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 종전 80년:
제2차세계대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반파시즘 전쟁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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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좋은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연합국에 패배해, 강점에서 풀려난 한국에서도 그런 견해가 흔하다(태평양 전쟁과 관련해서는 12~13면에 실린 ‘태평양전쟁 종전 80년: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제국주의간 전쟁’을 보시오).
전간기에 파시즘의 공포를 감히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연합국 지배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결코 아니었다.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이른바 ‘전간기’에) 서구의 주요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파시스트들이 좌파와 노동자 운동을 분쇄하고 체제의 질서를 확립한 것을 공공연히 찬양했다.
1927년, 당시 영국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은 로마에서 무솔리니를 만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라면, 나는 레닌주의의 짐승 같은 욕망과 광기에 맞선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투쟁에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함께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혁명(1936~1939년)을 지원하지 않고 외면했다. 파시스트 장군 프랑코의 승리가 좌파의 승리보다 훨씬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이렇게 썼다. “‘블룸보다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는 구호가 그들[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좌우명이 됐다.” 레옹 블룸은 1930년대 중반 사회당 소속의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 총리였다.
영국은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당했을 때부터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할 때까지 주로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에즈 운하와 유전 지대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국도 파시즘 반대에 심드렁했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했을 때조차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미국은 장제스(중국 국민당)의 항일전을 지원하는 등 애초에 아시아에서 일본과 세력권을 분할하려고 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함대를 공격하자 그제야 미국은 참전했다. 참전의 직접적 동기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벌어진 식민 제국들 간의 분쟁이었다.
그러나 1943년 말부터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이기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소련의 적군(赤軍)이 유럽을 휩쓸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프랑스에 제2전선을 형성하자고 영국을 압박했다. 유럽에서 적군이 급속도로 진군하자 처칠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실시됐다.
스탈린이 통치하는 소련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동기에 따라 움직였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하고, 소련이 독일에 원자재를 공급하기로 했다. 스탈린은 또한 호의의 표시로, 소련에 망명해 있던 독일 공산당원들을 게슈타포(나치 독일의 보안 경찰)에 넘겼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1944년 독일군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저항 세력의 봉기를 분쇄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소련군에 명령했다. 바르샤바와 반나치 저항 세력이 초토화된 뒤에야 비로소 소련군은 비스투라 강을 건너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연합국의 전쟁 목표도 반파시즘과 무관했다.
연합국은 전쟁 기간에 파시스트 정권들과 협력했다. 예컨대, 미국은 1942년 말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 파시스트 정부)의 군사 지도자들과 협력했다. 그 때문에, 1945년 종전 뒤에도 알제리에서는 비시 정부의 인종차별법이 유지됐다.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침공한 뒤 바돌리오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무솔리니 정권의 장군이었다.
연합군은 독일 점령 직후 “유화적 평화”라는 이름으로 옛 국가 기구들을 유지했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후계자로 지명한 카를 되니츠가 이끄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의도적으로 존속시킨 것이다.
연합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도 살려 줘, 그들은 각각 1974년과 1975년까지 유지됐다. 연합군이 1942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뒤, 루스벨트는 프랑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 당신의 진정한 친구.”
스탈린도 루스벨트와 똑같이 행동했다. 1943~1954년 당시 스페인 공산당 지도자 페르난도 클라우딘은 1970년 이렇게 말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독재가 유지된 것은 스탈린의 ‘영향권 분할’ 정책이 초래한 가장 분명한 결과의 하나다.”
반면, 연합국은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위해서는 아무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다.
연합군의 전쟁 수행 방식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싸우다 엄청난 고초를 치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빈곤을 안겨 줬다. 연합군의 “폭격 전쟁” 전술은 독일의 산업 생산을 마비시키려고 노동자 밀집 지역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13~15일 연합군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으로 2만 5000명이 사망하고, 도시의 75퍼센트가 파괴됐다. 연합군의 민간인 학살은 결국 나치에게 ‘국민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줬고, 민간인들이 나치 정권 쪽으로 더욱 결집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미국·영국·소련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같은 혁명적 혼란에 시달리는 독일을 떠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기존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 목적을 위해 독일 내부의 반란을 피하며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군사적 해결책을 선호했던 것이다.
