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전진’)의 AI론
〈노동자 연대〉 구독
양동민과 강진관의 지난 7월 3일 발제문이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하 전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두 글을 전진의 AI론으로 묶어 검토한다. 두 글은 한국 노동운동이 AI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고, 풍부한 사실 자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론과 전략 모두에서 일정한 결함이 있다.
A. 양동민, 〈AI 도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 방향〉
이 글에는 인정할 대목이 많다. 첫째, 기술 결정론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빅테크 자본가들의 기술지상주의를 비판하고, AI가 노동과 대립하는 것은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술을 도입하는 자본이 노동과 대립하기 때문이라고 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출발점이다.
둘째, 일(tasks)의 감소와 일자리(jobs)의 감소를 구별하고,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줄어든 일을 나눌 수 있다고 짚는다.
셋째, 노동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환경 파괴와 군사화까지 다룬다.
넷째, 미국 동부·걸프 연안 항만노조(국제항만노동자협회, ILA)의 완전자동화 제한, SAG-AFTRA 파업, 아마존 물류센터 노동자의 태업, 콜센터 노동강도, 미국 교사와 간호사들의 AI 원칙 등 구체적 투쟁 사례를 폭넓게 소개한다. 특히 AI가 단순 콜을 가져가면서 상담사에게 고강도 업무만 남긴다는 분석은 AI가 노동강도를 높이는 메커니즘을 잘 포착한다.
다섯째, 러다이트 운동을 아나키스트적 분노 폭발로 보는 통념을 바로잡으며 홉스봄을 인용한다.
그러나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비판 1: 체제의 강제 대신 자본가의 ‘선택’과 ‘이데올로기’
이 글의 가장 큰 약점은 방법론적인 것인데, AI 도입의 동력을 자본가들의 의사결정과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글은 AI가 “자본가들의 의사결정에 의해, 그들의 목적에 걸맞은 방식으로” 도입되고 있다고 쓰고, 빅테크 자본가들이 “기술지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자본가들이 “착취를 제한하는 거추장스러운 법, 제도, 정책을 우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술을 쓴다고도 한다.
이 서술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표면에 머문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통찰은 자본가들이 기술을 도입하도록 경쟁에 의해 ‘강제된다’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가 기술지상주의자든 아니든, 그는 경쟁자보다 비용을 낮춰 특별잉여가치를 얻으려고 신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놓치면 문제가 자본가들의 잘못된 사상이나 탐욕으로 환원되고, 해법도 ‘더 나은 규제’나 ‘민주적 결정권’이라는 제도적 개선으로 기울기 쉽다. 이 글이 “기술은 사회와 상호작용한다”는 사회학의 구성주의적 명제에 기대는 것도 같은 한계를 드러낸다. 상호작용은 맞다. 그러나 어떤 사회인가? 경쟁적 자본축적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 구조적 강제를 분석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비판 2: 제국주의 분석의 얕음
글은 AI가 “제국주의 패권 대결을 위한 전쟁무기”로 도입되고 있다고 쓰지만, AI와 제국주의 경쟁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단지 사례를 나열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례는 상세한 반면, 미·중 경쟁을 두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으로 분석하는 틀은 약하다. 한국 국가가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한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대중국 봉쇄에 통합되는 방식, 한국 방위산업의 AI 무기화가 한국 자본주의의 하위 제국주의적 야망과 맺는 관계도 분석되지 않는다. 레닌·부하린 제국주의론의 틀을 적용했다면 훨씬 깊은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비판 3: 거품과 위기에 대한 분석의 부재
이 글은 한국 주가가 “AI 유행을 타고 전례 없는 속도로 치솟았다”고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석하지 않는다. 본지 기사들이 거듭 강조했듯, AI 붐은 투기적 거품의 성격을 띠며 기대한 이윤이 실현될지 매우 불확실하다. 이 점을 빠뜨리면 AI 산업이 순조롭게 확장해 나가리라는 자본의 전망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노동운동은 AI 도입의 직접 효과뿐 아니라, 거품이 꺼질 때 닥칠 구조조정과 긴축 공세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윤율 문제와 거품의 정치경제학은 AI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을 논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비판 4: 기술적 한계에 기댄 논증의 취약성
이 글은 상당한 분량을 AI의 ‘환각’(핼루시네이션) 문제에 할애하며, 환각을 AI가 노동자를 완전히 대체해서는 안 되는 근거로 삼는다. 환각이 실재하는 문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런 논증은 장기적으로 취약하다. 기술이 개선돼 오류율이 낮아지면 논증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이 오픈AI 연구진이 ‘환각 불가피’를 인정했다고 소개한 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2025년 9월 오픈AI 연구진의 논문은 사전훈련 단계의 오류는 통계적으로 피할 수 없다고 보면서도, 환각이 계속되는 것은 훈련과 평가 방식이 모르는 것도 추측하도록 유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모델이 불확실할 때 답변을 삼가게 하면 환각을 줄일 수 있으므로 환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1
그러나 앞에서 강조했듯 우리가 AI의 무분별한 도입에 반대하는 근거는 AI가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 아니다. AI가 자본의 통제 아래 노동자를 착취하고 감시하고 대체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오류 없는 AI라도 자본이 통제하는 한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논증의 무게중심을 기술의 결함에서 기술의 소유·통제 문제로 옮겨야 한다.
