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총선:
왜 ‘볼리바르식 혁명’이 의회 다수당 자리를 잃었는가?
〈노동자 연대〉 구독
12월 6일 치러진 베네수엘라 총선에서 ‘차비스타’(우고 차베스와 그 후계자인 현 대통령 마두로 지지자)가 1998년 총선 이래 17년 만에 의회에서 다수파 자리를 잃었다. 12월 7일(현지시각)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것을 보면, ‘차비스타’ 여당인 통합사회주의당PSUV이 주도한 선거 연합은 55석을 얻어, 우파 선거 연합 민주주의통합연석회의MUD의 107석에 크게 뒤졌다. MUD는 의석의 5분의 3 이상을 획득해, 부통령 혹은 장관을 단독으로 해임 의결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 몇 년간 베네수엘라가 심각한 위기를 겪은 결과다.
베네수엘라는 무역 수익의 90퍼센트 이상, 정부 재정의 65퍼센트 가까이를 석유 수출 수익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국제 유가가 최근 배럴 당 4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는 ‘균형재정’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외환 보유액이 크게 줄어, 현물(원유)이나 금을 담보로 부채 이자를 상환할 돈을 조달해야 했다. 이조차도 원유 담보를 시가보다 낮게 셈했기 때문에 외채 규모가 5년 만에 갑절로 늘었다.
2013년 외환 위기로 물가가 크게 뛰어 공식적인 물가인상률이 1년에 50퍼센트를, 민간 통계로는 1백 퍼센트를 넘는 해가 이어졌다. 물가 인상 때문에 최저임금을 30퍼센트 인상해도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이마저도 제조업 전반의 가동률이 떨어져 제대로 지급되지 못했다.
생필품 수급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생필품 부족률이 평균 29퍼센트를 넘었고, 식용유·설탕·분유·옥수수 가루 등 일부 상품은 부족률이 85퍼센트에 이르렀다.
빈곤 때문에 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됐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살인율은 온두라스에 이어 2위다. (도시 하층민의 피해를 추정할 수 있는) 전국 대비 도시 지역 살인 비율도 카리브해의 소국 세인트키츠 네비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베네수엘라 우파는 경제 위기를 여당의 ‘통치 불능’을 입증할 기회로 봤다. 기업들은 고의로 생필품 품귀 현상을 일으켰고, 기업주들이 소유한 민영 언론은 차베스·마두로 정부의 친서민 정책 때문에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며 맹비난했다. 자본가들은 유령 회사를 마구잡이로 세워 외화 수익을 최대 20퍼센트 가까이 해외로 빼돌렸다.
사보타주
베네수엘라에서 자본가들의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 집권 초기였던 2001년에도 자본가들은 석유 산업을 마비시키고자 고의로 사보타주를 일으켰다. 차베스가 국영 석유 회사 PDVSA의 수익 배분에 손을 대려 하자 반발한 것이다.
2002년 4월,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은 군부 보수파와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도시 빈민 수십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저항으로 좌절됐다.
같은 해 말 자본가들은 정유 공장을 폐쇄하고 석유 시추 기구에 고의로 고장을 일으켜 경제를 마비시키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3개월간 자주 관리로 석유 산업을 가동하고 국가 경제를 돌린 끝에, 사보타주는 무력화됐고 우파들은 결정적으로 위축됐다. 이때의 승리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부패한 어용 노총 CTV에 반대해 새로운 민주 노총인 전국노동자연합UNT를 건설했다.
이런 일련의 저항들을 통해 차베스의 ‘볼리바르식 혁명’도 급진화했다.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선언하며 민영화됐던 PDVSA의 재국유화를 추진했고,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해 주로 빈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복지 프로젝트 ‘미션’을 발족했다. 때마침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이 수렁에 빠지고 중국 등 신흥공업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해 유가가 폭등한 것도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를 주도한 대통령 차베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자본가 계급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고도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자주 관리 덕에 쿠데타를 막아 냈음에도,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핵심인 석유 산업에서는 자주 관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부와 생산수단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손에 있었고, 부유층의 사유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석유 수출 수익에 기대어 복지 정책을 폈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배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차베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국가기구를 활용해 개혁 과제를 추진하려 했지만, 이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차베스 이전 시기부터 국가기구를 주무르던 관료들은 민중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고, 종종 개혁에 딴죽을 걸었다.
