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마르크스주의자 방한 강연: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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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공동 사무국장, SWP의 주간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인 찰리 킴버가 8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이날 강연을 통역한 천경록은 전문 통역사이자 노동자연대 활동가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부가 덧붙인 것이다.
이번 시간에 제가 다룰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이론적으로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개혁주의자들과 ‘기존 국가를 인수해서 노동계급을 이롭게 하고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논쟁하는 데 있어서 이 주제가 대단히 핵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먼저 강조할 것은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국가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이를 매우 강조했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기 동안 수렵과 채집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물을 사냥하거나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고 잉여를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굶어 죽지 않고 먹고 살 만큼 수렵과 채집을 했습니다. 그러지 못해 죽을 때도 많았지만 살아남은 경우에도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수렵과 채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이 변한 것은 바로 인류가 자신의 삶의 조건을 바꾼 결과였죠.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논란 거리지만 적어도 1만 2000년 전부터는 메소포타미아 강 유역, 그러니까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농경이 시작됐고 본격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과정은 9000~1만 년 전 오늘날 중국에서도 시작됐고 유럽도 이를 따라갑니다.
이게 특별한 이유는 그 결과 잉여가 생산됐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일 먹을 만큼이 아니라 소량일지언정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가 생겼습니다.
이러면서 잉여 생산물을 누가 관리하고 그것을 어디에 쓸지를 누가 결정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다른 집단이 생산한 잉여를 빼앗을 순 없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잉여가 없다면 전쟁은 무의미합니다. 전쟁에서 다른 부족을 정복해도 뺏어갈 잉여가 없으니 말이죠. 피정복민을 노예로 삼아도 노예는 자신이 먹고살 만큼밖에 생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할 동기가 없는 겁니다.
일단 잉여가 생기면 계급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즉 그 잉여를 지배하고, 소유하고, 그것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특정한 집단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죠. 열매를 따거나 동물을 쫓아다니지 않고 잉여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집단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잉여가 생기면 사유재산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제가 잉여를 소유한다고 해 보죠. 잉여를 물려주려면 누가 내 자식인지가 중요해집니다. 여기서 여성의 구실과 국가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잉여를 누가 지키느냐 하는 문제도 제기됩니다.
그리고 잉여 생산물을 소유·통제하면서 등장한 지배계급은 잉여 농산물을 탈취하는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적들한테서도 잉여를 지켜야 했다고 엥겔스는 주장했습니다.
생산력 발달 수준이 낮은 탓에 가능한 것들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제기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넉넉한 생활 수준을 누릴 만큼 잉여가 충분치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유재산의 발달과 지배계급·피지배계급의 분화는 인류가 전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국가: 강압적 계급 지배의 수단
바로 이 대목에서 국가가 등장합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나머지 인구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국가에 대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지금까지 한 설명을 헤겔의 국가관과 대조해 보겠습니다. 헤겔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마르크스가 더 엄밀한 역사유물론 분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뛰어넘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헤겔은 국가를 사회 발전의 역사의 일부이자 그 결과로 설명하지 않고, 사회 발전과는 별개로 외부에서 도입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사회 안에는 개인들이 원자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모종의 보편적인 이해관계를 부과할 외부 인자가 필요합니다.
즉 헤겔에게 국가는 계급 갈등이나 계급투쟁의 산물이기는커녕 개인들 간의 차이를 완화하고 국익을 관철하는 긍정적 요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헤겔은 국가의 관료 기구를 보편적 계급으로 규정했습니다. 관료들을 이해관계가 다른 계급들 간의 충돌에서 차이를 제거하는 사람들로 봤습니다.
