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사회주의의 실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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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가 위기에 빠진 것을 두고 기성 언론들은 ‘사회주의 복지 정책의 처참한 결말’, ‘포퓰리즘의 파국’이라며 고소해 한다. ‘기형적 경제 구조’와 ‘국유기업의 방만한 운영’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리스터 패로우는 베네수엘라 위기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전략의 실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우파는 베네수엘라의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두고,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은 무엇이든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혼돈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고, 하이퍼인플레이션[1년에 수백 퍼센트 이상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는 베네수엘라의 올해 물가 상승률이 100만 퍼센트에 이를 것이라 예측한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4년 국제 유가 폭락의 여파로 만성적 문제를 겪어 왔는데, 그에 뒤이어 이런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2014년의 국제 유가 폭락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낳은 여러 효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의 보통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기초 식품과 의약품이 믿기 어려울 만큼 비싸거나 아예 구할 수조차 없다.
경제 위기라는 수렁에 더해, 베네수엘라 우파가 정부를 포위하며 벌이는 악독한 짓들도 무시할 수 없다.
저항
베네수엘라 우파는 역사의 시계를 우고 차베스가 집권한 1999년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어떤 도전에도 불같이 성을 낸다.
우파는 20년 가까이 좌파 정부를 공격해 왔고, 쿠데타가 성공할 조건을 조성하려 해 왔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고개 숙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계적 경제 제제를 당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 금융권에 발을 들일 수가 없는데,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약 580억 달러[한화로 약 64조 원]에 이르는 국가 채무를 재조정할 수 없다.
이에 더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산 석유에 대해 금수 조처를 내리겠다고 으르고 있다.
베네수엘라 우파는 위선적이게도, 니콜라스 마두로 현 정부가 반정부 세력을 상대로 사용하는 폭력을 두고서, 좌파 정부가 불만을 다스리는 전체주의적 모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지목한다.
우파는 자신들이 자행하는 야만적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에서 우파가 재집권하면 끔찍한 폭력이 온 나라를 휩쓸 것이다.
우파의 주장과는 달리,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부자들에 맞선 저항이 일어나더라도 그들이 경제적·사회적 핵심 부위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우고 차베스와 그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의 정치에서 핵심은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차베스가 집권한 1999년 이래로 오늘날까지 베네수엘라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 긴장은 공식 정치 영역에서 위로부터 벌어지기도 했고, 노동자·빈민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기도 했고, 때로 사용자들이 자기 이해관계를 방어하면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대중이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 올라 사태를 장악하려 한 아주 긍정적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2년 지배계급의 부추김을 받은 군부의 일부가 대통령궁을 점거하고 차베스를 체포한 일이 있었다.
보통 사람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음험한 세력의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쿠데타를 중단시켰다. 오직 그 때문에 차베스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말 베네수엘라의 기업주들은 경제의 대부분을 마비시킴으로써 차베스를 제거하려 했다.
이때는 노동자들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노동자들은 석유 생산을 재가동했고 운송과 식량 공급을 유지시켰다.
2년 후인 2004년에 부자들은 차베스를 “국민투표로 탄핵”하려 했다. 그때도 대중이 뭉쳐 우파를 꺾어 버렸다.
이 시기에 차베스 정부는 다수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원대한 개혁을 이루려 애썼다.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힐끗 보여 줬음에도, 차베스와 마두로는 그런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통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유가가 높을 때는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에게 도전하지 않고도 개혁 조처를 시행할 수 있었다. [국내 언론들은 차베스의 개혁 조처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 담론에 빗대지만, 차베스의 개혁(‘미시온’)은 그저 말잔치가 아니라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실질적 조처였다. 빈곤율이 절반 가까이 줄었고, 교육·주거·의료·식량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크게 개선됐다. 이에 관해서는 본지 100호에 실린 ‘‘21세기 사회주의’와 차베스가 못다 이룬 꿈’을 보시오.]
[차베스 집권기인] 1999년에서 2011년 사이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민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65퍼센트에서 71퍼센트로 늘었다.
그러나 유가가 하락하자 자본가들에게 도전하지 않는 개혁은 더는 유지될 수 없었다. 기존 체제와 [그 수혜자인] 우파에게 도전하지 않고서는 혼돈을 피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 전체 수출에서 석유 수출이 95퍼센트를 차지하기 때문에, 베네수엘라는 유가 변동에 특히 취약하다.
