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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당시의 반전 운동을 돌아보며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는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전쟁 발발 약 40일 만에 부시는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이라크라는 수렁에 빠졌다. 전쟁 ‘승리’ 후 17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지배자들은 이라크전 패배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먼저,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쇠락하는 현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전 세계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이라크 현지에서 점령에 맞서 끈질기고 거센 저항이 벌어졌고, 그 저항이 ‘또 다른 수퍼 파워’와 결합됐다. 〈뉴욕 타임스〉가 2003년 2월 17일자 1면 머릿기사가 말했듯, 당시 “지구 상에는 두 개의 ‘수퍼 파워’”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전 세계의 [반전] 여론이다.” 미국 제국주의는 중대한 저항과 도전을 받았다.

두 개의 ‘수퍼 파워’

이 반전 운동이 놀라웠던 점은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대중 운동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도 전쟁 발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본격화됐다.)

2003년 2월 15일 영국·미국·이탈리아·스페인·오스트레일리아·이집트 등 전 세계 6대륙 60여 나라 600여 도시에서 약 200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최대 규모의 국제 반전 시위를 벌였다. 남극 국제과학기지에서 일하는 과학자들도 영하 30도 추위를 무릅쓰고 실외 집회를 했다! 서울에서도 약 5000명이 거리에 나왔다.

미국의 전쟁몰이에 도전한 ‘또 하나의 수퍼파워’ 2003년 2월 1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 100만 명이 참가했다 ⓒ출처 〈소셜리스트 워커〉

그 전 해인 2002년 영국 런던에서 40만 명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00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이런 대규모 운동은 1999년 시애틀 항쟁 이후 만개한 대안 세계화(국제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반전 운동과 연결됐기에 가능했다.(관련 기사: 본지 307호 ‘시애틀 항쟁 20주년 — 위대한 반자본주의 항쟁’)

이런 연결은 특히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국내 정책 실패로 정치적 파산 직전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2001년 7월 제노바에서 G8(주요 8개국) 정상회담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고, 뒤이어 당시 총리이자 부패한 우익 정치인 베를루스코니에 맞선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분출했다.

두 운동의 연결에서 혁명적 좌파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비롯한 급진 좌파와 무슬림 단체들이 2001년 9·11 테러 후 열흘 만에 공동전선인 ‘전쟁저지연합’을 건설해 전쟁 반대 운동 건설에 착수했다.

이런 운동들 덕에, 미국은 국제적으로 상당히 고립된 채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UN 등 국제 기구로부터 거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던 1991년 걸프 전쟁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와 당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공공연히 전쟁 반대 입장을 발표했고,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친미 국가 터키는 미국의 전쟁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을 수렁에 처넣다

애초에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을 재천명하려 했다. 9·11 테러를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다음으로 이라크를 겨냥한 이유였다.

‘테러와의 전쟁’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 입각한 도박이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장악해 중동 통제력을 강화하고, 이로써 중동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잠재적 경쟁자들보다 우위임을 보여 주려 했다.(부분적으로는 군사력을 동원해 중동에 미국식 정치·경제 체제를 이식한다는 목표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목표는 첫 단추부터 어긋났고,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점령에 맞선 저항과 국제 반전 운동이 서로 갈마들며 미국의 점령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했다. 점령군은 끝없는 게릴라 투쟁에 시달렸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주창한 (소규모 첨단 군대로 전투를 치르고 ‘외과수술식’ 정밀 폭격을 한다는) ‘전환적 전투’ 이론은 점령에 반대하는 분노한 대중 저항 앞에서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이런 저항에 고무된 아랍 지역 저항 운동가들이 훗날 아랍 혁명을 이끄는 주역이 됐다.

국제 반전 운동은 점령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심각하게 제약했다. 미국 본토에서 부시 정부를 정조준한 대규모 반전 운동 때문에 미군의 이라크 증파 시도는 계속 제약됐다.

국제 반전 운동 때문에 그나마 있던 동맹들도 하나둘 발을 빼야 했다. 2003년에 부시의 전쟁을 지지해 파병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총리는 모두 반전 운동으로 실각했고, 두 나라 모두 군대를 철군해야 했다.

부시와 그 동맹들은 심각한 도덕적·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사상자 수치가 끝없이 올라가고 점령군이 이라크인들에 가한 고문·가혹행위가 폭로되면서, (침공의 명분이었던) ‘대량 살상 무기’는 없었고 점령이야말로 대량 살상 행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국의 전쟁을 적극 지지해 ‘부시의 푸들’이라 불리던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대규모 반전 시위에 밀려 2006년에 사임했다. 부시 자신도 2006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했다.(부시가 2004년 대선에서 승리해 재선한 것은,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가 이라크 전쟁을 부시보다 더 잘 치르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라크 철군을 공약한 버락 오바마가 다음 대통령이 됐다.