실제로 헤겔은 국가를 이성의 화신이자 실현체라고 말했습니다. 제각기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질적 집단들 사이에서 그런 차이를 초월해 사람들을 전진시키는 구실을 국가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반대로 주장했습니다. 국가는 이성의 화신이기는커녕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도구라고 말이죠. 국가가 여러 계급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 계급의 지배 도구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현대 국가 권력은 자본가계급 전체의 공동 사안을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매우 훌륭한 문장이지만 이 정의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자본가계급 전체”가 뭘 가리키는 것일까요? 전 세계 자본가를 다 가리킬 리는 없는데 자본가들이 국가 별로 나뉘어 치열하게 갈등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한 민족 국가 안에서도 자본가 계급 구성원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의는 매우 훌륭하지만 우리는 이런 물음을 철저히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의가 훌륭한 것은 자본가계급이 사회의 다른 계급들, 다른 영토의 자본가 집단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조직화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초기 저작인] 《독일 이데올로기》를 쓸 당시에도 이미 마르크스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현대의 사적 소유 체제는 대외적으로는 민족성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국가로 조직화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국가는 무엇으로 구성돼 있을까요? 가장 중심부에는 레닌이 “무장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표현한 억압 기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요소들을 다 제하고 적나라하게 보면 국가의 본질은 합법적 폭력의 독점입니다. 이 사회에서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은 국가뿐입니다. 국가를 중심으로 모인 경찰, 군대 같은 특수 집단이 이런 구실을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 점이 자본주의 초기에 굉장히 중요했다고 지적합니다. 빈농을 땅에서 강제로 몰아내고, 식민지를 세우고, 노예제를 도입하려면 현장에서 폭력적으로 법을 집행할 무장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산업화를 하려면 농민에게서 토지나 공유지를 빼앗아야 했습니다. 농민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죠. 그러면 누가 농민들에게 가서 나가라고 했을까요? 무기를 든 사람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계급사회에서는 계급 갈등이 불가피하기에 계급이 조화를 이룬 계급사회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에게는 계급사회를 유지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국가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레닌은 1917년에 《국가와 혁명》을 써서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1917년이면 러시아혁명이 한창인 때라 꽤 바빴을 텐데 말이죠. 《국가와 혁명》은 국가 문제에 관한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저작입니다.
여기서 레닌은 아름다우리만치 간결하고 명료하게 “국가는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표현이자 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국가가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가?
물론 국가에 대한 흔한 설명은 이와 많이 다릅니다. 오히려 국가는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국가 안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국민으로서 보편적 권리를 공유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영국인이다, 한국인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국민적 동질성의 이면에는 당연히도 국민이 아닌 사람(‘영국인이 아닌 사람’, ‘한국인이 아닌 사람’)에 대한 배제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생생한 문제입니다. 난민, 외국인, 이주민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기에 수상쩍은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국민에 포함될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우리가 같은 한국인이나 영국인이라는 주장은 허무맹랑합니다.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부자와 평범한 사람의 생활과 이해관계는 하늘과 땅 차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회 최상층보다는 다른 국적의 비슷한 사람들과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한 국가의 국민은 완전히 보편적인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환상은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꿰뚫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강력한 두번째 환상이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국가가 특정 집단을 편애하지. 하지만 국가 최상층부에 다른 사람을 앉힐 수 있잖아?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 거야.’
권력 장악과 국가 문제
이 둘째 환상에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이 좌우를 막론한 모든 개혁주의 세력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거를 통해 국가 기구 운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사활적으로 여기고, 이를 성공하기만 하면 사회를 훨씬 더 평등하게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에 대한 이론을 그저 사유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실제 경험, 특히 파리 코뮌을 보면서 발전시켰습니다.
파리 코뮌은 단명한 실험이었지만 노동계급이 사회의 권력을 장악했고 그 노동자들은 기존의 국가를 인수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그 국가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 작동했습니다.
물론 파리 코뮌 체제 또한 한 계급이 다른 계급들에 맞서 이익을 관철하는 국가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지금과는 반대로 압도 다수가 소수에 맞서 자기 이익을 관철했습니다.
파리 코뮌에서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선출된 자가 유권자에게 책임을 졌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이 일반 노동자만큼 임금을 받았고 투표권을 누렸습니다. 이런 파리 코뮌을 보고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론을 새롭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이것입니다.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조직을 장악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기존의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
이것은 중대한 진전이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존 주장과 연속선상에 있긴 하지만,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동계급에게 어떤 과제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선거로 의회에서 다수가 된다거나 장관·총리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국가 구조 전반은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막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필요하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장했습니다.
