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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혁명의 불길에 휩싸인:
시리아 국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대규모 시위가 시리아 지배계급을 뒤흔들고 있다.

바사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다른 아랍 지배자들처럼 중동을 휩쓰는 반란 물결에 직면해 자기 자리를 지키려 한다. 그래서 그는 시위가 벌어진 2주 동안[이 글은 2주 전에 쓴 것이다] 60명을 죽였다.

애초에 시리아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시위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과 미국 첩자들이 사주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런 말바꾸기는 시리아 국가의 모순을 보여 준다.

3월 25일 시리아의 청년 실업자들이 벌인 반체제 시위

서방 정부와 언론들은 시리아를 ‘불량 국가’로 분류한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관심이 있고 테러리즘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불과 2주 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알아사드 대통령을 개혁가로 칭송했다.

대다수 1천7백만 시리아인 ― 그중 절반이 19세 이하 ― 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고 있다. 실업률은 25∼30퍼센트에 이른다. 국내총생산은 하락하고 있고 석유 자원도 곧 바닥이 날 것이다. 바트당의 권력을 유지시켜 준 방대한 관료, 군, 보안 기구들은 더는 유지되기 힘들다.

시리아 경제는 거의 파산상태다. 최근 가장 큰 시위들은 주로 남부 도시인 다라에서 발생했는데, 다라 주민들이 주로 소득을 얻는 농업은 지난 몇 년 동안 가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항쟁은 다마스커스, 알레포, 홈스와 하마 등 다른 대도시로도 확산되고 있다. 또, 북부의 쿠르드족은 반란에 준하는 행동에 돌입했다.

전직 언론인 로버트 피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고문과 무카바라트(비밀 경찰)의 심문이 지속되고 있다. 시리아에서 자유란 사막의 오아시스만큼 찾기 힘들다. 의회란 정부를 지지하는 서커스단일 뿐이다.”

서커스단

시리아 정부는 이슬람의 알라위파(시리아 인구의 12퍼센트)에 속한 소수의 군장교들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위에는 다양한 종파들이 참가했다.

시리아와 서방 관계는 불편했다. 시리아는 이라크 이후 차기 표적이기도 했다. 시리아는 동으로는 미국이 점령한 이라크에, 서로는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시리아 역사는 제국주의 지배의 역사이자 그에 대한 대응의 역사였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오토만 제국이 붕괴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을 분할했다. 1920년 파이잘은 아랍 반란을 일으키고 다마스커스에서 아랍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군은 이 반란을 진압했다.

프랑스 탱크는 메이살룬 전투에서 아랍 기병들을 몰살시켰고 영국은 서둘러 파이잘을 바그다드로 데려갔다. 이곳에서 파이잘은 이라크 국왕이 됐다. 그 다음 25년 동안 프랑스 식민 정부가 시리아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저항했다.

1925년과 1926년에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다마스커스를 두 번이나 폭격하는 등의 방법으로 간신히 진압했다.

1946년에 마침내 또 한 번 민중 항쟁이 일어나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첫번째 독립 정부를 구성한 지주와 상인 들은 곧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에 직면했고,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급진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1954년 아랍 최초로 공산당원이 의회에 진출했고 아랍권이 단결해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바트당의 민족주의적 주장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높아졌다.

바트당은 제국주의의 중동 개입을 혐오하는 중간계급 지식인, 전문직 종사자, 학생, 상인과 기타 기업인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통일, 주요 산업 국유화, 제국주의 반대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 바트당은 갈수록 자신이 장악한 국가 기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됐다. 한편, 중동 다른 나라에서도 바트당이 등장했다. 이 중 상당수는 오늘날 남아 있지만, 그들은 창립 당시의 급진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선을 그었다.

시리아 바트당도 범아랍 혁명이 아니라 기존 영토의 확장과 국가 이해관계의 수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58년 시리아 바트당은 이집트 군부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로 구성된 연합아랍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961년 시리아 자본가들이 나세르의 토지 개혁과 은행·산업 국유화 계획에 반발하면서 연합아랍공화국은 무너졌다.

반제국주의 미사여구

다마스커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자유주의적인 민간인 정부가 등장했다. 그러나 1963년 또 한 번의 쿠데타로 바트당이 재집권했다.

그들은 소련을 본딴 국가자본주의 경제 모델을 반제국주의 미사여구와 성장하던 팔레스타인 게릴라 운동에 대한 지지와 결합시켰다.

이것은 중동 지역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전진기지인 이스라엘과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심화시켰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다른 아랍 나라들을 패배시켰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을 차지했다.

