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보판
가정 폭력, 여성 차별,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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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서구 전처 살인사건’을 계기로 쓴 ‘가정 폭력, 여성 차별, 자본주의’(2018년 11월 20일자)의 증보판이다. 이 사건의 1심 재판 선고(2019년 1월 25일 예정)를 앞두고 한국여성의전화가 가해자 사형을 촉구하는 연서명 동참을 호소하고 있어, 이에 대한 입장을 새로 포함시켰다. 사형제 폐지의 필요성을 다룬 글도 링크했다.
25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결국 전 남편에게 살해된 일이 벌어졌다(‘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 폭력의 심각성이 재조명되고 있다. 해결책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가정폭력특례법이 시행된 지 20년이나 됐고 수차례 개정도 했지만 그 실효성은 미미하다는 점이 다시금 드러났다. 그러자 각계에서 ‘법의 사각지대 해소’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내달인 12월 ‘여성폭력방지 국가행동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성가족부의 가정 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평생 신체적·성적·경제적·정서적 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한 비율은 23.2퍼센트였다(2016년). 하지만 숨겨진 부분이 훨씬 더 많은 가정 폭력의 특성상 실제로는 더 심각할 것이다.
가정 폭력 신고율은 극히 낮다. 피해 여성은 대부분 자신이 학대 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꺼린다. 생계나 자녀 문제로 얽힌 관계, 보복의 두려움, 수치스러움 등이 신고를 꺼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경찰에 대한 이해할 만한 불신도 작용한다. 정부는 가정 폭력으로 해마다 몇 명이 죽는지조차 파악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집계한 사망 통계가 전부다.
경찰은 신고를 받아도 단순한 ‘집안일’로 치부하며 외면하기 일쑤다. 검찰과 법원도 가정 폭력을 무성의하고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가정 폭력 범죄의 기소율은 9퍼센트가량밖에 안 된다. 이는 피해자가 고소를 원치 않는 비율이 높아서이기도 하지만(가정 폭력은 피해자 의사 없이는 기소·처벌할 수 없는 범죄다), 수사기관이 형사 처분에 미온적인 탓도 있다. 객관적 기준도 없이, 가해자가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검사가 기소를 유예해 주는 제도도 있다(‘상담조건부 기소유예’). 피해자가 신고할 정도면 폭행 정도가 심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말이다.
피해자가 고소나 처벌을 원치 않을 때 법원은 형사 처벌 대신 ‘보호처분’(격리나 접근 금지 등)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 내리지 않는 비율이 42퍼센트나 된다. 그나마 내려진 처분조차 상담 위탁이나 사회봉사 명령 등 피해자의 안전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접근 금지 처분은 0.2퍼센트에 불과했다(2018 사법연감).
경찰과 법원의 처분을 어겨도 과태료밖에 매길 수 없다는 맹점도 있다. 이번 ‘강서구 전처 살인’의 가해자도 이런 구멍을 이용해 보란듯이 접근 금지를 어겼다. 가정 폭력 사건 처리에 드는 기간은 평균 3.6개월이나 된다(2014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 피해자가 가해자와 한 집에서 살고 흔히 반복적 가해가 벌어지는 가정 폭력의 특성상, 이토록 더딘 처리는 피해자에게 별 쓸모가 없다.
처벌 강화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처럼 법과 제도가 허술해 처벌 강화 목소리가 높다.
‘강서구 전처 살인’의 가해자를 사형시키라는 피해자 딸의 국민청원에는 20만 명 넘게 동참했다. 유족의 애끓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지지할 수는 없다. 사형제는 유엔이 폐지를 권고하는 불합리한 형벌일 뿐 아니라, 사형제가 흉악 범죄를 줄이는 것도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강서구 전처 살인’ 재판 1심 선고를 앞두고, 공식 SNS 계정을 통해 가해자 사형 촉구 연서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어머니를 잃은 딸들의 간절한 호소에 화답하려는 선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형제는 “국가가 저지르는 살인”으로, 사형제 폐지는 국제 진보 진영의 공리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한국의 진보·좌파도 사형제 폐지를 요구해 왔다.(사형제 폐지의 필요성을 설명한 본지 기사 바로가기) 한국은 21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국가인데, 진보단체들은 사형 집행 재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사형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아무리 끔찍한 젠더 폭력 가해자라 해도, 사형 반대의 예외일 수는 없다. 게다가 진보적 여성단체가 사형 선고를 지지하면, 사형제 존치와 사형 집행 재개를 요구하는 우익의 목소리를 키우는 데 이용될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오랫동안 가정 폭력 반대 운동에 헌신한 여성단체들은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법 개정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처벌 강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에 경찰청장 민갑룡은 “경찰이 현장에서 위하력[엄한 형벌로 위협함으로써 범죄를 억지하려는 것]을 가질 수 있게 적절한 법이 갖춰져야 한다”고 했다.