연합국의 홀로코스트 대응도 비인도적이었다. 연합국은 이미 1942년에 나치의 “최종 해결책”(유대인 인종 말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유대인 구출에 필요한 재원을 배정하지 않았고,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로 향하는 철도 인프라를 파괴하는 작전도 실시하지 않았다.
단지 인명 구출이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합국 정치인들의 당시 인종차별(유대인 혐오)이 작용했다. 나치의 유럽 점령지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숨겨 주고 구출한 것은 저항 운동들이었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은 연합국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도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길 거부했지만(1938년), 1939년 폴란드를 위해서는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 정권은 반유대주의적 군사 독재 정권이었다.
식민지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말은 더욱 흰소리일 뿐이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인도는 어떤 의견도 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인도인 200만 명이 영국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인 조지 6세를 위해 참전해야 했는데도 말이다.
제국주의(간) 전쟁
제2차세계대전은 당시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인 1929~1932년의 위기로 촉진됐다. 독일·미국·일본·영국 등 열강은 비슷한 위기 탈출 전략을 채택했다. 국가가 경제를 직접 통제하고 자체의 보호무역 경제 블록을 형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전쟁 개전 이틀 후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제국주의 노예주들이 서로 다른 진영으로 나뉘어 세계의 재분할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 이번 전쟁은 이전 전쟁[제1차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연장이다.”
영국(과 프랑스)은 제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다. 그런데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영국은 세계의 4분의 1을 지배하면서도 산업 생산은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영국·프랑스 지배계급의 전쟁 목표는 자신들의 제국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었다.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다. 독일은 전쟁을 통해 기존 질서를 재배치하려 했다. 히틀러는 이렇게 밝혔다. “세계 패권을 위한 투쟁은 러시아 대공간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유럽에서 결정될 것이다. 유럽을 지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 정치 운운하는 것은 [독일에게]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보유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그에 못 미쳤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권을 해체하고,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확립하고자 했다. 루스벨트 정부의 국무장관 코델 헐은 1942년 이렇게 말했다. “무역과 그 외 경제 문제들에 관한 새로운 국제 관계 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리더십은, 우리의 막강한 경제력을 감안할 때, 상당 부분 미국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리더십을 맡아야 하며, 그에 수반되는 책임도 져야 한다.”
소련은 1917년 혁명을 통해 노동자 국가를 수립했지만, 1928년 스탈린 반혁명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변질됐다. 소련은 국제적 고립을 돌파하고 어떻게 해서든 영토를 확장해 영향권을 확대하려 했다.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이용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점령·병합했다.
동부 전선: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장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바르바로사 작전’).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벌인 최대 규모 작전이었다.
히틀러와 독일 장군들은 동부 전선에서 단기전을 계획했다. 히틀러는 1941년 말까지 소련을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론트슈테트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만 걷어차면 썩은 구조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히틀러는 소련을 점령해 독일 경제와 통합한 뒤 영국을 굴복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손바닥 위에서 거의 놀아날 뻔했다. 스탈린은 1941년 6월 21일까지도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자국 정보기관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 전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등 독일의 공격 개시 몇 분 전까지도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히틀러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원자재를 계속 공급하고 있었다.
독일은 방어 태세도 갖추지 못한 국경 지대의 소련군을 공격했다. 스탈린은 독일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방어 준비를 불허했었다.
전쟁 개전 뒤 며칠 동안 스탈린은 베를린에 무선으로 평화를 요청했고, 일본에는 중재 역할을 부탁했다.
당시 소련군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트로츠키 휘하에서 적군 지도자였던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1938년 (날조된)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적군 장교 가운데 군사 고등 교육을 받은 장교는 겨우 7퍼센트였고, 37퍼센트는 중등 훈련조차 이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히틀러의 단기전 계산은 빗나갔다. 점령과 함께 실시된 독일의 인종 학살과 노예화 정책이 소련인들(소련 내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포함해)의 거센 저항을 불렀기 때문이다. 나치는 소련과의 전쟁을 인종 간 전쟁, 즉 “두 세계관의 싸움, 말살 전쟁”으로 규정했다. 사이비 인종이론에 따라 유대인은 반드시 말살돼야 했고, 슬라브인은 “열등 인종”으로 간주돼 언제든 죽여도 되는 존재로 취급했다.
