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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극우 최일붕 글 모음 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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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등장과 공동전선 논쟁

[필자 주] 이 글은 필자가 13년 전인 2013년 〈레프트21〉 116호 (2013.11.23)에 기고했던 글과 핵심 논지와 역사적 소재가 상당히 겹치지만, 같은 글은 아니다. 13년 전 글이 나치 집권 과정 전반을 설명하는 개설문이라면, 이 글은 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과 공동전선 실패를 중심으로 훨씬 더 좁고 깊게 재구성한 글이다. 이 글은 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 코민테른의 노선, 공산당의 공동전선 거부, RGO/‘적색 노동조합’ 전술, 나치와의 기괴한 공동 행동 사례 등을 길게 파고든다. 특히, “왜 공동전선이 필요했는가”, “공산당은 왜 그것을 망쳤는가”, “오늘날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가 글의 중심이다.

반면 〈레프트 21〉 기사, ‘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는 더 넓은 역사적 배경 설명이 많다. 베르사유조약, 1923년 초인플레, 카프 쿠데타, 히틀러의 맥주홀 쿠데타, 브뤼닝·폰 파펜·슐라이허 정부, 헌법 문제, 라익스바너와 강철전선, 트로츠키의 비판과 대안 등이 별도 꼭지로 정리돼 있다. 즉, “나치 권력 장악의 전체 과정”을 설명하는 개설문에 가깝다. 물론 같은 역사적 사건과 같은 정치적 결론을 다루므로 중복감은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전에 본 주제”로 느낄 수 있지만, 문단 구성·자료 배치·강조점이 같지는 않다. 예전 글의 일부 논점을 더 길게 확장하고, 특히 공동전선 문제로 초점을 좁혀 재구성했다.

1930년대 초 독일에서 나치가 부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일종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공격하는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취했다. 이것이 히틀러가 승리한 단연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가장 반동적이고 야만적인 형태의 파시즘이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저항 없이 독일에서 승리했다. 아우슈비츠와 제2차 세계대전을 낳은 이 비극적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하고 묻는다.

산업이 고도로 발전한 독일에는 경험이 풍부하고, 잘 조직되고, 자각한 노동계급 운동이 존재했다. 독일 노동계급은 주로 독일사회민주당(SPD, 이하 사회민주당)의 개혁주의적 지도를 받았고, 사회민주당 계열의 ADGB(이하 독일노동조합총연맹)로 조직돼 있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KPD)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독일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산업 자본주의 나라의 하나였음에도 전통적 중간계급(도시 소상공인과 농촌 소자영농)의 비중이 꽤 컸다. 전체 인구 중 산업 노동자는 약 30퍼센트였고, 농업 노동자를 포함한 전체 육체노동자는 총인구의 대략 절반을 차지했다. 나머지 절반 중 20퍼센트는 사무·서비스 노동자였고, 나머지 30퍼센트는 전통적 중간계급이 차지하고 있었다. 파시스트들이 대중 운동을 건설할 능력만 있다면,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파시즘 운동의 실질적인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노동계급이 잘 조직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오늘날의 선진국과 비교하면 많은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육체노동자의 4분의 1만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고, 사회민주당은 약 100만 명의 당원을 확보했으나 기회주의적 정당에 불과했다. 어떤 조처가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회든 이용하려 했다.(SPD는 1919~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강한 정치 세력이었고, 여러 총리와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배출했다. 물론 자주 야당이 되기도 했지만, 결정적 시기의 전야인 1928~1930년에는 다시 집권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1918~1923년 당시 발전하던 노동계급 혁명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되돌리려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전직 장교들로 이뤄진 군사 조직 프라이코어(이하 의용단)를 육성해 1919년 한 해 동안 노동자 살해를 방조하고, 당시 등장하던 노동자 민주주의 기구 레테를 파괴하도록 사주했다. 이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노동계급의 핵심 지도자들이 피살됐다.

이러한 정당이 반나치 투쟁을 제대로 벌일 리는 만무했다.

한편 사무·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낮았다. 노동조합 비슷한 것에라도 가입한 비율이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다. 그마저도 1929~1931년 경제 공황이 급속히 심화하자 더 떨어졌다. 따라서 정식 노동조합에 속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만이 노동운동이나 관련 기구에 참여하는 실정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기구를 다수 관리했다. 또한 대규모 협동조합과 관료 기구뿐 아니라 사무 설비 공급 회사를 포함한 자체 기업도 보유했다. 사회민주당이 수립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탄탄한 계급 협조 체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노동법원, 사회보장위원회, 경제기획위원회, 의무 가입 공장회의 등을 설치해 이 계급 협조 체제를 철저히 관리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유지에 철저히 헌신하는 정당이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말 경제 공황이 시작되자 사회민주당은 본색을 드러내며 지지자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임금 삭감, 사회복지 축소, 대자본가와 대농장주에 대한 거액의 보조금 지급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경제 상황은 매우 절박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 산업 생산은 42퍼센트 급감했고, 2000만 노동인구 중 600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발생했다. 사회민주당은 지지자들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는 정책을 강행하며 경제 공황에 대처하려 했다.