그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이 옳았을까요? 이 주장을 반박하려면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를 그대로 장악해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도입하는 데 이용한 사례를 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시도들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에 상대적으로 작은 변화를 주는 데에 그쳤고,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을 만큼 멀리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선출된 세력이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려는 순간 민주주의에 가려진 국가의 본색, 폭력, 압력이 아주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어제 말씀드린 수단 항쟁에 대한 국가 폭력이나, 1973년 칠레 사례를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꼭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본가가 투자를 철회하거나 은행들이 압력을 넣거나, 국채 시장에 압력을 넣어 정부의 돈줄을 막기만 해도 됩니다.
지배계급은 영국 노동당이나 프랑스 사회당 당원들을 굳이 총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야 할 만큼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위협한 적이 없거니와 다른 수단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대한 외관 뒤에서 국가는 언제든 다른 수단을 동원할 태세가 돼 있습니다.
국가의 ‘선량한 측면’?
그러나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단지 무장 집단이나 감옥이 아니다. 좋은 면도 있다. 도로도 짓고 개량도 한다. 영국에서는 무상의료 제도(NHS)를 만들기도 했는데 노동계급에게 무척 큰 혜택이 됐다. 국가를 왜 몽둥이로 사람들의 머리를 깨는 집단으로만 보는가?’
‘그래서 너희 혁명가들은 NHS와 공교육도 다 분쇄하자는 것인가? 국가의 이런 좋은 요소들을 다 분쇄하겠다는 것인가?’ 당연히 우리의 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부하린이 1916년에 이런 반론을 잘 반박한 글을 썼습니다.
부하린은 이렇게 썼습니다. “국가는 철도를 깔고, 수로를 파고, 학교를 짓는다. 어째서? 그래야만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가치를 자본가계급의 주머니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또 공장법[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 등을 제정해 노동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왜? 노예처럼 사는 노동 대중을 긍휼히 여겨서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는 이런 제도가 지배계급에게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하린은 두 논점을 제기하는데 우리도 이를 곱씹어 봐야 합니다. 첫째, 부하린은 국가가 때로는 자본가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 자본의 이익을 거스르기도 한다고 지적합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에서는 산업이 파괴되고 버려지고 소진됐습니다. 자본가들을 위해 누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윤 추구 체제를 부활시킬 인프라와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철도 시스템을 복구해야 하는데 이는 개별 철도 회사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누군가 제대로 된 철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민간 회사들은 나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서서 국영 철도 시스템을 만들겠다.’
당시에 영국 자본가들 사이에서 거의 아무런 항의가 없었다는 것이 시사적입니다. 일부 철도 회사주주들은 걱정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꽤 짭짤한 돈을 받았습니다. 자본가계급 일반은 이런 식으로 철도 산업을 살리는 계획에 무척 기뻐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2007~2008년 경제 위기를 떠올려 보시죠. ‘시장이 결정하게 놔둬라’, ‘국가는 시장에서 손떼라’ 등등의 얘기들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단 하루아침에 말이죠! 그 대신에 국가가 대대적으로 개입해 은행과 금융 체제의 일부의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주장이 울려 퍼졌습니다. 경제 가치로 따지면 조지 부시가 레닌보다 경제를 더 많이 국유화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국유화는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국유화였지만 자본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조처였습니다.
부하린의 둘째 논점은 계급투쟁 과정에서 그 수위가 매우 높아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하고, 개별 자본가가 취하려 하지 않을 조처를 도입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공장법이 그런 예입니다. 당시 노동 시간을 제한하지 않으면 혹독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노동계급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회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정서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노동계급을 기존 사회에 어느 정도 순응시키려면 이런 개혁을 선사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례인 영국 NHS도 이 두 요인이 모두 작용했습니다. 한편에는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이 존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을 어느 정도 보존·재생산하고 질병에서 보호하는 것이 자본주의 전체에 득이 됐습니다.
