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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회주의자 초청 강연:
남아공 ANC 집권 이후, 왜 흑인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나

이 글은 8월 12일 열린 노동자연대 주최 온라인 토론회 ‘남아공 ANC 집권 이후, 왜 흑인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나?(영상 보기)’에서 찰리 킴버가 한 발표와 정리 발언을 글로 옮긴 것이다.

킴버는 영국의 혁명적 좌파 주간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이고, 수차례 남아공을 현지 취재한 바 있다.

이 토론회를 통역한 천경록은 전문 통역가이자 노동자연대 회원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부가 덧붙인 것이다.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전역을 뒤덮었던 소요와 탈취는 남아공 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애초에 소요는 수감된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의 복권을 도모하면서 촉발된 듯했습니다만, 금세 사회적 폭발로 번졌습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종식된 후 단연 최대 규모의 파동이었습니다.

소요는 대체로 서민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그러나 부족한] 생필품을 상점에서 탈취한 것과 관계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남아공의 절망적인 빈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업률은 공식 통계로도 43퍼센트에 이르고, 15~34세 사이 청년층은 절반이 실업 상태입니다. 서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심각한 빈곤에 시달려온 남아공 흑인들 ⓒ출처 킵레프트

2019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남아공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입니다. 극소수의 백인·흑인 자본가 엘리트가 거의 모든 부를 차지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으며 살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잃을까 항상 두려워하며 열악한 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1994년 소수 백인들의 지배를 끝내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사회가 결코 아닙니다.

당시 저는 남아공을 방문해 만델라의 대선 선거운동을 현장 취재했는데, 그때 ANC의 대선 슬로건은 “일자리, 평화, 자유”였습니다.

이런 좌절을 특정 개인들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당시 상황을 규정했던 남아공 자본주의 발전의 두 단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남아공에서 인종 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의 체제는 1948년 수립됐습니다. 광업 부문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1888년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와 금광이 발견됐습니다. 이 수익성 좋은 광물을 채굴하려면 끔찍한 노동조건 하에서 저임금으로 일할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흑인 농민들을 토지에서 강제로 분리해 임금 노동에 종사하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십 년에 걸친 전쟁, 잔혹한 법률, 노골적인 탄압, 전통적 농업 기반의 파괴가 수반됐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잔혹한 공포 체제였습니다. 정부가 규정한 피부색에 따라 어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부터 특정 장소에서 수영할 수 있느냐까지 규정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에 저항하면 국가는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1948~1993년 사이에 아파르트헤이트 반대를 이유로 2000명 넘게 교수형을 당했고, 수십만 명이 교도소에 갇혔으며, 수백만 명이 체포됐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남아공 현지 자본들과 다국적기업들 모두에 막대한 이윤을 보장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브라질과 남한에 존재했던 체제와도 많은 면에서 유사합니다. 세 나라 모두 억압적인 국가가 제조업의 급격한 성장을 주도한 나라들이죠.

그런데 이 국가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거기에[급속한 경제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바로 노동계급이었습니다. 남아공에서 국가가 혹심한 탄압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놀랄 만큼 전투적인 흑인 노동계급이 출현했습니다.

노동계급

1973년 초 남아공 남부 도시 더번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 이후, 1980년대 내내 노동계급은 국가 탄압을 뚫고 투쟁해, 국가에게서 중요한 양보를 얻어 냈습니다.

1987년 중요한 파업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첫째, 철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둘째, 광원 34만 명이 21일 동안 파업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지배자들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앞으로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을지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지배계급 일부는 최악의 억압 일부를 멈추고 대중의 정치적 권리를 증진시키지 않으면 파업이 더 벌어질 뿐 아니라 정말로 노동자 혁명이 남아공에서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1987년 남아공 광원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을 다룬 당시 신문 보도

이 시기에 남아공 지배자들은 넬슨 만델라의 정당 아프리카국민회의ANC와 협상을 시작하고 만델라 석방을 타진하기 시작했습니다.

ANC가 인종차별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영웅적으로 투쟁했음은 인정해야 합니다.

