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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민중 항쟁:
이란의 새로운 반란

이란계 네덜란드 사회주의자 페이만 자파리는 이란 지배계급 내 심각한 분열이 공공연한 갈등으로 표출되자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말한다.

6월 12일 이란 대선의 후폭풍이 1979년 혁명 이래 가장 심각한 정치 위기를 불러 왔다. 공식 선거 결과를 보면, 현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63퍼센트 지지를 얻었고 그의 주요 경쟁자인 개혁파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34퍼센트 지지를 얻었다. 선거 결과 발표 직후 무사비는 정부가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했고, 며칠 뒤 주요 도시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내가 던진 표는 어디로 갔는가?” 하고 외치며 시위 진압 경찰에 맞섰다.

이번 위기는 지배 엘리트 내 경쟁 분파들 간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 갈등의 효과는 선거를 넘어 이슬람 공화국 역사에서 일종의 분기점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제국주의자들은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외세 개입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이란 사회를 바꾸려 한다.

올해 선거 운동은 1979년 혁명 초기 이래 가장 큰 활력을 보여 줬다. 네 대선 후보 지지자들은 모두 거리에서 활기찬 선거 운동을 펼쳤다. 학생들은 대학 내에 토론을 위한 “자유 구역”을 조직했다. 신문에 게재된 비판적 기사들은 인터넷 이곳저곳에 퍼날라졌다. 최초로 후보들 간 토론이 국영 TV로 생중계됐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이 모두 부패한 전 대통령 아크바 하세미 라프산자니의 대리인들이라고 비꼬았다. 무사비는 아마디네자드가 경제를 망쳤고 빈곤을 심화시켰으며 이란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고 비판했다. 또 아마디네자드가 이란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며 여성과 소수자 들을 위한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약속했다.

선거 운동이 달아오르며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젊은이 수천 명이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약 4천만 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 85퍼센트는 2005년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당시 1차 투표는 63퍼센트, 2차 투표는 48퍼센트였다). 무사비의 선거 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거대한 “녹색”[무사비 진영의 상징 색깔] 운동이 거리와 인터넷에서 지지를 받으며 부상했다. 테헤란과 이스파한, 타브리즈에서 수백만 명이 무사비 지지 집회에 동참했다.

비록 아마디네자드 지지자들이 언론의 주목을 덜 받긴 했지만 그들의 규모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2005년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는 빈곤을 퇴치하고 “석유 판매 수익을 유권자들의 식탁 위에 올려놓겠다”고 하는 등 포퓰리즘 공약을 내놓으며 당선했다. 그 뒤 2년 동안 아마디네자드는 소도시·마을 3백50곳을 방문했고 국민들한테서 편지 9백만 통을 받았으며 현금 약 1천만 달러를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이를 통해 도시와 농촌의 빈민 일부가 수혜를 입었지만 그밖의 대다수는 경기 위축으로 고통받았다. 당시 석유 판매 수익은 사상 최고였는데 말이다.

아마디네자드가 집권할 당시 16퍼센트였던 물가인상률은 현재 약 25퍼센트다. 이란 중앙은행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도시 거주 가구 생활비는 지난 4년간 갑절 가까이 올랐는데, 이것은 임금 상승률을 상회하는 것이다. 노동자 일인당 월급은 대략 2백23달러 정도인데, 이것은 빈곤선 한참 아래 수준이다. 실업률도 상승해서 공식적으로는 약 13퍼센트이지만 실제로는 20~30퍼센트일 것으로 추정된다. 불평등도 확대됐는데, 가장 부유한 20퍼센트가 국민소득의 절반을 가져간다. 이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들을 보면, 그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빈부격차 확대를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거듭거듭 파업으로 표출됐다.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교사 수천 명이 다른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파업을 주도한 한 교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다. 박사 학위를 가진 교사가 한 달에 3백 달러도 못 번다. 테헤란 같은 도시에서 4인 가족 월 수입이 5백 달러 미만이면 빈곤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열었고 1백 명 이상이 구속됐다.

