급의 독재’라는 표현 자체가 문자 그대로의 독재를 배제하며,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통치 형태가 아니라 상태”,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획득한 곳이면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카우츠키는 마르크스가 영국과 미국에서의 평화적 이행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든다(S. 20f.). 이 해석을 근거로 카우츠키는 제헌의회 해산과 부르주아지의 선거권 박탈을 소수의 독재이자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로 단죄했다. 29
레닌의 반박은 개념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첫째, ‘낱말 하나’라는 규정에 대한 반박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공식을 “마르크스의 혁명적 교훈 전체를 요약하는 고전적 추론”이라고 부르면서, 레닌은 그것이 고립된 표현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2년부터 1891년까지 40년에 걸쳐, 특히 1848년과 1871년의 경험을 총괄하며 거듭 주장해 온 부르주아 국가기구 ‘분쇄’ 과제의 “역사적으로 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응수했다. 즉, 『고타강령 비판』의 한 구절은 『프랑스 내전』 전체를 배경에 두고 있으며, 그 구절을 ‘낱말’로 축소하는 것은 이 연관성을 끊어버리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둘째, 레닌은 카우츠키가 회피한 정의를 직접 제시한다: “독재란 직접적으로 폭력에 기초하며 어떤 법률에도 제한되지 않는 지배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으로 쟁취되고 유지되는, 어떤 법률에도 제한되지 않는 지배다.”(『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30
셋째, 레닌은 ‘상태 대 통치 형태’의 구별이 삼중으로 어리석다고 논박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통치 형태, 즉 국가의 형태 또는 유형이다. 군주정과 공화정이라는 상이한 통치 형태는 모두 부르주아 국가, 즉 부르주아지 독재의 변형들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마르크스 『고타강령 비판』의 규정인 ‘형태의 다양성과 토대의 동일성’을 직접 적용한 결과다. 영국·미국 예외론에 대해서는 역사적 반박을 가한다. 마르크스가 평화적 이행 가능성을 인정한 1870년대의 영국과 미국은 군국주의와 관료제가 없었던 예외적인 경우였다. 『프랑스 내전』이 밝혔듯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은 바로 그 군국주의와 관료제의 존재에서 나온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그 예외는 소멸했다. 결국 카우츠키가 ‘상태’라는 개념으로 지우려 한 것은 혁명과 개혁의 대립이라는 문제 자체였다는 것이 레닌의 결론이다.
민주주의 층위에서 레닌이 편 반박은 본 기사의 주제와 가장 깊이 맞닿아 있다. 카우츠키는 시종 ‘민주주의 일반’이나 ‘순수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반면 레닌은 상이한 계급이 존재하는 한 ‘일반 민주주의’가 아니라 계급 민주주의만을 말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일반 민주주의’는 노동자를 속이려는 자유주의자의 거짓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중세와 비교하면 커다란 역사적 진보이지만, 언제나 협소하고 제한되며 위선적인 채로 남는다. 부자에게는 천국이지만, 착취당하는 대중에게는 덫이자 기만이다. 31
이는 1844년 이래의 논제인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의 공존’을 재진술한 것이다. 레닌은 가장 민주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차별받는 대중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선포하는 형식적 평등과, 프롤레타리아를 임금노예로 만드는 수많은 현실적 제한 및 책략 사이의 모순에 매번 부딪힌다고 썼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그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백만 배 더 민주적이며, 소비에트 권력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보다 백만 배 더 민주적이라고 주장한다. 32
계보학적으로 보면 이 논쟁은 마르크스의 세 텍스트를 어떻게 정확히 읽을 것인가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카우츠키의 ‘민주주의 일반’ 논법은 1844년에 분석된 추상, 즉 형식적 평등과 계급적 내용을 분리하는 방식의 재연이다. 그가 침묵으로 일관한 부분은 『프랑스 내전』의 ‘분쇄’ 테제와 의회주의 비판이다. 또한 그가 “낱말 하나”로 축소한 것은 『고타강령 비판』의 이행기 규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우츠키주의는 레닌의 진단처럼 라살레주의의 “국가에 대한 비굴한 신뢰”를 이어받은 의회주의적 후계자다. 강령의 요구 대상이 프로이센 군사 독재에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으로 바뀌었을 뿐,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의 그릇으로 전제하는 논리는 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단서를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카우츠키가 제기한 소수 보호, 언론·출판의 자유, 제헌의회 등의 물음 자체는 이후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내전, 관료화 속에서 처음과는 다른 무게를 지녔다. 1918년 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 초고에서 볼셰비키의 특정 조치들을 비판했을 때, 그것은 카우츠키처럼 ‘일반 민주주의’로 복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혁명의 편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사활적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차이가 결정적이다.
