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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트로츠키의 민중전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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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국제 전략으로 채택된 민중전선(인민전선) 노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글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중전선은 트로츠키가 제창한 노동자 공동전선과 외형상 유사해 보이지만 계급적 성격에서 정반대의 전략이며, 그 차이는 우연적·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원리적·질적 차이다. 둘째, 민중전선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표방한 목표인 반(反)파시즘 투쟁의 수단으로서도 무력하다. 셋째, 프랑스(1936)와 스페인(1936–39)의 경험은 이 이중의 실패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며, 1970년대 칠레의 민중연합(Unidad Popular)이 그 계보를 잇는다. 이 글은 ‘힘의 평행사변형’ 논증, 동맹의 문제, 금융자본의 위계 구조에 관한 트로츠키의 견해를 차례로 재구성함으로써,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이 ― 개혁주의가 그러하듯 ― 반동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명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최고 수준의 전략적 원리로 남아 있음을 논증한다.
Ⅰ. 문제의 제기
1933년 1월 히틀러의 집권은 20세기 노동운동사 최대의 패배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자 정당이었는데도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조직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코민테른은 히틀러의 승리 이후로도 한 해 넘게 이른바 ‘사회파시즘(social fascism)’ 노선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독일 정책이 옳았다고 강변했고, 심지어 나치 독재가 “독일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 노선의 파산을 그 노선의 언어로 정당화하는 이 도착(倒錯)은 곧이어 정반대 극단으로의 급선회로 이어진다.
1934년 코민테른은 180도 방향 전환을 시작했고, 1925–28년의 우경화 경로를 다시 밟았다. 이 전환을 선도한 것은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성장하는 파시즘 운동에 직면해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전선을 맺었고, 이를 다시 급진당―그 주된 기반이 중간계급에 있던,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정당―과의 동맹으로 확장했다. 이 정책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국제 전략으로 채택됐으며, 민중전선(Popular Front 혹은 People’s Front)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본질은 파시즘에 맞선 모든 ‘민주적’ 세력―부르주아 세력을 포함한―의 통일이었다.
본고의 과제는 이 민중전선 전략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데 있다. 비판의 준거는 트로츠키의 1935–37년 저작이다. 논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Ⅱ절에서 민중전선과 공동전선의 원리적 구별을 다루고, 제Ⅲ절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역사적 검증을 검토한다. 제Ⅳ절에서 ‘이중의 실패’ 명제―혁명의 장애물이자 반파시즘의 무력한 도구―를 ‘힘의 평행사변형’ 논증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제Ⅴ절에서 동맹과 중간계급의 문제를, 제Ⅵ절에서 금융자본의 위계 구조와 ‘반독점 동맹’ 비판을 다룬다. 제Ⅶ절에서는 민중전선을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적 퇴화의 정점으로 위치 짓는 관찰을 검토하고, 제Ⅷ절에서 현재적 함의를 정리한다.
Ⅱ. 공동전선과 민중전선: 외형의 유사와 원리의 대립
민중전선 비판의 출발점은 그것을 공동전선(united front)과 명확히 구별하는 데 있다. 두 전략은 모두 ‘전선’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양자 모두 분열된 노동자 대중을 하나의 행동으로 묶으려 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닮았다. 바로 이 외형적 유사성 때문에 민중전선은 공동전선의 정당한 연장 혹은 확대처럼 제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자가 “여러 결정적 측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네 가지로 정식화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차이는 서로 독립적인 항목들의 나열이 아니라, ‘계급’이라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수렴하는 단일한 대립의 네 국면이다.
1. 동맹의 외연: 노동자 정당인가, 부르주아 정당인가
첫째, 공동전선이 노동계급에 기반한 정당들―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을 연결하려 한 데 반해, 민중전선은 부르주아 정당에까지 확장된다. 이로써 민중전선은 그 용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계급협조 정책이 된다. 공동전선은 노동자 정당들 사이의 행동 통일, 즉 한 계급 내부의 통일이다. 민중전선은 계급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일, 곧 적대하는 두 계급 사이의 결합이다. 전자에서 동맹의 상대는 같은 계급의 다른 정치적 표현이지만, 후자에서 동맹의 상대는 타도돼야 할 계급의 정치적 대표다. 이 첫 번째 차이가 나머지 모든 차이를 규정한다.
