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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노동운동:
마리카나 학살부터 새 노동자 정당 건설 움직임까지

현재 남아공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공세적인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차승일 기자가 그 시작인 2012년 마리카나 학살부터 현재까지 남아공의 노동운동을 살펴본다.

남아공의 현실을 밝히 보여 준 마리카나 학살

2012년 8월 16일 남아공 경찰이 영국 광물 기업 론민 소유 광산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총을 쏴 34명을 살해했다. 이 마리카나 학살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마리카나 학살과 뒤이은 투쟁들, 자본주의의 위기, 집권당 ANC와 주요 노조들에서 일어난 동요, 2014년 5달에 걸쳐 일어난 백금 광산 파업의 승리 등은 ANC·공산당·코사투 삼각동맹에 구멍을 냈다.

전 세계의 좌파들은 그리스의 급진좌파 정당인 시리자의 부상을 연구하며, 시리자의 조직 방식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논의를 해 왔다. 남아공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훨씬 덜하다. 그러나 남아공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체제 아파르트헤이트는 저항에 대한 혹독한 탄압으로 유지됐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뒤 많은 사람들은 학살의 시대가 끝났다고 봤다. 그런데 마리카나에서 학살이 다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탄압과 살해의 표적이었던 ANC와 그 동맹들이 마리카나 학살에 보인 반응도 똑같이 충격적이었다. 마리카나 학살 나흘 뒤 광원노조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둠의 세력이 우리 조합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공산당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야당은 경찰이 마리카나 파업에 대응한 방식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하던 일에 비유하는데,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다.”

마리카나 파업은 착암공 약 3천 명이 일으킨 비공인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매우 값비싼 광물을 채취하는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과 끔찍한 노동조건에 항의한 것이다.

남아공의 주요 세력

  • 아프리카민족회의(ANC) : 1912년에 설립됐다. 1994년부터 20년 넘게 집권하고 있다.
  • 남아공노동조합연합(COSATU, 코사투) : 남아공 최대의 노총.
  • 남아공공산당(SACP, 공산당): ANC·코사투와 함께 삼각동맹을 이루는 스탈린주의 정당.
  • 전국광원노조(NUM, 이하 광원노조): 코사투 내 최대 노조였지만 마리카나 학살 이후 조합원 절반이 탈퇴했다.
  • 남아공금속노조(NUMSA): 현재 남아공의 최대 노조다. 2013년 말 AN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고 있다.
  • 광원건설노조(AMCU): 1998년에 설립됐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급성장해 NUM을 앞질렀다.
  • 민주좌파전선(DLF): 2011년에 결성된 남아공 극좌파의 연합체.

1987년

마리카나 파업은 광원노조에 대한 이의 제기이기도 했다. 광원노조는 1987년 영웅적 파업을 벌이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강력한 노조였지만 지금은 경영진에 순종한다.

광원노조 초대 사무총장이고 1987년 파업을 이끌었던 시릴 라마포사가 광원노조의 현재 모습을 아주 잘 보여 준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그는 ANC의 지도적 인물이자 재산이 7억 5천만 달러나 되는 남아공 최고의 기업인이 됐다. 그는 론민의 사외이사이자 주요 주주이다. 그는 경찰에 이 파업을 통상적 쟁의행위로 보지 말고 “악랄한 범죄 행위”로 보고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마리카나 학살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의 남아공에 관한 신화는 모두 깨졌다. 마리카나 학살은 신자유주의의 잔혹성을 보여 줬고, 자본주의적 통치가 계속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밝히 드러냈다.

라마포사의 변신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1992~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해체되는 과정은 ANC와 대기업 사이에 타협이 이뤄지는 과정이었다. 흑인 거주 지역에서 끈질기게 일어난 반란과 노동자 투쟁이 결합돼 분출하고,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등장하자,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뿐 아니라 남아공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의 길이 열렸다. 지배계급의 일부는 모든 것을 잃느니 흑인 야당 ANC와 타협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봤다.

1994년 이후 남아공을 통치해 온 ANC 지도자들은 흑인과 백인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공정한’ 자본주의를 운영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남아공 국내외의 강력한 기업·지주·은행들에 호의를 베풀려면 대중에게 약속한 것들을 거둬들여야 했다. ANC 주도의 과도정부가 처음에 한 일은 IMF한테서 8억 5천만 달러의 차관을 받는 것이었다. 그 조건은 수입관세 인하, 공공지출 삭감, 공공부문 임금 대폭 삭감과 구조조정 등이었다. ANC는 집권 2년차부터 세계은행의 권고를 기초로 한 훨씬 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전략을 추진했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의 삶에 재앙을 가져왔다. 진정한 경제적 권력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부터 있던 기업들의 손에 있었다. 소수 흑인 엘리트들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됐다.

