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민주항쟁 40주년:
군부 독재에 맞서 일어난 위대한 무력 저항과 대중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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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인 사람 모두가 흥분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어떤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바로 어제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저항을 목격했었다. 그런데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지금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어제까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 그들의 몸짓과 말은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 지금 내 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습은 ‘폭도 학생들’과 ‘깡패’ 그리고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는 군인들의 발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목격한 미국인 자원봉사자 폴 코트라이트는 최근 출판된 회고록
물론 위에서 묘사한 기쁨과 열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짓밟혔지만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얘기하는 것은 광주민주항쟁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할 것이다.
항쟁의 배경
광주민주항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모순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60년대 이래로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되는 방식의 자본축적은 세계경제의 등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아 한국 자본주의가 주기적인 위기에 노출되게 만들었다. 특히 1979~80년은 위기가 심각했는데, 1980년에는 산업화 이후 최초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앞서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초반의 위기에 대응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권위주의적 억압을 강화했었다. 그런데 1979년 당시 경제 위기가 한국 자본주의가 낳은 두 번째 모순
1970년대 국가와 회사에서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키려는 투쟁은 집요한 국가 탄압 때문에 금방 정치·사회적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1979년 YH무역 투쟁도 한 사업장에서 시작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적 초점이 됐다.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노동자들을 박정희 정권이 강제 진압한 것이 공분을 샀다.
YH 투쟁은 같은 해 부마항쟁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부마항쟁의 시발점인 부산대 학생들의 선언문에도 YH 탄압에 대한 항의가 주요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그동안 쌓인 계급적·정치적 불만을 격렬하게 표출한 부마항쟁은 군대를 동원한 박정희의 탄압으로 가라앉았지만 부마항쟁의 영향으로 지배자들 사이의 분열이 가속화됐다.
강경 조처로 계속 나아간다면 체제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경고했지만, 박정희는 억압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여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죽은 뒤의 상황을 결정지은 것은 김재규의 손 끝이 아니었다. 김재규를 밀어붙인 아래로부터의 힘과 박정희의 뒤를 이어 억압적 착취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전두환이 대립하게 됐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한편 박정희 죽음 이후 그동안 숨죽이던 학생운동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조직하고 학내민주화와 정치적 민주주의 요구를 제기하며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억눌린 불만을 터뜨렸고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1980년 초부터 4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발생한 노사분규는 809건이었는데 이것은 1979년에 105건이었던 것에 비해 7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투쟁은 전두환을 제압할 만큼 확대되거나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600여 명이 넘는 재야·학생운동 지도자·언론인 등을 체포하면서 전면적인 탄압에 나섰다.
다른 지역에서 투쟁이 멈춘 것과 달리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군부독재가 호남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면서 분열지배 정책을 써 왔기 때문에, 천대에 시달린 호남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대항하며 그동안 쌓인 분노를 표출했다.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광주를 초기에 잔인하게 짓밟아 본보기를 보여 주려 작심했다. 공수부대의 짐승 같은 야만 행위는 그 결과다.
항쟁의 전개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에 학생 100여 명이 모여 농성을 벌이자, 학교를 지키던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공격했다. 공수부대의 공격에 밀린 학생들은 시내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하면서 시내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곧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잡아서 무조건 군홧발과 곤봉으로 피범벅이 되도록 때렸고, 체포한 사람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기고 기합을 주고 괴롭혔다.
공수부대 폭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꼬마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 점원,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요식업소 종업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투쟁은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5월 21일 도청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 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제 곧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공수부대 발포가 시작됐고 조준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러자 사람들은 계엄군의 총격에 대응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시민군의 저항으로 5월 21일 저녁 드디어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했다.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는 소수 지배자들이나 전문 관료가 아니라 대중이 이 사회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을 얼핏 보여 줬다.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
“도청 건물 정문 쪽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테이블 앞에 줄을 지어 있었는데 테이블마다 대학이나 기관 등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청년들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묻고 받아 적고 있었다. 자원봉사자 접수를 받고 있는 창구였다. 등록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에게 청소 등을 비롯해 각자 자기들이 맡아서 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시민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쟁은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었고 전두환은 진압 기회를 노렸다.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청을 점령했다.
항쟁의 계승
광주민주항쟁은 물리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 많은 사람들이 광주민주항쟁의 영향으로 급진화됐고 군부독재에 맞서 기꺼이 싸우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는 군부독재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근본적 사회 변화
결국 1980년 광주민주항쟁은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전두환 군부독재를 무릎 꿇렸다.
광주민주항쟁은 한국 노동계급 운동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 볼 수 있다. 전두환이 박정희가 구축한 억압적인 착취 체제를 지키고자 광주 민중을 짓밟았듯이 박정희의 억압적인 착취 체제 속에서 형성된 거대한 노동계급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과정 속에 광주민주항쟁은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힘이 결정적 구실을 해 군부독재가 없는 오늘
이러한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광주민주항쟁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길일 것이다. 광주민주항쟁에서 보여 준 대중 민주주의는 몇 년에 한 번 투표하고 선출된 대표를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틀에 욱여넣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