비판 5: ‘노동자민중’이라는 범주와 계급 분석의 흐림
글은 ‘노동자민중’이라는 용어를 일관되게 쓴다. 이 용어는 한국 좌파에서 널리 쓰이지만, 계급 분석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AI 문제에서 결정적인 것은 자본 축적이 그들의 착취에 의존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이다. 민중이라는 포괄적 범주는 그 힘의 원천, 곧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가린다. 결론부의 “세계의 통제권을 노동자가 접수하는 투쟁”이라는 옳은 구호도 이 때문에 중심과 예리한 초점을 잃는다.
비판 6: 투쟁의 동력과 전략의 부재
글은 ILA와 SAG-AFTRA의 단체협약을 AI 도입을 막는 “방어선”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그 방어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협상과 협약 문구가 아니라 파업의 힘이었다. 특히 ILA의 2025년 협약은 2024년 10월 동부·걸프 연안 항만 전면 파업의 결과였고, SAG-AFTRA의 성과도 2023년 118일간의 파업에서 나왔다. 그런데 글은 SAG-AFTRA의 파업만 언급할 뿐 ILA의 파업은 언급하지 않고, 어느 쪽에서도 성과의 원천이 파업이었다는 점을 전략적 교훈으로 끌어내지 않는다. (사소하지만, 글은 배우노조와 작가노조(WGA)가 함께 “118일 간의 파업”을 벌였다고 쓰지만, 118일은 SAG-AFTRA의 파업 기간이고 WGA의 파업은 148일이었다.)
또한 글은 IWW의 사보타주 스티커를 크게 싣고 아마존 노동자들의 태업을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태업과 사보타주는 조직되지 않은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쓸 수 있는 저항 형태이고, 그 자체로 지지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약함에서 나오는 무기다. 전략의 중심은 그보다는 파업에 있어야 한다. 사보타주를 상징으로 내세우면 개인적·비밀스러운 저항을 집단적·공개적 투쟁보다 높이 평가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가장 큰 공백은 전략 문제다. 글은 “사업장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 AI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연결하자”고 하지만, 누가 어떻게 연결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노조 관료의 성격, 현장 조합원 조직의 필요, 그 안에서 혁명적 조직의 구실은 다뤄지지 않는다. AI 도입에 관한 “노동자들의 의견을 형성”하고 “요구를 성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이끌 진정한 주체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좋은 요구도 종이 위에 머문다.
비판 7: 사실관계의 착오
사소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사실관계가 두 군데 있다. 첫째, 트럼프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 관한 서술이다. 글은 이 법안에 “향후 10년간 주나 지방정부의 AI 규제를 전면 금지하는 교묘한 조항이 포함돼 있다”고 쓴다. 그러나 이 조항은 하원 법안에 들어 있었지만, 2025년 7월 1일 상원이 99대 1로 삭제안을 가결해 최종 법률에서는 빠졌다. 연방 차원에서 주의 AI 규제를 막으려는 시도가 이후 다른 경로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법안 자체를 근거로 드는 것은 착오다.
