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 추락에서 사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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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블레어는 존 메이저의 보수당 정부를 붕괴시킨 정치적 해일 덕분에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 그는 5월 3일 노동당이 겪은 선거 패배 와중에 슬그머니 총리 관저에서 내빼고 있다. 그는 심지어 마가렛 대처가 총리에서 물러날 때보다도 훨씬 더 인기가 없다.
블레어가 총리로 있었던 1997년부터 2005년 사이에 노동당의 득표수는 4백만 표나 줄었고, 이는 전례 없는 규모다.
블레어를 이해하는 데서 대처와의 비교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국내 정책과 국외 정책에서 모두 그는 대처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볼 때, 대처가 없었다면 블레어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핵심 노동자 집단들이 대처 정부에 패배하고 그 때문에 조직 노동자 운동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블레어가 노동당의 지도자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블레어는 대처의 정책들을 지속했지만, 대처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수준까지 그 정책들을 추진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지적했듯, “신(新)노동당은 ― 보건, 교육, 근로 연계 복지, 주택 부문 전역에서 ― 적어도 대처 시절만큼 광범한, 아마 그 이상의 대대적 변화를 도입했다.
“[공공] 서비스 공급 방식을 구(舊)노동당 이데올로기보다는 보수당 이데올로기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전환한 것은 노동당 정부가 보수당 정부보다 훨씬 더 쉽게 변화를 도입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공화당 대통령이자 국가 안보 정책에서 매파였던 리처드 닉슨이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당이라는 간판이 노동당의 전후 유산 혁신에 각별히 도움이 됐다.”
신노동당의 공동 창시자인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국내 문제에서 처음에 신중했다. 그들은 보수당으로부터 물려받은 공공지출과 소득세 제한 [정책]들을 지속했다.
그들이 경제 정책에서 이룬 주요 “혁신”은 영국은행이 금리를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의 상투적 교의에 대한 항복이었다. 그 결과 주요 경제적 결정들이 일체의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노동당의 경제 실적은 노동당이 오랫동안 떠들어 온 큰 자랑거리다. 블레어의 후임인 브라운은 [노동당 집권기 동안] 심각한 경제 위기가 없었고 실업률이 하락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필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규제
그러나 그 둘은 대처의 정책, 즉 영국 경제를 미국 경제와 긴밀히 통합시키고 미국의 자유시장 정책들을 따라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이 때문에 제조업이 계속 쇠퇴하고 금융시장 의존도가 심화했다.
블레어와 브라운의 집권기 동안에 런던 금융계는 번창했다. 많은 사람들은 런던 금융계가 느슨한 규제 덕분에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투자회사들의 막대한 투기 자금을 유치함에 따라 이제 뉴욕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금융 중심지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전체 영국 경제가 심각한 금융 위기에 매우 취약해졌다. 그리고 많은 논평가들은 그런 위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동당이 영국을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에 옭아맨 부정적 효과는 명백하다.
가장 분명한 것은 빈부격차다. 빈부격차는 대처와 그 후계자인 존 메이저 집권기 동안 엄청나게 악화했다.
1997년 이후 브라운은 자산 조사 급여[자산 조사를 거쳐 수혜 대상자를 선별하는 급여]와 세액 공제라는 복잡한 체계를 통해 자녀가 있는 빈민 가정에 거액의 공공 자금 지출을 했다.
그러나 금융시장 위주의 신자유주의 경제가 사회 상층의 부를 엄청나게 증가시킨 탓에 빈부격차는 노동당 집권기 내내 좁혀지지 않았다.
‘재정정책연구소’의 마이크 브루어가 지적했듯, 브라운은 재분배에 수십억 파운드를 지출했지만 “완전히 허사”였다.
한편, 대처 정부 때 벌어진 북부와 남부 사이의 격차는 계속 확대됐다. 금융시장 강세 덕분에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가 호황을 구가하는 동안 영국의 나머지 지역은 제조업 쇠퇴로 혹독한 타격을 받았고 [그 결과] 공공지출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지난주 출판된 더럼 대학교의 보고서는 잉글랜드 북동부 ― 블레어가 지난 25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지역 ― 의 임금과 연금이 1997년에는 영국 평균의 81퍼센트 수준이었고, 2005년에는 79퍼센트 수준이었음을 보여 준다.
블레어는 공공 서비스가 개선됐다며 자신의 실적을 옹호한다.