메이데이에 또다시 대규모 구속 사태가 벌어졌고, 이날을 기점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란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보여 준 징표였다.

개혁파는 심사숙고 끝에 무사비를 자기 후보로 선택했다. 개혁파 지도자들은 작심하고 노동자들의 불만에 코드를 맞추기로 했다. 지난 2004년 개혁파 전략가 사이드 하자리안은 개혁파가 이란 중간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왔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2005년 아마디네자드가 내세운 포퓰리즘에 패배한 개혁파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0년대에 총리를 지냈고 평등주의 지향의 정치 세력과 광범하게 연결돼 있는 무사비가 개혁파의 과제를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무사비는 지난 3월 대통령 선거 첫 유세지로 노동계급 밀집지역인 테헤란시(市) 나지 아바드를 택했다. 주민들은 “미르 호세인은 우리의 영웅, 피억압자들의 지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그를 환대했다.

선거 기간 내내 무사비는 “빈곤 없는 미래”를 약속했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란노동자통신사(ILNA)는 무사비가 54퍼센트의 지지로 당선할 것으로 예측했다. 응답자 가운데 전문직의 71퍼센트, 노동자의 69퍼센트, 학생의 62퍼센트가 무사비를 지지했다. 노동계급 표가 아마디네자드와 무사비로 갈릴 것이란 예측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지배계급의 분열

이번 대선은 엘리트 정치인들 내 긴장을 경쟁 분파 간 노골적 쟁투로 발전시키는 촉매 구실을 했다.

경쟁 분파 간 긴장은 1980년대 이래 상존해 온 것이었다. 1980년대에 무사비는 지배계급 내 ‘좌파’를 대변하는 인물로 국가자본주의 경제와 빈곤층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현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포함된 ‘우파’는 상인들(바자)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란 의회(마즐리스) 의장 라프산자니는 둘 사이에서 약삭빠르게 처신해 ‘상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0~1988년 이라크와 벌인 전쟁, 최고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의 권위 때문에 이 분파들 간 경쟁은 봉합됐다. 1990년대 초, 자본가와 상인 들은 국가의 경제 개입에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경제가 몰락하며 포퓰리스트들이 기층의 지지를 잃자 1989년 대통령에 당선한 라프산자니를 중심으로 체제 내 새로운 분파가 힘을 얻게 됐다.

‘신우파’ 또는 ‘실용주의자’로 알려진 이 분파는 ‘전통적 우파’와 결탁해 지배계급 내 ‘좌파’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카페트와 피스타치오[아이스크림이나 과자의 재료로 이용되는 관목] 무역을 거의 독점하며 부자가 된 라프산자니는 신흥 산업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물가인상률이 50퍼센트에 이르고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1992년과 1995년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등 라프산자니의 경제 자유화는 역풍을 맞았다. 저소득층이 국가한테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간파한 하메네이는 “문화적 타락”을 비난하고 “이슬람적 가치”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런 조처는 사람들의 소외감을 부추길 뿐이었다. 이미 이란 사회 내부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과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고, 30세 이하 청년층이 총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늘었으며, 종교의 구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었다.

1997년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하타미를 따르는 분파는 주로 중간계급 전문직, 지식인, 관료 들이었다. 하타미는 기층의 압력을 수용해 정치 개혁을 약속하며 대통령에 당선했다. 라프산자니는 처음엔 하타미가 경제 자유화를 지속할 것이라 생각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라프산자니는 하타미가 당선한 뒤 학생·여성·노동자 들의 시위가 통제 범위를 넘어 커질 것을 우려했고 나중엔 그와 거리를 뒀다. 대통령에 당선한 하타미도 우익이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모른 척했다. 이런 경험에서 비롯한 환멸 때문에 기층 대중은 2005년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를 선택했다.