둘째, 안면인식 AI의 인종별 오류에 관해 글은 흑인과 아시아인을 범죄자로 잘못 지목하는 오류를 “백인의 경우보다 100배 넘게” 일으켰다고 쓴다. 이 수치의 출처로 보이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연구는 알고리즘에 따라 10배에서 100배의 차이를 보고했다. ‘100배 넘게’는 과장이다.
B. 강진관, 〈현대차 아틀라스 생산 현장 투입에 대한 노동자계급 대응 방향〉
이 글의 가장 큰 가치는 구체적 자료다. 현대차의 DF247 전략,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지분 구조와 아틀라스 양산 일정, 싱가포르 혁신센터,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울산 전기차 공장의 자동화율, 1공장·4공장 42부 재건축 계획, 퇴직 예정자 추이를 한데 모아 현대차 자본의 전략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노동자들이 막연한 불안이나 안이함에서 벗어나 자본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교육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더 중요한 것은 정규직 중심 교섭의 한계를 날카롭게 폭로했다는 점이다. 2026년 6월 고용안정위원회 합의가 정규직 3,000명의 배치 전환만 보장하고 사내 하청, 촉탁직, 부품·서열 노동자를 외면했다는 지적, 그리고 정규직의 배치 전환이 결국 촉탁직 노동자들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분석은 정확하고 중요하다. 현대차 자본이 1998년 같은 전면전을 피하고 공장을 하나씩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쓴다는 지적도 날카롭다. 원하청 총단결이라는 결론의 방향도 옳다.
그럼에도 비판할 대목이 적지 않다.
비판 1: 자본의 청사진을 현실로 착각하는 숙명론
이 글의 가장 큰 문제는 현대차 자본의 청사진을 거의 확정된 미래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글은 피지컬 AI 투입 계획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 하고, 현대차 자본이 “향후 5년 동안 120조 원을 투자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거의 완성 단계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 결과를 “노동자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아틀라스의 사양, 곧 새로운 작업을 24시간 안에 학습하고 24시간 연속 운영이 가능하며 5만 대 양산 시 가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수치도 비판적 검토 없이 그대로 옮긴다.
이것은 본지 강동훈 기자가 경고한 함정, 곧 자본의 과대광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AI 과대광고는 기업주들의 감원 결정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쓰인다. 현대차의 기술 발표회와 투자자의 날 자료는 무엇보다 투자자를 겨냥한 홍보물이다. 노동운동이 그 자료를 미래에 대한 확정된 예언으로 받아들이면, 자본의 홍보를 노동자들 사이에 대신 퍼뜨려 주는 셈이 된다. 두려움은 저항의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체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적 경험도 신중함을 요구한다. 1980년대 제너럴모터스는 로저 스미스 회장 체제에서 ‘불 꺼진 공장’을 목표로 로봇 자동화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지만, 로봇이 서로 부딪치고 차에 도색을 잘못하는 등 실패를 거듭했고 회사는 오히려 경쟁력을 잃었다. 일론 머스크는 ‘모델 3’ 생산 지옥을 겪던 2018년 4월, 테슬라의 과도한 자동화는 실수였고 인간은 과소평가돼 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완전 자율 공장은 자동차 산업에서 수십 년 동안 반복된 꿈이었고, 그때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물론 AI와 로봇 기술은 최근에 더한층 발전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자본의 계획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품 분석도 이 청사진의 경제적 취약성을 보여 준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에 따르면, AI 투자가 기대한 이윤을 내지 못하면 계획된 투자 자체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강진관의 글은 “쇠퇴기 자본주의”를 말하면서도, 바로 그 쇠퇴기 자본주의가 막대한 청사진을 차질 없이 완수하리라고 가정한다. 이것은 자기모순이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계획을 완수하는 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모순 속에서 흔들리는 체제다.
비판 2: 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과소평가
숙명론의 이면은 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과소평가다. 강진관 글은 노동자들을 거의 전적으로 피해자로 그린다. 그러나 기업주들이 신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할수록 그것을 운용하는 노동자들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된다.