둘째, 그 이후의 퇴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도 카우츠키의 척도가 아니라 레닌이 복원한 척도, 즉 노동계급이 실제로 국가를 지배하는가라는 기준을 소련 자체에 적용할 때만 가능하다.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6. ‘전 인민의 국가’의 스탈린주의적 계승
마지막으로, ‘전 인민의 국가’라는 스탈린주의적 신기루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서 국가는 계급 갈등과 분리될 수 없다. 지배계급은 국가기구를 통해 지배를 유지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적 국가로 이해된다. 따라서 노동자 국가는 자신의 강화가 아니라 자신의 사멸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적대적 계급이 사라졌다고 선언하면서도 강력한 국가와 일당 지배를 영구화하려는 스탈린주의의 ‘전 인민의 국가’론은 처음부터 심각한 이론적 모순을 안고 있다.
트로츠키는 1936년 ‘전 인민의 국가’의 논리적 모순을 짚었다. 계급이 사라졌다면 국가는 왜 강화되는가? 1936년 4월 발표한 글 「소련의 새 헌법」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 체제의 주장대로 계급이 사라졌다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국가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 자체가 약화되고 사멸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새 헌법을 둘러싼 공식 선전은 국가의 사멸이 아닌 독재의 강화만을 역설하고 있었다(트로츠키, 1936a).
이 비판은 같은 해 집필한 저서 『배반당한 혁명』 제3장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됐다. 당시 코민테른은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승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전면적 강화”가 동시에 이뤄졌다고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이 두 명제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살아있는 사회 체제로서 사회주의가 최종 승리를 거뒀다면 계급적 강제 기구는 약화돼야 마땅하다. 반대로, 독재와 국가적 억압을 강화해야 한다면 이는 계급 없는 조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적대가 증폭되고 있다는 증거다.
트로츠키는 이 모순의 물질적 토대를 낮은 생산력 수준과 재화의 부족에서 찾았다.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분배를 결정하고 통제하는 기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관료는 이 분배 과정을 관리하며 자신들의 몫을 우선 확보하며 결국 사회 위에 군림하는 특권 기구로 성장했다. 따라서 강화된 국가는 잔재가 남은 옛 착취 계급의 부활을 억제하는 중립적 기구가 아니라, 현실의 결핍과 불평등을 관리하며 관료의 특권을 비호하는 기구였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국유화를 10월 혁명의 사회적 성과로 인정했다. 그러나 법적 국유화가 노동자의 실질적 소유와 통제를 곧바로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그의 비판은 ‘국유화냐 사유화냐’라는 형식적 선택이 아니라, 국유 재산을 누가 통제하고 누구의 이해를 위해 운용하는가라는 정치적 문제를 겨냥했다.
『배반당한 혁명』 제10장에서 트로츠키는 1936년 헌법의 논리를 ‘한 계급의 독재’가 ‘인민의 독재’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그러나 계급적 모순에서 해방된 전체 인민이 독재의 담당자가 됐다면, 이는 독재의 확대가 아니라 해체를 뜻해야 한다. 계급이 소멸할수록 관료제와 독재뿐 아니라 국가 자체도 사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소비에트는 이름만 남았고, 정치적 결정은 통제받지 않는 관료층의 독점물이 됐다. 노동자와 농민의 평등은 “관료제 앞에서의 동등한 무권리”로 전락했다(트로츠키, 1936b, 제10장).
스탈린은 적대하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러 정당이 생길 토양도 없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당 이론을 행정 편의주의에 맞게 희화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나의 계급도 결코 균질하지 않다. 산업 부문, 숙련도, 생활 조건, 정치 경험에 따라 다양한 경향과 강령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의 정치적 의식은 경제적 위치에서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쟁과 조직, 정치적 경향 간의 경쟁을 통해 형성된다.
더욱이 계급과 정치적 차이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복수 정당뿐 아니라 단일 정당도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계급이 없으므로 여러 당이 필요 없다’는 전제에서 ‘그러므로 스탈린의 일당만 필요하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제에 충실하다면 정치적 강제와 당의 독점도 소멸해야 마땅하다. 트로츠키에게 일당 국가의 영구화는 사회 통합의 표현이 아니라, 관료가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같은 이유로 국가 소유를 ‘전 인민의 소유’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없다.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 제9장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사회주의의 필요조건일 뿐, 그 자체가 완성된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국가 소유가 실질적인 사회적 소유가 되려면 특권과 불평등이 줄고, 생산자 대중이 경제와 국가를 직접 통제해야 한다. 아울러, 국가가 사회 위에 군림하는 별도의 강제기구로 존재할 필요성도 줄어야 한다. 국가는 인민과 동일하지 않고, 관료 기구도 사회 전체와 같지 않다.