결국 독일군의 진격은 볼가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막혔다. 독일군 25만 명과 루마니아·크로아티아 등 기타 동맹군 병력이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됐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세계대전의 변곡점이 됐다. 히틀러는 1944년 봄 자신의 군의관에게 밤마다 악몽을 꾼다고 고백했다. “나는 스탈린그라드에 있었던 모든 사단의 위치를 정확히 그릴 수 있다. 시시각각 기억이 떠오른다.”

1943년 여름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전차전으로 꼽히는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은 마침내 베를린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소련은 자력으로 독일을 패퇴시켰지만, 그 승리는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특히 미국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은 경쟁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이었다. 단지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의 충돌일 뿐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도 서로 첨예하게 갈등했다.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세계를 지배할 경제적·정치적 질서의 토대를 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 과정에서 영국과 소련을 완전히 배제했다.
1945년 5월 7일 새벽 2시 41분, 나치 독일은 프랑스 북부 랭스에 본부를 두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의 아이젠하워 사령관에게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 문서는 미국이 동맹들과 협의 없이 단독으로 작성됐다.

석 달 뒤인 8월 14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도쿄만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때도 영국과 소련은 배제됐다.
트루먼이 1945년 8월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것도, 전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지위를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좌파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는 이렇게 지적했다.
“연합국은 사실상 일본을 패퇴시켰고, 일본의 산업 능력과 병력은 거의 최후의 저항 수준으로 축소돼 있었다. … 미국은 이제 핵폭탄을 일본에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소련과의 미래 관계에 갖는 함의까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 미국은 단 한 번도 이 폭탄을 중국에 있는 막강한 일본군을 격파할 무기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장차 소련과 벌일 제국주의간 갈등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항 운동
제2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간 전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거대한 사회적 폭발, 대중 운동, 봉기를 촉발했다. 저항 운동은 크게 세 가지 형태를 띠었다. 독일 점령에 맞선 해방 전쟁, 파시스트 정권과 나치 부역자들에 맞선 내전, 자본가·지주 계급과 노동자·농민 사이의 계급 전쟁.
유럽의 점령지에서 상당수 지배자들은 나치와 공공연하게 협력했다. 나치가 노동자 운동과 좌파 운동을 분쇄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치의 유럽 점령기 경험은 철저하게 계급적이었다. 많은 자본가들에게 전쟁은 부를 축적할 기회였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기아와 빈곤, 폭격, 강제 노동, 총살형을 뜻했다.
이로 인해 국가와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정당성이 급속히 무너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파업 등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분출했다.
1943년 2월 나치 독일에 점령된 그리스에서 공무원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내무부 청사를 불태웠다. 노동자들은 나치 독일의 대규모 강제 노동 동원 계획을 좌절시켰다.
1943년 3월 이탈리아 북부의 대공장들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식량 배급 확대를 요구했다. 몇 달 뒤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했다.
종전 뒤에도 대중 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그 운동들은 그저 점령군을 몰아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전쟁 이전의 불평등한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대체로 공산당이 그 운동들의 선봉에 섰고, 그 덕분에 당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40년경 공산당은 대부분 불법 조직이었고, 당원 수도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5년 그리스 공산당(KKE)은 약 40만 명, 프랑스 공산당(PCF)은 약 100만 명,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약 200만 명에 육박하는 진정한 대중 정당이 됐다.
유럽에서 혁명은 불가능했는가?
1945년 미국 상원의원 반더버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세상이 전부 좌선회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과는 달리, 1945년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1945년의 이탈리아를 두고 가브리엘 콜코는 이렇게 물었다. “붉은 깃발을 들고 권력을 쥔 15만 무장 병력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고,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의 거의 병적인 두려움은 결국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왜?”
독일의 패배는 이미 1944년에 기정사실이 됐지만, 그 시기와 방식, 전후에 미칠 영향은 전혀 확정돼 있지 않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미국·영국·소련은 전략적으로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일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독일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전후 세계의 분할 문제가 떠올랐다. 독일이 항복할 때 자국 군대가 어디에 주둔하고 있느냐가 전후 질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은 1945년 초까지도 확정돼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1944~1945년은 동·서 진영의 경계선이 확정되고 냉전 구도가 뚜렷하게 자리 잡은 1948년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상호 의존과 갈등의 결합은 저항 운동들에 거대한 가능성을 열어 줬다. 유럽의 점령지 대부분에서 연합군은 저항 운동들에 맞닥뜨렸다.