근데 이것은 노동계급 투쟁이 가라앉으면 국가가 앞서 도입한 개혁을 도로 빼앗아 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노동계급이 패배한 후 대대적으로 민영화가 이뤄져 국가에 속했던 부문들이 도로 민간 기업으로 넘어간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사회적 부조, 복지 서비스, 연금도 계속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국가는 자본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고 사회 진보의 장애물이며 그 안에서 뭔가 개혁을 이끌어 낼 여지는 굉장히 협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국가 기관 다수는 어떤 의미에서도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경찰, 법원, 정보기관, 스파이 등에 대해서 우리는 유의미한 통제력이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생산물은 어떻게 분배할지가 투표에 부쳐지지 않습니다. 아예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배제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를 분쇄한다는 우리의 목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폐지가 그 국가의 바탕을 이룰 것입니다. 즉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모든 생산,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에 관해 결정권을 갖는 더 광범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도입해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저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할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가일 것입니다. 다수 즉, 노동계급의 지지를 등에 업은 그 국가는 옛 착취자들이 착취와 지배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차단할 것입니다(그런 시도는 필연적으로 벌어집니다).
우리와 아나키스트의 핵심적 차이 중 하나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다음 날 국가를 폐지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구 질서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고, 상대편의 방해에 맞서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밀어붙이려면 국가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러시아혁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혁명 직후에 국내외 적들이 혁명을 피바다에 빠뜨리려 얼마나 애썼던가요. 고도로 조직된 노동자 국가가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몇 개월 만에 분쇄됐을 것입니다.
그런 강압 기구가 인류 역사 내내 필요할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썼고 레닌이 재차 강조한 대로, 시간이 흘러 옛 착취 계급이 모두 파괴되면 국가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국가는 사멸할 것”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국가는 강압적 수단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국가를 공산주의 사회의 구현으로 보는 스탈린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국가를 대신할 것이고, 사람들을 강압 기구 아래 둘 이유가 없는 만큼 국가는 사멸할 것이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상당히 아나키스트적인 저작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억압적 성격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라 국가가 필요없는 사회야말로 우리의 이상임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알 수 없습니다. 미래에 기대할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국가에 대한 관점은 우리 정치의 핵심입니다. 아나키스트, 더 중요하게는 개혁주의자와 논쟁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스탈린주의자와 논쟁하는 데서도 그렇고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에서 이런 관점을 언제나 명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질의 응답
가끔씩 국가 기구 내에서도 불일치, 예컨대 법원은 이런 입장인데 행정부는 저런 입장이라거나 행정부 내에서도 부서별로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자본가계급 안에 서로 경쟁하는 분파들이 존재하고 그런 것의 영향을 관료들도 받기 때문에 불일치하는 게 있는 것으로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국가 기관들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 기구 안에 각 집단이 나름의 이해관계를 발전시켜 배타적으로 이를 지키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이 꼭 자본의 상이한 형태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법관들은 자신들이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법관이 다른 관료나 집단의 압력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계급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언제나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법관은 법관들의 이해관계를 더 직접적으로 의식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전반적으로는 당연히 체제를 지지하지만 동시에 나름의 이해관계를 지키려 하는 강력한 집단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부문의 자본가들 사이에 더 심대한 분열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1840년대 영국에서 어떤 부문의 자본은 곡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길 원했고, 다른 부문은 낮추길 원했습니다. 그 세세한 이유를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때문에 의회, 집권당, 국가 기구 내에 심대한 분열이 나타났습니다.
또 오늘날 트럼프를 둘러싸고 미국 자본들이 부문 별로 첨예하게 분열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트럼프를 완전히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예컨대 군부의 일부는 골칫거리 트럼프 대신, 다음 행보를 좀더 예측하기 쉬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들 내부에 복잡한 분열이 있을지라도 우리 계급에 맞서서는 신속하게 단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혁명가들이 사회 최상부 분파들 간의 차이점을 파악하고 이를 이용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맞설 때는 몹시 신속하게 단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故) 크리스 하먼이 여러 해 전에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쓴 논문을 보면, 자본과 국가의 불일치 같은 것이 존재하긴 하지만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고 기본적으로 자본과 국가는 동행한다고 봐야 한다고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국에서는 자본과 국가의 불일치가 꽤나 지속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례적 현상이 영국에서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봐야 할까요? 앞으로의 시기에는 좀 자주 일어나는 일일까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국가와 자본이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분명 흔치 않은 일이고, 그만큼 크게 충돌한 경우를 찾으려면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를 둘러싼 미국 지배자들 내의 근심도 비슷한 정도로 심각합니다.