한편, 나치가 급성장하고 있었다. 나치의 득표율은 1928년 2.6퍼센트에서 1932년 7월 37.4퍼센트로 급등했다. 돌격대(SA)는 약 40만 명에 이르는 제복 입은 살인자 집단이 돼 있었다. 전통적 중간계급(프티부르주아지) 전체와 사무·서비스 노동자 일부가 기존 보수·우파 정당을 외면하고 나치당을 지지했다. 이들을 따라 많은 실업자와 일부 산업 노동자까지 나치를 지지했다. 나치는 사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이 지도하는 노동조합총연맹, 그리고 여타 계급 협조 기구에 명백한 위협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나치에 맞설 일치된 방어가 필요했다. 그러나 대중 역량의 폭발적 분출을 두려워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총연맹 지도부는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도성은 혁명가들에게서 나와야 했다. 이들은 독일공산당(이하 공산당)으로 조직돼 있었다.

공산당은 1919년 1월 창립 직후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에 가입했다. 1919~1923년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은 여러 주요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거듭된 과오로 유리한 혁명적 정세를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1923년 이후 공산당은 코민테른 중앙(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스탈린 일파의 노선은 한마디로 ‘일국사회주의’론이었다. 이 이론은 소련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로 노동자 혁명이 확산되도록 하는 일은 배제됐다. 이에 따라 각국 공산당의 정책은 모두 소련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됐다.

세계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스탈린은 세계 자본주의가 “전반적 위기”에 처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각국 공산당에 당면한 노동자 혁명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 판단은 다소 낙관적이었으나 재앙을 불러올 만큼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 판단에 뒤따른 ‘사회파시즘’론이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는 코민테른 창립 10주년 기념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부르주아지는 고조되는 혁명적 위기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민주당이라는 충실한 동맹자를 발견했다. 마침내 10년 후, 사회민주당이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도록 임명된 부르주아적 노동자당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의심할 여지 없이 확인됐다. 대외 정책 분야에서 사회민주당은 평화주의적 언사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 준비와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대항한 십자군 조직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대내적으로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가 합리화 정책을 수행하며 노동계급에게 굴레를 씌우는 일을 돕는다. 코민테른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자 마르크스주의의 유일한 대표자다.”

이 분석이 보여 주는 바 못지않게 여기서 빠진 사항이 중요하다. 코민테른이 제아무리 “마침내 10년 후, 사회민주당이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도록 임명된 부르주아적 노동자당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지라도, 그 사실은 코민테른과 그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확인됐을 뿐이다. 대다수 독일 노동자는 사회민주당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여전히 믿었다. 코민테른이 도처에서 자기 기치 아래 노동자들이 결집한다고 제아무리 크게 선포해도, 사회민주당은 여전히 독일 노동계급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전복이 즉각적인 의제로 올라 있다 해도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공산당을 지지하도록 이끄는 일이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전선이었다. 일치된 투쟁의 근거는 실업 및 임금 삭감에 대한 저항,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선 방어 투쟁 등으로 광범했다. 1930년경 나치는 이미 상당한 세력이 돼 있었으므로, 그들에 대항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협력해야 함은 명백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다르게 생각했다. 1929년 7월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사회민주당이 강한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사회파시즘이라는 특별한 형태를 취하는데, 사회파시즘은 파시스트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는 대중의 활동을 마비시키는 도구로서 갈수록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고 있다.”