물론 가정 폭력 피해자의 신고가 제대로 처리되고 안전을 더 잘 보장하도록 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가정 폭력을 가벼이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가벼운 제재는 좀 더 강화될 필요도 있다.
가령, 피해자가 안정된 상태에서 후속 절차를 결정할 수 있도록 가해자를 우선 격리하는 조처를 의무화하고, 사건 처리 기간도 대폭 단축해야 한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도 폐지돼야 한다. 가해자가 경찰과 법원의 처분을 어기면 (과태료 부과가 아닌) 더 강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이 ‘가정 유지’가 아닌, 피해자 보호로 바뀌어야 한다는 여성단체들의 지적도 옳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의 처벌 강화책 중에는 지지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상당수 여성단체들은 현행법이 다른 범죄와 달리 가정폭력에 대해서만 형사 처벌 외에 ‘보호처분’이라는 우회로를 열어 두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래서 ‘형사 처벌 원칙을 수립하라’고 요구한다. 미국에서 시행되는 ‘강제 기소주의’를 한국에 도입하라는 요구도 같은 취지다.
그런데 이는 가정 폭력 범죄의 기소·처벌·보호처분 등에서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게 돼 있는 조항을 폐지하거나 제한적으로 적용하라는 요구와 직결된다.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취약하므로 자발적 ‘선택’을 하기 힘들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반의사 불벌죄’나 ‘피해자 의사 존중’ 법 조항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국가의 미온적 대응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단지 판단력이 떨어져 고소나 처벌 등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피해자들은 경제적 문제나 자녀 양육, 다른 대안의 부재 등의 이유로 당장의 폭력 제지나 신변 보호만 원할 뿐 남편을 처벌하거나 체포하기를 원치 않을 수 있다. 일부 진보적 법조인들의 우려처럼,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형사 처벌을 강제하면 오히려 신고율이 더 떨어질 수 있다.
물론 여성이 눈앞의 위협이 없는 진정된 상태에서 진로를 결정할 수 있게 국가가 도울 수는 있다. 무기력증이나 트라우마가 심한 피해자는 충분한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지원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든 여성의 의사에 반한 국가 개입을 요구할 수는 없다. 어떤 ‘전문가’의 판단도 여성의 자기 결정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 여성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순 없기 때문이다.
일반으로 말해, 국가의 처벌 강화가 가정폭력을 줄이지 못했다는 점도 봐야 한다. ‘기소 강제주의’, ‘체포 우선주의’를 이미 실행하고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폭력과 범죄를 낳는 토양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벌주의는 폭력을 근절하지는 못하면서 오히려 경찰력 강화나 지배자들의 우파적 의제 추진에 이용되곤 했다. 박근혜 정부가 가정폭력을 ‘4대악’에 포함시키면서 경찰 대응 강화를 추진했지만, 가정폭력이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기관들과 경찰은 본성상 여성 해방의 수호자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 차별을 낳는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기구다. 따라서 진보·좌파는 국가 권력 강화 요구에 신중해야 한다.
가정 폭력의 뿌리
지배자들은 가정 폭력 근절을 외치지만 정작 그 원인에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가정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소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적 소외는 생산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이 없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조차 자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을 착취하는 자들의 힘을 키워 줄 뿐이다. 이처럼 ‘통제력이 박탈된 상태’를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소외라고 한다. 소외는 사람들이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여기게 만들고, 좌절감을 준다.