차베스는 2002년 사보타주에 참여하지 않은 자본가들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베네수엘라 자본가 일부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이들 ‘볼리부르게스’[‘볼리바르식 혁명’이 탄생시킨 부르주아라는 뜻으로, 친차베스 자본가들을 일컫는 말]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성장한다는 보장 하에 차베스를 지지했고, 차베스가 국가 관료를 우회하고자 만든 대규모 대중 정당 PSUV에도 참여했다.
‘볼리부르게스’와 국가 관료들이 사사로이 부를 축적하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노동자·민중이 2002년에 거둔 압도적 승리의 여파 속에서 이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보였다.
이반
그러나 베네수엘라 경제가 침체하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외환 위기와 물가 인상으로 복지 정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미션’은 물자 부족으로 개점 휴업 상태에 빠졌다. 위기 전에는 하향세였던 빈곤율이 다시 치솟았다. 마두로 정부는 내수용 석유를 사실상 무상으로 공급해 왔는데, 가난 때문에 석유 밀무역이 크게 늘어 이웃 나라 콜롬비아와의 국경 분쟁으로 비화될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미션’을 운영하려 고군분투했던 기층 ‘주민자치평의회’ 활동가들의 좌절도 같이 깊어졌다.
생필품 판매 수익이 줄어들면서, 특히 ‘볼리부르게스’가 많았던 식품 가공 부문 자본가들부터 시작해 한때 차베스를 지지했던 자본가들이 줄줄이 반대파로 돌아섰다. 차베스와 그 후임인 마두로는 정부 재정으로 이들의 수익을 보존해 주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반정부 우파들은 정부 공격에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언론을 통한 맹비난과 생필품 품귀 현상 조장을 일삼는 한편, 반정부 거리 폭동을 일으켜 정부의 ‘통치력’을 공격했다. 그런 폭동 시도 중 하나로 2014년 2월에 일어난 ‘과림바’ 폭동은, 경제 위기로 고통 받는 중하층 중간계급 일부가 동참하면서 거의 넉 달 가까이 이어졌다.
차베스와 마두로가 노동자 파업과 대중 행동으로 우파에 맞섰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자본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차베스는 실질임금 인상을 억제했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때로 정부는 UNT의 임금 협상 제의도 거부했다.
“거리의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마두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림바’ 폭동 직후였던 2014년 6월, 베네수엘라 최대 식품 가공 기업 ‘폴라’ 소속 UNT 조합원들은 폴라 경영진이 고의로 품귀 현상을 조장하는 데에 항의해 창고 점거에 돌입했다. 그런데 마두로 정부는 노동자들이 관리하고 있는 식품 재고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파업 중단을 촉구했다.
베네수엘라 자본주의가 완전히 파탄 날까 봐 두려워한 마두로 정부는 자본가들과 타협을 시도했다.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에게 “경제 전쟁”을 멈춰 달라며 ‘과림바’ 폭동의 주범들을 석방했고, 외화를 유출하고 고의로 품귀 현상을 일으킨 “경제 전범”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자본가들의 요구도 받아들였다.
마두로가 물러서자 우파들은 더한층 기세를 올렸다. 이 때문에 선거에서 우파들이 더한층 단단히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경화?
그렇다고 해서 우파의 기반이 더 확대된 것은 아니다.
12월 7일(현지시각) 현재 베네수엘라 언론들이 집계한 것을 보면, 이번 총선에서 대략 7백50만 명 정도가 MUD를 지지한 듯하다. 이는 차베스 사망 후 우파들이 대거 결집을 시도했던 2013년 대선 때와 비슷한 수치다. 반면 PSUV는 6백만 표 가까이 얻은 듯한데, 이는 지난 대선에 비해 20퍼센트 가까이 줄어든 것이며, PSUV 당원 수와 대략 비슷한 정도다. 마두로 정부의 ‘개점 휴업 복지’가 경제 위기의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던 데 대한 실망감 때문에 단순 계산으로 2백만 명 정도가 투표에 불참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우파들이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이윤을 지키려 생필품 품귀를 조장해 사람들의 삶을 수렁에 빠뜨린 자들이고, 당선하자마자 친서민 정책을 백지화하겠다고 벼르는 자들이다. 우파들이 추진할 노골적인 긴축 정책은 민중의 삶을 더 어렵게 하면 했지 낫게 하지는 못할 것이고, 이 때문에 분노가 자랄 수 있다.
베네수엘라 민중이 우파들에 제대로 맞서려면, 2000년대 초 ‘볼리바르식 혁명’을 급진화시켰던 전투적 대중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