ANC 안에 사회주의자들이 속해 있기도 했고 남아프리카공산당이 ANC 내에서 주요 세력이었지만, ANC는 결코 반자본주의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만델라 자신이 여러 차례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ANC 집권의 목표가 “비유럽계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할 수 있는 옥토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협상 내내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선 대중 저항의 염원에 응답하면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종식 후에도 여전히 핵심 세력일 대자본들과 타협점을 도출하는 줄타기를 했습니다.

그로써 ANC 집권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양보와 타협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림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토록 전투적으로 싸웠던 노동계급의 투쟁이 억제돼 ANC의 친자본 노선에 끌려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남아공의 노동자주의[급진노조운동 지향] 세력에 관해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주의자들은 흑인 노동계급의 힘과 노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파업을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치적으로 조직하지는 않는데, 정치를 대중이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전투적이고 투철한 노동조합 투사들이었지만 ANC의 정치에는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주의는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말한 ‘경제주의’의 일종[남아공판]이었습니다. 노동자주의자들은 투쟁을 ─ 매우 전투적일지언정 ─ 노동조합 투쟁으로 국한했고, 그 때문에 ANC가 운동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종식된 후에도 ANC의 정치가 지배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종식이 별일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는 인구의 7분의 1에 불과한 백인들만이 정치적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었고 인구의 다수인 흑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부정당했습니다. 이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종식된 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도 생겼고 의회에 의원들을 보낼 기회도 열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중요한 일입니다.

실질적 변화도 있었습니다. 전기·수도 보급률이 높아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존중받는다고, 부당함에 맞설 수 있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더는 전처럼 3등 시민 취급받는다고 여기지 않게 됐던 것입니다.

집권

집권 직후 ANC는 기업주들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협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집권 후 ANC가 맨 처음 취했던 조처 하나는 8억 5000만 달러 규모의 IMF 차관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런 차관에 흔히 따라붙는 민영화, 공공부문 긴축, 노동자 임금 삭감 등의 조건들을 모두 수용했습니다. 자본가들에 대한 실질적 도전 일체를 초장부터 포기한 것입니다.

ANC는 창립선언문 격인 자유헌장에서 했던 광산 등 주요 산업부문 국유화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 헌장에서 ANC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 부채를 갚지 않겠다고도 했지만, 그 약속 역시 저버렸습니다.

남아공 대부호들에게 부유세를 매기지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뒀던 기업들이 보상금을 물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ANC의 한 주요 인사가 훗날 지적했듯, 이는 “자본가들이 ANC 정부에 등을 돌리지 않게 하려 맺은 악마의 거래”였습니다.

브라질의 룰라도 비슷한 일을 한 사례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브라질인들에 보낸 유명한 공개 서한에서 룰라는 자본가들의 권력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에 근본적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룰라는 이렇게 자본과 평화를 맺은 덕에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는 룰라가 집권해도 사회 질서가 재편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집권 2년째 ANC 정부는 세계은행의 조언에 따라 훨씬 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들을 채택했습니다. 당시 재무장관은 이것이 경제 붕괴를 막을 유일한 방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애초에 빈곤을 양산하는 사회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아공 사회 전체가 하루아침에 바뀔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었습니다. 명백히도 ANC 정부는 자본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중에게 한 약속을 저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남아공 공산당이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그들은 ANC에 투덜거리고 때로 ANC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ANC와는 다른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계급이, 국면마다 ANC를 감싸고 도는 자기 지도부에 의해 발목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파업을 고무하는 것이 아니라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투쟁한 일부 노동자들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재앙

그 가장 경악스러운 사례가 2012년 8월 16일 마리카나 학살입니다. 경찰이 파업 중인 마리카나 광원들에게 발포해 34명을 사살한 일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종식 이후 최악의 참극이었습니다.

2012년 남아공 마리카나 광산 대학살 ⓒ출처 Miners Shot Down

남아공 현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는 당시에 마리카나 광산 소유 광산업체 론민의 이사였는데, 학살을 정당하다고 비호했습니다. 남아공 공산당도 마찬가지로 학살을 비호했습니다.

