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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망 10년 ─ 노무현을 알면 문재인이 보인다

[2020년 5월 26일 편집자 주]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1주기가 얼마 전이었다. 친노 진영 정치인들이 모여 추모의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진보정치 지도자들도 이에 발맞춰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식의 발언들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진보 개혁 염원에 힘입어 당선됐지만, 첫해부터 그에 역행하는 일에 주력했다.
사측의 손해배상 가압류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귀족” 운운하며 매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첫해부터 탄압에 직면했고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는 악법으로 해고 위협에 직면했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동조해 전투병 수천 명을 파병했다. 한국 사회를 더욱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할 목적으로 한미FTA를 체결했다.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했고, 국민연금, 대학 재단의 이월금 등을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겠다더니, 폐지도 개정도 없었고, 이듬해 진보정당 당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고 진보진영을 친북이라고 몰아붙였다.
요컨대, 진보 개혁을 약속해 권력을 얻고는 그 권력으로 기업주에게 헌신한 것이 “노무현 정신”이다. 그 허위의 정신은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진보·좌파 노동계가 맞서 싸워 실체를 드러내야 할 대상이다.
지난해 10주기를 맞아 게재한 기사를 재게재한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눌렀다. 노무현은 천대받는 대중이 우파 이회창에게 가진 반감과 그들의 개혁 열망에 기대어 승리할 수 있었다. 좀더 직접적으로는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압사시킨 사건과 그에 대한 무죄 판결, 미국의 대북 강경 노선이 낳은 불안 속에 벌어진 40만 청년 촛불 시위의 수혜자였다.

노무현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평등과 정의가 구현돼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를 그가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상고를 졸업해 판사까지 오른 경력, 노동자들을 변호한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은 그가 주류 정치인들과 다른 점이었다.

반대로 기성 권력자들과 보수 언론은 노무현이 전통적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를 멸시했다. 동시에 그가 표상하는 대중의 진보 염원을 경계했다.

그러나 청와대에 들어간 직후부터 빠르게 노무현은 기존 체제에 타협했다. 사실 그는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후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2001년 초 대우차 부도 때 부평 공장을 방문해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고 말했고, 1998년 현대차 파업 때도 노무현은 정리해고를 수용하라고 압박했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에 찬성했고, 기업의 이윤을 갖고 복지와 실업자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만 지독한 냉전주의 우파이자 주류 기득권층 출신인 이회창과 대비돼 그의 서민적·개혁적 이미지가 더욱 부각됐고,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그에게 애써 환상을 덧씌우려 한 덕분에 이런 본색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집권 전에 포퓰리즘을 표방해 온 점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모순 투성이였고 좌충우돌한 언사를 많이 했다. 그러나 개혁 약속을 신속히 거둬들이고 노골적인 친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서 나름의 일관성도 보였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

대선 후보 시절 노무현은 “전쟁이냐 평화냐” 하며 평화를 내세워 많은 표를 챙겼다. 그러나 노무현은 2003년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을 결정했다. 그해 2월 15일 전 세계 1500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반대 시위에 나섰는데, 노무현은 정반대로 학살 동맹이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은 특히 청년 지지층에서 급속한 이탈을 낳았다. 8개월 뒤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서 노무현 스스로 “지지자 절반이 무너질 수 있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피랍됐을 때 ‘테러 세력과의 협상은 없다’고 매몰차게 외면하며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협조하는 것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용적 판단이라고 포장했다. 한·미 동맹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미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시위에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미군의 대중국 압박에 도움이 될 제주 해군기지 건설도 결정했다. 한국 지배자들의 오랜 한미동맹 전략에 반기를 들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훗날 조지 부시 2세 정부의 동아태 선임보좌관 마이클 그린은 “한·미 동맹에 대한 노무현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라며 “한미동맹이 더 강하고 좋아졌다”고 평했다. 다가올 5월 23일 노무현 사망 10주기 추도식에 부시가 참석하기로 한 것은 이런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친제국주의 행보가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온갖 협조를 다했지만 대북 압박은 완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긴장이 높아졌다. 사실 노무현의 전임인 김대중 정부도 미국을 도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공병부대와 10억 달러를 지원했지만 허사였다. 2002년 미국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해 오히려 긴장 수준을 높였다.

“비정규직의 눈물 닦아주겠다”더니

노무현 집권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다소 악화하고 있었다. 지배자들은 경제 위기가 노동시장이 “경직”됐기 때문이라며 노동유연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노무현은 이런 지배자들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경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해 한국 자본주의의 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말하더니 얼마 뒤에는 국제 자본가들의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노조 권한을 축소시키고, 파업 발생 건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사용자들이 해고를 더욱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KT는 무려 5500여 명을 명예퇴직 시켰다. 노무현은 화물연대 파업과 철도파업에 증오심을 드러내며 경찰력을 투입해 물리적으로 투쟁을 파괴했다. 그러고도 정부는 철도 파업에 7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학생들의 개인 정보를 집적하는 NEIS 도입 반대 투쟁을 한 전교조에 “단호한 대처”를 지시한 것도 노무현 자신이었다.

