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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제1차세계대전 발발 110년:
의도치 않은 전쟁? 제국주의 간 식민지 쟁탈전

제1차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됐다. 공식 역사에서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고(故)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썼다.

“제1차세계대전의 근원을 둘러싼 논쟁은 1914년 이후로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역사적인 문제 ― 프랑스 혁명에 관한 논쟁을 포함시킨다 해도 ― 보다 더 많은 잉크가 필요하고,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나무들이 더 많이 베어질 것이며, 또한 더 많은 타이프라이터가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제국의 시대》, 한길사, 1998년, 539쪽. 번역을 약간 바꿈)

제1차세계대전은 그때까지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재난이었다. 사상 유례없는 죽음, 피, 고통, 비참함이 세계를 덮었다.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유럽의 한 세대 전체가 희생당했다.

1915년 4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오늘날 튀르키예)을 상대로 벌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에서 실패해 2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오스만 제국 측의 사상자 수는 21만 명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병사들은 팔과 다리를 잃고 불구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베르됭 전투에서 무려 70만여 명이 전사했다.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완전히 소모시킨 뒤 서부 전선을 돌파하고자 했다. 이 작전은 ‘고기분쇄기’로 일컬어졌다. 프랑스군을 모아서 한꺼번에 갈아버린다는 뜻이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가 자국이 더 많기 때문에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다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 결과 베르됭 전투는 단위 면적당 전사자가 가장 많은 참혹한 소모전이 됐다.

이 모든 고통과 파괴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역사책들은 제2차세계대전에 대해서는 그럴 듯한 설명을 갖다 붙인다. 즉,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수백만 명이 민주주의의 순교자라는 것이다. 물론 매우 잘못된 설명이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은 그런 설명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도치 않은 전쟁이었다거나 정치인들의 오판과 우연이 꼬리를 문 결과였다는 주장이 많다.

전쟁의 발단과 개전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해 암살했다. 페르디난트는 이탈리아 티롤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뻗어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자(추정 상속인)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 합병했다.

프린치프는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블랙 핸드’가 암살 사건에 연루돼 있다고 자백했다. ‘블랙 핸드’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지상 과제로 내건 세르비아 군부 내 극우 민족주의 조직이었다.

암살 사건 한 달 뒤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암살 자체는 선전포고의 동기가 아니었다. 황제는 후계자이자 조카인 페르디난트에게 아무 애정이 없었다. 조카가 암살당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도 황제는 별로 애통해 하지 않았다. 자기의 명을 어기고 낮은 가문의 여자와 결혼한 조카에게 앙금이 남았던 것이다.

또, 암살을 막지 못한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황제는 그를 보호해 줬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적 선전포고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러시아가 자국의 의존국인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각 회의에서 이런 두려움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실제로 러시아 황제(차르)는 세르비아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뒤이어 프랑스와 영국이 참전했다. 모든 유럽 강대국들이 연합국(협상국)과 동맹국 중 어느 한 편에 섰다.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썼다.

“전쟁이 정말로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914년 7월 국제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마지막 절체절명의 나날 동안에 운명적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던 정치인들조차 자신들이 세계전쟁을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 종종 그랬듯이 이 경우에도 확실히 하나의 공식이 발견된다. 반전파들 또한 자신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예측해 온 재앙이 바로 자기들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같은 책 530쪽. 번역을 약간 바꿈.)

세계대전의 전조

당시 유럽인 대부분에게 전쟁은 먼 옛날의 악몽 같은 것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 전쟁)은 1871년에 끝났다. 보불 전쟁은 파리 코뮌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전쟁이다.

그로부터 거의 43년이 지났다. 전쟁을 모르는 두 세대가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43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대국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세계의 대부분을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는 거의 영구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12년과 1913년에 오스만 제국과 발칸 동맹(그리스·몬테네그로·불가리아·세르비아)이 벌인 두 차례 발칸 전쟁은 제1차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1895년 아비시니아(오늘날 에티오피아) 점령을 위한 전쟁을 벌였으나 대패했다.(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1935년 아비시니아를 재침공해 점령했다.)

