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척(과 표현물 반포 금지)을 중단하라:
민주노총 집행부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노동자연대 배척에 관해 노조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글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을 노조 활동가들에게 쓴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의 결정을 집행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누구와 집회를 함께 열 수 있고 누구와는 안 되는지, 어느 단체 회원이 파업 지원에 나타나면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위에서 정해 내려보낸 결정이다. 그 결정의 근거 문서를 여러분이 직접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 결정의 타당성을 묻는 일 자체가 ‘2차 가해’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하 전진)이 그 결정을 가장 열심히 옹호하는 것도, 결정에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까지 비난을 넘어 폭언과 폭력을 가하는 것도 봤을 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단순하다. 여러분은 그 결정을 집행하기 전에 물을 권리가 있고, 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운동의 단결은 서로에게 도덕적 무결점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이 아니다. 착취와 차별에 맞서려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견해를 지닌 채 공동의 힘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차별과 폭력을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도덕적 비난이 제기됐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심지어 사람과 조직을 무기한 추방해서도 안 된다.
판단의 기준은 하나다. 전진에도, 민주노총 중앙 집행 기구(여성위원회 포함)에도, 노동자연대를 포함한 어느 단체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사회주의적 명칭도, 노동운동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차별에 반대한다는 자기소개도 배척 권력의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판단의 기준은 명분의 고결함이 아니라 실제의 방법, 입증의 수준, 책임의 범위, 그리고 그 방법이 노동자들의 행동 능력에 미치는 효과다.
1. 분노는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성차별에 대한 분노, 폭력에 대한 항의는 해방운동의 동력이다. 그러나 분노가 판단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에서 판단을 끝내 버리는 권위로 바뀔 때 문제가 생긴다. 분노의 강도가 증거의 강도를 대신하고, 비난의 격렬함이 제재의 적절함을 대신하며, 반대편을 얼마나 멀리 밀어냈는지가 실천의 성과를 대신하게 된다.
도덕주의는 틀린 말을 하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참인 판단도 맥락을 도외시해 버리는 방식,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행사될 수 있다. 어떤 행동이 잘못됐다는 판단과 그 행동을 한 사람이 속한 단체 전체, 그 단체와 연대한 사람 모두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결론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개인의 행위에서 단체의 책임으로, 단체의 책임에서 제삼자의 책임으로 넘어갈 때마다 독자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배척 정치가 교묘한 것은 이 간극을 숨기기 때문이다. 제재의 범위를 묻는 사람에게 최초의 잘못을 되풀이해서 제시한다. 그러나 심각한 잘못이 있다는 사실과 특정한 배척 조치가 그 잘못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는 주장은 다르다. 활동가가 “정확히 무엇을 근거로, 어디까지, 언제까지 배제하라는 것인가” 하고 물을 때,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느냐”로 답하는 사람은 질문에 답한 것이 아니다. 논쟁해야 할 지점을 봉쇄한 것이다.
2. 목적과 수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들은 도덕을 설교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회관계의 변화를 개인의 선함에 대한 훈계로 대체하지 말라는 뜻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서로 이기적이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은 무력하다. 연대는 설교가 아니라 공동 행동 속에서 물질적 기반을 얻는다. 운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적이 좋으면 무슨 수단이든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허용되지 않는 수단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맞세우는 것, 대중이 자신과 자신의 조직을 믿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대중을 기만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해방이 목적일진대 해방의 주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방식은 그 목적과 충돌한다.