현대차의 생산 체계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글 자체가 서술하듯, 메타플랜트는 현대제철에서 프레스, 차체, 도장, 의장을 거쳐 현대모비스, 현대트랜시스, 현대글로비스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된 공급망에 기초한다. 울산 공장의 부품 서열 공급 체계도 마찬가지다. 적기 공급(JIT) 체계는 재고가 거의 없어서 한 고리가 멈추면 전체 라인이 멈춘다. 부품·서열 노동자는 자동화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이 체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 로봇과 디지털 트윈으로 연결된 공장일수록 설비 보전 노동자, 물류 노동자, 데이터 시스템을 운영하는 노동자의 행동이 미치는 파급력은 커진다.
글은 원하청 총단결을 결론으로 제시하지만, 그 단결이 왜 가능하고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를 보여 주지 않는다. 이 구조적 힘을 분석했다면 ‘노동자 대학살’이라는 비관적 전망 대신, 자본의 계획이 어디서 취약하고 노동자들이 어디서 반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실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판 3: ‘노동귀족’론의 오류와 분열의 위험
이 글에서 가장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정규직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다. 글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보존을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을 박탈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라고 쓰고, 2030년대 중후반에는 국내공장 전체에 “10,000명~15,000명 정규직 노동귀족만 남아서 피지컬 AI와 함께 일하지 않을 거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노동귀족’론은 엥겔스가 처음 제기하고 레닌이 《제국주의》에서 상술한 이론으로, 제국주의 초과이윤으로 매수된 노동계급 상층을 개혁주의의 물질적 기초로 본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은 이 이론을 일찍부터 비판해 왔다. 토니 클리프는 1957년 논문 〈개혁주의의 경제적 뿌리〉에서, 개혁주의의 뿌리가 소수 특권층의 매수에 있다면 노동계급 다수가 개혁주의를 지지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혁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장기 호황기에 노동계급 전체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과 연결시켰고, 노동조합 관료라는 특수한 사회계층의 중재 역할을 개혁주의의 사회적 기반으로 강조했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제국주의 초과이윤의 분배가 아니라, 1987년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의 성과다.
이 구별은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를 ‘노동귀족’으로 규정하면 두 가지 결과가 뒤따른다. 첫째,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으로 설정해, 자본이 조장하는 분열을 운동 안에서 재생산한다. 둘째, 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설득할 대상이 아니라 비난할 대상으로 만들어, 원하청 공동 투쟁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는다. 글이 결론에서 원하청 총단결을 외치면서 정규직을 노동귀족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정확한 분석은 이렇다. 1공장·4공장 42부 재건축 합의에서 비정규직이 외면된 것은 정규직 조합원 일반의 이기심이라기보다, 현대차지부 지도부 등 노조 관료층의 협소한 교섭 전략의 결과다. 그 전략은 조합원 다수의 수동적 동의를 얻고 있지만, 그 동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자동화와 공장 재편의 위협을 받는다. 글 자체의 분석대로라면, 정규직 중 약 3분의 1만 돌아올 수도 있다. 현장 투사들의 과제는 이 공통의 위협을 근거로, 비정규직을 지키는 것이 정규직 자신을 지키는 길임을 현장에서 설득하는 것이다. 촉탁직과 하청 노동자의 해고를 막는 것을 합의의 조건으로 요구하도록 정규직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구체적 과제다.
이 문제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노동조합론 일반과 맞닿아 있다. 노동조합을 그 지도층과 동일시하고, 노동조합 지도층을 개혁주의자와 좌파로 나눈 뒤 조합원 대중을 그들 지도부의 부속물처럼 취급하는 경향은 노동조합 안에서 현장 조합원을 조직하는 과제를 흐리게 만든다.