브렉시트의 경우에는 자본가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흥미롭습니다. 자본가들은 애초 브렉시트 투표 자체를 원치 않았고 지금은 최악의 결과, 즉 10월 31일에 노딜 브렉시트를 맞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또 분개하고 있습니다. 제 예상에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타결되도록 압력을 계속 키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죠.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가 지난 2년 사이에 추락했죠. 이런 방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일은 보통 좌파 정부를 상대로 휘두르는 무기인데 지금은 그걸 보수당 정부에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가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자본은 특정한 결과를 얻고자 하지만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10월 31일에 영국이 실제로 유럽연합을 탈퇴하더라도 이번 사태는 끝나지 않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둘러싸고 영국은 앞으로 최소 몇 년 동안 시끄러울 것입니다. 영국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고 이게 어떻게 해결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 브렉시트를 한다고 자본주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영국 자본가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지방정부,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좀 묻고 싶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복지 제공의 성격이 훨씬 두드러져서 지방정부에 개입이나 가능성을 훨씬 더 열어 두는 주장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의 지방 정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기에 영국 사례에 기초해 일반적인 주장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국의 경우 지방정부는 일부 지방세가 있긴 하지만 재정을 대부분 중앙정부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정부가 운신할 여지는 중앙정부의 결정에 크게 제약을 받고 갈수록 그런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지방정부들이 중앙정부가 요구하는 긴축을 실행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노동당이 운영하는 지방정부의 정책이 보수당 중앙정부의 정책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주 소수지만 노동당이 운영하는 지방정부가 주목을 받는 사례들은 중앙정부의 복지 삭감 요구에 반발해서 거기에 도전했던 사례들이었습니다. 그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꽤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래서 저는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반동적 요구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라고도 봅니다.
지방정부 질문과 연동된 것일 수 있는데 한국 전교조의 경우, 진보 교육감이 당선했을 때 지방교육청에 참가하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그런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지방정부 등에 노동조합이 참가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이 지방정부나 국가 기구에 많이 참가하는데 그에 대해 영국 사례를 소개해 줄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첫 질문에 답하자면, 말씀하신 대로 영국에서도 노동조합이 교육기구에 참가하는 일이 흔합니다. 영국에서는 근래에 일부 학교들이 정부가 아니라 비영리 민간 기구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도 합니다만(아카데미 시스템) 어쨌든 그런 곳에서도 노동조합이 운영에 참가합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떤 기회든 활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저도 거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구들이, 노동조합이 결코 동의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동의하도록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아주 종종 활용됩니다. 예컨대, 당신이 그런 기구에 파견된 노조 관계자라면 이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 교육 예산이 이것밖에 안 돼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제한된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지 함께 고민해 봐요.” 그 결과 당신은 빡빡한 예산을 집행하는 데 책임감을 느껴 인력 삭감이나 임금 동결 등에 동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이 엄청나게 큽니다.
둘째 질문인 페미니스트들이 정부에 진출하는 사례, 물론 있습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죠. [얼마 전까지 영국의 보수당 총리였던] 테리사 메이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에 영국 의회에서 ‘왜 여성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냐’고 [노동당 대표인] 제러미 코빈에게 공격받자 그녀는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남성인 주제에 나에게 여성 입장을 옹호하는 게 뭔지 왈가왈부 말라’하고 대꾸했습니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것입니다.
페미니스트 여부가 논란이 덜 될 인물로는 아이슬란드 총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를 꽤 진지하게 옹호한 투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 정부가 부자와 은행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흔히들 아이슬란드는 그래도 다른 국가들보다 괜찮게 대응했고 특히 은행들이 요구한 돈을 주지 않았다고 오해하는데, 실제로는 은행들이 원하는 돈을 결국 받아 냈습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께는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겠지만,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보다] 어느 계급을 대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계급 문제가 전면에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