사회적 지출이 크게 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블레어의 두번째 임기인 2001~2005년에 국립보건의료서비스(NHS)에 대한 지출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추진한 시장 “개혁” 때문에 대개 무용지물이 됐다. 공공부문은 꾸준히 사유화되고 있다.
반면, 지출 확대는 끝났다. 브라운은 금융시장에 자신이 구노동당 식 온건파가 아니라는 점을 필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공공부문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포함해 훨씬 더 빡빡한 예산안을 강요하고 있다.
개혁
여기에 더해, 물가 상승 때문에 생활수준 저하 압력이 커지고 있다. 현재 실질 가계소득은 하락하고 있다.
블레어 정부가 전통적 노동당 노선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는 지난 3월 복지개혁부 장관인 짐 머피가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났다. 머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복지] 급여는 이 나라 국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지 못한다.” 급여 체계는 예컨대 혼자서 어린 자녀 두 명을 키우는 부모를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없었고,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머피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노동뿐”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급여를 충분히 낮춰서 빈민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그래드그라인드[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인물로 ‘냉혹한 자본가’를 상징한다] 식 철학이다.
[그러니] 지난 2월에 유니세프가 발행한 보고서가 영국의 아동과 청소년 복지 수준을 21개 선진국 가운데 최하위로, 심지어 미국보다도 못한 것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신노동당의 국내 [정책] 실패가 하도 심각한 나머지 이제 이튼교[영국의 명문 기숙 사립학교] 출신의 보수당 지도자 데이빗 캐머런조차 NHS의 수호자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NHS는 심지어 1980년대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조차 노동당의 고유한 쟁점이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정책의 희생자들에게 신노동당이 제공하는 것이라곤 감시, 반사회적행동규제령(Asbos, Anti-Social Behaviour Order), 감옥의 끔찍한 과밀 수용뿐이다.
임기가 계속될수록 블레어는 “자격 없는” 빈민을 표적으로 삼고 강압적 공권력과 사적 자선에 의존하는, 소름끼치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관을 점차 드러냈다.
19세기 식 도덕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옹호자 구실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블레어는 외교정책 면에서도 빅토리아 시대적이었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티모시 가튼 애쉬가 대외정책 분야에서 “블레어주의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묻자 블레어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 답했다.
아마도 더 정확한 대답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 서방 열강이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에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강요하는 것 ― 였을 것이다.
심지어 조지 부시가 백안관에 입성하기도 전인 1999년 4월 시카고에서 한 연설에서 블레어는 자신이 “국제사회 독트린”이라고 부른 이 정책의 요지를 설명했다.
자질구레한 국내 정책에 지루해진, 야심만만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렇다 할 사상이나 초점이 없는 듯했던 한 정치인이 일생의 과업 ― 서방의 “가치”를 무력으로 강요하는 것 ― 을 찾은 것은 분명 바로 이 때였다.
그 결과는 언론인인 존 캄프너가 “블레어의 전쟁들” ― 코소보·시에라리온·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 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블레어는 이 중 마지막 전쟁을 도모하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영국의 동참이 없었다면 부시가 이라크를 침략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침략 정당화를 위해 이용된 거짓말들에 대해 추궁을 받을 때마다 블레어는 자신은 “선의를 갖고” 행동했다고 우겼다. 마치 진실이나 많은 전문가들의 경고야 어찌 됐든 [자신의] 의도가 좋았으니 전쟁은 정당했다는 듯이 말이다.
진실은 그가 사담 후세인 정권 전복에 대한 찬반 논쟁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부시와 함께 이라크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시한 채 블레어는 역사 ― 와 그가 믿는 신 ― 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블레어가 모든 법정에서 영원히 저주받아야 할 까닭은 그가 인류를 상대로 한 엄청난 범죄 행위 ― 이라크를 파괴하고 1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 ― 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이처럼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일말의 뉘우침조차 없기 때문이다.
훨씬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종종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곤 했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속죄하려 애쓰며 여생을 보냈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블레어가 이런 인간성을 되돌아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의 운명은 헨리 키신저[키싱어]와 비슷할 가능성이 더 크다.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 말기의 가장 끔찍한 만행들을 주도했다.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블레어는 은퇴한 뒤에도 높은 보수를 받고 거들먹거리며 부자들의 세계에서 지낼 것이다.
그러나 또한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블레어는 전쟁 범죄 조사관들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지 끊임없이 돌아보며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슬프게도, 블레어주의는 그가 싫어하지만 피할 수 없는 후계자 고든 브라운 덕분에 정치적으로 블레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물러난 것은 참으로 속 시원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