2. 합의의 성격: 구체적 행동인가, 강령과 정부인가
둘째, 공동전선이 특정한 구체적 목표를 위해 함께 싸운다는 실천적 합의―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였던 데 반해, 민중전선은 공동의 선거 강령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지지를 포함한다. 공동전선의 합의는 제한적·잠정적·과업 한정적이다. 가령 특정 파업의 방어, 특정 파시스트 행진의 저지, 특정 권리의 수호와 같은 단일한 목표를 위해 노동자 정당들이 일시적으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반면 민중전선은 하나의 선거 블록으로 결합해 공동 강령을 내걸고, 그 강령 위에 세워진 부르주아 정부를 떠받친다. 합의의 단위가 ‘행동’에서 ‘정부’로 옮겨가는 순간, 노동자 정당은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에 공동 책임을 지는 처지가 된다.
3. 비판의 자유: 이념적 독립인가, 비판의 포기인가
셋째, 공동전선의 조건이 완전한 이념적 독립과 비판의 자유였던 데 반해, 민중전선은 동맹 내 다른 정당들에 대한 혁명적 비판의 포기를 수반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차이다. 공동전선의 고전적 정식인 “따로 행진하되, 함께 타격하라(March separately, strike together)”에서 ‘따로 행진한다’는 것은 곧 동맹 상대에 대한 비판의 권리를 한순간도 양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은 공동 행동 속에서 다른 정당 지도부의 동요와 배신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혁명적 지도의 우월성을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동맹의 ‘단결’을 위해 바로 이 비판을 봉인한다. 부르주아 동맹자를 비판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순간, 혁명적 당은 노동자 대중을 교육할 유일한 수단을 스스로 포기한다.
4. 사업의 위상: 부분 전술인가, 전체 전략인가
넷째, 공동전선이 당 사업의 한 측면에 불과했고 그 외에는 독자적 활동을 계속했던 데 반해, 민중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이 됐다. 공동전선은 도구다. 그것은 당의 독립적 활동이라는 더 큰 전체 안에 놓인 하나의 전술적 계기이며, 필요에 따라 채택되고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목적 그 자체로 격상됐다. 그것은 더는 혁명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의 유지 자체가 모든 활동을 종속시키는 최고의 명령이 됐다. 수단이 목적을 잠식하고 마침내 목적을 대체하는 이 전도(顚倒)야말로 민중전선의 퇴화 논리의 핵심이다.
이 네 가지 차이를 관통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이다. 공동전선은 노동계급 내부의 전략이고, 민중전선은 계급 경계를 넘는 전략이라는 것. 따라서 민중전선을 ‘더 폭넓은 공동전선’으로 이해하는 것은 양(量)의 언어로 질(質)의 전환을 은폐하는 일이다. 명시적 자본주의 정당이 단 하나라도 동맹에 들어오는 순간, 전선의 성격은 연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역전된다. 노동자의 무기였던 것이 노동자를 묶는 사슬로 바뀐다.
Ⅲ. 역사적 검증: 프랑스와 스페인
민중전선은 모든 나라에서 획일적으로 적용됐으나, 그 결정적 시험대는 프랑스와 스페인이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에서 그 효과는 파국적이었다. 비판이 추상적 원리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역사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점이 트로츠키 비판의 힘이다.
1. 프랑스 1936: 위로부터의 수습과 진화(鎭火)
1934년 프랑스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일시적 행동 통일은 악화되는 경제 위기 및 파시즘의 위협과 결합해, 페르난도 클라우딘이 “파리 코뮌 이래 프랑스 노동계급의 가장 거대한 운동”이라 부른 사태를 촉발했다. 1936년 5월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한 민중전선의 선거 승리는, 그러나 단지 선거의 승리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민중전선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총파업과 공장 점거―을 분출시켰고, 이 운동은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했다.
바로 여기서 민중전선의 진정한 한계가 드러난다. 이 달갑지 않은 전개에 직면해 블룸 정부와 특히 공산당은 운동을 가라앉히고 평온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민중전선은 혁명이 아니다”라고 선언했고, 그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적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은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목적을 달성했다. 그 결과는 혁명적 잠재력으로 가득 찬 기회의 탕진이었을 뿐 아니라, 1940년의 치욕적 붕괴로 귀결되는 완만한 퇴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동자의 혁명적 에너지를 끄는 소방수―이것이 민중전선 속 공산당의 실제 역할이었다.