물론 소외를 겪는다고 모든 남자가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각각의 개인들이 그런 행위에 이르게 된 매개 고리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소외를 각별히 심하게 겪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에 관한 여러 연구를 보면,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실업 상태인 집단에서, 아동기에 폭력을 경험한 집단에서 가정폭력 가해율이 높게 나타난다. 물론 지배계급 가정도 폭력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하지만 부와 권력 덕택에 그들은 문제를 훨씬 더 잘 무마·은폐할 수 있다. 또한 지배계급 여성들의 경제적 풍요는 그들이 받는 성차별을 완화할 수 있다.
2016년 여성가족부 실태조사에서는 (가정폭력 가해) 응답 남성의 64퍼센트가 아동기에 가정폭력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수준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과 관련성이 높고, 사회적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실업은 가난과 직결된다. 그리고 이 모든 요인들이 소외를 강화한다.
가족은 바깥 세상에서 받은 무시와 상처, 좌절을 달랠 안식처로 (전통적 가치관에 의해) 여겨진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족에 가하는 압박은 그 기대를 이내 산산조각 내고 만다. 사람들이 ‘무정한 세상의 안식처’로 여기는 곳이 실제로는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지옥이 된다)는 모순이 가족을 억압, 증오, 때로는 폭력이 뒤섞인 감옥으로 만든다.
특히 노동계급 가족이 받는 경제적 압박은 가족 관계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소득과 재산이 곧 존엄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집에 부족한 생활비를 가져올 때마다 노동계급 남성의 자존심은 좀먹는다. 이들이 직장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개인적 죄책감으로도 이어진다.
남편들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아내가 세워 주길 갈구한다. 하지만 불만족스러운 생활수준과 불안한 미래는 아내들의 실망과 분노도 키우기 마련이다.
가정폭력을 ‘남성 권력의 표현’으로 여기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와 달리, 오히려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권력을 갖지 못한 현실이 폭력의 원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해서 낙담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사회의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여성 차별 때문에 그 분풀이 대상은 아내나 자녀가 되기 쉽다. 여성이 전례없이 많이 노동시장에 진출했어도 ‘집안일’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통념이 여전히 강하다.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은 노동계급 가족, 특히 그 안의 여성에게 노동력 재생산의 부담을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탓에 여성에 대한 온갖 차별이 정당화되고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국가가 가정 폭력 피해자 보호에 그토록 소홀한 이유도 자본주의 지배자들에게는 여성 인권보다 가정 유지가 제1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지원에 걸림돌이 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가정폭력의 해결책은 국가 처벌 강화로 환원될 수 없다.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대안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억압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다.
자립할 여건이 되면 여성들이 스스로 폭력적 관계를 청산할 여지도 커진다. 따라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주택이나 충분한 생활비, 직업 제공 등 복지를 대폭 늘려야 한다. 이혼을 까다롭게 만드는 장애물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 기구는 경찰력 강화에는 대폭 투자하면서도, 정작 가정 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주택과 복지 확충에는 인색하다. 경제 위기 시기에는 그나마 유지되던 지원조차 삭감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가정 폭력 피해자 지원도 보잘것없다. 상담소와 피해자 보호시설은 안 그래도 부족한데, 그조차 정부 지원만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해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현행법 상 보호시설에 입소한 피해자는 최소한의 생계비와 아동양육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지만, 정작 정부가 예산을 충분히 배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보호시설에서는 6개월밖에 지낼 수 없고(연장해도 최대 12개월), 그보다 안정적인 임대주택은 전국에 300여 호밖에 되지 않는다(2018년 6월 30일 기준).
문재인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서 가정폭력 보호시설 퇴소 후 1인당 지원금을 500만 원으로 할당했다고 홍보한다.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맨 몸으로 간신히 탈출한 피해 여성들의 삶을 건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가 재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비롯한 노동계급과 서민층 전반의 삶을 악화시킬 것이다. 정부는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는 데 여념이 없다. 임금과 노동조건을 체계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복지 확충에도 인색하다. 낙태 처벌 강화 등 여성을 옥죄는 정책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 폭력의 주된 원인인 가난과 소외를 증대시키고 노동계급 가족의 삶을 더욱더 압박할 것이다. 또한 여성이 폭력적 관계를 끝낼 능력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여성차별 반대 운동은 국가를 파트너로 삼으면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맞서 노동계급의 조건을 지키고 복지를 확충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더 나아가, 폭력과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도전하고, 개인들의 건강한 결합이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