이런 상황은 저항을 촉발했다. ANC는 자본에 맞서기보다는 저항을 억누르기로 마음먹었고 마리카나 학살은 이러한 과정의 일부였다.

“마리카나 모멘트” - 남아공 노동운동의 전환점

광원들의 분노가 매우 커서 마리카나 학살은 큰 저항 물결을 일으켰다. 학살이 일어난 직후 광원 2만 3천 명이 추가로 파업에 동참했다. 결국 론민은 상당히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섰다.

광원노조 지도자들은 마리카나 파업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체의 위원회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건설한 위원회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상황 전개다. 2012년 6월에 결성된 착암공들의 위원회는 매우 민주적이었다. 대표자는 선출됐고,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면 소환됐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요구안을 작성했다. 이 노동자들이 내놓은 1만 2천5백 랜드(약 1백21만 원)의 ‘생활임금’ 요구는 이후 남아공 노동자들의 대표적 요구가 됐다.

이 기구는 계속 존속되지는 못했다. 노조 지도자들이 지독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를 조직한 활동가들은 나중에 광원건설노조의 핵심 조직가들이 된다. 광원건설노조는 광원노조에 견주면 일보 전진이고 노동자들의 자체적 위원회에 견주면 일보 후퇴다.

광원건설노조는 비공인 쟁의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광원노조에서 축출된 광원들이 만든 노조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이 노조로 노동자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노동자 다수를 조직하고 있는 노조에서 활동가들이 분리해 나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광원노조 내부에서는 현장조합원 전략을 구사하기가 불가능했다. 기존 지도자들에 이의 제기를 하는 노동자들은 축출되고 구타당했다. 광원노조에서 노조 직책이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물질적 혜택을 받았다.

파업 물결은 2012년 말이 되면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파업들을 생겨나게 한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2014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파업 두 건이 2012년보다 더 크게 일어났다. 첫째, 앵글로아메리카·임팔라·론민(세계 3대 백금 생산업체)에 종사하는 광원 최대 8만 명이 무려 5달 동안 벌인 전면 파업이다. 이 파업은 남아공 역사상 최대의 광원 파업이었다. 광원건설노조가 이끈 이 파업은 마리카나에서 시작된 임금 인상 파업의 연장선 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임금 인상 파업

파업 결과, 광원들의 요구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흑인 노동자들은 승리했다고 느꼈다. 사용자들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협박 문자를 보내고 대체 인력을 대규모로 투입하려 했다. 노동자들은 집회, 행진, 강력한 피케팅을 벌여 대체인력이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에 저지했다. 주요 노조들이 광원건설노조를 도왔다면 완벽한 승리를 쟁취했을지도 모른다. 광원건설노조는 광원노조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노동자 수만 명이 모인 여러 집회를 거치고 나서야 합의안이 통과됐다.

광원건설노조 파업 직후, 금속 노동자 22만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을 벌였다. 금속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1만 2천 개 기업이 타격을 입었고, 파업 손실액은 하루에 2천5백만 파운드나 됐다. 토요타 닛산 BMW 포드 GM의 남아공 공장들은 생산을 전면 또는 일부 중단했다. ANC와 기업들은 이미 백금 광산 파업으로 GDP가 줄어드는 큰 타격을 입은 터였다. 사용자들은 파업 4주 만에 대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ANC의 친자본주의적 정책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노조 상급단체에도 반영됐다. 2010년부터 코사투 지도자들은 공공연하게 “약탈적 엘리트”라는 말을 쓰며 “약탈적 국가”가 등장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ANC 지도자들뿐 아니라 정부 각료인 공산당 인사들도 이 운동의 표적이 됐다. ANC와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코사투 사무총장 즈웰린지마 바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노동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퍼져 있는 분노를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코사투가 분열한다면,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금속노조가 축출되는 형태를 띨 것인데) 그것은 단지 바비의 지도권을 둘러싼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널리 퍼진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금속노조가 새 노동자 정당 건설에 나서다

2014년 5월 총선 결과는 얼핏 보면 “마리카나 모멘트”가 선거 영역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ANC가 투표자 대비 62퍼센트를 득표해 여유 있게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ANC의 득표는 1994년 이래 계속 줄어 왔다. 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을 보면, ANC의 득표율은 1994년 54퍼센트에서 2014년 35퍼센트로 줄어 왔다. 이런 사실을 보면 ANC의 주도력이 너무 견고해 흔들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ANC가 완전히 망한 것은 결코 아니다. ANC에는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선임 당원과 걸출한 활동가가 많다. 그럼에도 더는 철옹성 같은 존재가 아니다.

조합원이 32만 명으로 남아공 최대 노조인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새 노동자 정당 건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마리카나 학살이 이 움직임에 큰 영향을 줬다. 기존의 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이다.

