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포르투갈 혁명 50주년:
진정한 권력을 잡으려고 싸웠던 노동자와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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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4월 수백만 명이 참가한 혁명으로 잔혹한 독재자가 타도되고, 근본적인 사회주의적 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다라 커미스키가 포르투갈 혁명에 대해 살피고, 역사가 하켈 바렐라와 대담을 나눈다.
혁명이 포르투갈을 휩쓴 지 50년이 지났다. 혁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300만 명이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그들 대부분에게 이런 활동은 생전 처음 겪은 경험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을 장악했다. 사람들은 대저택을 탁아소와 문화센터로 탈바꿈시켰다.
포르투갈 혁명은 유럽에서도 혁명이 가능함을 보여 줬고, 1932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시작하고 1968년 이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이어가던 파시스트 정권을 타도했다.
‘이스타두 노부(새로운 국가)’라 알려진 이 정권은 값싸고 잘 통제된 노동력을 이용할 생각이 간절한 외국 투자자들에게 포르투갈을 개방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경제는 여전히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1인당 경제생산량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낮았다.
포르투갈 국민들 사이에서는 집권자들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커져 왔고 그 불만이 심지어 군대 안으로까지 스며들었다.
포르투갈 군인들은 대부분 징집됐고, 지배자들은 청년들을 쇠락해가는 제국의 일부로 여전히 남아 있던 식민지로 보내 죽이고 죽게 했다.
1961년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앙골라의 반란으로 포르투갈은 일시적으로 식민지 전초기지였던 앙골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지배자들은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완전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가망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식민지 저항 세력들이 남부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도 반격에 나섰고, 1964년에는 서부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에서도 저항이 일어났다. 사지로 보내졌다는 것을 깨달은 장교들은 불만에 차서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저항할 계획을 시작했다.
장교 400명으로 구성된 군인운동(MFA)이 1974년 4월 25일 카에타누 총리를 타도했다.
군인운동은 장군 100명을 제거했고, 쿠데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음에도 안토니우 데 스피놀라 장군이 대통령이 됐다.
상층부의 이런 분열과 혼란은 진정한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훨씬 더 엄청난 저항의 길을 열었다. 노동자들은 군인들의 행동을 지지했지만 곧 더 나아갔다.
판자촌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거대한 시위에 참가했다. 수도 리스본의 한 판자촌에 살던 약 260 가구가 도시 근처의 비어 있던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다. 군대는 퇴거를 명령했지만 가족들이 거부하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1968년의 세계적 혁명의 물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힘에 기초한 계급 투쟁이 낡은 방식이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일들은 노동자들이 경제를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란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억압에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을 되살렸다.
1974년 5월 전체 인구가 900만 명인 이 나라에서 조선, 방직, 전자, 호텔, 요식, 은행 등 주요산업 부문의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파시즘에서 벗어난 “자유”를 찬양하던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으로 말을 바꿨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자본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74년 9월 스피놀라는 “침묵하는 다수”에게 좌파에 맞선 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 시위는 9월 28일에 예정됐지만, 노동자들이 맞불 시위를 조직했고 결국 반反좌파 시위는 무산됐다.
대신 최소 4만 명이 리스본 중심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병사들은 시위대의 바리케이트를 치우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시위에 합류했다.
혁명을 통해 거의 모든 곳에서 노동자와 주민 평의회가 설립됐다. 지배계급은 수개월 동안 반란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주요 좌파 세력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지하 활동에서 막 빠져나온 공산당원들은 혁명을 더 심화시키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무장해제
혁명적 사회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좌파가 무장해제 당한 이유를 설명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국군이 자신들을 대신해 행동해 주길 기대했고, 국군 내 사병들은 진보적인 장교들이 이끌어 주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카에타누 정권으로의 회귀는 없었다. 식민지는 독립을 쟁취했고 지배계급은 [종전의 파시즘이 아니라] 의회민주주의에 희망을 걸며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자국이 유럽 안으로 더 통합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자본가들이 통제력을 되찾은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1974~1975년의 기억은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히고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하켈 바렐라가 말한다: “혁명사를 아래로부터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의 책 《민중의 포르투갈 혁명사》는 포르투갈 혁명 당시 대중 참여에 대해서 무엇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제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300만 명이 시위, 파업, 작업장 점거에 동참했습니다.
