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밍 사회 -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
캔슬 컬처에 대한 일부 통찰력 있는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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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 사회 -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북바이북)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일본에서 있었던 여섯 사건을 중심으로 ‘플레이밍 현상’을 다룬다. 플레이밍(flaming)이란 ‘불타오르다’는 뜻의 영어 단어로,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도 넘은 비방”을 뜻한다.
저자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플레이밍 현상과 명암과 배경을 다룬다. 코로나19 시기에 나타난 ‘자숙 경찰’(타인에게 자숙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나 행동), ‘아르바이트 테러 소동’(아르바이트생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상품 등에 장난을 치고 이를 재미로 촬영해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가 크게 비난을 받아 해고·퇴학 등을 당한 일), 2020년 일본 검찰청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해시태그 운동, 연예인에 대한 악성 댓글 공격과 그에 따른 자살, 수십 년 전 과거의 나쁜 행실이 이유가 돼 유명인들이 연이어 ‘캔슬’된 사건 등.
객관적으로 성격이 다른 사건들을 ‘플레이밍’ 현상으로 한데 묶어 설명하다 보니 혼란스러움이 있지만(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겠다), 캔슬 컬처 등을 비판적으로 다룬 부분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저자는 캔슬 컬처를 “저명인사의 과거 언동을 고발하고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활동을 보이콧하고 심지어 그 지위를 박탈하려는 풍조”로 규정한다.
한국 진보좌파 운동 내에서도 ‘캔슬’이 하나의 운동 방식으로 채택돼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현실을 보자면, 저자의 문제의식이 성찰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성찰을 자극
저자의 비판은 우파와는 다르다. 우파는 차별에 맞서는 운동 일반을 ‘캔슬 컬처’라고 비난한다. 트럼프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을 ‘캔슬 컬처’라고 비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인종 차별에 대한 반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겹게도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다. 얼마 전 〈조선일보〉도 그런 맥락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캔슬 컬처’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피억압자가 억압자에 맞설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억압자들의 차별은 단지 ‘표현’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언론이나 각종 제도,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언제든 차별을 부추길 ‘자유’를 누리곤 한다.
저자는 우파적 관점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으며, 이런 우익 포퓰리즘에 대해 경계를 촉구한다.
저자는 “관용적 자유주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그래서 우파뿐 아니라, “다양성을 지키려면 그것을 위협하는 자에 대하여 불관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캔슬 컬처 등을 옹호하는 “불관용적 자유주의”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는 다의성이 존재하고 세계에는 모호함과 복잡함이 있다. 즉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 공존하는 다양한 성향이나 동향이 있다.
“그런데 캔슬 컬처는 … 오직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근거해 그 인물의 인생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 인물이 다른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변해 왔는지, 즉 다의성이나 변화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르바이트 테러 소동’을 살펴보며 저자는 묻는다. “그들에게 내려진 엄격한 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행위 자체의 악독함보다는 거기서 생겨난 비난의 크기에 따른 것이 아닐까.”
행위의 진위나 시점, 경중, 행위자의 변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잘못을 범했거나 범했다고 알려진 개인을 온라인상에서 무책임하게 규탄하고 단죄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캔슬 컬처의 이런 문제점은 본지의 지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관련 기사: ‘캔슬 컬처, 차별에 맞선 효과적인 방법?’, 본지 413호)
소셜 미디어에서의 ‘해시태그 운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 운동이라며 일면적으로 찬양하거나 혹은 포퓰리즘에 의한 군중 행동으로 여기고 경탄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말한다. 이런 온라인 현상을 균형적으로 보려고 애쓰는 신중한 태도다.
“관용적 자유주의” 관점의 한계
그러나 계급적 관점이 없다 보니, 혼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의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나 일본의 검찰청법 반대 해시태그 운동도 플레이밍 현상이라는 범주로 묶는다. 플레이밍 현상에는 “빛과 어둠”이 모두 있으니, ‘쉽지 않겠지만, 끈기 있게’ 선용의 방법을 생각해 나가자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도 넘은 비방”로 규정한 플레이밍이라는 개념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에 적용한 것은 적절치 않다.
물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는 2013년 흑인을 살해한 자가 무죄를 선고받은 것에 항의하며 온라인상에서 해시태그 구호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 지배계급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현실의 대중 운동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차별은 만연하지만 이 운동은 평범한 백인들이 아니라 미국 지배계급과 그들의 지배 도구인 경찰을 향했다. 따라서 온라인상의 강경한 비판이라는 그것의 형식상 유사성만 가지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플레이밍 현상으로 묶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일본의 검찰청법 반대 해시태그 운동을 플레이밍 현상으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일은 아베 정권에 대한 광범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체계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망치고 차별을 유지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들을 규탄하는 말·행동과, 권력층이 아닌 개인(들)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에 대한 “도 넘은 비방”을 구분해야 한다. 과도함이 문제가 되는 건 후자의 경우에서다.
저자는 플레이밍 현상의 주요한 배경을 “신자유주의 내면화”에서 찾는다. 2000년대에 일본에서 급속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으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행동 규범에서 경쟁과 감시가 강화된 것이 플레이밍 현상의 주요 배경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관철처럼 신자유주의가 원자화를 심화시켜 이런 현상을 가속시킨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하에서 사람들이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 즉 소외를 겪는 것과 관련 있다. 소외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고,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기 쉽게 만든다.
또, 강력한 대중운동의 부재도 소외를 강화시킨다. 차별과 착취에 맞선 운동이 대중적으로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감과 연대감을 느끼곤 한다. 그럴수록 그 안에서 후진적인 생각에 도전하기도 더 쉬워진다.
온라인상의 비방과 캔슬하기의 핵심 문제는 온통 개인에 초점을 맞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반목과 분열을 심화시켜, 차별과 착취에 맞선 운동을 키우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데에 있다. 좌파 내에서 캔슬 컬처가 채택될 때 더욱 해악적인 이유다.
몇몇 아쉬움이 있음에도, 캔슬 컬처 등 플레이밍에 대한 일리 있는 비판이 담긴 책이 발간된 것은 반갑다.
더불어 해당 쟁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캔슬 컬처, 차별에 맞선 효과적인 방법?’(본지 413호)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