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혁명 ─ 희망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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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헝가리 혁명은 동구권 국가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마이크 헤인즈는 말한다
다른 어느 사건보다 [분명하게] 1956년 헝가리 혁명은 동구권 “사회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밝히 드러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진정한 노동자 혁명으로 시작된 체제가 요시프 스탈린 치하에서 무력으로 강요되고 탱크로 수호되는 제국주의 체제로 타락했다.
1956년 10월 말 헝가리가 소요에 휩싸였을 때, 공장과 거리의 요구는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이었다.
1956년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해였다.
그 해 2월 옛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요시프 스탈린의 범죄 행위들을 폭로하는 “비밀 연설”을 했다. 이 때문에 논쟁을 위한 약간의 공간이 열렸고 동구권 지도자들의 위신이 깎였다.
시위는 폴란드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 시위가 옛 소련 군대에 의해 진압될 듯하자 헝가리 학생들은 폴란드의 개혁 세력을 지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10월 23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이 시위는 봉기로 나아가는 방아쇠가 됐다.
모든 사람들이 [정부의] 반응에 경악했다. 1950년대에 헝가리는 가장 스탈린주의적인 위성국가였다. 헝가리는 개혁파인 임레 나지의 도전을 견뎌낸 마처스 라코시(Matyas Rakosi)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 라코시의 권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당시 부다페스타에서 활동하는 충실한 공산당원이었던 영국 언론인 도라 스칼렛에 따르면, 헝가리는 “진실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다. 강력한 억압 수단을 통제하고 있었음에도, 1956년 여름 무렵 정부 지도자들은 불안감을 느끼며 우유부단해졌다.
헝가리의 시위 학생들에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심지어 부다페스트의 경찰들조차 시위에 동조하는 듯했다. 헝가리 지배자들은 겁에 질렸고 그 날 밤 옛 소련 군대가 수도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권력은 임레 나지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자신의 개혁 구상을 실현하는 한편 옛 소련에 상황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납득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 무렵 헝가리는 달라져 있었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데일리 워커〉에서 일하는 젊은 공산당원 기자였다. 그가 헝가리에 입국해 목격한 일들은 그의 관점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것은] 파시스트와 반동분자들이 조직한 반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옛] 소련 군대의 지원을 받는 경찰 독재에 맞선 전 민중의 봉기였고, 여기에는 공산당 기층당원들도 참가했다.”
헝가리 전역에서 혁명적 평의회들이 재빨리 등장했다. “그들은 봉기의 기관 ― 공장과 대학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집결체 ― 인 동시에 무장한 인민의 지지를 받는 대중 자치 기관이었다”하고 프라이어는 썼다.
1956년 10월과 11월의 헝가리는 1905년과 1917년의 혁명 러시아를 닮아 가고 있었다. 프라이어에 따르면, 부다페스트는 “무장한 도시, 무장한 민중의 도시였다.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전투적 도시들 ― 파리, 페트로그라드, 광저우, 마드리드, 바르샤바 ― 의 명단에 또 다른 영원불멸의 이름, 바로 부다페스트를 추가했다!”
일단 최초의 폭발이 일어나자 놀라운 속도로 급진화가 진행됐다. 10월 전까지만 해도 대담하게 정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던 개혁파 인사들이 이제는 소심하고 무능해 보였다. “전에 우리는 자유를 위한 투쟁 전선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쓰레기 더미 위에 서 있다”고 옛 ‘청년동맹’의 한 회원은 말했다.
당시에 그리고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단순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1956년에 헝가리 사람들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서방식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대체하길 원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옛 세계로의 회귀를 꿈꿔서는 안 된다. 귀족, 은행가, 자본가들의 세계는 영원히 끝났다”고 한 정치인은 말했다. 이것은 다양한 노동자 위원회들의 결의안에서, 그리고 황급히 출판된 신문과 리플릿들에서 거듭거듭 드러난 정서였다.
‘지외르 철도노동자들’이 발행한 리플릿이 전형적이다. 그 리플릿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토지를 귀족에게 돌려주고 산업과 금융을 자본가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맞서 일어섰다. 동시에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라코시 일당의 복귀에도 반대한다.”
