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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의 ‘일자리 대타협’:
임금 양보로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

ⓒ출처 보건의료노조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하 보건의료노조)은 8월 16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고 ‘2017 보건의료분야 일자리혁명·의료혁명 투쟁계획’ 등을 확정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인력확충,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주요 요구로 교섭을 벌이고, 오는 9월 5일 전 지부가 동시에 조정신청을 접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보건의료노조는 줄곧 보건의료 분야에서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 실질적 노동단축과 교대제 개선, 공공의료 인력 확충, 모성정원제, 만성질환 전담 인력, 치매 환자 돌봄, 공공병원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 50만 개를 만들자는 것이다.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위해서라도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보건의료노조의 주장은 완전히 타당하다.

예컨대 입원 환자의 간병을 위해 가족 중 누군가 희생해야 하거나 고액의 간병비를 지출해야만 하는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만족도가 높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만으로도 11만~23만 명을 추가로 고용해야 한다. 메르스 사태는 공공병원과 공공의료 인력을 대폭 확충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 준 바 있다.


불규칙한 교대 근무와 야간 노동, 상대적 저임금은 병원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간관계를 망치고, 이직률을 높이고, 숙련도를 낮춰 환자에 대한 양질의 서비스를 어렵게 한다. 따라서 연간 2천4백4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실질적으로 단축해야 한다. 인력 부족 때문에 임신도 눈치를 봐야 하는 임신 순번제, 퇴직 순번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런데 보건의료노조 집행부는 일자리 확충을 위해 산별노조 차원의 '중타협' 모델을 거쳐 사회적 대타협으로 나아간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중간 수준의 사회적 중타협이 많아지면 대타협도 가능할 것[이다].”(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정책연구원장)

그리고 이를 “초기업 단위 교섭을 통해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노동시간 단축 등 3가지 과제를 임금연동형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한다. 7월 12일에는 산별중앙교섭을 타결하면서 “2017년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보건의료 분야 좋은 일자리 창출, 인력 확충,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며, 세부 방안은 특성교섭 또는 현장교섭에서 정한다”고 합의했다.

이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반응은 뜨겁다. 문재인 자신이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해 왔고,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이용섭도 “사용자와 노조 간에,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측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귀가 따갑도록 듣던 얘기다.

다만 전임 정부들이 정규직을 ‘노동귀족’, ‘철밥통’이라며 공격을 퍼부었다면 문재인 정부는 아직까지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스스로 양보안을 들고 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그런데 보건의료노조 집행부가 이처럼 나서서 ‘임금 양보’를 제안하니 이를 성사시켜 장차 다른 부문으로도 확대 적용하려 할 듯하다. 8월 23일 열린 ‘보건의료 분야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사정 공동 선언식’에는 이용섭을 비롯해 보건복지부 장관, 고용노동부 장관, 교육부 차관, 청와대 일자리수석비서관 등이 대거 참가했다.

병원 측도 못 이기는 체하며 이런 ‘대타협’에 호응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방안 등에서 밝혔듯이 수가를 충분히 인상해 주겠다고 나서고 있고, 노동조합 측도 임금 일부를 양보할 수 있다고 하는 만큼 손해만 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병원 별로 진행될 임단협 교섭이 ‘일자리 창출’의 실제 내용을 결정할 텐데, 따라서 실제로 일자리 수백~수천 개가 늘어난다는 발표를 듣게 될 수도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오는 10월 이 성과를 모아 보고대회를 열 계획이다.

호응

다만 이날 선언문에는 ‘임금 양보’ 같은 내용이 노골적으로 담기지는 않았는데, 노동조합 안팎의 비판을 염두에 둔 듯하다.

특히 보건의료노조가 올해 3~4월에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7년 보건의료 노동자 정기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정규직 임금을 덜 올려서라도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 개선을 해야 한다”는 노동조합 활동 방향에 응답자의 46.4퍼센트가 반대했다. “사회안전망 확충과 복지 확대를 위해서라면 세금을 올리는” 활동 방향에도 55.7퍼센트가 반대했다.

일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병원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단순히 인력 부족 문제만으로 협소하게 바라보는 것과 달리, 조합원의 62.5퍼센트는 현재 임금 수준에 불만을 표현했다. 보건의료 분야는 다른 산업보다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자 비중이 높은데도(44.7퍼센트 대 73.6퍼센트) 평균 임금 수준은 전체 평균 임금 수준에 못 미친다. 특히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상대적 저임금에 시달린다. 여성이 집중된 직종이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은 노동시장에서의 체계적 여성 차별이 반영된 결과다.(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남성의 60퍼센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어떤 식으로도 도우려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자기 임금을 양보해서 다른 노동자들을 돕자는 입장을 환영하기는 어렵다.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지금의 보건의료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조합원 상당수가 임금, 노동강도에 불만이 많고 그래서 이직률도 높다. 당장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를 위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도 낮은 임금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일자리를, 그것도 지금보다 더 낮은 수준의 임금을 감내해야 하는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보건의료노조가 충분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쟁취해야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한다고 해서 사용자와 정부가 양보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오히려 절반 가까운 조합원들이 ‘양보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반대한 것은, 이런 시도가 노동자들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음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를 강조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부 투자는 약속하지 않고 있다. 추경에서도 일자리 예산을 대거 삭감하는 데 동의했다. 반면 일부 노조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로부터 실질적인 양보를 강제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있다. 일부 저소득 노동자들뿐 아니라 기업주들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보건의료노조가 추진하는 일자리 대타협이 노동자 양보의 마중물이 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