비판 4: 종파적 언사와 공동전선의 부재
글은 민주노총이 “이재명 정부의 2중대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고 쓰고, 민주노총·금속노조·현대차지부의 대응이 “참으로 참담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정책이 협소하고 투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에는 근거가 있다. 특히 현대차지부가 7월 2일 교섭에서 “노력한다”는 추상적 문구에 합의한 것은 날카롭게 비판할 만하다. 그러나 비판의 방식이 문제다. 민주노총을 정부의 ‘2중대’로 규정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비난이다. 이런 언사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동전선 전술의 요점은 개혁주의 지도부를 단순히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건 요구, 예컨대 금속노조의 ‘신기술 도입 시 사전 합의’ 요구조차 실제로 쟁취하려면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보여 주는 것이다. 지도부가 그 투쟁을 조직하지 않으면 조합원들 앞에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현장 투사들은 지도부와 함께 싸우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금속노조 중앙교섭 요구안에 담긴 사전 통보, 노사 합동 영향 평가, 알고리즘 정보 공개, 입증 책임의 사용자 전가 같은 조항은 영국의 여러 노조가 마련하고 있는 ‘신기술 협약’과 비슷한 내용이다. 이것을 “계급적 요구와는 분리되어 있다”고 일축하기보다, 이 요구를 지지하면서 그것을 쟁취할 현장 조직과 투쟁을 건설하자고 호소하는 것이 옳다.
비판 5: 강령 물신주의와 국유화 요구의 문제
글은 결론에서 다섯 가지 ‘계급투쟁강령’을 제시한다. AI 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민중에 의한 통제, 기후 위기 악화·전쟁·감시 활용 금지, 총고용 보장, 임금 삭감 없는 주 30시간 노동, AI 도입에 따른 모든 해고 금지다. 이 요구들 자체는 대부분 지지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강령을 대하는 방식이다. 글은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강령을 제출하고 투쟁을 조직한다”고 쓴다. 이 서술은 (노동자들의 현재 의식 수준과 상관없이) 올바른 강령을 제시하면 투쟁이 그것을 따라 조직되리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는 요구가 투쟁 속에서 생겨나고, 투쟁의 수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주 30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이 싸울 태세가 된 상황에서는 강력한 동원 구호가 되지만, 그런 태세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선언에 머문다. 강령이 올바르다고 투쟁이 저절로 조직되지는 않는다.
국유화 요구로 말하자면, AI는 국가와 기업의 융합을 재촉하고 있고, 오늘날 AI 산업의 가장 강력한 추진자는 국가다. 미국 국방부는 희토류 광산의 최대 주주가 됐고, 한국 정부는 3대 메가 프로젝트에 막대한 국가재정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AI 산업 국유화’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 그 산업을 가장 공세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의 손에 넘기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보여 주듯, 국가 소유는 그 자체로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적 방향도 아니며 노동자 착취를 폐지하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에 의한 통제’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그 통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곧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국유화 요구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키울 수 있다.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든가 하는 특정 상황에서 그 요구를 제기하더라도, 무상몰수와 노동자 통제를 강조하면서 결국 노동자 권력만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판 6: 국제적·생태적 차원의 빈약함
글은 현대차 자본의 전략을 상세히 분석하지만, 그것을 규정하는 국제적 맥락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보틱스 기술과 생산이 미국 정부의 규제를 받는다는 점은 언급하지만, 그것이 미·중 기술 경쟁과 미국의 산업정책(관세, 보조금, 기술 수출 통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는다. 현대차가 미국에 메타플랜트를 짓고 아틀라스 생산을 미국에서 시작하는 것은 순수한 기업 전략이 아니라 미국의 산업정책과 관세 압력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결론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국제조직과 함께” 국제 연대를 도모하자고 하지만, 그 국제 연대가 미국 조지아주의 메타플랜트 노동자, 인도·베트남·알제리의 현대차 노동자, 데이터를 생산하는 전 세계 노동자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말하지 않는다.
생태적 차원도 거의 빠져 있다. 새만금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산업단지 계획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요구할 막대한 전력과 용수, 그것이 기후 위기와 지역 주민들에게 미칠 영향은 다루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은 노동, 주거, 기후 투쟁을 하나로 모을 잠재력이 있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런 폭넓은 운동과 연결하는 전망이 필요하다.
비판 7: 자료의 내적 불일치
글의 가장 큰 장점이 자료인 만큼, 자료의 내적 일관성도 중요하다. 몇 가지 불일치가 눈에 띈다.