성직자들 사이에서 호메이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권위 때문에 고심하던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했다. 아마디네자드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발전시켜 온 국가 관료와 혁명수비대의 이익을 대변했다. 현재 이란 경제의 약 80퍼센트를 국가가 통제하고 약 1천5백여 개의 경제 프로젝트를 혁명수비대가 주관한다. 따라서 2005년 아마디네자드 정부 각료의 압도 다수가 이 계급 출신으로 채워진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슬람공화국은 처음부터 의회·대통령 등 선출직과 최고지도자·혁명수비대 등 비선출직 사이에서 모순을 안고 태어났다. 최근 하메네이가 취한 태도는 둘 사이 힘의 균형을 비선출직에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히 이동시키려는 시도다. 그래서 무사비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적어도 얼마간 거리 시위와 한 편에 섰던 것이다. 실제 거리 시위는 개혁파들의 힘을 키워 주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국가가 석유 판매로 얻는 이익을 나눠 이란 자본가들의 수익성을 높이고 싶어 한 라프산자니는 무사비를 지지했다. 그러나 만일 하메네이에게서 이것을 보장받는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무사비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이란 대선과 그 뒤 벌어진 사건들은 이란 지배 엘리트 내 분열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조만간 더 큰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것이란 점을 보여 줬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란의 미래가 거리의 투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선거 부정 여부를 세세히 따져보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내던져 거리로 뛰쳐나온 수백만 명과 그들을 지지한 더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테헤란, 이스파한, 시라즈, 타브리즈, 마샤드, 바볼, 라시트, 오루미예 등에서 표출된 대중 시위는 반쯤 자생적인 것이었다. 선거 결과 발표 직후 첫 집회가 열렸다. 무사비가 집회를 호소하자 6월 15일, 정부의 불허 조처에도 사람들이 1백만 명 넘게 모였다. 무사비는 측근에게서 수십만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허겁지겁 집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그 뒤 며칠 동안 운동은 무사비에게 지도력 제공을 요구했지만 그는 오히려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국가 폭력에 맞서 “탱크·총·바시지 민병대의 효력은 다했다”고 용감하게 외쳤다. 또 밤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1979년 혁명의 슬로건인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투쟁을 계속했다.

저항에 앞장선 이란 여성들

〈인디펜던트〉의 중동 특파원 로버트 피스크는 말한다. “시위 참가자들이 선글라스를 쓴 유행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뿐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여기엔 저소득층, 길거리 노동자, 차도르를 쓴 중년 여성 들도 참가하고 있다.” 다른 기자들과 시위 참가자들의 증언도 피스크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테헤란 대학에 다니는 사하르는 사람들이 “차도르를 썼든 안 썼든 다 같이 독재자를 타도하자!”고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간호사와 환경미화원 들이 함께 행진했다. 〈스트리트〉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노동부 앞을 행진하며 “노동부엔 노동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외쳤다고 전했다.

이 운동은 몇 가지 민주적 요구들, 핵심으로는 공정한 자유 선거, 결사의 자유, 국가 탄압 중단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급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묶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면서도 노동계급이 라프산자니, 무사비 같은 자들과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중간계급 지도자들을 뛰어넘으려면 추상적 강령들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당장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의 일부가 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이란 대중 운동이 외세 개입이나 경제 제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란 인권 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시린 에바디는 이렇게 말했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란인들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들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그들의 목소리를 널리 알릴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이란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애쓰고 있다. 이스라엘의 극우 외무장관 아비그도르 리베르만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디네자드가 재선하면, 국제 사회는 이란의 핵개발과 테러단체 지원을 막고 중동의 안정화를 위해 단호히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스라엘 외무차관 다니 아얄론은 설사 무사비가 당선했더라도 이란은 여전히 “위협적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서방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란 대중 운동을 지지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것뿐 아니라 자국 정부가 이란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번역: 조명훈 기자
출처: 영국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9년 7·8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