당시 작업장 약 600 곳이 자체적으로 운영되거나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운영됐습니다.
대공장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소유권을 갖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공장의 운영 방식은 통제했습니다.
또한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고, 병원·학교 등 공공부문 전반에서 협동조합과 노동자 경영이 등장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직접 대표를 선출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16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가 학교 등급제 없는 교육을 통해 질적 차이가 없는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은 혁명 과정에서 어떻게 미디어를 장악했습니까?
포르투갈에는 서방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아나코-생디칼리즘 운동 중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장 전투적인 투사였지만, 종종 그들의 정치로 인해 고립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에는 300개가 넘는 노동자 신문들이 발행됐습니다. 그중에는 〈전투〉라는 신문도 있었는데, 매일 2만 5000부를 발행했습니다.
혁명기에 노동자 평의회가 세워지면서, 신문들은 놀라울 정도로 민주적으로 운영됐습니다. 저는 이 점을 연구해 공저하고 있는 책 《민중의 포르투갈사》(아직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에 담았습니다.
포르투갈 혁명 과정에서는 헌신적인 저널리즘이 탄생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 여러 언론인들과 신문사들이 참여한 파업들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저널리즘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오늘날에는 노동자 신문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의 목소리와 그들의 토론이 사회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혁명과 식민지 해방을 위한 반란은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두 투쟁은 전적으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식민 지배에 맞서는 혁명은 강제 동원 노동자들이 시작했습니다.
그 반란들은 포르투갈 국가가 1961년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라 부른 사건을 촉발시켰습니다.
포르투갈 국가는 그 투쟁들을 식민지 전쟁이라 부르지만, 우리에게 그 투쟁들은 식민 지배에 맞서는 혁명들이었습니다.
앙골라에서 면직공 파업이 벌어졌고, 포르투갈 군대는 이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포르투갈 군대는 네이팜탄을 사용해 앙골라인들을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앙골라인민해방운동은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일이 기니비사우와 모잠비크에서도 벌어졌습니다.
포르투갈 부두 노동자들은 근본에서 이러한 해방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민족 해방 운동과 군대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군대의 장교들이 진보적 쿠데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기울고 있던 제국을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의 포르투갈 군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식민지에서의 전투를 정치적으로 끝내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군사 쿠데타가 노동자들의 대규모 참여로 이어지게 됐습니까?
군 중간급 장교들은 쿠데타를 조직하면서 사람들에게 집에 머무르고 지시를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밖을 돌아다니면 체포할 수 있다는 얘기를 10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하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노조도 없고 정당도 없었기 때문에 국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어떤 중재 수단도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매우 자발적으로 수많은 노동자 평의회와 지역 평의회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했습니다.
이 평의회들은 조직된 즉시 지방자치단체와 파시스트 노조에서 각 지도부들을 대체했고 정권에 밀착해 있던 기업들을 폐쇄했습니다.
이 평의회들은 사회를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책에서 저는 군사 쿠데타와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를 별개의 두 순간으로 볼 것이 아니라 1961년에 시작되어 1975년까지 계속된 하나의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일한 혁명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혁명의 역사를 평가하려면 주류의 이해보다 훨씬 더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민중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역사가 아래로부터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접근법은 노동계급의 활동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 접근법에서는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연구합니다.
1975년 이후 집권자들은 어떻게 반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반혁명을 이끈 사회민주주의 통치자들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습니다.
반혁명 세력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은 병영 내 병사 평의회로, 1975년 11월 25일에 군대 내 이중 권력을 해체했습니다. 그 후 1978년과 1979년에는 노동자 평의회를 제거했습니다. 그 후 1982년에는 토지 개혁을 되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1989년에는 노동자들의 통제하에 있던 은행을 대규모로 민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영국의 광원 노동자들을 파괴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포르투갈 지배계급이 조선소 노동자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맹렬히 싸웠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조직은 혁명의 선봉장이었습니다.
노동계급이 기업, 국가, 노조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느린 과정이었습니다.
지배계급은 평조합원들과 주로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이끄는 더 전투적인 좌파 노동조합을 파괴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