전략
차베스와 마두로 모두 경제를 다각화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 여파가 지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베네수엘라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2018년 5월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의 재무장관 존 맥도넬은 어느 인터뷰에서, 차베스가 사망한 2013년 이후 마두로 정부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주장했다.
맥도넬은 2018년 초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해서도 마두로 정부[의 실패]를 언급했다.
맥도넬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부펀드[정부가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투자용으로 출자해 만든 펀드]를 조성해 석유 수출 수익을 경제의 다른 부문으로 돌렸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두로 정부가 잘못된 결정 한두 개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마두로 정부의 실패는 전략의 실패다.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건설할 수 없다. 아래로부터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정부는 점차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 됐다.
마두로 정부가 여당 통합사회주의당 PSUV을 통해 노동자들과 관계 맺으며 노동자들과 반목하게 된 과정이 그 결정적 사례다.
[최근] 몇 년 동안 PSUV는 노사 간 단체협약 갱신을 거부하며, 임금과 노동조건의 변화를 법에 내맡겨 왔다. 이 때문에 여러 산업 부문에서 노동조합 체계가 무의미해졌다.
이를 통해 마두로는 노동자들이 ‘국가가 우리 이해관계를 대변하겠거니’ 하며 정부 편에 서기를 바랐다.
이 전략은 급속히 뒤집어졌다. 마두로 정부는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공격을 감행했다.
마두로 정부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포장지를 쓰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들을 달래고 평범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경제 조처들을 시행하고 있다.
마두로는 자신이 시행할 조처들이 “신자유주의 자본가들의 흉악한 공격[“경제전쟁”]을 막고 건강하고 생산적이고 균형 잡힌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공격은 그의 주장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마두로 정부는] 평범한 베네수엘라인 수백만 명의 생명줄인 석유 보조금을 없애 버렸고, 새로 정해진 최저임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우파 정부가 1989년에] 비슷한 조처를 시행했을 때, 베네수엘라 수도를 뒤흔든 대중 봉기[‘카라카소’]가 분출했다.
마두로 정부는 부가가치세 세율을 12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올리려 한다. 부가가치세는 빈부와 상관 없이 매겨지는 일률 과세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세율 인상의 타격을 가장 크게 입는다.
이에 더해, 마두로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만든 새 화폐 ‘볼리바르소베라노’를 유가와 연동된 가상화폐 ‘페트로’와 연동시켰다.
새로 결정된 월 최저임금 1800만 볼리바르소베라노의 가치는 약 30달러[한화로 약 3만 3000원]다. 이전에는 이보다도 약 1.3달러[한화로 약 1500원] 적었다.
이는 여전히 생필품과 공과금 지불을 위해 필요한 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는 이런 미적지근한 개혁을 할 때조차 [부자들을 위한] 중재 조처를 포함시켜야 했다. 정부는 최저임금 개혁 이후 90일 동안 사용자들에게 노동자 임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고 있다. 벌써부터 임금 인상 때문에 기업이 파산할 것이므로 기업 운영을 중단하겠다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마두로는 8월 초에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 조처는 마두로가 “제국주의 세력들”이 감행한다고 비난하는 “경제전쟁”[공격]에서 잠시 숨 돌릴 수준일 뿐이다.
베네수엘라 우파는 이 기회를 노려 ‘총파업’을 단행했다.
상점과 작업장 다수가 문을 닫았다. 이 ‘파업’과 화폐개혁이 야기할 혼돈이 미칠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베네수엘라 우파와 미국 외교 당국은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그들은 이번 위기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좌파 정부 당선 물결의 핵심 고리를 파괴할 기회로 본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대부분 경제 제재 압력에 짓눌려 우파에 정권을 내어 주거나 [좌파적 개혁] 정책을 되돌려야 했다.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보면, 좌파 정부는 자본가들이 가하는 엄청난 압력에 짓눌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정부라면 그 압력이 훨씬 클 것이다.
결론은, 그런 압력에 아래로부터 [투쟁으로] 맞서야 하고, 국경을 넘는 연대를 제공할 국제 노동계급의 힘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