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이 부활했음을 보여 준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
“잊지 않을게. 끝까지 행동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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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1주기에 조차 가슴 아파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차분한 애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가족과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를 분노와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투쟁으로 가득 채웠다.
세월호 1주기인 16일, 낮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 분향소에는 청년들의 긴 줄이 저녁까지 줄지 않았다. 서울광장에서 저녁에 열린 ‘대통령령 즉각 폐기! 선체인양 공식 선포! 4·16 약속의 밤’에는 5만여 명이 모였다. 사람들이 광장 주변 차도까지 넘쳤다.
이런 애도와 공감, 연대에 박근혜의 대답은 도발이었다. 지난 반 년 간 걸어 나와도 만날 수 있는 광화문광장의 유가족들을 외면해 온 박근혜는 (분노한 유가족이 미리 알고 분향소를 폐쇄하고 철수해 분향도 할 수 없고 유족도 만날 수 없는) 진도 팽목항에 가서 깜짝 쇼를 했다.
도통 박근혜 머리 아니면 생각도 못 할 것 같은 이 도둑 추모 쇼에 따라가 멋진 사진을 찍어 준 주류 언론들은 충실히 박근혜의 팽목항행 일정 관련 엠바고를 지켰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반성하고 약속한 것도 없이 “가신 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그분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시[라]”는 복장 뒤집는 소리나 해댔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해외 순방을 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경찰 차벽, 최루액, 경찰 폭력이 남았다. 경찰 방패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수술을 해야 할 지경이 된 성복 엄마 ‘권남희’ 씨가 남았다. 진실을 규명 못 한 상태에서는 추모를 할 수 없다며 분노와 투쟁으로 1주기를 맞자고 호소하던 수백 명의 유족들이 남았다. 자정이 넘어도 폭력경찰에 맞서 물러서지 않았던 수만 명의 성난 청년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남았다. 분노가 남았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세월호 국면을 정리하는 기회로 이용하려고 반쪽짜리 특별조사위원회마저 정부 시행령(안)으로 식물 상태로 만들려고 한 지 3주 만이다.
해고 요건 완화, 공무원연금 개악 등 노동자 공격으로 우파를 결속하고 지배계급 내에서 자신의 신뢰를 재구축해 재·보선 등에서 개가를 올리려 했던 박근혜의 계획은 지금 제 궤도를 가지 못하고 있다.
4·16 약속의 밤
평일임에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5만여 명이 모였다. 지난해 8월 이후 최대 규모다. 서울만이 아니라 광주, 전남, 부산, 경남,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1주기 집회가 열려, 서울을 빼고도 1만 2천여 명(17일 정오에 집계된 수치만)이 참가했다.
집회 시작 시각 7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서울광장은 노란 리본을 달고 국화꽃을 든 대열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퇴근 시간이 지나자 대열은 삽시간에 불어나 이동이 힘들 정도였다. 지난해 11월 누더기 특별법 통과 이후 잠시 소강 상태인 듯 보였던,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은 1주기를 앞두고 정부가 쓰레기 시행령을 입법예고하며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날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삭발까지 감수하며 단호하게 투쟁에 앞장 선 유가족들의 호소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핵심 구실을 했다.
이 날 집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줬다. 서명부스마다 참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노동자 연대〉 부스에 마련된 ‘세월호 인양 요구’ 서명은 용지가 모자랄 정도였고, 참가자들은 뒷면에라도 서명을 하고 싶다고 이름을 써낼 정도였다.
특히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그룹을 지어서 참가한 것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대학생들은 이 날 도심행진과 사전집회를 열기도 했다. 조직된 학생 대열은 아니지만 개별적으로 집회에 참가한 청년들도 상당수 눈에 띠었다.
전명선 가족협의회 대표가 첫 발언으로 호소했다. “대통령, 국무총리 누구도 답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생명을 한낱 돈으로 치부하는 정부를 두고 볼 수 없다. 답이 나올 때까지 청와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앞장서 행동할 것이다. 이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같이 행동해 달라.”
이어진 영상에서는 소중한 가족을 떠나 보낸 유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다.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다면 더 잘해줄 걸” 하며 흐느끼는 한 어머니의 모습에 대열 여기저기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실종자 9명 중 한 명인 단원고 허다윤 학생의 아버지가 실종자 수습을 외면해 온 정부를 향한 울분을 쏟아냈다. “아직 바다 속에는 9명이 있다. 그들은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다.”
최윤민 학생의 언니 최윤아 씨는 눈물을 참아가며 차분하고 또박또박하게 발언을 이어갔다. 최윤아 씨의 발언은 많은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지난해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미안하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잘못한 사람들은 왜 사과하지 않나요? ‘미안하다’고만 하고 ‘살려달라’는 우리의 손은 왜 잡아주지 않나요? 이 나라에서 숨 쉴 수 있게 세월호를 인양해 주세요. 시행령을 폐기해 주세요. 희생자 분들에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저희는 동생이 죽어 가는 걸 생방송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지 말아 주세요. 같이 행동해 주세요. 저희가 내민 손을 외면하지 말고 잡아주세요.”