헝가리 노동자들은 다른 모습의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우중 지배의 분출이 아니었다. 혐오스런 보안 경찰 기관원들은 살해됐고 때로 교수형당한 그들의 시신이 전시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린치를 당했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숫자는 “질서”[수호] 세력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규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질서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것은 대중 자신의 질서 유지 수준이었다. 일부 보안 경찰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구성원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부다페스트 중심가의 파괴된 상점들을 둘러본 한 폴란드 기자는 이렇게 썼다. “신발, 장난감, 와인병 등은 가지런히 진열된 상태 그대로였다. 이 물건들을 가져가려 한 탐욕스런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도라 스칼렛은 한 상점에서 진열대가 비었을 때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게시됐다고 기록했다. “모든 상품들은 창고 안에 안전히 보관돼 있습니다. 우리 헝가리인들은 약탈을 하지 않습니다.” 만취한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질서는 혁명의 창조적 추진력의 일부였다. 그 귀결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투쟁의 첫 물결 이후 나지를 비롯한 개혁파 인사들은 통제를 재확립하려 했다. 그리고 11월 3∼4일의 주말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토요일 밤 일단의 폴란드 언론인들이 헝가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느낀 바들을 공유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들은 “헝가리[의 사태]가 진정되고 있고, 정부는 안정돼 가고 있으며, 혁명 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노동자들은 월요일에 작업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공장 설비는 가동돼야 하겠지만 동시에 노동자들과 그들의 위원회들은 어떻게 공장을 운영할 것인지, 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집회와 토론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옛 소련의 지배자들은 잠시 망설인 끝에 이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너무나 위험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일요일인 11월 4일 새벽에 새로운 소련 부대가 특히 부다페스트 민중을 겨냥해 행동을 시작했다.
투쟁의 두번째 라운드는 부다페스트에서 훨씬 더 유혈낭자했고 파괴적이었다. 도라 스칼렛은 옛 소련 탱크들이 “의심스런 건물들을 향해 태연히 포탄을 쏴 댔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투쟁 물결을 통틀어 약 2천5백 명이 살해됐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조악하게 무장한 시민들이 이끈 몇몇 영웅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사이에 옛 소련 [군대]는 반대 세력을 쓸어버렸다.
평의회들
그 뒤 몇 주 동안 헝가리 인구 1천만 명 가운데 약 20만 명이 헝가리를 떠났다. 그러나 혁명이 끝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노동자 평의회들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옛 소련은 헝가리 공산당원인 야노스 카다르(Janos Kadar)와 협정을 맺었다. 그는 나지 부류의 인사들이나 새로운 헝가리 군대를 창설하려 해 온 팔 멀레테르 같은 영웅들을 대체해 정부의 새로운 얼굴마담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중에 나지, 멀레테르 그리고 다른 인사들은 재판에 회부돼 처형당한다.
그러나 카다르는 옛 소련군 탱크말고는 달리 의지할 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들은 공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어진 투쟁은 12월까지 지속됐다.
옛 소련과 그들의 헝가리 꼭두각시들은 도처에서 수동적 저항에 부딪혔다. 필수품들은 노동자 평의회들의 통제 하에 생산됐다. 그러나 또한 헝가리의 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고 지속적인 총파업 가운데 하나를 이끌었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권력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 지도자들은 사실상 계엄령 아래 점령된 나라에서 활동하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연결망을 구축하고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카다르 정권은 그들을 솎아내고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12월과 1월에 대규모 구속과 시위 노동자 추가 학살이 벌어지면서 혁명은 끝났다.
거짓말 위에 세운 정권은 오직 폭력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 가장 많이 구속당한 집단은 ― 그리고 운동의 최고위 지도자들 다음으로 가장 긴 형량을 선고받은 사람들 ― 은 노동자 평의회를 이끈 헝가리 노동자들이었다.
오늘날 헝가리는 여전히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올해 10월 현 헝가리 총리가 냉소적으로 자백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부다페스트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모든 거짓말 중 으뜸은 옛 소련에서 발전하고 헝가리에 강요된 체제가 “사회주의”였다는 ― 그리고 그 대안은 서방식 시장 자본주의밖에 없다는 ― 것이다.
1956년 헝가리 노동자들은 다른 세계를 위해 싸우고 죽었다. 그런 세계의 핵심은 아래로부터 새로운 권력을 건설하는 노동자 평의회 사상이었다. 1989년의 혁명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정부들을 타도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정부들에 대한 환멸이 고조되고 있기에 노동자 평의회 사상은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이크 헤인즈는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갈무리, 크리스 하먼 공저)와 《러시아 ― 계급과 권력 1917∼2000》(국역: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 혁명부터 스탈린 체제를 거쳐 푸틴까지》(책갈피))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