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북아프리카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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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언론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혁명이 끝났다고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는 혁명 물결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동, 북아프리카와 다른 곳에서 평범한 민중은 계속 항쟁을 벌이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에서 영감을 얻어 그들은 빈곤, 부패와 독재에 맞서 싸우고 있다. 시리아와 예멘에서 지속되는 시위는 이런 투쟁 물결의 일부다. 지난주 이라크에서는 정부 탄압과 부패에 맞서 1백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라크 보안군은 시위대를 상대로 발포해 35명이 다쳤다. 최근 몇 주 동안 부르키나 바소에서는 군과 대통령 경호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블라제 콤파오레는 육군, 공군 참모총장과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정부를 해산했다. 바레인에서는 정부의 잔인한 탄압에 반발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조직하고 있고 가두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반란에 휩쓸린 나라의 지도자들은 서방의 친구인 경우가 많다. 서방 정부들은 시위대를 억누르고 ‘안정’을 회복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굴복하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들은 탄압만으로 저항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아래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혁명(혹은 아랍 혁명)에서 흔히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왜 아랍권에서 혁명과 대중 반란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는가?
2009년 튀니지 청년 행상의 분신으로 시작된 반란 물결은 역사와 국가 형태상 차이를 떠나 아랍 전역을 휩쓸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전후 민족주의 반란과 혁명으로 탄생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이번 반란이 정치 혁명으로 발전해 장기 집권해 온 독재자가 쫓겨났고 알제리와 예멘 정부도 대중의 신망을 잃었다.
이스라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독재가 불가피하다고 말하며 10년(아버지 바사드 통치까지 합하면 거의 40년) 이상 반민주적 정책을 정당화해 온 시리아 바사드 정부도 연일 지속되는 반정부 시위가 항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나세르처럼 민족주의 쿠데타로 탄생한 정권인 리비아 카다피 정부는 현재 국토 대부분을 통치하지 못하는 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그밖에 다른 왕정국가들이 개입한 뒤에야 바레인 왕정은 반정부 시위를 억누를 수 있었다.
심지어, 미국의 반식민지인 이라크에서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석유 노동자들이 30년 만에 파업을 벌였다.
때로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때로는 반서방의 기치로, 저마다 ‘체제 경쟁’을 벌여 온 아랍 나라들은 결국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나라별로 차이점도 많지만 몇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하나는 비민주적 장기 독재다. 이집트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리비아 카다피는 42년 동안 집권했다. 이것은 당연히 온갖 종류의 부패를 낳고 독재와 부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경찰력 강화를 가져 왔다.
예컨대, 이집트 경찰은 대중의 모든 생활에 관여했고 경찰에 대들었다는 이유로 수백 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백주대낮에 20대 청년을 구타해 숨지게 할 정도로 대담했다.
둘째는 기존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모델의 실패와 신자유주의 개혁의 도입으로 최근 대중의 삶이 크게 추락한 것이다.
리비아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만 2천 달러로 중동에서 높은 편이다. 그러나 많은 리비아인들의 삶은, 인구 절반이 하루 2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연명하는 이집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랍 나라에서 인구의 절반가량이 청년층인데, 이들의 실질실업률은 20퍼센트를 웃돌았다.
반대로,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나라의 부 가운데 대부분은 통치자 일가친척, 친정부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돌아갔다. 무바라크와 카다피 일가가 해외로 빼돌린 돈은 각각 7백억 달러와 3백억 달러로 추정된다. 다른 나라의 신자유주의 시장화와 마찬가지로 아랍권의 시장화도 엄청난 부패와 부조리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아랍권 국가들 중 다수인 친서방 국가들의 경우, 이들이 2000년대 중동을 뒤흔든 제국주의 만행 — 이라크 침략, 이스라엘의 레바논과 가자 침략 등 — 에 협력한 것은 아랍권 민중 전체의 공분을 샀다.
이렇게 모순이 무르익은 상황에서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 지역의 위기를 더욱 더 격화시켰고, 마침내 튀니지의 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가 아랍권 전역을 뒤흔든 민주화 요구 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랍 혁명은 단순히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인가?