2. 스페인 1936–39: 살아 있는 혁명의 교살
스페인에서는 1931년 군주제 타도 이래 전개돼 온 장기적인 혁명적 과정이 1936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1936년 1월 두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당, 공산당, 사회당, 그리고 POUM(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구성된 민중전선이 결성됐고, 2월에 민중전선 정부가 수립됐다. 7월 파시스트 프랑코 소장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며 내전이 시작됐다. 노동계급의 응답은 즉각적이고 강력했다. 주요 도시,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파시스트들은 격퇴됐고, 사실상의 노동자 권력이 솟아났다.
그 시점부터 민중전선은―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위반하고 정부에 입각한 아나키스트 대중 운동 지도자들의 협조를 받아―노동자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도로 밀어넣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노선에 제시된 전략적 정당화는, 스페인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사회주의는 프랑코를 물리친 뒤로 미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하므로 그들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전술적 논거가 덧붙여졌다. 이런 식으로 스페인 공산당을 선두에 세운 민중전선은 살아 있는 노동자 혁명을 교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성공을 거둔 것은 오직 노동계급에 대한 탄압과 소련 보안 기구 NKVD(내무인민위원부)의 살인적 방법을 스페인에 도입함으로써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프랑코에 맞선 투쟁 자체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여기에 민중전선의 가장 잔인한 역설이 있다. 프랑코를 물리치려면 첫째, 억압받는 노동자·농민의 모든 에너지를, 그들이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자각 위에서 동원해야 했고, 둘째 노동자 공화국이 농민에게 토지를, 모로코(프랑코 군사 쿠데타의 발진 기지)에 독립을 제공한다는 것을 실천으로 입증함으로써 파시스트들의 사회적 기반을 허물어야 했다. 그런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보존하겠다는 민중전선의 공약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공화국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사회주의를 ‘나중으로’ 미루는 바로 그 결정이 ‘지금의’ 군사적 패배를 예비한 것이다.
Ⅳ. 이중의 실패: 혁명의 장애물이자 반파시즘의 무력한 도구
트로츠키는 이전의 초좌파적 종파주의(‘제3기’ 노선)를 비판했던 것 이상으로 민중전선 전략을 비판했다. 전자를 그는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관료적으로 강요된 심각하게 잘못된 노선으로 본 데 반해, 후자는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것”으로 봤다. 더 나아가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이 단지 크렘린의 책략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스페인에서 민중전선은 스탈린주의자들만의 피조물이 아니라 사회당, 아나키스트, 심지어 반(反)스탈린주의 POUM의 피조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시대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략의 핵심 문제”로서, 폭로뿐 아니라 이론적 논박을 요구하는 독자적인 전략적 문제였다. 트로츠키에게 민중전선은 사실상 고전적 멘셰비즘의 연장이었다.
1. 2월혁명이라는 본보기
민중전선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례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 임시정부라는 사실은 흔히 잊혀져 있다. 2월부터 10월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매우 잘 대응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부르주아 정당인 카데트(입헌민주당)와 가장 긴밀한 동맹과 영속적 연립을 맺었고, 그들과 함께 일련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 민중전선의 깃발 아래 노동자·농민·병사 평의회를 포함한 민중 전체가 모여 있었다. 볼셰비키도 평의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민중전선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그 민중전선을 깨뜨리고, 카데트와의 동맹을 파괴하며, 그런 다음 진정한 노동자·농민 정부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유비의 힘은 결정적이다. 민중전선 옹호자들은 그것을 1935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발명품으로 제시했지만, 트로츠키는 그 원형을 1917년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멘셰비즘이라는 낡은 전략의 되풀이임을 폭로한다. 그리고 10월 혁명이 바로 그 민중전선을 깨뜨림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은, 민중전선이 혁명의 전제가 아니라 혁명이 돌파해야 할 장벽이었음을 역사로써 증명한다.
2. 힘의 평행사변형: 산술을 넘어 역학으로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 아니라,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도 완전히 무력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이 ‘이중의 무력함’을 그는 ‘힘의 평행사변형’이라는 역학적 비유로 정식화한다.
민중전선의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술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주의자 더하기 사회주의자 더하기 아나키스트 더하기 자유주의자는 그들 각각이 고립돼 있을 때의 수보다 더 큰 합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혜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여기서는 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도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 법칙은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러한 평행사변형에서, 성분 힘들이 서로 더 많이 갈라질수록 합력(合力)은 더 짧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길 때, 그 합력은 영(零)과 같아질 수도 있다.