이 논지는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대중이 ‘사회파시즘’에 품은 환상과 신뢰 탓에 ‘사회파시스트’야말로 반나치 투쟁의 걸림돌이며, 따라서 ‘주적’은 사회민주당이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에 따라 공산당은 역량의 상당 부분을 사회민주당 공격에 쏟아부었다. 1929년 메이데이 시위대 발포를 승인한 베를린 경찰청장 카를 최르기벨이 사회민주당원이었을 만큼 사회민주당이 반동적 행태를 보였을지라도, 사회민주당은 여전히 노동자 대중의 정당이었지 파시스트는 아니었다.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한 조치는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 사이의 진지한 토론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심지어 공산당은 한술 더 떴다. 그들은 ‘주적’인 사회민주당에 맞서기 위해 나치와 손을 잡기도 했다. 1931년 8월 프로이센주에서 나치가 발의한 주 정부 해산안 국민투표가 열리자, 공산당은 찬성표를 던질 것을 나치와 나란히 촉구했다. 공산당이 파시스트와는 다른 명분으로 사회민주당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변했으나,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의 눈에는 나치의 협력자로 비쳤을 뿐이다. 이러한 무리수에 공산당 지지 노동자들조차 반발하면서 결국 투표는 부결됐다.

당시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이 작성한 의견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혁명적 노동자 중에서도 브라운-세베링 사회민주당 정부가 히틀러-괴벨스 정부보다 차악이라는 견해인 사람들이 프로이센에 존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 말하지는 않겠으나, 이는 계급의식이 미흡함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는 프로이센 노동자들이 공산당 지도부보다 자신들의 기본적 계급 이해관계를 훨씬 더 잘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나치와의 협력 노선은 투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32년 공산당 지도부가 접수한 보고서들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이 일터에서 사회민주당 노동자보다 오히려 나치 노동자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도부는 노선을 수정하지 않고 기존 방침을 옹호하는 데만 급급했다.

이러한 노선은 당 활동의 최일선에서도 그대로 실행됐다. 훗날 한 공산당원은 1931년 초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31년 봄 브레멘에서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운수노동조합이 독일 서부 모든 주요 항구의 선박·부두 노동자 대표가 참석하는 대규모 모임을 열었다. 공개 집회였기에 일반 노동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나치당 본부에 전령을 보내어 그 모임을 함께 무산시키자고 제안했다. 언제나 그렇듯 히틀러 추종자들은 동의했다.

“모임이 열렸을 때 방청석 복도에는 공산당원과 나치 대원 200~300명이 있었다. 공산당 측 작전 책임자는 나였고, 나치 측 책임자는 돌격대장 발터 트리코브였다. 2분도 채 되지 않아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합의했다. 모임이 시작되자마자 내가 일어서서 열변을 토했다. 반대편에서 트리코브도 똑같이 행동했다. 의장이 우리 둘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조합 대의원 한 명이 우리 몸에 손을 대자마자 우리 일행은 일어서서 소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부수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다음 날 나치 신문과 우리 당 신문은 일제히 1면 톱기사로 부패한 지도자들의 배반 행위에 분노한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철저한 프롤레타리아식 ‘마사지’를 선사했는지 보도했다.”

그러므로 공산당은 ‘주적’을 공격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물리적으로 공격할 만큼 나치와 손잡을 태세가 돼 있었다.

이런 노선을 추구했으니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그들의 광기는 ‘적색 노동조합’을 설립하려고 기존 노동조합을 분열시키는 전술까지 서슴지 않고 채택했다.

당시 독일 노동운동의 주류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ADGB)이었다. 이 노동조합은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한 것에 따라 공산당은 사민당계 노동조합 안에서는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기존 노조를 ‘체제 순응적 배신자’로 낙인찍고, 공산당만의 독자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물로 1929년 ‘제2의 노동조합’ 혁명적공장반대파(이하 RGO)를 공식 출범케 했다. RGO는 체제 전복과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표방했다.

RGO는 1930년 베를린 금속노동자 파업, 1932년 베를린 운수노동자 파업 등 큰 파업을 주도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1930~1931년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넘쳐나고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주류 노동조합 독일노동조합총연맹에 실망한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RGO에 대거 가입했다. 전성기에는 수십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RGO 설립은 결과적으로 독일 노동계급을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분열시켰다. 특히, 독일노동조합총연맹과 RGO가 공장과 거리에서 말다툼이나 몸싸움, 심지어 격투를 벌이는 사이, 정작 진짜 파시스트인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 분열을 틈타 세력을 급격히 확장했다. 심지어 1932년 말 베를린 운수 파업 때는, RGO와 나치당 공장 조직(NSBO)이 손을 잡고 공동 파업을 벌이는 기괴한 광경까지 연출됐다.

그러나 사실, 코민테른이 1929년 7월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열망과 그것이 어렵고 위험하다는 인식 사이의 모순이 드러난다. 게다가 독일은 가장 까다로운 나라의 하나로 지적됐다. 문제가 그토록 어렵다면 도대체 왜 제안했는가. 노동조합 분리는 대다수 노동자에게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고려하는 것이 옳았다.