첫째, 보스턴 다이내믹스 지분 구조다. 글은 현대차그룹 54.7퍼센트, 정의선 21.9퍼센트, 현대글로비스 11.0퍼센트, 소프트뱅크 12.4퍼센트라고 한 뒤, 소프트뱅크 지분 12.4퍼센트를 인수해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100퍼센트 자회사”로 만들었다고 쓴다. 그러나 정의선 회장 개인 지분 21.9퍼센트가 남아 있다면 그룹 계열사 기준 100퍼센트 자회사라는 서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총수 일가 지분을 포함한 ‘그룹 지배 지분 100퍼센트’라는 뜻이라면 그렇게 명확히 써야 한다. (총수 개인 지분 문제는 그 자체로 비판적으로 다룰 가치가 있다.)
둘째, 인원 비교다. 비교표에서 1공장 총인원은 3,400명이다. 전기차 공장은 1,500명으로 “1공장 대비 -1,900명”이라고 계산했는데, 이것은 3,400에서 1,500을 뺀 값으로 맞다. 그런데 메타플랜트는 2,600명인데 “1공장 대비 -2,400명”이라고 돼 있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800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게다가 메타플랜트의 연간 생산량(30만 대)은 1공장(20만 대)보다 많다. 생산량 대비 인원을 비교하려는 취지라면 그 기준을 명시해야 한다. 같은 쪽 본문은 전기차 공장이 “1공장과 비교하면 약 2,600명이 적다”고 해 표의 -1,900명과도 어긋난다. 2,600명은 1공장과 42부를 합한 인원(4,100명)과 비교한 값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비교 대상을 밝혀야 한다.
셋째, 1공장·4공장 42부의 총인원이다. 비교표의 1공장(정규직 2,400명, 비정규직 1,000명)과 42부(정규직 600명, 비정규직 100명)를 합치면 정규직 3,000명, 비정규직 1,100명, 합계 4,100명이다. 그런데 바로 아래 본문에서는 “정규직 노동자(3,000명), 주니어·시니어 촉탁직+2차 하청노동자(1,100여 명), 총 4,300명”이라고 쓴다. 산수가 맞지 않는다.
넷째, 정규직 3,000명이 배치 전환되면 “주니어 촉탁직 계약직 3,000명이 해고된다”는 서술은 정규직과 촉탁직이 일대일로 대체된다는 가정에 기댄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로는 타당하지만, 확정된 사실처럼 서술하면 반대 측에 반박의 빌미를 준다. 마찬가지로 “촉탁직 10,000명이 정리해고”된다는 전망도 추정임을 명시해야 한다.
C. 두 글에 공통된 문제
양동민과 강진관의 글은 문체와 초점이 다르지만 공통된 약점이 있다.
첫째, 두 글 모두 AI 붐의 경제적 취약성, 곧 거품과 이윤율 문제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다 자본의 AI 전략이 계획대로 진행되리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공유한다.
둘째, 두 글 모두 노동자들의 구조적 힘, 특히 자동화되고 통합된 생산 체계에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주로 피해자로 등장하고, 저항은 당위로 제시된다.
셋째, 두 글 모두 전략 문제, 곧 노조 관료와 현장 조합원의 관계,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혁명적 조직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양동민의 글은 제도적 요구와 현장 저항을 병렬하고, 강진관의 글은 지도부 규탄과 강령 제시를 병렬한다. 둘 다 그 사이를 잇는 전략, 곧 현장에서 조합원들의 자신감과 조직을 키워 지도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로를 보여 주지 않는다. 현재 노동자 의식 수위에서는 이행기 강령이 ‘다리’ 구실을 못한다.
넷째, 두 글 모두 AI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체계적 틀 안에서 분석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AI 경쟁은 국가와 자본의 융합, 미·중 대립, 군비 경쟁이라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 역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런 약점들을 극복하려면 마르크스의 자본 축적 이론, 이윤율 저하 경향론, 고전적 제국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론, 그리고 현장 조합원 중심의 노동조합 전략을 결합한 분석 틀이 필요하다.
후주
- Adam Tauman Kalai·Ofir Nachum·Santosh S. Vempala·Edwin Zhang, “Why Language Models Hallucinate”, arXiv:2509.04664, 2025년 9월 4일; OpenAI, 〈Why language models hallucinate〉, https://openai.com/index/why-language-models-hallucin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