1911년에는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맞붙은 리비아 전쟁(트리폴리타니아 전쟁)이 벌어졌다.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발칸 전쟁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같은 해 프랑스와 독일 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 모로코 위기(아가디르 위기)가 발생했다.

아시아에서는 1894년에 일본군이 (조선 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패퇴시키고 무차별 보복과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청일 전쟁에 이어, 1904~1905년에는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군과 충돌했다. 러일 전쟁은 약 15만 명이 전사한 유혈낭자한 쟁탈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먼 곳의 일이었을 뿐, “문명화된” 유럽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로 여겨졌다.

이런 분위기는 좌파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 다음 날인 7월 29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 빅토어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면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자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던 카를 카우츠키는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표현했다.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론을 역설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20세기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더는 양립할 수 없다. 대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카르텔” 개념을 고안해 냈듯이, 거대 제국주의 열강이 벌인 세계대전의 결과로 군비 경쟁을 포기한 강대국 간 연합이 형성될 것이라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카우츠키에게 전쟁은 군수업 같은 특정 자본 부문에만 합리적인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평화주의적 견지에서 전쟁을 비판했고, 자연히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제한적이고 합법적인 근거에 따랐다.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만드는 정당은 아니다” 하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전쟁을 반대하고 혁명적 격변으로 전환시킬 운동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1914년 8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저마다 자국 지배계급의 편에 섰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처음으로 정부에 입각하는 것으로 그 보상을 받았다. 교전국의 사회주의 세력 중에서 러시아 볼셰비키당,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조직만이 전쟁을 반대했다.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분열시켰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거듭 반전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그것은 한낱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적 관념은, 전쟁이 벌어지자 노동자들이 다른 국가로부터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에도, 가령 1910년 이탈리아 정부가 친노동 정책을 실행하자 개혁주의자들은 이듬해에 리비아 침공을 기꺼이 지지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으로 전환시키는 과제는 반제국주의적 혁명가들의 몫이었다. 마침내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그 과업을 완수했다.

1918년 독일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일찍이 1907년에 쓴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라는 중요한 저작에서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분리시키는 시도를 비판했다. 이 책은 바로 판매 금지당했고, 리프크네히트는 반역죄로 기소돼 1년 6개월 동안 수감됐다.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당대의 위대한 혁명가들은 ‘세계화’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영속화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핵심 특징은 대기업과 국가의 결합이라고 설명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다국적기업은 거대한 규모로 인해 전체 국민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대기업의 이익과 ‘국익’이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와 동시에, 국가는 기업 활동, 사회 기반 시설, 기술 등에 점점 더 의존했다.

예컨대, 철도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군 참모들이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서 핵심적인 고려 사항이었다. 독일은 철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제일 먼저 인식한 국가 중 하나였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독일 연방(1815년 38개 국가들의 느슨한 동맹으로 설립)은 광범한 전략적 철도망 구축 계획을 작성했다.

1842년 프랑스의 한 장관은 독일이 쾰른·마인츠·만하임에서 프랑스 국경까지 11개의 공격 노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도 1871년 전쟁에서 패배한 뒤 철도망을 급속하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례는 석유다. 석유는 19세기 말부터 석탄을 대체하기 시작한 에너지원이었다. 석유는 세기 전환기에 두 거대 다국적기업인 스탠더드 오일과 쉘 오일의 손에 넘어갔다.

이런 에너지원의 변화는 군 참모들에게 커다란 압박이 됐다. 영국이 특히 그랬다. 영국은 당시 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1911년까지도 여전히 석탄을 선박 동력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석유가 공간을 작게 차지하고 깨끗하게 연소되며 더 효율적이라는 명백한 장점이 있는데도 그랬다. 영국에 탄광은 있지만 유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박 동력원을 석유로 전환한다는 것은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인데, 군 장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경쟁국들, 가장 중요하게는 1897년 북해에서 현대식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한 독일에 밀릴 수 있었기 때문에 더는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러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버마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영국은 난관에서 벗어났다. 영국 해군은 1911년 마침내 석탄을 버마 오일과 그 자회사인 앵글로-페르시안 오일의 석유로 대체했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 몇 주 전인 1914년 6월 영국 정부는 당시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권유를 따라 앵글로-페르시안 오일의 지분 51퍼센트를 인수했다. 이 회사가 바로 오늘날 영국 최대 석유 회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이다.