이 논증의 정교함은, 그것이 동맹 일반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트로츠키는 곧바로 단서를 단다. 노동계급 내부의 서로 다른 정치 단체들의 블록은 공동의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때로 완전히 불가결하며,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그 이해관계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에 가까운 차별받는 중간계급 대중을 끌어당길 수도 있다. 그런 블록의 합쳐진 힘은 그 성분 부분들의 힘의 단순한 합보다 훨씬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즉, 노동자 공동전선에서는 벡터들이 같은 방향을 향하므로 합력이 산술적 합보다 커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다르다. 현 시대 기본 문제들에서 그 이해가 180도 각도로 갈라지는 두 계급의 동맹은, 일반적 규칙으로서,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힘을 마비시키는 작용밖에 하지 못한다. 두 벡터가 정확히 반대 방향을 향하므로 합력은 영에 수렴한다. 민중전선이 ‘더 많은 세력의 결집’을 통해 더 강해진다는 산술적 직관은, 바로 이 역학적 분석 앞에서 무너진다. 부르주아 동맹자를 끌어들이는 대가로 프롤레타리아의 독립적 행동을 봉인하는 순간, 동맹의 총력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수렴한다. 이것이 민중전선이 ‘반파시즘 통일’의 이름으로 결성되고도 파시즘을 막지 못하는 역학적 이유다.
내전이라는 (당시 스페인과 같은) 조건에서 이 논리는 더욱 첨예해진다. 적나라한 강제력이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내전은 그 참가자들에게 최고도의 자기희생 정신을 요구한다. 노동자와 농민은 오직 그들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때에만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지의 지도에 종속시키는 것은 내전에서의 패배를 미리 보장하는 일이다. 스페인의 패배는 바로 이 정리(定理)의 역사적 증명이었다.
Ⅴ. 동맹 문제: 중간계급은 어떻게 견인되는가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반론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가 동맹자(농민과 도시 중간계급)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과녁을 빗나간다. 트로츠키는 그러한 동맹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거부한 것은, 그 동맹이 통상 중간계급의 표를 수거하는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협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전략의 기초적 공리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와 도시·농촌의 소시민 사이의 동맹은 오직 중간계급의 전통적 의회적 대표에 맞선 비타협적 투쟁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농민을 노동자의 편으로 끌어당기려면, 농민을 금융자본에 종속시키는 급진당 정치인으로부터 농민을 떼어내야 한다.
여기에 민중전선 논리의 근본적 오류가 있다. 민중전선은 중간계급을 그 의회적 대표인 부르주아 정당과의 ‘위로부터의’ 협정을 통해 견인하려 한다. 그러나 농민과 도시 중간계층은 급진당 같은 정당을 통해 이미 금융자본에 포박돼 있다. 따라서 그 정당과 동맹하는 것은 중간계급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을 포박하고 있는 사슬과 동맹하는 것이다. 중간계급 대중을 견인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그 배신적 대표로부터 떼어내는 비타협적 투쟁이며, 이는 민중전선이 요구하는 ‘비판의 포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더욱이 트로츠키는 동요하는 중간계급 대중이―과거와 현재의 민중전선 옹호자들이 시사하듯―‘극단주의’에 의해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하고 가장 단호한 지도를 제시하는 사회 세력에 의해 끌려온다고 봤다. 결정적인 것은 이 지도가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와야 하며 파시스트로부터 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중간계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투쟁을 약화시키거나 희석시키는 것은 곧 중간계급을 반동에게 넘겨주는 일이었다. 민중전선은 ‘온건함으로 중간계급을 안심시킨다’는 명분 아래, 실은 중간계급이 따를 수 있는 강력한 극(極)을 스스로 해체함으로써 그들을 파시즘의 자장(磁場)으로 밀어넣는다.