이 기준으로 배척 정치를 판단하면 쟁점은 분명해진다. 이 조치는 노동자들이 문제를 이해하고 공동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높이는가? 아니면 일부의 결정에 복종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게 하며, 낙인을 피하려는 침묵과 추종을 낳는가? 정보가 일부에게 독점되고 활동가는 결론만 전달받는다면 활동가는 결정을 평가할 수 없다. 반대 근거가 차단되고 이견을 말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의심받는다면 잘못된 결정을 고칠 방법도 없다. 이 같은 기준은 은폐와 배척을 모두 비판한다. 조직의 체면을 위해 문제를 덮는 것도, 충분한 근거와 절차 없이 특정 세력을 추방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것도 대리주의다. 둘 다 집행부가 대중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중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 도덕적 인증이 아닌 공동의 능력으로서의 단결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공동전선의 원리를 매일 실천하고 있다. 정부의 성격, 선거 전략, 노조 집행부에 대한 태도에서 대립하는 정파들이 해고 철회와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에는 함께 선다. 합의의 범위가 명확하기 때문에 협력도 가능하고 비판도 가능하다. 도덕주의적 배척은 이 범위를 무너뜨린다. 같은 집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포괄적인 정치적 동의로 간주하고,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에서 공모를 추론한다. 공동전선은 실천의 합의에서 순결성의 합의로 변질된다.
배척의 대가는 추상적이지 않다. 일터 앞 농성에 나와 줄 사람, 연대 집회에 참가할 사람, 선전물을 함께 만들 사람이 줄어든다. 조직할 시간이 관계의 적절성을 해명하는 데 쓰인다. 다른 정치를 가진 사람과 함께 행동하며 자기 주장을 검증받을 기회도 줄어든다. 사람들은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보다 어떤 사람으로 분류될지를 먼저 걱정하게 된다. 그 결과 토론의 질은 낮아지고, 이는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상대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해 놓으면 나중에 공동 행동이 필요해져도 돌아설 길이 좁아진다. 이처럼 대가가 명백한 이상, 배척을 주도하는 쪽은 조치의 필요성과 효과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4. 도덕주의는 어디서 생기는가
비난 경쟁: 가혹하게 비난할 때만 발언권이 주어지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그 보상 체계에 맞는 언어를 익힌다. 첫 발언자가 철회를 요구하면 다음은 공개 사과를, 그다음은 활동 중지를, 그다음은 단체 전체와의 절연을 요구한다.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지 않았다면 커진 것은 정의가 아니라 비난 경쟁의 판돈이다. 비례성을 묻는 사람은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는 의심을 받고, 회의는 최선의 대응을 찾는 장소가 아니라 가장 덜 의심받을 입장을 고르는 장소가 된다. 사회주의 조직이 노조 관료 기구보다 더 단호해 보이려 할 때, 단호함의 내용은 더 넓은 배제, 더 긴 기간, 더 엄격한 접촉 금지일 수밖에 없다.
무력감의 보상: 여성위 등 노조 중앙 기구 구성원의 도덕주의는 사회 변혁 전망의 상실이 낳은 증상일 수 있다. 일터의 성차별적 노동조건과 노조 안의 성별 불평등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오래 걸린다. 반면 특정 단체를 집회에서 몰아내는 일은 쉽고 비교적 빨리 성공한다. 운동은 자신의 힘을 확장하기보다 이미 가진 작은 힘을 행사해 결과를 내세우는 데 익숙해진다.
반(反)정치: 도덕주의는 ‘반정치’다. 도덕주의는 대화하거나 논쟁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금지와 비난을 통해 대화를 중단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노총 중앙 집행부와 여성위, 그리고 전진이 노동자연대를 상대로 하는 일의 정확한 묘사다. 여성위와 전진은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논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 논쟁 자체를 ‘2차 가해’로 만들어 중단시키려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는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해 온 질서에 대한 비판에서 태어난 개념이다. 그 개념이 자신에 대한 모든 질문을 금지하는 데 쓰인다면 자신의 기원을 배반하는 것이다.
