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직무급제:
“동일임금” 미명 아래 추진되는 임금 억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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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직무급제 도입을 상당히 진척시키고 있다. 직무급제 도입은 호봉제 비중이 높은 현재의 임금체계를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말만 무성했던 우파 정부 시절에 비해 속도감 있는 직무급 추진을 보여 주는 일들이 지난 1년 새 벌어졌다.
은밀하게 속도 내는 직무급제
첫째, 정부는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전환자들에게 직무급제를 도입하고 있다. 이미 수십 개 기관에 직무급제가 적용됐다. 정부는 이를 지렛대로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전체로 직무급제를 확대하려 한다. 지난 10월 2일 홍남기 부총리가 “20만 공무직 임금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한 것은 이런 뜻이다.
둘째, 공공부문 정규직에 대한 직무급제 도입도 시나브로 추진되고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공공기관의 직무별 임금을 공시하겠다고 한다(임금분포공시제). 직무 분류 기준을 만들고 이에 맞춰 임금을 공시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손사래치지만, 직무 분류가 직무급제 설계의 첫 공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공공기관 정규직 직무급제 추진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게다가 정부는 직무급제 도입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셋째, 정부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추진하면서 직무급제를 적용했다. 이 모델은 지금까지 강원, 대구, 구미, 군산 등 6개 지역으로 확대됐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로 만들어질 일자리들에 “직무와 성과 중심의 선진형 임금체계가 도입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직무급제가 공공부문뿐 아니라 민간기업으로도 확대된다는 것을 뜻한다.
임금 차별 정당화
문재인 정부는 직무급제가 임금 차별을 해소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는 임금체계라고 정당화한다. 정부가 원하는 바가 정말 그것이라면, 그동안 차별받은 비정규직과 여성의 임금, 그리고 청년들의 초임을 대폭 올려 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80퍼센트 수준으로 올리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 청년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최저임금 인상도 ‘이제 그만’ 하겠단다.
무엇보다 중앙부처·지자체·공공기관들이 마련한 무기계약직 전환자 직무급제를 보면, 그것이 임금 차별 해소는커녕 해당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장기간 묶어 두려는 속셈임을 알 수 있다.
직무급제 하에서는 주로 청소, 경비, 시설관리, 조리, 사무보조 등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직무가 낮게 평가되는 데다 상위 직무 등급에 오르기도 어려운 탓에,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처음부터 정부는 이들의 정규직 전환에 돈을 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호봉제 중심의 기존 임금체계 편입 시 급격한 재정부담이 우려된다.” 이게 문재인 정부가 무기계약직 전환자에게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본심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어쩌구는 진보 색칠용일 뿐이다. 사실 더 나아가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노동자들 처지에서는 속 터지고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임금에 고착될 판인데도 차별이 아니란다. ‘청소, 경비, 시설관리, 조리, 사무보조 직무의 가치가 낮으니, 당신들의 저임금은 직무 가치에 걸맞은 공정한 임금이다!’
게다가 지금 정부는 하라는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차별) 해소는 외면하고, 애꿎은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내의 임금 격차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공공부문 일부에 도입된 무기계약직 전환자 직무급제(저임금 고착 효과)를 공공부문 무기계약직(공무직) 전체로 확대하려는 것이자, 언감생심 정규직 임금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기업 정규직 임금 후려치기
직무급제 도입이 임금 억제를 노린다는 것은 공공부문 정규직 대상의 직무급제와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직무급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직무급제 도입의 목표 하나는 현재 임금 체계의 연공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순히 연공서열대로 임금이 올라가는 구조는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 점은 이전 대통령들도 다 강조했으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사용자들의 임금 부담 증가를 줄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직무급제가 도입되면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본급이 대폭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 연구는 하락 폭이 15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직무급은 직무 등급 내 임금 상한선을 둬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쉽다. 상위 직무 등급으로 올라가기 쉽지 않은 것도 임금 상승을 어렵게 만든다. 오래 일해도 임금이 거의 제자리이기 십상인 것이다.
직무급제 도입의 또 다른 목표는 사용자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높은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후려치는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직무급제는 기존 자동차 노동자 임금의 반값 수준으로, 그런 구실을 잘 보여 준다.
〈조선일보〉는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업계의 설렘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업계에서는 광주형 일자리가 자동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반값 연봉과 5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임단협 등 기존 자동차회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저항에 나서야 한다
임금 억제 말고도 정부와 사용자들이 직무급제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더 있다. 직무급제는 유연한 전환배치에 도움이 되고(직무를 폭넓게 분류하는 경우), 관리자들의 현장 통제력을 강화한다(직무 평가에 따른 줄세우기). 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을 이간질해 각개격파 하기가 좀 더 쉽다.
또, 사용자들은 직무 가치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각 등급의 임금을 정해서 매번 임금 협상(과 투쟁)으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전환배치와 함께 현장 노동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길이다.
온건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부·사용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더 나은 직무급 모델을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직무급 임금체계 그 자체로 임금 차별 해소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처음 보장한 것은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이었다(제1차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체결한 조약).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조차 남녀 임금 격차가 의미 있게 줄어든 것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분출한 노동자 파업과 동일임금 쟁취 투쟁 덕분이었다.
장기 경제 침체에 빠진 정부와 사용자들은 비정규직과 여성에게 동일임금 주기를 어떻게든 피하려 할 것이다. 정규직 임금 억제에는 사활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동일임금 기치는 직무 가치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고, 정규직·남성 임금 억제를 압박하는 명분일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노동자가 함께 문재인 정부의 직무급 도입에 맞서 저항에 나서야 한다.
지금 공공부문 비정규직과 여성들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조직화에 나서고 있다. 그 힘을 투쟁에 사용할 때만 차별을 해소하고 임금을 개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