코민테른은 1931년에도 “독일의 독자적인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에 관해 제5차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RILU) 대회가 제시한 총노선”이 성공적으로 실현됐다고 과장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내세운 수치로도 RGO는 1930년 선거에서 공산당에 표를 던진 400만~500만 명의 노동자는 물론, 공산당원(당시 전체 18만 명)조차 조직하지 못했다. ‘적색 노동조합’은 대안 조직으로서 사실은 별로 전진한 바가 없다.

오히려 ‘적색 노동조합’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가장 선진적인 공산당원 투사들이 개혁주의적 노동조합을 탈퇴하자, 노동조합에 남아 관료에 맞서 싸우려던 노동자들은 내부 활동의 구심점을 잃었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대중적 노동조합 투쟁에서 고립됐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RGO는 가장 먼저 불법화돼 철저히 탄압당했다. 수많은 RGO 지도자들과 노동자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같은 해 5월에는 RGO가 그토록 적대시했던 ADGB마저 나치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며 독일의 노동조합 운동은 완전히 절멸하게 된다.

코민테른은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이 동일하다고 보고, 이를 인식하면 양자 모두에 대항하는 투쟁이 진전될 수 있다고 봤다. 사회민주당 대중이 사회민주당과 나치당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면, “아래로부터 혁명적으로” 동원돼 자신들의 지도자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정책을 제시한 공산당이 실질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회민주당 조직들은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면 전멸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소극적인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조차 파시스트에 맞선 공동 행동을 요구하는 일은 사활적으로 필요했으며 동시에 가능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론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파시즘 독재를 확립하려는 대자본가 계급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전제에 근거했다. 실제로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노동자와 당 지도부를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이 주장은 한 가지 점만을 함축한다.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공동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공산당의 사회민주당 평가가 옳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전선 요구는 “공산당에 입당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공동전선이 혁명가들에게 주는 가장 큰 이점은 노동자 대중을 ‘아래로부터’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공동전선 사업은 바로 기층에서 이뤄진다. 진정한 혁명적 좌파는 노동자 대중의 지도자가 아닌 일부 사회민주당 대표를 정치적·이념적으로 전향시키는 데 관심이 없다. 노동자 대중을 동원하려면 노동자 정당의 지도자인 사회민주당 지도부에게 접근해야 했다. 파시스트에 맞선 진정한 공동 활동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만약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신들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신뢰를 잃는다. 사회민주당 당원들이 파시스트의 위협을 인지하는데도 지도부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이 지도부로부터 독립해 행동하도록 이끌 수 있다. 만약 지도부가 제안을 수락한다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서로 다른 정책이 대중 투쟁 속에서 검증되며, 이는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공산당이 초좌파적 태도로 공동전선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 독일에서 파시즘이 승리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큰 부담을 안고 있었으므로 대중 투쟁을 회피하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맞서 노동계급을 동원해야 할 책임은 결국 혁명적 활동가들의 어깨에 놓였다. 이들마저 책임을 회피한다면 가장 잘 조직되고 투쟁적인 노동자들조차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잘못된 방침 탓에 공산당은 한때 30만 당원을 가진 정당으로 성장했어도 노동계급 대중을 동원하지 못했다. 대신 공산당은 당원의 4분의 3 이상이 실업자인 정당으로 급변했다. 이는 공산당이 대규모 집회·시위와 행진을 벌였을지라도, 취업해 있는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는 더욱 괴리됐음을 뜻했다.

1933년 초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됐을 때 공산당은 총파업을 요구했다. 모든 독일 노동자가 히틀러의 총리 임명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총파업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공산당이 노동계급 운동의 광신적 과격파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계급 조직의 생명이 걸린 극단적인 암흑기에조차 아무도 공산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문제는 공산당이 나치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다. 공산당은 나치와 싸웠고, 때로는 매우 격렬하고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1932년 7월 17일 함부르크 근처 알토나에서 돌격대와 벌인 격투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흔치 않았을 뿐 아니라, 대중 투쟁이 아닌 무장 조직 간의 충돌이었으므로 정치 폭력에 가까웠다. 오히려 나치의 권력 장악 직전인 1933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건이 당시 상황을 더 잘 보여 준다. 나치가 카를 리프크네히트 공회당에 있는 공산당 본부 쪽으로 행진했을 때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반대 시위를 취소했다. 그 결과 나치는 의기양양하게 행진을 마쳤다. 이 사건은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나치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심어 주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공산당과 나치 사이의 드문 충돌에서 승자는 항상 나치였다. 나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테러 집단이었으므로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이는 대중 행동으로부터 유리돼 있었다는 뜻이다. 소집단의 영웅주의가 해결책은 아니었다.