악마화: 상대를 악의 담지자로 만드는 일에는 폐해가 뒤따른다. 악마화는 악을 특정한 사람, 집단, 지역에 집중시킬 뿐 아니라, 다른 곳, 특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동하는 악의 작용을 흐린다. ‘2차 가해 단체’라는 낙인이 한 조직에 집중될수록, 자기 기구와 자기 정파 안의 성차별과 권한 남용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노동자연대가 내일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자. 그때 여성위와 전진은 현장의 성폭력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답이 지금의 배척 캠페인과 무관하다면, 배척은 애초에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5. 비판의 권리와 처벌의 권한
성폭력은 중대한 잘못이다. 여성위와 전진이 노동자연대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운동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비판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 처벌의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 타인의 나쁜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과 기구의 행정 권력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도덕을 하나의 법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사람들을 집행관으로 만든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두려움과 원한을 법의 목소리로 오해하도록 부추긴다. 한 단체의 주장에 대한 판정이 내려지자, 어느 집회의 주최자든 어느 노조의 간부든 노동자연대 회원을 집회장이나 현장 어디서든 ‘체포’할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정파적 경쟁에서 느끼는 반감, 상대 조직의 성장에 대한 경계심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잘못은 그 감정을 ‘피해자 보호’의 명령으로 오해하고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6. 활동가가 어떤 기구에든 요구해야 할 기준
“우리는 차별에 반대한다”는 옳은 명분이 “그러므로 피해자의 설명에 일절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로 비약할 수는 없다.
‘2차 가해’는 구체적 행위를 가리켜야 하는데, 정당한 의문까지 틀어막는 데 쓰인다면 동의를 강요하는 무기가 된다. 운동사회의 경험이 이미 이를 보여 줬다.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는 피해자의 주관적 경험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하고 진술의 신빙성 검토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억울하게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생겼고, 이는 여성운동 활동가 일부의 반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7년 민주노총 여성위는 노동자연대와의 연대 중단을 선언했다. 계기는 ‘민주노총 전 울산본부장 사건’이었다. 여성위가 그 가해혐의자에게 양심에 반한 성폭행 자술을 종용한 사실이 재판에서 드러나 1·2심 무죄로 귀결된 사건이다. 노동자연대 기자가 이 사건을 피해자 중심주의의 패착 사례로 제시하자, 민주노총은 노동자연대가 ‘2차 가해’를 했다며 연대를 끊었다. 지금 집행하라고 내려온 결정은 논쟁 자체를 가해로 규정하는 오래된 논리에서 나왔다.
잘못된 정보로 누군가를 부당하게 내쫓았다면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시킬 의무가 있다. “내 의도는 선했다”는 변명이 그 책임을 덮어주지 않는다.
운동은 선행(善行)과 다르다. 왜냐하면 운동은 주체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페미니즘도 여성을 피해자화해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어떤 노동운동도 노동자를 피해자화해서 성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박경신, ‘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 《문학동네》 통권 95호, 2018년 6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속한 단체, 그 단체 토론회에 참가한 사람, 그 단체와 연대한 노조까지 결백을 해명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연좌제다. 활동가 여러분이 지금 받는 압력이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연대의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아니라, 노동자연대 회원과 같은 자리에 있었는지가 심사받고 있다.
7. 관료 권력과 도덕주의의 결합
활동가라면 누구나 알듯, 노조 관료 기구는 종종 현장의 전투성을 관리하고 파업을 봉합하며 비판적 조합원을 고립시키기도 한다. 평소 파업에서는 집행부의 결정을 비판할 자유를 외치면서, 특정 단체를 쫓아낼 때는 “공식 결정이니 묻지 말고 집행하라”고 요구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집행부의 권력이 내 경쟁자를 내칠 때만 미덥게 보인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파의 이익이다.
이것은 전진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주의 조직이 노조 관료 기구의 행정적 권한을 빌려 경쟁 정파를 현장과 집회장에서 축출하는 일은 전술적 과오가 아니다. 노동계급 자주성이라는 사회주의 정치의 근본과 충돌한다. 어떤 선택지는 애초에 검토 대상에서 빠져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 조직에 ‘노조 관료 기구의 징계권으로 경쟁 정파를 제거한다’는 선택지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좌파 단체는 배제를 정당화할 도덕적 명분을 대주고, 노조 관료 기구는 그 명분을 무기 삼아 행정적 징계를 내린다. 이 결탁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전진도 민주노총 집행부도 아니다. 연대할 사람을 잃고, 질문할 자유를 잃고, 다음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떠안는 활동가들이다.
