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 민중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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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셜리스트 리뷰〉 174호(1994년 4월)에 실린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노동자 연대〉 1994년 5월호에 실렸던 것을 약간 교정한 것이다.
최근 역사에는 급작스럽고 극적인 정치적 반전이 많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겪은 전환 과정만큼 극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데클레르크가 대통령이 된 지] 5년도 채 안 돼, 집권당인 국민당은 집권 40여 년 동안 완벽하게 유지해 온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강력히 방어하던 태도를 바꾸어 1인 1표제 선거에 참여하기로 했다. 국민당과 아프리카국민회의(ANC)는 헌법 제정에 합의하며 연립정부를 꾸리게 됐다. 두 조직은 여러 해 동안 문자 그대로 서로 전쟁을 벌이던 사이였는데 말이다.
왜 데클레르크의 국민당은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게 됐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데클레르크가 1989년 8월에 대통령직을 넘겨 받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가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1984∼1986년에 흑인 거주 지역인 타운십에서 위대한 항쟁이 벌어졌다. 이 항쟁은 인구의 다수인 흑인들이 이제는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에서 참고 살지 않을 태세라는 것을 보여 줬다. 데클레르크의 전임자인 P W 보타는 1986년 6월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시간을 벌지는 못했다. 1989년에 대중의 조직들과 투쟁성이 되살아났다.
198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이 항쟁들 ─ 그리고 1976년과 1980년의 항쟁들 ─ 의 밑바탕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제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 흑인들이 차츰 숙련 생산직·사무직에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노동자로서 그들의 집단적인 힘이 커졌다. 주로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코사투, COSATU)를 통해 조직된 민주 노조들이 1980년대 중반의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고, 비상사태 시기 동안에도 끈질기게 이어진 흑인 저항의 주요 세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위기를 보며 걱정에 빠진 국제 자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일종의 ‘불신임 투표’를 했다. 1985년 8월 보타는 ANC와의 협상을 거부한다는 재앙적인 연설을 했고, 이는 자본의 대규모 해외 유출을 촉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당시 빌릴 수 있는 해외차관은 처참한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수준이었다. 데클레르크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외국인 투자자들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바로 흑인 저항에서 영향력이 가장 센 세력인 ANC와 정치적으로 화해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화해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고 1인 1표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데클레르크는 주도력을 발휘하고 상대적으로 강한 협상력을 활용함으로써 ─ 1980년대 말에 군사력 균형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정권에 유리했다 ─ 그의 가장 중요한 지지 세력인 백인 대기업주들에게 유리한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데클레르크는 1990년 2월에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주요 저항 조직들을 합법화해 세계와 ANC를 깜짝 놀라게 했다. 뒤이은 협상에서 국민당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 내 다수파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제정하자고 거듭거듭 요구했다. 연방제 하에서 대부분의 책임을 지방정부에 양도하고 [중앙정부는] 주요 정당들의 연립정부로만 구성하도록 못박자는 것이었다. 한편, 데클레르크는 잉카타자유당과 그 동맹인 보안군이 타운십에서 벌이는 테러를 적어도 못 본 체했다. 이것은 ANC를 수세로 몰아넣고 그 지역 조직들을 약화시키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 전략이 먹혀들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데클레르크는 자신의 역량을 과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백인의 거부권을 요구하면서 1992년 5월에 열린 제1차 주요 정당 회담이 파탄 나게 했다. 한편, 잉카타자유당과 보안군의 폭력은 인구의 다수인 흑인들의 반발을 낳았다. 1993년 4월 남아프리카공산당 지도자이자 ANC 투사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크리스 하니가 백인 극우 세력에 암살당하자 물줄기가 확 바뀌었다.
대중의 분노가 엄청나게 폭발했다. 그리고 여기서 ANC가 받는 지지가 얼마나 큰지, 대중의 분노를 제어하는 데서 ANC가 없으면 왜 안 되는지가 밝히 드러났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패티 월드메어는 이렇게 말했다. 하니 살해 사건으로 “세력 균형은 … 영구히 ANC에 유리하게 기울었다.” [애초에] 국민당은 [새 헌법에서] 백인의 권력과 특권을 보장받는 것을 추진했는데, [이제] 데클레르크는 이를 확고하게 보장해 주지 못하는 헌법안에 합의해야 했다.