1999년 만델라가 퇴임했을 때 이미 ANC 정부의 통치 방식에 대한 환멸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만델라 자신은 워낙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으므로 환멸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ANC에 대한 환멸은 컸습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흑인 노동계급 대다수가 거주하는 타운십[흑인 거주구]들에서 매우 격렬한 반란이 분출했고, 노동조합들도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남아공의 좌파는 여전히 매우 취약합니다. 사회주의 좌파들 대부분이 ANC 내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ANC라는 커다란 우산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합니다. 공산당은 여전히 ANC, 코사투(남아공 노총)와의 삼각동맹의 한 축인데,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그 꽁무니를 좇습니다.

대안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습니다. 남아공 최대 노조인 남아공 금속노조(NUMSA)는 독자적 노조 연맹을 설립하고 독자 정당인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SRWP)을 출범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때늦었습니다. 마리카나 학살 직후 ANC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그런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나 지난 뒤에야 신당을 창당했고, 그 결과 매우 미약한 도전에 그치게 됐습니다. 이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는 2019년 남아공 총선 결과입니다.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의 득표율은 0.14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남아공 전체에서 2만 4000표밖에 얻지 못한 것인데,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을 출범시킨 금속노조의 조합원 수가 30만 명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조합원 열 명 중 한 명도 그 당에 투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른 세력들도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줄리어스 말레마의 경제자유투쟁당(EFF)이 그 사례입니다. 말레마는 ANC 출신 인사로, ANC를 탈당해 급진적인 듯한 구호들을 내걸고 2019년 총선에 도전해 의회에서 상당 지분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말레마 역시 자본가들과 타협할 태세가 돼 있습니다. 말레마는 범아프리카주의 정치를 추구합니다. 그는 그걸 통해 흑인 내 계급 분단을 은폐하려 하지,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이 처참한 상황이고 기아에 시달리는 지금 진정한 좌파적 대안이 부재하다는 것은 실로 재앙입니다. 최근 소요를 보십시오. 이는 혁명적 운동도 아니고 항쟁도 아닙니다. 사실 이번 소요에는 매우 위험한 요소도 일부 있는데, 예컨대 일부 사람들이 남아공 사회 문제의 책임을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돌리며 이들을 공격하고 쫓아내려고도 했습니다.

교훈

이런 분석으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로 자본주의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만들어 냈고 오늘날 남아공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도 낳았다는 것입니다. 빈곤과 실업이 만연한(그런데도 정치적 저항은 부족한) 현 상황의 배경에도 자본주의가 있습니다.

둘째, 정치 조직, 즉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 건설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당을 건설해 [대중의] 전투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주장하고, 국수주의 우익 사상의 성장을 저지하고, 노동자 행동과 정치적 변화가 모두 필요하다고 역설해야 합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한국 노동자연대의] 남아공 자매 조직인 ‘킵레프트’[좌측 통행이라는 뜻]는 소규모이지만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남아공에는 다른 저항 투쟁도 있습니다. 특히, 더번 지역 판자촌 거주자들의 운동, 좌파적 관점을 견지하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이 그런 사례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1994년 이후 있으리라 여겨졌던 변화의 과정이 중단된 것은 신생 ANC 정부가 자본주의의 우선순위에 맞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분명 이어질 사회적 폭발을 거치며 남아공에서 더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고, 그런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조직이 성장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2019년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SRWP) 창립대회 ⓒ출처 @OfficialSRWP

발제자의 정리

한 동지가 ANC의 부패가 극심한 이유를 질문했습니다. 분명 제이컵 주마와 그 파벌은 엄청나게 부패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부는 하나같이 부패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제가 사는 영국의 사례를 들면, 영국 정부는 자기 부자 친구들에게 수익성 좋은 국책 사업을 거의 공공연히 넘겨주고, 스스로 국가를 갈취합니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위기 동안 영국인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남아공 고유의 사정이 있기도 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에도 ANC의 고위 인사들은 민간 부문으로의 진출이 가로막혔는데, 이는 민간 기업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그걸 소유했던 자들의 손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본가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ANC 고위 인사들은 국가 체계 안에서 국가를 약탈해 자기 배를 불리려 애썼습니다.

소수는 자본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가 그 사례인데, 라마포사는 민간 기업 이사가 돼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지 못한 나머지는 체제 자체를 약탈했습니다.

스탈린주의

한 동지는 남아공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정치에 관해 질문하셨습니다.