1938년 멕시코노동조합총연맹(CTM) 지도자 롬바르도 톨레다노가 반동적 언론을 검열하거나 아예 금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이에 맞서 이렇게 경고했다. “오늘은 정부가 노동자 조직에 호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일이면 정부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의 손에 넘어갈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억압적 법률이 노동자들을 겨냥해 사용될 것이다.”
반동 언론에 맞서는 길조차 국가의 금지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언론과 조직을 통한 투쟁이다. 하물며 노동운동 안의 경쟁 정파를 대하는 원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집행부가 바뀌고 투쟁적 좌파가 다음 ‘2차 가해자’로 지목될 때, 전진은 자신이 세운 선례를 무엇으로 반박할 것인가.
공식 결정은 현장의 비공식 관계망을 타고 집행된다. 어느 단체 회원이 집회에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귀띔, 공동 성명에 대한 ‘우려’ 전달, 섭외 명단에 대한 사후 항의, 그 배경의 “당신도 같은 편이냐”는 무언의 질문. 물리적 강제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 결과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평판의 훼손, 정보의 차단, 행사에서의 배제는 활동 능력에 치명적이다. 직함 없는 ‘도덕적 권위’의 권력도 비판의 대상이다.
8. 활동가들이 민주노총 집행부와 전진에 물어야 할 것
전진과 민주노총 집행부는 도덕적 명분을 반복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답해야 한다.
1.근거: 제재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 행위는 무엇이며, 그것이 ‘2차 가해’라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비판하는 행위와 요구하는 제재 사이의 논리적 관계는 무엇인가?
2. 범위: 왜 조직의 책임이 그 조직과 연대하는 모든 사람과 단체로 확장돼야 하는가?
3. 기한과 해제 조건: 제재는 언제까지인가? 2017년에 시작된 ‘연대 중단’은 아무런 재검토 없이 햇수를 더해 가고 있다. ‘연대 중단’의 근거로 제시된 노동자연대에 관한 핵심 비난들이 명예훼손 소송에서 허위사실로 판결돼 확정됐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이례적 조치가 아니라 관료적 독점의 일상이다.
4. 일관성: 같은 기준을 자기 기구의 사건에도 적용하는가? 누가 적용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고 때로는 자기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기준인가?
5. 효과: 이 배척이 여성 노동자의 실제 조건을 바꾸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 배척이 현장의 성폭력을 실제로 줄였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맺으며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무결점을 인증받은 소수만의 도덕적 순혈 공동체가 아니다. 착취받고 천대받는 자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공동 통제하는 사회다. 그 세계를 만들어 갈 주체들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며, 억압과 편견의 진흙탕 속에서 투쟁하고 연대하며 한계를 돌파해 내는 사람들이다. 성폭력 없는 노동운동을 위해 싸우는 것은 도덕주의가 아니다. 그 대의명분으로 사실 확인, 비례성, 소명 기회, 정정의 통로를 경멸하는 것이 도덕주의다.
엄격함은 중요한 무기다.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데 엄격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데 엄격하며, 동지의 입을 틀어막는 관행에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타인을 배제하려는 자기 자신의 행동에 가장 엄격해야 한다. 상대를 쫓아낸 횟수나 연대의 고리를 끊어 낸 횟수는 해방운동의 훈장이 될 수 없다. 운동의 진정한 채점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할 힘을 가졌는가,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내게 됐는가,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통의 요구를 위해 어깨를 걸게 됐는가, 그리고 조직의 그릇된 결정을 스스로 뒤집을 수 있게 됐는가에 달려 있다.
활동가 여러분에게 이 글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연대의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니다. 집행하라고 내려온 결정의 근거와 결과, 책임성에 대해 물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이 없다면 집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지금 운동에 절실한 것은 자신들만이 정의롭다는 환상을 메아리처럼 주고받는 좁은 온실이 아니라, 자본의 착취와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넓고 강력한 공동의 역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