Ⅵ. 금융자본의 위계: ‘반독점 동맹’이라는 환상
두 번째 이론적 논점은 자본가 계급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1935년 코민테른은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파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로 정의했다. 이 정의의 목적은 파시즘이 자본가 계급 일부의 이익만을 위해 지배하며, 그 계급의 다른 부분들은 폭넓은 반파시즘 동맹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시사하는 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민중전선 언론은 ‘200개 가문’(부르주아지 중 가장 부유한 최상층)에 맞선 ‘국민’의 투쟁을 말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지를 그 최상층 대표, 즉 소수의 가장 큰 독점체로 축소하는 이 이론적 조작은, 오늘날의 스탈린주의 및 좌파 사회민주주의 전략이 내세우는 광범한 ‘민주대연합’ 또는 ‘반독점 동맹’의 기초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의 이 발상에 대한 비판이 중요하고 또 현재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인구의 95퍼센트, 아니 98퍼센트는 금융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러나 이 착취는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 착취자가 있고, 하위 착취자가 있고, 하위의 하위 착취자가 있는 식이다. 오직 이 위계 덕분에 초(超)착취자들은 국민 다수를 복종 상태에 묶어 둔다. 국민이 실제로 새로운 계급적 핵 주위로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이념적으로 재구성돼야 하며, 이는 오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인민’, ‘국민’ 속으로 용해시키지 않을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이 위계 분석은 ‘반독점 동맹’의 환상을 결정적으로 해체한다. 만약 착취가 200개 가문이라는 정점에서 95퍼센트의 피착취자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면, 정점만을 표적으로 삼는 동맹은 그 정점을 떠받치는 위계 전체를 건드리지 못한다. 트로츠키는 단언한다. “에리오–달라디에[프랑스 급진당 지도자들]가 프랑스를 지배하는 ‘200개 가문’에 맞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고 가장하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200개 가문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자본 체제의 왕관이다. 200개 가문을 처리하려면 경제·정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하는데, 그 체제의 유지에는 에리오와 달라디에가 플랑댕과 드 라 로크 못지않게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프랑스 공산당 신문 〈뤼마니테〉가 묘사하듯 한 줌의 거물에 맞선 ‘국민’의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문제이며,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200개 가문 대 국민’이라는 민중전선의 표어는 이중으로 기만적이다. 첫째, 그것은 계급투쟁을 다수 ‘국민’과 소수 ‘과두’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함으로써 계급의 경계를 흐린다. 둘째, 그것은 그 과두를 떠받치는 부르주아 동맹자(급진당)를 ‘국민’의 편으로 분류함으로써, 적을 동맹자로 둔갑시킨다. 프롤레타리아가 ‘인민’이나 ‘국민’ 속으로 자신을 용해시키는 순간, 새로운 계급적 핵을 중심으로 한 이념적 재구성은 불가능해진다. 민중전선은 바로 이 용해를 강령으로 삼는다.
Ⅶ. 맺으며: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적 청산
트로츠키의 독일에 관한 분석과 프랑스·스페인에 관한 분석 사이에는 어떤 단절도 없다. ‘제3기’에 대한 그의 논증과 민중전선에 대한 그의 논증은 동일한 전제에서 나왔고, 똑같이 설득력 있었으며, 똑같은 역사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됐다.(오늘날 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험에 프랑스 신민중전선의 경험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트로츠키의 1930–33년 입장은 많은 공산당원들 사이에서까지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1935–37년 입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형태의 민중전선이 이제 거의 모든 공산당의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트로츠키 비판에 그토록 현재적인 의의를 부여한다.
트로츠키의 핵심 주제―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정책은 (개혁주의가 그러하듯) 반동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저항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것―는 여전히 최고로 중요한 전략적 원리로 남아 있다. 트로츠키에게 민중전선은 코민테른이 사회애국주의로 퇴화하는 데 종지부를 찍었고, 스탈린주의를 국제 무대에서 반혁명적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그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청산 대회’라 불렀고, 그 참가자들이―알든 모르든―‘코민테른을 독립적 조직으로서 완전히 폐지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코민테른이 1943년 연합국에 대한 선의의 제스처로 해산되기 전 마지막 대회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민중전선이 이 해산을 준비했을 뿐 아니라, 현대 스탈린주의를 특징짓는 노골적 개혁주의와 레닌주의·혁명의 포기로 가는 길의 결정적 정거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트로츠키 비판의 일관성과 그 한계의 위치
우리가 트로츠키의 분석에 덧붙일 수 있는 통찰은 그의 코민테른 비판이 왜 그토록 정확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1923년 코민테른 퇴화의 첫 징후로부터 그 최종 해산까지 20년이 흘렀고, 트로츠키의 비판은 그중 17년을 다루며 ‘좌(左)로부터의’ 대항 역사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 비판은 단순히 ‘좌익주의적’ 또는 ‘초좌파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정확하게는 레닌주의 전략·전술에 대한 지속적 옹호로 특징지어진다. 그 일관성은 미리 정해진 공식의 반복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통찰과 직관에 기초했다.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비교를 도입하고자 한다. 트로츠키는 영국·중국·독일·프랑스·스페인 등 적어도 다섯 나라의 역사적 국면 분석을 산출했고, 그 분석들은 오늘날 그가 가장 일관되게 몰두했고 가장 상세히 알고 있던 소련에 관한 분석보다 더 잘 견뎌 낸다. 이 불균형은 설명을 요구한다. 우리의 답변은 이렇다. 코민테른 전략 비판과 독일·스페인 등에 관한 분석은 마르크스가 확립하고(자본주의적 사회관계·계급구조·자본주의 경제의 분석) 레닌이 발전시킨(제국주의론) 이론적 기초 위에 세워졌다. 반면 소련 스탈린 체제를 분석하려는 시도에는 이 기초가 결여돼 있었다. 국유화된 소유에 잘못 이끌린 트로츠키가 확립된 마르크스주의 범주들을 소련에 적용 불가능한 것으로 기각했기 때문이다. 이 이론적 틀의 부재 속에서 그의 예리한 역사적·전략적 감각은 올바른 방향을 찾기에 불충분했다.