1944년 8월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도시를 해방시켰다. 그 무렵 프랑스 남서부 지역은 대부분 레지스탕스 세력이 통제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 그리스에서 독일군이 철수하자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이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1945년 4월에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 독일군과 파시스트 부역자들을 몰아냈고, 공장평의회가 설립돼 일터를 통제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그 나라들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틀렸다.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미군과 영국군은 소련군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독일 영토를 점령하려고 애썼다. 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에서 연합군이 저항 세력과의 무력 충돌로 발목이 잡히게 된다면 소련군은 대서양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태 전개는 미국과 영국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이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면 영국군 5만 명으로는 그리스를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을 것이다. 연합국 정부들이 독일과의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나치에 저항한 운동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자국 내에서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이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은 결정적인 요인은 객관적 조건(연합군의 주둔 등)이나 대중의 투지 부족이 아니라, 스탈린과 유럽 각국 공산당 지도부들이었다.
이탈리아·프랑스·그리스에서 공산당은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그 덕분에 노동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반면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사회당은 전쟁 동안에 탄압을 받아 와해됐고, 프랑스 사회당의 우파는 수치스럽게도 비시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저항 운동을 자국의 외교 협상과 전후 영향력 분할에 필요한 장기판의 졸(卒)로 봤다. 예컨대, 소련의 폴란드 개입에 영국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그리스를 협상 카드로 사용했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혁명적 정당으로 창당됐던 유럽 공산당들은, 1920년대 후반 스탈린주의 반혁명을 거치며 중간주의 정당으로 변질됐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민중전선 전략을 채택했다. 노동계급의 요구와 목표를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협력에 종속시키는 전략이었다. 전시에 이 전략은 파시즘의 분쇄를 바라는 노동 대중의 열망을 소련의 해외 군사 동맹 필요성에 종속시켰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 공산당들은 지그재그 행보를 보였다. 1939년 9월 전쟁이 시작되자 공산당은 독일과의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9월 말에는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것으로 선회했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다시 입장을 바꿨다.
공산당 지도부는 저항 운동의 확산을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할 기회로 보지 않고 전후 정부에 자신들의 참여를 보장할 수단으로 활용했다.
게다가 공산당 지도부는 저항 운동을 연합군 사령부와 망명 정부의 통제에 종속시켰다. 가령 영국과 미국의 공산당은 “연합군의 단결”이라는 명분 아래 파업과 대중 동원을 가로막았다. 또, 파리·아테네·밀라노를 해방시킨 운동들은 공산당 지도부의 강요에 의해 드골과 파판드레우 등 노골적 친자본주의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이런 전략은 환상에 따른 전략이었고, 그 결과는 패배와 비극이었다.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은 전후 정부에 참여했지만, 대중 운동을 억누른 뒤 1947년 초 수치스럽게 쫓겨났다. 그리스에서는 지배계급이 운동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결심했고, 공산당의 타협 노선은 커다란 비극으로 끝났다.
곳곳에서 공산당의 타협에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투사들은 타협에 맞서 집단적으로 싸울 독자적인 조직이 없었고, 원칙과 정치 전략도 취약했다. 당시 좌파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개념들은 전쟁이 반파시즘 전쟁이므로 연합국의 단결이 필요하다, 스탈린은 저항 운동의 편이다, ‘민중 민주주의’는 선거나 국민통합 정부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등등이었는데, 이 모두는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트로츠키는 히틀러가 승리할 것처럼 보였던 암울한 1940년에 히틀러에 맞서 영국과 미국을 지지해야 하고, 히틀러가 패배한 뒤에야 비로소 혁명이 다시 의제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좌파들과 논쟁했다.
그러나 소규모였던 당시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거친 파도 속에서 표류하는 허약한 배였다.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파시즘의 부상이 혁명적 좌파를 분쇄하는 바람에 운동 내부에서 영향력 없는 소수 집단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로츠키 자신이 1940년에 살해당하고,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전쟁 동안 심한 탄압을 받았다.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자국 정부의 전쟁을 지지하는 공산당들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박해했다.
그럼에도 개전부터 종전까지 제2차세계대전이 제국주의(간) 전쟁이며 파시즘은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한 것은 바로 이 작고 박해받은 일단의 혁명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