공산당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분명 1930년대 스탈린주의 민중전선 전략의 영향도 일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1991년 소련의 붕괴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후 공산당은 우경화해 진정한 혁명적 변화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남아공 스탈린주의자들 고유의 문제도 있었는데, 이들이 이른바 모종의 단계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가 단결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고, 그후에야 노동계급 고유의 쟁점을 제기할 수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관점이었습니다. 중간계급과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매순간 자신의 불만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는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마리카나

몇몇 동지들이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에 관해 질문과 주장을 하셨습니다. 저도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이 때를 놓친 데에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영향이 있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역사 속에는 급격한 변화가 가능한 순간이 있습니다. 남아공에서는 마리카나 학살로 ANC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팽배하던 2012년 8월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가능하시면 남아공 자매조직 동지 레하드 데사이가 감독한 ‘마이너스 샷 다운’[사살당한 광원들]을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카나 학살의 진상을 적나라하게 담은 훌륭한 영화입니다.

마리카나 투쟁에서 놀라운 점은, 학살이 있었는데도 파업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사용자들에 맞서 목숨 바쳐 투쟁해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이때야말로 새로운 사회주의 단체를 창건할 최적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금속노조 지도부는 머뭇거렸습니다. 신생 정당의 성격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생 정당이 선거 승리와 의원 배출로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선거 정당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일터와 거리에 기반을 두고 저항을 건설하는 당이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물론 혁명가들이 선거에 출마할 때도, 심지어 의원을 배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목표가 의회를 바꾸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은 최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의회주의 정당, 그것도 취약하고 영향력 없는 정당을 [그마저도 뒤늦게] 출범시켰고, 그 결과 마리카나 학살 이후의 열기는, 진정으로 필요한 종류의 조직이 아니라 줄리어스 말레마의 경제자유투쟁당으로 흘러 들어가게 됐습니다.

한국에 시사하는 교훈

남아공의 사례가 한국에 시사하는 교훈은 ‘정치 조직의 핵심 초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정치적 성장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거 정당을 건설하고 의원을 배출하는 것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다른 모든 문제를 규정짓는 결정적 요인인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중요할까요?

영국에서도 이런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였을 때 수많은 사람이 노동당에 입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무 성과도 낳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선거 연합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투쟁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남아공 노동자주의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종식 이후 어떻게 됐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됐습니다. 코사투에 가입하고 그 안에서 노동조합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치 조직은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남아공 노동자주의자들이 ANC와의 단절을 대표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단절을 정치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남아공에서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노동계급은 매우 전투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이를 표현할 조직은 ─ 지나치게 소규모인 조직들밖에 ─ 없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자매조직 ‘킵레프트’[좌측 통행]는 이런 정치를 퍼뜨리기 위해 회합·출판·웹사이트 등을 이용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으로 많은 노동자들과 직접 교류하고 그로써 성과를 내기에는 조직 규모가 너무 작습니다.

그럼에도 ‘킵레프트’는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 내에서 적잖은 시간을 들여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고, 지역에서 벌어지는 토론회나 투쟁의 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아공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킵레프트’ 당원들 ⓒ출처 킵레프트

희망

현재 남아공 소요는 중단됐습니다. 소요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국가는 심각한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저는 어제(8월 11일) 영국 〈소셜리스트 워커〉 웹사이트에 이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청중 가운데 한 동지가 말씀하신 더번 인근 타운십에서 경찰이 두 아이의 어머니를 사살한 사건도 다뤘습니다.

지금은 남아공 노동계급에게 힘든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희망적인 말로 발언을 마치고자 합니다.

남아공에서는 투쟁 없이 지나가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남아공에서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타운십 거주민들이 전기·수도·주택 공급 부족에 항의해 들고 일어나거나, 공장·직장에서 노동자들이 분규를 일으킵니다. 남아공을 보면 투쟁이 폭발할 잠재력을 매일같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기후 혼란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실질적인 쟁점이지만 특히 남아공에서 첨예한 쟁점입니다.

지금은 오직 급진적 사상으로만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옥한 토양에서 더 큰 조직들이 생겨나고 더 많은 투쟁이 벌어져 남아공 대중에 진정한 대안이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언제나처럼 훌륭한 통역을 해 주신 천경록 동지와 참가자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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