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1백40주년: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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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은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다. 자본의 신세계가 지구 전체를 삼키며 질주하려던 그 순간에 파리 노동계급이 비상 브레이크를 힘껏 잡아 당겼다. 파리 코뮌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레닌)이었다.
계기는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이었다. 더 근원적으로는 점증하는 프랑스 대중의 불만이 있었다. 지배 계급은 분열했고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탈출구로 삼았다. 그러나 전쟁 두 달여 만에 그 자신이 포로가 됐다.
그 이후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군에 맞서 실질적으로 도시를 방어한 것은 국민방위군으로 조직된 무장한 노동계급이었다. 그들은 기아 상태에서 추위를 견디며 초인적으로 다섯 달을 버텼다. 무책임한 지배자들 때문에 대중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공화파는 좌파들을 진압하고 왕정주의자들을 복권시켰고 급기야 반동적인 아돌프 티에르가 정부 수장이 됐다.
티에르는 국민방위군 수중에 있는 몽마르트 언덕의 대포들이 두려웠다. 적개심에 가득찬 대중이 언제 그것을 자신에게 겨누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티에르는 정규군을 보내 새벽에 조심스럽게 대포들을 옮기려 했지만 루이즈 미셸이라는 여성 노동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미셸은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 노동자 2백여 명을 이끌고 와 정부군 3천여 명과 맞섰다. 장군은 세 차례나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모든 병사들이 이를 거부했다. 장군은 체포됐다.
그날 오후 세 시에 티에르는 모든 정부기구를 이끌고 파리 남쪽의 베르사유로 도망쳤다. 파리는 진공상태가 됐다.
즉각 노동계급의 권력이 그 공백을 메웠다. 파리에서 날마다 축제가 벌어졌고 대중의 약동하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남성 보통선거권을 기초로 한 선거를 실시해 각 지역별 대의기구인 코뮌을 구성했다.
그것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코뮌은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구성됐다. 첫째, 모든 공직자는 선출돼야 하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둘째, 선출된 사람들의 월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을 넘어선 안 된다. 셋째, 선출된 사람들은 부르주아 의원단들처럼 수다만 떨고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행하고 책임져야 한다.
코뮌은 국가 아닌 국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중이 국가에 소속돼 있었으나 오늘 창출된 새로운 종류의 국가는 대중의 통제에 복속돼야만 했다. 놀랍게도 단 며칠 만에 코뮌은 노동대중 자신들을 위한 일을 하는 실질적 기구로 발전하고 있었다.
코뮌은 당장 국가 권력의 핵심에 도달했다. 기존의 무장한 국가기구를 해체하는 것이 그들의 첫 임무였다. 징병제와 상비군, 경찰은 폐지됐고 무장한 노동계급이 이를 대체했다.
그 이후로 두 달 만에 코뮌이 이뤄 낸 것의 상당수는 1백4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도 성취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코뮌은 야간 노동을 폐지했으며, 임대료를 체불한 세입자들이 쫓겨나지 않게 했다. 공장주들이 버리고 간 공장은 노동자들이 운영했다. 남편을 여읜 여성에게는 연금이 지급됐다. 아동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됐으며 교육과정에서 종교적 강요를 걷어냈다. 더는 단두대와 나폴레옹 동상 같은 독재와 군국주의의 상징물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가운데 백미는 전쟁 중인 독일 노동계급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독일 노동자를 노동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유지 하는 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베르사유였다. 티에르가 베르사유로 도망간 날만 해도 군사력은 파리의 국민방위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 후 보름 동안 역전이 일어났다.
티에르가 세력을 키우기 전에 완전히 제압했어야 했다.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티에르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채 도망갔다. 게다가 실제로 티에르가 도망간 직후에 국민방위군 중앙위원 일부는 코뮌 선출 전에 “우선 베르사유를 쓸어버린 뒤 프랑스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배계급에게 아량을 베풀거나 시간을 벌어주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가.
코뮌은 티에르의 물질적 자원을 장악하는 데도 무신경했다. 티에르가 프랑스 은행에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빌려가기 전에 완전히 몰수했어야 했다.
훗날 러시아 노동계급은 파리 코뮌에서 배워야 했다. 트로츠키는 그의 저서 《러시아 혁명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병들은 ‘신속히 움직이며’ 건물을 점령했다. 국영은행의 점령은 어느 정도 상징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 중핵들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코뮌의 지도자들은 국영은행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몰수
지배계급에게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티에르는 단 하루도 낭비하지 않고 꾸준히 병력을 모았다. 파리 노동계급의 급진성에 감염됐을 법한 파리 정규군은 제외했고, 농촌에서 6만 명을, 비스마르크에게서 포로 40만 명을 확보한 뒤 파리 외곽의 요새들부터 차례대로 격파해 들어왔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파리 노동계급에게는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나날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자신의 희생이 또 다른 코뮌의 창출로 이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지막 교전지인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서 노동자들은 비석들을 엄폐물 삼아 후퇴하다 막다른 벽 앞에서 사살됐다.
그 뒤 일어난 일들은 지배자들의 야만성과 복수심을 보여 줬다. 노동자들은 가축처럼 도살됐다. 거리는 바리케이드 잔해더미와 시체 3만 구로 뒤덮였다.
코뮌이 이러저러한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마르크스)
21세기 노동계급은 파리 코뮌 전사들이 남긴 유언의 집행관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