결국 ‘전 인민’의 이름으로 관료의 지배가 은폐돼 있었다. ‘전 인민의 국가’론의 본질은 국가가 실제로 모든 인민의 것이 됐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료가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체 인민의 의지로 포장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착취 계급이 사라졌다는 선언은 현실의 불평등과 정치적 대립을 분석하는 출발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대립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 국가와 당의 권력에 반대하는 행위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정당한 정치적 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에 이미 해결된 계급투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적대 행위로 취급됐다.
스탈린은 적대 계급의 소멸,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전 인민의 단결이라는 논리로 ‘전 인민의 국가’ 교리의 기초를 마련했다. 트로츠키는 ‘계급은 사라졌으나 국가는 강화된다’는 모순을 분석해 그 교리의 관료적 기능을 비판했다. 국가가 진정으로 전 인민의 것이 됐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스스로를 ‘전 인민의 국가’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대중의 직접 통제가 확대되고 관료적 특권과 정치적 강제가 줄어들며, 사회 위에 군림하는 별도의 권력인 국가가 사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전 인민의 국가’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의 완성을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관료제가 인민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은폐하는 스탈린주의적 신기루에 불과했다.
마르크스가 1875년에, 그리고 레닌이 1917년에 조롱한 바로 그 개념인 ‘전 인민의 국가’는 1961년 소련공산당 제22차 대회 강령에서 부활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임무가 완수됐으며 소련은 이제 ‘전 인민의 국가’가 됐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33 계급이 존속하는 조건에서 국가의 초계급성을 선포하는 이 표현은, 고타강령 비판의 기준으로 보면 정확히 마르크스가 분석한 착각의 국가 공식을 이데올로기화한 결과였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이 선언을 소련 관료 지배의 자기정당화로 읽은 것은 이 때문이다. 34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전 인민의 국가’를 자칭하는 국가야말로, 마르크스의 세 텍스트가 일관되게 겨냥한 표적, 즉 계급 지배를 보편성의 형식으로 은폐하는 국가의 가장 완성된 사례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세 텍스트와 레닌의 종합은 부르주아 대의제 국가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참칭한 국가를 비판하는 척도로도 남아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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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헌법, 1977년, 제1조. https://www.departments.bucknell.edu/Russian/const/77cons01.html
- Nikandrov, Aleksey. “Antinomy of Classes and People in the Soviet Socialist State Theory: The Concept of ‘All People’s State’.” Antinomies. https://yearbook.uran.ru/en/archive/189-issue-2024-24-2/1326-antinomy-of-classes-and-people-in-the-soviet-socialist-state-theory-the-concept-of-all-people-s-state
- Fokin, Alexander A. “Building Communism by Numbers: The Third Program of the CPSU and Its Stalin-Era Prehistory.” Russian Journal of Economics, 2026. https://rujec.org/article/171595/
후주
- 인용의 저본은 marxists.org의 영역본이며, 한국어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이다. [ ] 안의 말은 필자의 첨언이다. 서지 병기의 약호는 다음과 같다. MECW = Marx/Engels Collected Works, Progress Publishers/Lawrence & Wishart. MEW = Marx-Engels-Werke, Dietz Verlag, Berlin. LCW = V. I. Lenin, Collected Works, 4th English ed., Progress Publishers, Moscow. ↩
- Karl Marx, “On the Jewish Question”, MECW Vol. 3, pp. 146–174. “Zur Judenfrage”(1843년 가을 집필),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 1844년 2월. MEW Bd. 1, S. 347–377. ↩
- MECW 3, p. 153. MEW 1, S. 354. ↩
- MECW 3, p. 154. MEW 1, S. 355. ↩
- 인권 분석은 1791년·1793년 프랑스 인권선언과 미국 주 헌법들(펜실베이니아·뉴햄프셔)을 전거로 전개된다. MECW 3, pp. 160–164. MEW 1, S. 362–366. ↩
- MECW 3, p. 155. MEW 1, S. 356. ↩
- 제1부의 결어. MECW 3, p. 168. MEW 1, S. 370 ↩
- Karl Marx, “The Civil War in France”. 국제노동자협회(IWMA) 총평의회 제3차 담화문으로 1871년 4~5월 집필, 코뮌 진압 이틀 뒤인 1871년 5월 30일 총평의회에서 채택·발표. MECW Vol. 22, pp. 307–359. MEW Bd. 17, S. 313–365(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