그런데 백인 소유 대기업들은 이런 헌법적 보장이 빠진 것에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 조치들이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1990년 2월부터 만델라 등 ANC 지도자들은 급진적 사회‧경제 변화를 일으킬 생각이 없다며 토착 자본과 외국 자본을 안심시키려 각별히 애썼다. 지난해(1993년) 12월 요하네스버그의 〈위클리 메일 앤드 가디언〉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100대 기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68퍼센트가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출마하면 1순위로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ANC의 약속이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뜻한다.
더욱이 1993년 11월 헌법 초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이후 상황은 국민당에 유리한 쪽으로 흐르는 듯했다. 백인 극우파와 여러 홈랜드1[아파르트헤이트 시기 흑인 자치구] 지도자들이 잡다하게 모인 연합인 자유동맹은 4월 선거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략의 배후에는 노골적인 폭력 행사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너저항운동(AWB)의 파시스트들, 아프리카너국민전선(AVF) 지도자이자 전직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방군 사령관인 콘스탄트 빌료엔 장군의 지지자들, 무엇보다 줄루족 부족주의 세력인 잉카타자유당 지지자들의 폭력 행사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줄루어를 쓰는 아프리카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탈에서조차 잉카타자유당은 소수의 지지만을 받았다. 그럼에도 잉카타자유당은 보안군의 도움과 잉카타자유당 지도자 가챠 부텔레지가 통치하는 콰줄루 홈랜드 국가기구의 지원을 얻어 가공할 만한 대중 조직을 건설했다. 아프리카너국민전선의 도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은 잉카타 특공대가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나탈 전역에 배치됐다는 보도가 그동안 많았다.
ANC 지도자들은 자유동맹의 위협에 대응해 잇따라 양보를 내놨다. 자유동맹이 선거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려는 목적의 양보들이었다. 헌법안은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줄루족 족장의 권한과 지위를 높여 주며, 백인 자치 지역을 지원하도록 내용이 바뀌었다. 이 조치는 모두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 다수파의 권력이 제한되게 하려는 데클레르크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위클리 메일 앤드 가디언〉은 “이제 처음으로 국민당이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했다고 할 만한 것이 생길 것이다” 하고 논평했다.
다행히 흑인 대중은 자기 지도자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내던졌던 것을 어떻게 거리에서 되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선거를 겨우 6주 남겨 놓은 [1994년] 3월 초, 대중 반란이 일어나 보푸타츠와나 홈랜드 대통령 루카스 망고페를 퇴진시켰다.
보푸타츠와나의 망고페와 그의 핵심 참모 로완 크로녜는 보푸타츠와나에서 선거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로완 크로녜는 망고페와 함께 자유동맹의 지도적 인물이며, 전에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인종차별주의 백인 정권에서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망고페가 그들의 연금을 빼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일으킨 파업이 보푸타츠와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재통합되는 것과 4월 선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전면 항쟁으로 발전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로 공무원들의 파업에 가세했다.
군대와 경찰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급해진 망고페는 빌료엔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빌료엔은 주로 아프리카너저항운동의 준군사조직에 속한 우익 세력 수천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푸타츠와나 방위군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 이 파시스트를 무찌르고, 아프리카너저항운동의 ‘장군’ 한 명을 사살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방군은 ‘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대신 망고페는 퇴진하고 보푸타츠와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통합됐다.
보푸타츠와나 항쟁은 극우 세력이 보인 행동이 허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줬다. 부텔레지는 망고페보다 더 강력한 반대 세력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어쨌든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조만간 부텔레지의 위협과 그의 도살자들과 한바탕 맞붙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십중팔구 무력이 동원된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보푸타츠와나 반란은 훨씬 더 근본적인 교훈도 담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변화를 가속시킨 것은 흑인 노동자와 청년이었다. 그들은 1980년대 내내 그랬고 크리스 하니 암살 이후에도 그랬다. 언제가 돼야 그들은, 자신들을 억제하려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힘과 용기에 바탕을 두고 세워지는 정치적 지도력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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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랜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이 흑인들을 격리시키려고 만든 괴뢰적 자치 국가다. ‘반투스탄’이라고도 불리며 모두 10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