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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과 식민지 반란

1914~1918년 제1차세계대전의 주무대는 유럽 전선이었지만, 전쟁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 재분할을 둘러싼 쟁투였기에, 전선은 유럽을 넘어 중동 등지로 확산됐다.

전쟁은 식민지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낳았고, 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반란의 불길이 식민지 곳곳에서 치솟아 제국주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916년에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무장 봉기가 그런 사례의 하나였다. 이집트에서도 영국 점령에 맞서 거의 혁명에 가까운 투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수많은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이 근대 자본주의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됐다. 인도 병사들은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동원돼 유럽의 서부 전선, 중동 등지에서 싸웠다. 중국, 베트남, 이집트 등지의 수많은 식민지 사람들이 후방 지원 노동자로서 여러 전선에 동원됐다.

전쟁은 현지 산업이 발전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으로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수입이 중지됐고 대규모의 전쟁 물자 시장이 새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서구 열강이 중국 시장에서 후퇴하고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유럽으로 중국의 농산물과 경공업 제품 수출이 늘어나게 됐다.

산업 성장으로 토착 자본가들이 부상했고, 근대적 노동계급이 크게 성장했다. 한 연구를 보면, 중국에서 노동자는 1919년에 200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전체 인구에 견주면 여전히 작았지만, 노동자들은 상하이·광둥 같은 도시에, 그리고 작업장에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견줘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잠재력을 갖게 됐다.

이런 계급 구조가 식민지 반란의 전개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1차세계대전은 식민지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예컨대 전시의 세금과 대출 때문에 1억 파운드가 인도에서 빠져 나가 영국 제국의 재정으로 들어갔다. 영국 제국이 전쟁에 동원한 인도인 병사는 무려 130만 명이 넘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비용 고통 전가에 직면한 인도 노동자와 농민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1918~1920년에 소요 물결이 인도 전역을 휩쓸었다. 대중 시위, 파업, 폭동이 확산됐다. 1920년 상반기에는 파업이 200건 이상 벌어졌고, 15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이때 인도 하층 계급 성원들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차이를 넘어 “전례 없는 우의”를 보여 줬다.

그러나 간디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전투성을 보고 근심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독립 국가를 건설해 토착 자본주의의 발전과 자신들 같은 중간계급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 노동계급의 저항은 그 수준을 넘어 언제 인도 토착 자본가들을 향할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1922년 간디는 저항 운동 전체를 멈추게 했고, 이는 영국 식민 당국이 숨 돌릴 여지를 줬다. 이제 영국 당국은 운동을 마음껏 탄압했고 운동은 후퇴했다. 운동이 후퇴하면서 영국 지배자들이 조장한 종교적 분열이 전면에 부상하게 됐다.

21개조 요구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 열강의 시선이 유럽으로 쏠리자, 일본 지배자들은 전쟁을 “다이쇼(大正) 신시대의 천우(天佑)”라고 여겼다.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자국의 이권을 확대하고 영향력을 높일 기회가 열렸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유럽 기업의 상품들이 일본 상품으로 대체됐다. 또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 조계지가 있던 중국 산둥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 21개조 요구는 일본의 산둥 이권 인정, 철도·광산 등의 경제적 이권 확대,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들일 것 등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요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의 산둥반도 점령과 21개조 요구 강요는 중국 민족주의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했다. 게다가 일본의 요구에 끝내 굴복한 정부를 보면서 그 분노는 더욱더 커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하면서, 동북아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종결과 전후 처리 과정을 독립의 기회로 봤다. 또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식민지 압제에 맞서려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1919년 조선의 3·1운동은 그런 배경 속에 일본의 압제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민중 항쟁이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로 출발한 3·1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참가자가 200만 명에 이르렀다. 단지 만세 시위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농민과 도시 주민의 소요가 벌어진 격렬한 저항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거리로 나온 사람들 3·1운동은 농민,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이 대거 참여한 폭발적인 반제국주의 저항이었다

일본은 초기에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일본은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엄청난 유혈 탄압을 자행하고 나서야 3·1 운동의 기세를 겨우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파가 1년을 더 갔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두 달 후에 중국에서도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대중 운동이 등장했다(5·4운동).

서구 열강은 전쟁이 끝나면 자유와 민족 자결이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 결과에 기대를 걸었다. 제국주의가 차지한 중국 영토를 돌려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이 한 일은 제국주의적 영토 재분할이었다. 일본은 이 회의에서 중국 내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았다.

중국인들은 서구 열강의 위선에 치를 떨면서 민족주의적 호소에 이끌렸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제국주의와 이에 굴복한 베이징 정부를 규탄하는 민족주의 시위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학생들의 민족주의 선동은 다양한 도시 대중을 운동으로 끌어들였다. 베이징 정부가 학생들을 대거 체포하자, 상하이에서는 하루 동안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최대 9만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결국 베이징 정부는 물러섰고 친일 고관 3명은 해임됐다. 체포된 학생들은 석방됐다. 파리에 파견된 중국 대표단은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해야 했다.

5·4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민족의 이익 앞에 모든 계급을 단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중국 노동계급이 조직된 세력으로 투쟁에 참가해 자신의 힘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단지 상하이 노동자뿐 아니라, 전국에서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가했다.

코민테른

대중 반란의 경험은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일부 지식인과 청년들이 좌경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제국주의에서 해방되는 길을 노동계급에게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도 1919년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하고, 모든 식민지의 즉각적인 독립을 지지하며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을 고무하려고 노력했다. 레닌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투쟁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노동계급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섬세하게 고려된 입장을 내놓았다.

코민테른의 정책이 가장 성공했다가, 가장 비극적인 실패로 끝난 곳이 바로 중국이었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투쟁이 상승 곡선을 타면서 금세 노동계급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25년 중국공산당은 대중적인 혁명 운동에서 주도적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영국 경찰이 노동자와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일이 계기가 돼, 상하이·홍콩 등지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파업 물결로 시작한 혁명은, 1926년에 국민당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결탁한 군벌들을 몰아내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한 북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즈음 소련에서는 스탈린과 그 지지자들이 중국 같은 후진국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적 투쟁을 이끌 능력이 없으니 계급을 뛰어넘는 단결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레닌의 정책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스탈린의 정책이 비극을 낳았다. 북벌에 고무된 노동자들이 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도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민당은 제국주의보다 노동자 혁명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1927년 공산당은 상하이에 도착한 국민당 군대에 도시 통제권을 넘겨 버렸다.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 자본가들, 제국주의 군대와 공모해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공산당원과 투사들을 살해했다. 국민당의 학살로 중국공산당은 도시에서의 기반을 거의 다 잃었고 노동자 혁명은 패배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제1차세계대전은 식민지 세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낳았다. 그리고 제국주의 지배를 타도하려는 혁명적 민족해방운동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레닌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민족해방운동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장을 살짝 바꿔 “만국의 노동자와 모든 피억압 민중이여 단결하라!” 하고 호소했던 까닭이다.

제국주의는 민족 내부에서 계급 분단선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중간계급 출신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은 제국주의가 자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멍에로 작용하는 데 분노하며 운동을 이끌었지만, 노동계급과 농민의 저항이 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넘어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했다. 레닌이 민족주의 운동에 불필요하게 “붉은 칠”하지 말라고 얘기했던 까닭이다.

식민지에서도 1917년 러시아에서처럼 노동계급이 민족적·민주주의적 요구에 관한 일관된 해법을 제시할 잠재력이 있었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한때 흔들렸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패배, 이와 맞물린 식민지 반란의 패배로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비극과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