이제 유정과 원유 수송로를 지키는 것은 영국과 다른 모든 강대국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돼 있는 불안정성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자본주의 시스템과 오랫동안 타협해 온 것을 반영했다.

이런 타협은 일찍이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의해 이론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계급이 더는 체제의 폭력적 전복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입법 개혁, 제도적 변화, 국가기구 입성 등을 통해 자본주의를 점진적이고 평화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스포츠 클럽, 자전거 동호회, 합창단, 소비자 협동조합, 체스 클럽 등 자조 모임을 만들었다. 심지어 식료품점을 개업하고 장례 절차도 제공했다. “국가 안의 국가”였다. ‘사회주의’가 승리하려면 이런 질서의 안정과 영속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공상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1848년에 쓴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도구, 즉 생산관계, 다시 말하면 전체 사회관계들을 지속적으로 변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 신분적이고 정체된 것은 모두 증발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독당[한다.]”

카우츠키도 ‘초제국주의’론에서 강대국들이 19세기 말에 세계를 분할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각각의 강대국들이 자본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경제적 비중을 재조정하려면 국제적 균형을 재조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19세기는 영국의 세기였다. 그러나 1914년에 영국은 강력한 두 경제적 경쟁자와 대결하고 있었다.

첫 번째 경쟁자는 미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아직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미국은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대륙(1823년 먼로 독트린에 따라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됐다)과 태평양에 스스로를 국한시키고 있었다. 미국은 1917년 4월 동맹국이 전쟁에서 이기는 듯하던 결정적인 순간에 영국·프랑스의 편에 서서 참전했다. 미국의 참전은 연합국(협상국)이 승리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 당시 영국의 진정한 경쟁자는 독일이었다. 독일 산업은 이미 19세기 말에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화학 분야(비료·페인트·의약품 등)에서는 독일의 두 거대 기업인 바스프와 바이엘이 세계 시장을 사실상 석권했다. 철강 생산에서는 독일 기업인 크루프가 선두를 차지했다. 석탄 생산에서도 독일은 영국의 지위를 위협했다. 독일은 1900년에 600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다. 전쟁 직전인 1913년에는 영국 생산량의 거의 50퍼센트에 이르는 1억 1400만 톤을 생산했다.

1888년 독일 도이체방크의 자회사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최초의 철도 노선을 건설하기로 술탄과 계약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독일·영국·프랑스의 기업들이 오스만 제국의 중동에서 철도 부설권 쟁탈전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과 손잡자 연합국은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을 침공했다. 연합국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의 해체였다.

프랑스·영국 함대가 1915년 3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이스탄불에 상륙하려다 실패했다. 오스만 제국이 다르다넬스 해협에 기뢰를 부설해 놨고 프랑스·영국 군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앞서 언급한 갈리폴리 상륙 작전으로 이어진 다르다넬스 해전).

그러나 미국의 참전 때문에 동맹국은 군사적 우위와 러시아 혁명(그로 인해 연합국은 가장 중요한 동맹 하나를 잃었다)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했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했지만, 연합국은 튀르키예를 점령하지 못했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새로운 국가(터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합국은 중동의 나머지를 점령해 방대한 중동 땅을 나눠 먹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됐다.

독일은 수많은 자국민을 굶주림에 빠뜨린 평화 협상인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당시 영국 재무성의 자문위원 존 메이너드 케인스(나중에 1930년대 대불황에 관한 연구로 유명해졌다)는 독일의 목을 조르면 또 다른 전쟁을 부를 뿐이라며 연합국의 외교를 비판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연합국의 제1차세계대전 승리는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를 마감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새로운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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