최근 미국 언론들은 미국 정부가 튀니지, 이집트 등의 민주주의 단체들을 지원해 왔다며 이들 혁명의 지향점이 서구식 체제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해 서방 정부들은 원래 아랍 혁명 물결을 지지하지 않았고 ‘안정’을 바랐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혁명 물결이 시작된 1월 25일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무바라크 정부가 안정적이고 이집트 민중의 정당한 필요와 이익을 보장할 방법을 잘 찾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여전히 바레인과 사우디아리비아 독재 왕정이 반정부 시위를 탄압하는 데 ‘우려’ 이상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현 정부 체제 아래 ‘질서정연한 이행’을 요구한다. 따라서 많은 아랍 민중이 서방 정부의 뒤늦은 민주화 요구에 냉소적인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아랍 민중은 독재 종식과 선거권 도입 이상을 바란다. 혁명에 참가한 수많은 민중에게 반독재 투쟁은 폭넓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앞서 봤듯이 아랍권에서 신자유주의 개혁 도입 과정에는 국가와 지배층이 깊숙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이들에 도전하는 정치적 투쟁은 자연스럽게 이들이 특혜를 누리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튀니지 혁명에서 핵심 구호는 “빵과 물이 필요하지만 벤 알리는 필요없다”였고, 각 부문 노동자들은 독재자와 결탁된 경영진의 퇴진과 함께 그들의 특권적 경제 이익을 몰수하고 부를 재분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리비아 항쟁은 다른 아랍 혁명과 다르다?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일부 진보진영 인사들은 리비아 항쟁은 다른 아랍 혁명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물론 각 혁명은 고유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적하는 것은 혁명의 특수성이 아니다.
그들은 리비아가 ‘비폭력 시위’에서 무장 투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부족 간 갈등이 중요한 요소기 때문에,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 혹은 서방 정부가 배후에 있기 때문에 튀니지나 이집트 같은 ‘순수한’ 민중 혁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 혁명이 반동 세력의 군사적 공격에 맞서 무장을 한 것은 새로운 사례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때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이유 중 하나는 절대주의 왕정의 무장 공격에 대비해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따라서 벵가지에서 반카다피 세력이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전례없는 사태가 아니었다).
또, 5년 넘게 진행된 프랑스 혁명 과정이 반동 세력의 승리로 끝나지 않은 것은 국내외 반혁명 세력과 정권의 공격에 맞선 무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리비아 민중이 알카에다에 현혹돼 반카다피 항쟁을 시작했다는 것도 말이 되질 않는다.
중동 전문가 후안 콜은 이렇게 말했다.
“미스라타 주민 57만 명, 혹은 벵가지 주민 70만 명이 알카에다 지지자라는 주장은 증거가 제시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극소수의 리비아 청년이 이라크에서 반점령 투쟁을 벌인 것도 증거가 되질 않는다. 흔히 이라크의 수니파 아랍인 저항세력을 ‘알카에다’로 잘못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서방 정부의] 선전 공작일 뿐이다. 지금 투쟁을 벌이는 모든 아랍 국가들에서 민중은 이라크의 수니파 반점령 세력에 지지를 보낸다. 사실, 여론 조사를 보면, 수니파 아랍권 세계에서 이라크 반점령 세력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튀니지, 이집트와 시리아 민중 대다수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리비아 혁명을 혁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카다피 정권이 진보적이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 발생 직전 카다피는 2004년부터 반서방 제국주의 미사여구도 포기했다.
그는 1996년 벵가지의 아부 살림 감옥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죄수 1천2백70명을 무참히 즉결 처분할 정도로 잔인했다.
심지어 그는 1월 28일 이집트에서 1백만 명이 넘는 시위가 발생한 뒤 직접 무바라크에 전화를 걸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할 정도로 독재자의 구실에 충실했다.
리비아인들은 바로 이런 비민주적 억압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일어선 것이지 도시화, 계급화된 삶 속에서 약화된 부족적 정체성 때문에 반카다피 항쟁에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아랍 혁명은 계급과 상관 없는 새로운 혁명인가?
일부 좌파 — 대표적으로 《제국》 저자인 안토니오 네그리 — 는 노동계급이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했다면서 아랍 혁명은 계급적 동력이 중요한 구실을 했던 ‘20세기 혁명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랍 혁명에 노동계급 외에 다른 사회집단이 참가했고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대중 혁명의 특징이었다. 인구 압도 다수가 참가하고 지지해야 기층 혁명이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이번 혁명은 계급적 내용을 가진다.
첫째, 혁명이 당면 목표 — 독재자 퇴진 — 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튀니지에서는 거의 처음부터,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사임 직전인 2월 초부터 노동계급 조직과 계급 투쟁(파업 등)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둘째, 혁명이 독재자 타도를 넘어 더 넓은 정치·사회적 요구를 심화 발전시키는 데서 노동계급 투쟁이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친정부 경영진 퇴진과 노동조건 개선, 민주노조 설립 자유를 요구하는 노동자 투쟁은 의사 등 중간계급 전문직과 학생들이 자기 일터와 캠퍼스에서 민주화(친정권 학장 퇴진, 민주적 총학생회 결성 등)와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는 데 영감을 줬다. 이집트에서 독립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좌파들이 중심이 돼 민주노동자당을 결성한 것은 앞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강화될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앞으로 아랍 혁명에서 정치적 요구가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결합 발전하고 그 요구들을 실제로 성취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이 더 적극적 구실을 해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일관되게 발전시키며, 그 투쟁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는 연속혁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올바른 전략·전술을 제시하려는 응집력 있는 사회주의 조직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