노무현은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반대했고, 노동자 간 임금 격차 운운하면서 ‘노동귀족론’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정작 비정규직을 쉽게 늘릴 수 있는 비정규직법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2003년 10월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씨가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하는 등 노동자 3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죽음으로 싸우는 시기는 끝났다”면서 오히려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냉대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단속추방이 계속됐다. 2007년 무고한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처럼 가뒀던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불이 나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 회피 : 수구 세력 포위론

2003년 말 홍세화 씨는 “민주화 시대에 수구와 ‘개혁’은 겉으로는 현란하게 싸우지만 반노동적·반민중적 신자유주의에서는 서로 만나는 멋진 공생 관계를 이룬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집권 1년 만에 정부 지지율은 25퍼센트로 추락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왼쪽의 압력을 차단할 필요를 느낄 때 가끔 ‘수구 세력 포위론’을 끄집어 냈다. 사람들의 불만을 거대 야당과 보수 언론의 ‘흔들기’ 탓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문재인도 좌파와 노동운동의 조급증이 노무현의 개혁 실패에 한몫했다며 이 포위론을 좌우 포위론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 좌우 포위론은 자신을 향한 개혁 요구를 달래는 데 이용되고 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세력관계를 오판한 보수 정당들은 노무현 탄핵을 시도했다. 하지만 구세력의 권좌 복귀를 반대한 대중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25만 명의 청·장년 시위 덕분에, 총선에서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오히려 심판받고 열린우리당이 압승했다.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었으니 이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다시 커졌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노무현은 “열 배 남는 장사도 있다”면서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공약을 폐기했다. 재벌 총수들을 만나 “규제 완화”를 약속했다. 8월 초에는 이라크에 전투병을 추가 파병하고, 관련 언론 보도마저 통제했다. 4대 개혁 입법은 변죽만 울리다가 누더기가 되거나 없던 일이 됐다.

오죽하면 우파의 탄핵 시도를 좌절시킨 바로 그해 말 열린우리당 자체 조사 결과에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보다도 서민과 거리가 먼 정당으로 꼽혔겠는가?

노무현은 개혁은커녕 개악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미 집권 첫해 국유였던 조흥은행을 매각한 것에 이어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바꾸는 등 민영화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 영리병원 허용, 국립대를 시장 논리로 내모는 법인화 추진도 노무현 시절에 시작된 것들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저항 때문에 민영화 정책은 정부 뜻대로 쉽게 추진되지는 못했다. 그러자 나중에는 ‘외부 충격 효과’를 노려 한미FTA를 추진했다.

그래놓고는 신자유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권력은 이미 시장에게 넘어갔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의 표현으로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했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압사시킨 사건과 그에 대한 무죄 판결, 미국의 대북 강경 노선이 낳은 불안 속에 벌어진 40만 청년 촛불 시위 속에 당선한 노무현은 집권 직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돕는 파병을 강행했다 ⓒ〈노동자 연대〉

문재인은 이 시절이 “정치 민주주의는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러나 이윤을 최우선하고 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신자유주의와 대중의 민주적 권리 확장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 수는 1000여 명에 달한다.

2003년 7월에는 인구 7만 명인 부안군에서 방폐장을 맘대로 짓는 것에 분노한 군민 1만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는데 경찰의 과잉 대응 때문에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도 노무현은 엄정 대응을 촉구했다. 계엄군을 방불케 할 정도의 진압이 벌어졌다.

사상 표현과 출판의 자유를 심각히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대체 입법을 추진했고(그나마 중도 하차했다), 정작 한총련 활동가들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탄압했다. 파업 원천 봉쇄 공익사업장 범위를 확대하는 등 노동자 투쟁을 제약하는 노사관계로드맵을 한나라당과 손잡고 통과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아예 집회를 금지하고 물대포와 진압 부대를 앞세워 원천봉쇄했다. 2005년 농민 시위에서도 농민 2명이 경찰 진압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삼성의 정치권 로비 사실이 담긴 녹음 파일이 폭로됐지만 녹취록의 주인공인 〈중앙일보〉 전 회장 홍석현은 불법 정치자금 제공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폭로하는 데 앞장선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기소됐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어찌나 컸던지 2007년 대선은 치르나마나 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비리 범벅’ 이명박이 무난하게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길 꺼렸다. 노무현 임기말에 뒤늦게 노무현 퇴진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미 투쟁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희석되고 사기가 떨어져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진실이 이랬는데도, 지금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우파의 재집권을 막으려고 문재인 정부와의 공조를 중시하다 못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미화하는 일에 동참한다. 일종의 역사 왜곡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당면한 노동자·서민층의 삶을 개선하거나 또는 문재인의 개악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논쟁이 아닌 것이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투쟁을 꺼리고 문재인 정부와 협력해서 개혁을 얻겠다는 전략으로는 개혁을 얻을 수도, 진보·좌파가 성장할 수도 없음을 노무현을 겪은 경험을 통해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