- MECW 22, p. 328. MEW 17, S. 336. 마르크스·엥겔스는 1872년 『공산당 선언』 독일어판 서문에서 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선언에 가해야 할 유일한 교정으로 명시했다(MEW 18, S. 95f.). ↩
- MECW 22, pp. 328f. MEW 17, S. 336f. ↩
- MECW 22, p. 333. MEW 17, S. 340. 독일어판의 언어유희 ver- und zertreten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 제3장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인용한 판본에 반영돼 있다. ↩
- MECW 22, p. 333. MEW 17, S. 340f. ↩
- MECW 22, p. 334. MEW 17, S. 342. ↩
- MECW Vol. 24, pp. 75–99. MEW Bd. 19, S. 13–32. Karl Marx,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년 4월~5월 초, 브라케에게 보낸 「독일노동자당 강령 방주(傍註)」로 집필, 1891년 엥겔스가 Die Neue Zeit(Bd. 1, Nr. 18)에 초간. 본고의 인용은 국가 문제를 다루는 제4부에서 취했다. ↩
- MECW 24, p. 94. MEW 19, S. 27. ↩
- MECW 24, p. 95. MEW 19, S. 28. ↩
- MECW 24, p. 95. MEW 19, S. 28. ↩
- 이상의 인용은 모두 제4부. MECW 24, pp. 95–97. MEW 19, S. 28–31. ↩
- 영역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357. Engels an August Bebel, 1875. 3. 18~28. MEW Bd. 19, S. 3–9(같은 서한이 서간집인 MEW Bd. 34, S. 125–132에도 수록). 1911년 베벨의 회고록 제2부에서 처음 공개됐고, 이후 『고타강령 비판』과 함께 묶여 출판되는 것이 관례가 됐다. ↩
- V. I.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The Marxist Theory of the State and the Tasks of the Proletariat in the Revolution”. 1917년 8~9월 집필, 1918년 초간. LCW Vol. 25, pp. 381–492. 계획된 제7장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집필되지 못했다. ↩
- 『국가와 혁명』 제3장 5절. LCW 25, p. 437. ↩
- 『국가와 혁명』 제5장 2절. LCW 25, p. 461 ↩
- 레닌의 인용은 『국가와 혁명』 제3장 1절(LCW 25, pp. 420f.). Marx an Ludwig Kugelmann, 1871. 4. 12. MEW Bd. 33, S. 205. ↩
- 『국가와 혁명』 제3장 2절. LCW 25, pp. 425f. ↩
- 『국가와 혁명』 제2장 3절. LCW 25, p. 412. ↩
- 『국가와 혁명』 제5장 4절. LCW 25, p. 471. ↩
- Karl Kautsky,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trans. H. J. Stenning, Manchester: National Labour Press, 1919. Die Diktatur des Proletariats, Wien: Verlag der Wiener Volksbuchhandlung Ignaz Brand, 1918, 63 S. 이하 카우츠키 인용은 레닌이 반박문에서 인용한 대로 따랐다. 레닌이 인용한 쪽수는 빈(오스트리아 수도) 초판 기준이다. ↩
- V. I. Lenin, “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the Renegade Kautsky”. 1918년 10~11월 집필, 1918년 모스크바 코무니스트 출판사 초간. LCW Vol. 28, pp. 227–325; 레닌은 서문에서 카우츠키의 근본적인 이론적 오류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 사상의 기회주의적 왜곡”으로, 『국가와 혁명』에서 자신이 상세히 폭로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럼으로써 두 저작의 연속성을 확인해 준다. ↩
- 카우츠키의 논지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카우츠키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평범한 자유주의자로 만들었나’ 장에서 재인용. LCW 28, pp. 231–242. ↩
- ‘카우츠키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평범한 자유주의자로 만들었나’, LCW 28, p. 236. ↩
-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LCW 28, pp. 242–245. 여기서 레닌은 보통선거권이 “노동계급의 성숙도를 재는 지표이며, 현재의 국가에서는 그 이상일 수도 없고 결코 그 이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라는 엥겔스의 명제를 인용하며, 카우츠키가 전반부(부르주아지에게 수용 가능한)만 되풀이하고 강조된 후반부는 침묵으로 넘겼다고 지적한다. ↩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LCW 28, p. 248. 논거는 “파리 코뮌이 시작한 일”의 계속인 집회의 자유(최량의 건물들), 출판의 자유(인쇄소와 종이의 몰수), 그리고 착취받는 사람들의 국가 행정 참여다. ↩
- 1961년 10월 채택된 소련공산당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소련에서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으며 국가가 “전 인민의 국가”로 전화했다고 규정했다. ↩
- Tony Cliff, State Capitalism in Russia. 1948년 초판의 제목은 The Nature of Stalinist Russia. 1955년 2판의 제목은 Stalinist Russia: A Marxist Analysis. 클리프는 노동계급의 실제 국가 지배 여부라는 레닌적 기준을 소련에 적용해, 관료가 축적을 강제하는 총자본가 역할을 하는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