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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총선 대승리와 이후 :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배신했는가

21대 총선 결과 집권당이 압승을 거두자 민주당 핵심 인물들이 2004년 기억을 소환했다.

민주당 대표 이해찬은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면서 “야당의 협조”도 구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 이낙연은 “그때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면서 “실현가능성”, “신중”, “완급” 조절 등을 언급하며 이해찬의 말에 동조했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어떻게든 낮추려는 의도다.

일부 언론들도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해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빼앗긴 것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스스로 개혁 염원을 배신하고 지배세력과 타협하며 양보해, 대중의 불신을 산 결과이다.

이회창으로 표상되는 우파에 대한 반감과 개혁 열망 속에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했다. 이 선거는 두 여중생의 미군 장갑차 압사로 표출된 미국 대외정책 반대 시위가 벌어지던 가운데 치러졌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집권으로 개혁이 시작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전쟁 지지, 민영화 확대, 화물과 철도 등 노동자 파업에 경찰력 투입,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구속 등 기존의 정치 권력들이 벌여 온 일들이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고스란히 벌어졌다. 집권 초 80퍼센트에 이르던 대통령 지지율은 집권 1년 만에 30퍼센트로 주저앉았다.

우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를 의결했다. 선거로 당선한 지 1년 조금 더 된 대통령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우파적 국회의원들이 탄핵하고, 그를 지지해 준 진보적 개혁 열망 대중의 기세를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우익의 기대와는 달리 탄핵 시도는 역풍을 불러 왔다. 군부 독재의 잔당이자 원조 부패 세력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상당한 상황에서 탄핵 시도는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고 말았다.

탄핵 반대 운동이 솟구쳤고 그 여파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으며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도 10석을 얻으며 약진했다.

뒷걸음질치기

1988년 총선 이래 처음으로 ‘여대 야소’ 국회가 됐다. 곧 탄핵소추가 기각돼 노무현이 살아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 드라이브”가 시작될 것이라며 기대를 품었다. 노무현이 그동안 수구 세력 포위론을 펴며 개혁 후퇴의 책임을 보수 야당과 언론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강도 개혁”은 벌어지지 않았다.

노무현은 복귀 직후, 미국 대통령 조시 부시와의 교감 속에 이라크 파병 방침을 확정했고, 얼마 뒤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보복 피살됐다. 그런데도 두 달 뒤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다.

2003년 한 해에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12만 명 늘었지만, 당시 재경부 장관 이헌재는 “노동 시장 유연성”, “불법 노사분규 엄정 대응”을 발표했다. 시장주의적 공격에 대한 노동자 저항을 염두에 둔 엄포였다.

노무현은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면서 총선 공약이던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없던 일로 했다. 2003년 아파트 분양가가 1997년보다 갑절로 뛰었는데도 말이다. 조중동이 노무현을 칭찬하고 나섰다.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를 노무현과 이회창·박근혜·재벌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망갔던 재벌총수들이 줄이어 귀국해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은 이들에게 “규제 완화”를 약속했다.

제국주의 전쟁 지원에서 재벌총수 면죄부까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대변하려 한 지배계급의 이익에 충실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겠다던 약속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2005년 4월 민주노총 집회 ⓒ〈노동자 연대〉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관계법 개정, 과거사법 제정)은 어땠나?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역사의 박물관에 보내자”던 노무현 정부는 국보법의 핵심을 유지하는 형법 개정을 대안으로 내놓아 사람들을 실망시키더니, 최종적으로 글자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다른 ‘개혁 법안’들도 누더기가 됐다.

2005년 6월 노무현은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했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가 거부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 자체가 개혁 염원 대중의 큰 실망을 자아냈다.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함께 비정규직 개악안·노사관계로드맵 등 노동법 개악을 강행했고, 노무현 정부 임기 동안 4번이나 자이툰 부대 파병연장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한미FTA 추진,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과 반대 운동 탄압,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도 벌어졌다.

결국 개혁 배신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반감이 하도 커서 대선은 치르나마나 한 상황이 됐다.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은 2002년 이회창과 비슷한 표를 얻어 당선했다. 반면에 여당 소속 정동영은 노무현 득표의 절반만을 얻었다.

노동자 운동은 2004년에서 정치적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민주당은 개혁의 주체나 동반자가 결코 아니고 단지 보수 세력이 발목을 잡아서 개혁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노동자의 친구를 자처한 친자본주의 정부를 믿었다가 노동자들은 큰 낭패를 겪었다. 노동계 정당들은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노무현의 실패가 범진보진영의 실패라면서 여당과 ‘개혁 공조’를 내세우다 동반 추락해 결국 분열에까지 이른 쓰라린 경험을 돌아봐야 한다. 노동계급 대중이 스스로 싸워야만 개혁을 얻어낼 수 있다.

이 기사를 읽은 후에 “총선 승리한 정부·여당: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를 읽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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