이 패배는 바트당 내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높였다. 현 시리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당시 바트당 내 군부 핵심 인사였던 하피즈 아사드는 1970년 내부 쿠데타 ― 이른바 ‘교정 혁명’ ― 를 일으켰다.

아사드는 전임자의 국가자본주의 정책과 거리를 두면서 경제를 부분적으로 자유화했다.

시리아 현대사는 이스라엘과 끝없이 충돌한 역사다. 그러나 동시에, 시리아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한다고 온갖 말잔치를 늘어놓지만 번번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신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이스라엘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고 또 패했다.

그러나 1976년 시리아는 미국의 명령을 받아 레바논에 파병했다. 시리아군은 잔인한 파시스트 집단이자 팔레스타인인과 무슬림에 맞서 싸우던 팔랑헤의 편을 들었다.

그해 시리아군은 팔랑헤 기독교 우익 민병대가 베이루트의 텔 알자타르 캠프에서 팔레스타인인 2천 명을 살해하는 데 공모했다.

시리아 정부는 내부 저항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저항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980년대 나타난 이슬람주의 무장 집단이었다. 1980년에는 무장 저항과 함께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알레포 주민 가운데 3분의 2가 몇 주 동안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해, 시리아 정부는 동부 사막 지역 근처의 타드무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1천 명을 죽였다. 1982년에는 하마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아사드는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는 대학살로 항쟁을 억눌렀고 불과 한 달 동안 수만 명을 도륙했다. 하마시 거주지 전체가 파괴됐다. 정부의 목표는 모든 반대파에게 겁을 주는 것이었다.

1980년대 시리아 경제는 정체했고, 시리아를 지원해 온 초강대국인 소련은 쇠락했다. 그러나 1991년 걸프 전쟁은 시리아 국가가 서방 열강과 손을 잡을 기회를 제공했다. 시리아는 1991년 이라크를 상대로 미국이 벌인 걸프 전쟁을 지지했고 미국 정부는 시리아 정부의 입장을 환영했다.

시리아 정부의 변화로 미국 정부의 지원이 재개되진 않았지만 유럽연합과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경제는 별 볼 일 없지만 석유 생산 증가로 그럭저럭 성장했고, 시리아 지배계급은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대다수 평범한 시리아인들은 이런 변화에서 이득을 얻지 못했다.

‘다마스커스의 봄’

2000년 하피즈 알아사드가 죽자, 그의 아들 바사르가 대통령 자리를 계승했다. 초기에 바사르는 ‘다마스커스의 봄’으로 알려진 정치와 경제 자유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인권 유린과 정치 활동가 탄압은 계속됐다. 9·11 이후 아사드는 부시 정부에 자신이 하마에서 한 짓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이 부시가 따라야 할 ‘성공적 모범’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시리아에는 정치범 수백 명이 수감돼 있고, 인권단체들은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서방 정부들은 시리아 정부의 고문 행각을 활용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고문 중 일부를 시리아에 ‘외주’를 줬다.

한때 조지 부시는 시리아를 ‘악의 축’에 포함시켰지만, 곧 부시 정부는 자신이 잡은 사람들을 시리아 감옥으로 보냈다.

CIA가 납치한 사람들 중 일부는 ‘팔레스타인 지부’로 알려진 시리아 감옥들로 보내졌다. 캐나다 시민인 마헤르 아라르는 뉴욕에서 납치된 후 시리아로 보내졌다. 그는 시리아 감옥에서 거의 1년 동안 고문받은 뒤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나라 정부 간 관계는 2005년에 또 변했다. 미국 정부는 레바논 총리 라피크 하리리 암살이 시리아 짓이라고 주장했다. 하리리 암살은 이른바 ‘백향목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레바논에서 연이어 시위가 벌어지면서 시리아는 레바논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시리아에 경제 제재를 선포했고 시리아 바트당 정부가 이라크 저항세력을 지원한다고 비난했다. 2008년 미군의 공격으로 시리아인 8명이 죽기도 했다.

시리아 정부는 팔레스타인 집단과 ‘외국인 전사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시리아 지배자들은 쉽지 않은 줄타기를 해 왔다. 지금의 반란은 그것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

1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다

4월 15일 시리아에서 1백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부패와 비민주주의에 대한 분노가 거리에서 폭발했다.

시리아 정부는 잔인하게 시위대를 진압했다. 일요일[4월 17일]에 시리아 보안군은 시리아 제2의 도시에서 30명을 살해했다 .

지금까지 정부 탄압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는 것을 막는 데 실패했다.

시위대의 압력을 받아 시리아 대통령 아사드는 48년 묵은 긴급법을 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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