어떻게든 현지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에서 시아파/수니파 무슬림을 이간질해 끔찍한 내전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술수는 이라크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미국은 이라크 정권을 친이란계 시아파 정치 세력에 넘긴다는 커다란 후퇴 끝에 이라크를 부분적으로마나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 안정조차 오래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국의 애초 목표였던 패권 과시는 사실상 실패했다.

노무현, 파병으로 위기에 빠지다

노무현은 “전쟁이냐 평화냐” 하며 이라크 전쟁 직전이었던 2002년 말 대선에서 승리했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는 등 대북 강경 노선을 천명한 데 대한 불안감 속에 벌어진 40만 명 규모의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항의 운동 덕이 컸다.

그러나 노무현은 취임 직후에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2003년 4월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민 약 75퍼센트가 반대한 파병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9월에 부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더니 미국의 전쟁에 앞장서 동참한 것이다.

이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한국의 전쟁 동참이 낳은 희생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은 노무현 정부의 친제국주의 면모를 백일하에 드러낸 비극이었다. 2004년 6월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노동자 연대〉 자료사진

미국의 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한반도 평화를 구한다던 노무현 정부의 “평화 교환론”은 완전히 파산했다. 노무현이 파병으로 “어려울 때 미국을 돕”는 것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역효과를 낳았다.(관련 기사: 본지 294호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평화에 해로웠다 — 문재인의 호르무즈해협 파병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리[한국] 기업의 이라크 진출도 고려[한] ... 국익에 부합하는 선택”(노무현 대국민 담화)이라던 파병 때문에 평범한 한국인도 희생됐다. 2004년 6월 미군 군납업체 노동자였던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집단에 피랍·살해됐다. 2007년 2월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 방문을 경호하던 윤장호 하사가 폭탄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바그람 기지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의 점령 반대 저항 인사들을 납치·고문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이 고문 건 때문에 여러 명이 기소됐다.) 같은 해에는 선교 차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던 두 명도 피살됐다. ‘평화 재건 부대’라 최전방에 주둔하지 않았으니 안심이라던 이라크 북부의 자이툰 부대도 최소한 한 차례 이상 공격받았다.

파병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위기에 빠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노무현은 김선일 씨가 살해되는 것도 아랑곳 않고 파병 철회 요구를 거부했지만 수만 명이 노무현의 파병에 반대해 집회에 나섰다. 우파의 노무현 탄핵 시도에 맞서 거리 운동이 벌어진 지 고작 3개월 만이었다. 정부는 파병 결정 이후에도 계속됐던 반전 운동과 드높았던 반전 여론을 피해 출병 일정 보도도 통제하는 ‘도둑 출병’을 해야 했다.

노무현 자신조차 이라크 파병으로 “지지자 절반이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실제로 대중은 노무현 정부의 친제국주의·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실망하면서 노무현에 등을 돌렸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계속 맞서야

미국 지배자들의 ‘테러와의 전쟁’ 도박 때문에 외려 미국의 취약함이 드러나게 됐다. “21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던 부시의 호언장담은 된서리를 맞았다.

국제 반전 운동이 중요하게 한몫한 덕이었다. 반전 운동은 강력한 대중 운동으로 지배자들의 전횡을 심각하게 타격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동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이라크 전쟁·점령은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의 핵심 고리였(고 그에 맞서 전 세계 반전 운동도 온전히 중동 전쟁에 맞서 집중했)다. 반면 지금 트럼프는 중동 수렁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와중에 이란과 충돌했다.

트럼프는 오바마처럼 중동보다 중국이 부상하는 아시아에 미국의 역량을 집중하고자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오바마와 달리 이란과 타협하지 않고 협박을 가해 이란의 양보를 받아내고자 했다. 그러면 중동에 대한 통제를 지키면서 아시아로 갈 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은 오판임이 드러났다.

미국 지배자들은 중동에서 대규모 전쟁을 또 벌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미국의 ‘몸부림’은 중동에서 예측 불허의 상황을 낳고 피와 오물을 뿜어낼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미국의 이란 압박에 동참하는 문재인 정부의 파병에도 계속 맞서야 함은 물론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점령에 줄기차게 반대해 “남한에서 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기적”을 낳는 데에 기여한 혁명적 좌파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새로운 저항의 세기’로 바꿔버린 위대한 반전 운동의 경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영감과 교훈의 보고다.

자이툰 부대 철군 결정 시점에 대해 필자의 착오가 있어 해당 부분을 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