발언이 끝나고 유가족들은 함께 세월호 모형을 온전히 인양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안치환 밴드, 이승환 밴드 등도 공연으로 유가족을 비롯한 5만여 명과 마음을 나눴다.
성완종 리스트로 촉발된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위기에, 해경의 증거 조작 등이 새롭게 폭로된 상황 때문인지 참가자들의 분노는 투쟁하는 분노로 느껴졌다. 광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고무 받았다.
행진
이런 자신감과 분노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집회가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광화문 광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헌화 행렬조차 거대한 차벽으로 막았다. 태평로 전 차선을 청계천부터 서울광장까지 채운 행진 대열은 물러서지 않고 항의했다. 경찰의 불법 운운하는 해산 방송에는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불법? 구조 안 한 것은 합법이냐?”
행진 대열은 청계광장을 통해 행진을 이어갔다. 청계천에서 종로 방향으로 가는 다리 곳곳에서 경찰 차벽과 방패가 길을 가로막았지만, 그 곳곳마다 교복입은 청소년들, 대학생들들이 최루액을 뒤집어 써가며 싸웠다. 결국 종로3가에서 종로에 진출한 대열이 종각으로 행진하며 곳곳의 대열이 모두 종로로 합류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수만 명이 “정부 시행령안을 폐기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유가족들과 청년들이 경찰차 위로 올라서 투쟁과 연대를 호소했다. 탄압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종각까지 밀고 갔던 행진 대열은 유가족 70명이 경복궁 앞에서 고립됐다는 말에 인사동 방향을 통해 경복궁을 가려고 시도했다. 이미 막차가 끊길 시점인데도 수천 명이 남아서 인사동 골목을 메우고, 길이 막히자 경찰의 봉쇄를 피해 삼삼오오 경복궁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이 철통 같은 골목 봉쇄를 하는 바람에 많은 참가자들이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복궁 행을 막으려는 경찰 폭력으로 유가족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조계사 앞에서 성복 엄마 권남희 씨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조계사 뒤편과 종로구청 사이 골목 곳곳에서 작은 충돌들이 벌어졌다.
경복궁에서도 경찰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경찰이 전체를 포위하고 연행 시도를 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연행 위험이 더 높은) 대학생들을 보호하려고 스크럼을 짜고 저항했다. 격렬하게 버텼지만 힘에 부쳤고 결국 네 명이 연행됐고, 이 날 총 10명이 연행됐다. 그 건너편 광화문광장 북단에서는 경복궁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생들이 밤새 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차벽과 경찰 병력으로 농성자들을 아침까지 에워쌌다. 17일 오전에는 쓰러진 유가족을 위해 부른 119 구급차 출입까지 방해하는 작태를 부렸다.
경찰의 이런 행태는 유가족들의 경복궁 농성이 새로운 상징이 돼 정권에 대한 저항이 확산될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정권 자체가 부패 문제로 휘청거리고 있다. 박근혜는 자신이 해외 순방으로 없는 동안, 공무원연금 개악도 해 놓으라고 지시하고, 세월호 도둑 추모쇼도 하고 출국했지만, 부패 혐의에 거짓말까지 들통 난 총리 이완구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는 엎드려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태도다.
‘얼마나 어렵게 구한 총리인데 또 공석을 만들 수 없다’는 애처로운 오기도 있겠지만, 지금 부패 문제와 국민적 반감 속에서 총리 사퇴는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이완구, 홍준표 따위 등이 아니라 박근혜의 대선자금 의혹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해경이 구조 과정 기록을 조작했고 검찰과 감사원이 이를 덮어줬다는 사실, 정부의 TF가 발표한 인양 검토 보고서가 사실은 지난해 5월에 이미 작성됐다는 사실 등이 폭로됐다. 구조를 안 하고, 수색도 안 하고, 오로지 진실 은폐에서만 조직적이고 치밀한 국가기관들의 복마전 같은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것도 정부와 기득권세력의 부패 문제였다.
결국, 부패 스캔들이 터진 지 2주 만에 박근혜 지지율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 모두 30퍼센트 대로 또 떨어졌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대구·경북 지지율의 하락 폭이 가장 컸다.
이런 박근혜 정부와는 달리 서울광장에 모인 5만여 명은 유가족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이 날 집회는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투쟁이 곡절을 겪을 수 있지만 원칙을 놓지 않고 이어간다면 정부의 위기, 새로운 사실 폭로 등과 맞물려 다시 부양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부패한 측근들을 감싸면서 유가족과 진실을 내치는 대통령에게 더는 관용을 보내기 힘들다는 분노가 표출됐다. 물론 그런 분노가 실현되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야 하고,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들이 진짜로 본격화돼야 할 것이다.
일단 4월 18일 범국민추모대회에서 다시 한 번 진실을 밝히는 투쟁의 힘을 보여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