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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낙태 합법화 법안 하원 통과:
노동자 운동이 낙태권 투쟁을 지지하다

6월 13일 낙태 합법화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자 기뻐하는 아르헨티나인들

6월 13일 아르헨티나에서 임신 14주 이내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표결 몇 시간 전만 해도 반대가 근소하게 앞서던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됐다. 의회 밖에서 합법화 찬성 시위를 벌이던 수천 명과 유튜브 생중계로 의회 토론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감격의 환호성을 질렀다. 낙태가 세계적으로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도 최근 아르헨티나의 소식은 고무적이다.

아르헨티나는 가톨릭 국가로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 온 나라다.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할 경우,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을 제외하고는 낙태가 모두 불법이다. 또한 여성이 낙태를 하려면 판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는 해마다 50만 건의 낙태가 은밀히 시행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뒷골목 낙태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해마다 여성 5만여 명이 병원 신세를 지고 수백 명이 사망한다. 많은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낙태나 자연유산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았다. 형법은 여성이 낙태를 할 경우 1~4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변화

올해 5월 아일랜드 낙태 합법화 국민투표에 이어 아르헨티나에서도 대중 의식이 크게 진보했음을 보여 준다. 아르헨티나 역시 아일랜드처럼 역사적으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이다.(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일랜드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난 3월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는 연설까지 했지만 5월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합법화 진영은 대승을 거뒀다. 이제 6월에 아르헨티나에서도 낙태권 운동은 1라운드 승리를 거뒀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서 특히 최근 몇 년 간 성장해 온 대규모 여성운동 덕분이었다. 2015년 6월에 여성 폭력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단 한 명도 안 돼!”(Ni Una Menos)가 수십만 명 규모로 일어났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20만 명이 참가했다.(2001년 한 달 동안 대통령 네 번이나 갈아치운 대중 반란이 잦아든 뒤 최대 규모였다.) 여성단체, 노동조합, 정당, 가톨릭 교회 등이 주도한 이 시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모두 없애려는 열망을 담았다. 이 운동은 낙태권 쟁점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돼 왔고,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운동과도 연결돼 왔다.

낙태권은 노동계급의 쟁점

올해 3·8 세계 여성의 날에 5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뒤 낙태권이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됐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낙태권을 요구했고 60퍼센트 이상이 이를 지지했다.

하원 표결이 있기 전인 6월 4일에는 수천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고등학생 수백 명이 낙태권을 요구하며 학교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불법 낙태로 사망하는 여성이 대부분 24세 이하임을 감안할 때 젊은 여성들의 전투적 시위는 매우 고무적이다.

낙태 불법화로 죽는 여성들은 젊은 여성들이고 특히 노동계급 여성이다. 낙태죄 처벌은 대개 가난한 여성에게 시행돼 왔다.

2015년에 당선한 우파 대통령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낙태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성교육 예산도 대폭 삭감했다. 낙태 유도약인 미소프로스톨 가격은 1박스에 2015년 40달러 수준에서 2017년 170달러 수준으로 치솟았다. 노동계급 여성들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자들은 세계 여성의 날 시위를 위해 노조가 파업을 호소하고 대표단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 몇 년 간 아르헨티나에서는 긴축 정책에 반대해 조직 노동자 운동이 성장해 왔다. 올해 세계 여성의 날 시위에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다. 펩시콜라 같은 공장에서는 부분 파업을 벌이고 시위에 대거 참가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은 낙태권 운동을 지지했는데, 교사, 병원 노동자들이 낙태권을 지지했고 광원들도 낙태권을 지지했다. 특히 교사노조는 교사들에게 시위 참가를 호소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히 큰 만큼 낙태가 합법화된다면 엄청난 성과일 것이다. 아래로부터 운동 덕분에 2010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는 등 진전이 있었지만, 낙태 합법화는 가톨릭 교회와 동맹해 온 정치 세력들에 의해 거듭 좌절돼 왔다.

낙태 합법화 법안 상원 표결은 9월로 예상되는데,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하원에서도 찬성 129표 반대 125표로 근소한 차이로 통과됐고, 상원에서는 찬성 의견을 밝힌 의원보다 반대를 표명한 이들이 더 많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승리를 맛본 낙태권 지지자들은 상원 통과를 위해 총력 활동을 벌일 것을 다짐했다. 반대 진영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결집하고 있다. 최종 승부는 의회 밖의 힘 대결에 의해 결판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