이 비판이 민중전선 비판에 대해 갖는 함의는 명확하다. 민중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민간 기업 자본주의 아래의 계급투쟁’이라는 친숙한 지형에서 이뤄졌고, 따라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검증된 범주들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분석은 더 확신에 차 있고, 더 비타협적이며, 더 정확했다. 민중전선 비판이 90년이 지난 지금도 ‘최고로 중요한 전략적 원리’로 살아남는 것은 그것이 트로츠키 개인의 통찰이기 이전에 마르크스와 레닌 방법의 일관된 적용이기 때문이다. 민중전선 비판의 견고함과 소련 분석의 동요는,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진단을 가리킨다. 검증된 이론적 기초 위에 설 때 비판은 정확하고, 그 기초를 떠날 때 비판은 길을 잃는다.
Ⅷ. 결론: 민중전선 비판의 현재성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민중전선 전략에 대한 비판은 세 층위로 정리된다. 첫째, 원리의 층위에서 민중전선은 공동전선과 외형만 닮았을 뿐 계급적 성격에서 정반대인 계급협조 전략이다. 동맹의 외연, 합의의 성격, 비판의 자유, 과제의 위상이라는 네 가지 차이는 모두 ‘계급 경계를 넘느냐 아니냐’라는 단일한 질적 대립으로 수렴한다.
둘째, 역학의 층위에서 민중전선은 ‘이중의 실패’를 내포한다.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장애물일 뿐 아니라 반파시즘 투쟁의 무력한 도구다. 힘의 평행사변형 논증이 보여 주듯, 180도로 갈라지는 두 계급의 벡터를 결합한 합력은 영에 수렴하며, 부르주아 동맹의 대가로 봉인된 프롤레타리아의 독립적 행동이야말로 파시즘을 막을 유일한 힘이었다. 중간계급은 그 의회적 대표와의 협정이 아니라 그 대표에 맞선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서만 견인되고, ‘반독점 동맹’은 위계의 정점만 겨냥함으로써 위계 전체를 온존시키는 환상이다.
셋째, 역사의 층위에서 1917년 2월 혁명이라는 본보기, 1936년 프랑스의 위로부터의 진화, 1936–39년 스페인의 혁명 교살, 그리고 그 계보를 잇는 1973년 칠레 민중연합의 경험은 이 비판을 추상이 아닌 검증으로 만든다. 민중전선은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적 청산의 정점이자, 레닌주의와 혁명의 포기로 가는 결정적 정거장이었다.
오늘날 이런저런 형태의 민중전선이 사회당과 공산당의 정책이 됐다는 사실은, 이 비판을 골동품이 아니라 현재적 과제로 만든다.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이―개혁주의가 그러하듯―프롤레타리아의 반동 저항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명제는, 트로츠키가 그것을 정식화한 1930년대만큼이나 지금도 유효한 전략적 원리로 남아 있다. 민중전선 비판의 궁극적 의의는, 그것이 ‘더 폭넓은 단결’이라는 산술의 언어 뒤에 숨은 계급협조의 역학을 폭로하고, 노동계급의 독립성이야말로―혁명의 조건일 뿐 아니라―반동에 맞선 방어의 조건임을 일깨우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