나치 집권 뒤에도 공산당은 초좌파적 종파주의에 빠져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단결해 나치에 맞서기를 거부했다. 당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노동자들을 저버린 상태였다. 1933년 2월 19일 국제 사회민주당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이 코민테른에 반나치 공동 투쟁을 제안했다. 코민테른은 노동계급의 모든 경제 문제를 망라하는 합의를 조건으로 내걸어 사실상 회피하는 답변을 제시했다. 이들은 “자본과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 동안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공격을 삼가도록 권고할 수 있다”며 주춤하고 머뭇거리면서도, “반파시즘 단결”이라는 구호는 빼놓지 않았다. 독일 상황에 대한 코민테른 보고서(1933년 4월)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추구한 정치 노선과 조직 정책이 완전히 옳았음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는 언명한다”라고 밝히며 여전히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코민테른은 여전히 책임을 사회민주당에 전가했다. 자신들의 “혁명적 공동전선을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와의 반동적 공동전선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과오를 확인해 줄 뿐이다. “혁명적” 공동전선이란 정의상 혁명을 위해 투쟁할 태세가 돼 있는 사람들, 즉 자신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개혁주의적 노동자들은 정의상 혁명적이지 않다. 공산당이 반파시즘 투쟁을 위해 허용한 유일한 조건은 자신이 제시한 조건, 즉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뿐이었다. 공산당은 자신의 전략에 온전히 동의하는 사람들만을 동원할 태세가 돼 있었다.

코민테른의 오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히틀러의 승리가 독일 노동계급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고 강변했다. “노골적인 파시스트 독재의 확립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분쇄하고 대중을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한 독일의 진군 속도를 가속시킬 것이다.” 이 주장은 백 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결실인 노동조합과 정당 건설 등 엄청난 성과를 파괴하는 행위를 ‘해방’이라고 강변한다. 또한 파시스트가 가한 타격이 독일 노동자들을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에서 해방시켰다고 시사한다.

나치 승리 후 10개월이 지난 뒤에도 코민테른은 반파시즘 투쟁을 ‘사회파시즘’ 반대 투쟁보다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다. 공동 행동을 위한 제안도 모두 ‘폭로’로서의 가치만을 고려해 제시했다. 또한 익숙한 옛 용어인 ‘사회파시즘’을 다시 꺼내 들며 “사회민주당의 총노선이 부르주아 독재의 파시즘화로 향한다”고 주장했다. 파시스트의 승리가 공산당의 정치 활동을 수월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되풀이했다. 코민테른은 파국을 겪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교훈을 얻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과제다. 독일 노동자 운동은 실질적 저항 없이 파시즘에 패배했다. 만약 독일 노동자 운동이 단일 대오로 맞서 싸웠다면 파시스트들을 사소한 골칫거리로 제쳐 버릴 수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투쟁을 이끌 세력과 역량을 가졌으나, 그 전반적인 지향점은 대중 행동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집요하게 좇은 나머지, 자기 조직이 투쟁에 동원되기보다 차라리 파괴되기를 바랐다. 문제는 그들이 싸우도록 강제하느냐, 아니면 그들을 지지하는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느냐였다. 당시에 이를 실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공동전선을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에게 조직을 포기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라고 촉구하는 수단으로만 여겼다. 공산당은 반파시즘 공동전선이 아니라 혁명을 위한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동시에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정치 노선뿐 아니라 사회민주당 조직 자체에도 극렬한 공격을 가했다.

물론 그 조직들은 독일 혁명에는 장애물이었다. 분명 해체돼야 했다. 그러나 돌격대의 공세에 직면해 정치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은, 공산당이 파시스트에 맞선 공동 행동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한 공동 행동은 제한적이고 단기적일지라도 급격히 고조되는 대중 행동의 파고를 촉발할 수 있었다. 설령 공동 행동이 나치를 분쇄하는 선에서 즉시 멈췄을지라도,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대중의 지지를 얻을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반파시즘 공동전선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직면한 모든 노동계급에 필요하다. 사회민주당을 ‘주적’이나 ‘주된 장애물’, ‘파시즘의 앞잡이’로 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는 혁명적 소수가 계속 소수로 남도록 만들 뿐이다. 또한 계급투쟁과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혁명가들을 고립시킨다. 나아가 사회민주당 지지자들이 지도부에 더욱 매이게 만들어,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혁명적 소수파를 노동계급 운동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광신적 과격파로 몰아 추방하는 행위를 정당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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