2013년 12월 금속노조의 특별 대의원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ANC는 적대 계급에 사로잡혔다. ANC는 적대 계급을 위한 전략을 채택했다.” ANC-공산당-코사투의 삼각동맹이 “원래의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혁명적 강령을 추진해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목표 말이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금속노조는 ANC와 공산당을 호되게 비판하며 공산당을 바꿔 보려고 애썼다. 이제 이 정책은 폐기됐다. 금속노조는 코사투에 삼각동맹을 파기하라고 촉구하며 2014년 5월 총선에서 ANC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금속노조가 새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것은 ANC와는 다른 좌파적 대안을 건설하는 데서 중대한 상황 전개다. 혁명적 좌파는 이 논의를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한다. 새 노동자 정당 건설 움직임은 공동 활동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공간을 열 것이다.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고 진정한 사회주의는 무엇일지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열릴 것이다.

새 노동자 정당 건설 과정에서 불거질 쟁점들

남아공 현대사에서 흑인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73년이다. 노동조합들이 성장하면서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노동조합이 정치조직, 특히 ANC와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이냐 하는 게 핵심 쟁점이었다. ‘남아공 흑인 노동조합 연맹’(FOSATU; 포사투)을 이끈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다계급적인 ANC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ANC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더 넓은 정치적 문제들을 무시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사투는 정치 문제에서 사실상 ANC의 입장을 따랐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회피했다. 이제 이와 관련된 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이다.

금속노조가 새 정당 건설을 위해 일으킨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fS)이 맞닥뜨릴 정치적 쟁점은 더 있다. 주된 쟁점은 남아공 자본주의와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2014년 3월 금속노조는 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문서를 발표했다. “우리 사회의 특징은 ‘특수한 유형의 식민지’이다.” “특수한 유형의 식민지”라는 말은 ANC와 공산당이 유행시킨 것으로, 남아공 사회의 변화가 몇 단계를 거치리라는 뜻이었다. 즉, 우선은 민족민주혁명으로 특수한 유형의 식민지(아파르트헤이트)를 제거하고 나서야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금속노조의 많은 투사들은 단계론을 거부한다고 한다. 그러나 ‘식민지’ 개념은 토착 자본가 계급이 자체의 이익과 동역학을 가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남아공에서 사회주의는 오로지 기존 국가를 분쇄해야만 가능하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MfS가 앞으로 직면할 문제들은 네 가지 정도가 더 있다.

① 선거를 얼마나 중요하게 볼 것인가

선거 출마는 중요한 일이지만, 선거 출마와 당선을 가장 주된 고려 사항으로 보면 나쁜 결과가 뒤따를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 PT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PT는 MfS와 매우 비슷한 환경에서 등장했다. 정치적으로 PT의 등장은 브라질 공산당의 보수성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파적 대응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진보였다. 그러나 PT는 룰라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것에 골몰하며 타협에 타협을 거듭했다. 2002년 대선 직전 룰라는 IMF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적 국가재정 계획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권 후 그대로 실천했다. 현재 그리스의 시리자가 계속 우경화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MfS는 선거가 아니라 투쟁을 기초로 해야 한다.

② 천대받는 사람들의 호민관

레닌은 혁명가들이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했다. MfS는 조직 노동계급을 기초로 하면서도 실업자,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도 끌어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자유투사당은 지역사회를 맡고 MfS는 작업장을 맡는 “분업”이 생겨날 위험이 있다.

③ 어떤 종류의 정당인가?

MfS로 향하는 많은 활동가들은 ANC와 공산당의 실패를 봤고, 정당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금속노조처럼 크고 잘 조직된 세력이 중심적 구실을 하기 때문에 관료적 지배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이 문제는 철저한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MfS는 투쟁을 위한 정당이 돼야 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민주적 정당이 돼야 한다.

④ 노조 지도자

매우 좌파적인 노조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강력한 압력을 받는다. 노조 지도자들은 체제의 전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과 협상을 한다. 그 최악의 사례는 광원노조 관료들이다. 금속노조 지도자들은 그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그들도 2014년 백금 광산 파업에 대한 연대를 공개적으로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금속노조의 주요 인물들이 MfS에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MfS는 주로는 현장조합원 수준에서 건설돼야 하고, 투쟁에서 노조 지도자들이 하는 이중적 구실을 잘 알아야 한다.

결론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었다. 지도력, 조직, 주장 같은 주관적 요소가 중요할 것이다. MfS는 앞으로의 투쟁에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새 정당을 건설하는 일은 서두를 수 없는 것이지만, 남아공에는 그것을 위한 추동력이 있고 좌파는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은 행동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이다.

이 기사는 다음 논문에 기초해서 썼다: Charlie Kimber, ‘South Africa: from Marikana to the “Numsa moment”’, International Socialism 144(Autumn 2014), pp. 9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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