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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영화 〈1980 사북〉을 계기로 돌아보는 1980년 사북 항쟁

영화 〈1980 사북〉(박봉남 감독, 2025)이 소수의 예술영화관에서 상영 중이다. 지금 보기 어렵다면 OTT/VOD에서 공개될 때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80년 4월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제작자와 감독은 5년 반 동안 사북항쟁과 관련된 100여 명을 인터뷰해 이 영화를 완성했다.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확장하고 보충하는 글이다. 영화와 함께 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2020년 출판된 사북항쟁구술자료 총서 1, 2, 3권(《1980년 사북: 항쟁의 발발과 명예회복 과정》, 《1980년 사북: 여성의 탄광살이와 항쟁 참여》, 《1980년 사북: 항쟁과 그 이후의 삶》), 2021년 출판된 사북항쟁연구총서 《1980년 사북: 항쟁과 일상의 사회사》와 또 다른 책 《사북항쟁과 국가폭력》, 당시 신문 기사와 TV 뉴스를 참고해 이 글을 썼다.

석탄증산보국

1970년대 광원 10명 중 1명꼴로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광원은 전체 산업 노동자의 1.5퍼센트를 차지했지만 전체 산업 재해의 14퍼센트를 차지했다.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이 시작되자 국가는 1966년부터 펴 온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을 중단했다.

주유종탄은 발전소와 가정 연료를 석유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대도시에서는 석유 사용 캠페인도 전개했다.

박정희는 1974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해 “유류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석탄 증산”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석탄증산보국” 기치 아래 탄광 수를 다시 늘렸고 생산량을 늘렸다. 광원들은 혹사당했고 안전은 무시됐다.

이때, 즉 1973년부터 1976년까지 탄광 재해 사망자가 가장 급증했다.

1970년대 민영 탄광은 연중무휴였다. 8시간씩 3교대로 24시간 돌아갔다. 민영 탄광 광원들은 거의 1년에 350일 이상 일했다.

광원들의 잦은 산업재해는 위험한 작업 환경과 만성적인 혹사 노동 때문이었다.

근로기준법은 유해 위험 작업을 하루 6시간으로 제한한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한테 이런 불법은 ‘정상’이다. 광업소들은 처벌은커녕 경고도 받지 않았다.

광원과 부인들은 갱내를 “월남”이라 불렀다. 죽고 다치기가 전쟁터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갱내 더위와 습도는 베트남보다 더 심했다.

낙담한 광원들은 자신들이 “인간 두더지”라고 자조했다. 하지만 탄광 사고와 사망 재해를 겪으면서 차츰 집단의식을 갖기도 했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광원들 사이에는 전우애 같은 것도 있었다.

영영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무력감이 억누르고 있었지만, 처우와 죽음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광원들 내면에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탄광 사고와 재해는 통계보다 훨씬 많았다. 사망 재해 원인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광원들의 ‘부주의’였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재해의 과실은 죽은 광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책임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탄광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존재는 회사였다.

그럼에도 1974년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원들은 민영 탄광 가운데 최대 생산량을 달성했다.

반면, 1974년과 1975년 동원탄좌 경영진들은 세무서, 노동청, 은행, 정부 관료들과의 탈세, 횡령, 뇌물 등 각종 범죄 행각들이 줄줄이 폭로됐다.

처벌은 솜방망이였고 동원탄좌 회장 가족들은 외려 떼돈을 벌었다.

10억 원도 안 되던 자본금이 8년 만에 300억 원을 넘었다. 엄청난 국가 보조금 혜택도 누렸다.

한데, 광업소에는 광원들이 탄가루를 씻어 낼 목욕탕조차 없었다. 상수도가 없는 사택의 광원들은 우물물을 길어 세수만 간신히 할 수 있었다.

탄광은 월급제도 아니고 복잡한 도급제였다. 따라서 각자 채탄량에 따라 임금이 들쑥날쑥했다.

광업소는 채탄량 측정을 대놓고 조작했다. 광원들은 거의 매번 눈앞에서 저임금조차 다시 갈취당하곤 했다.

광원들이 당하는 갈취는 저탄가와 채탄량 조작이 다가 아니었다.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파는 구판장도 동원탄좌 소유주 일가가 운영했는데,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값에 물건을 팔았다. 심지어 연탄도 훨씬 비싸게 팔았다.

광업소는 다른 상인들의 사북 시내 출입을 통제했고 사택 단지에 시내버스 노선이 들어오는 것까지 막았다.

탄광촌의 높은 물가가 사북광업소 광원들의 실질임금을 더욱 깎아 내렸다.

이런 것들은 백여 년 전에 세계 최대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이 콜로라도 탄광에서 지독하게 써먹었던 수법들이다. 여전히 전 세계 탄광과 광산의 상당수가 쓰고 있는 경영 노하우다. 사실은 야바위 아닌가. 실질적인 경제적 폭력이기도 하다.

동원탄좌는 중앙정보부, 지역 경찰, 언론의 삼각 카르텔을 운용했다.

사북광업소는 말단 경찰인 순경들한테도 각각 매달 쌀 한 가마와 연탄 100장씩 뇌물을 먹였다. 동원탄좌에서 광원이 죽거나 실려 나가면, 경찰들에게 즉시 1~2만 원씩 교통비도 쥐여 줬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파견돼 노동조합 회의에 참석했다. 정보과 형사도 노조 회의에 참석했다.

‘암행독찰대’라는 사조직까지 있었다. 이들은 24시간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회사에 보고하는 일만 했다. 모두 회장의 친인척으로 구성됐다.

민주노조 염원

동원탄좌 노동조합은 친회사 어용 지부장이 장악했다. 지부장은 월급 50만 원에 수당 15만 원, 한 달 판공비를 200만 원씩이나 받았다.

당시 노동자들 월급이 16~19만 원 수준이었으니, 노동조합 대표가 현장 노동자들보다 매달 최소 10배 넘는 돈을 받았던 것이다.

1억 3,000만 원의 조합비가 회의비, 섭외비, 사무비, 운영비 등에 쓰인다고 하지만 노동조합은 항시 회사 편을 들었다. 경찰들이 노조에 들러 돈을 타 가기도 했다.

1978년 말 시작된 제2차 석유 파동에도 박정희 정부는 탄광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1978년 153명이던 탄광 재해 사망자가 1979년 221명으로 급증했다. 이직률도 29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급상승했다.

결국 터질 게 터졌다.

1979년 4월 동원탄좌 노조 지부장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매번 지부장 선거 일주일 전에 대의원 선거를 치렀다. 왜냐하면 회사가 당선된 대의원들을 바로 버스에 싣고 유원지로 데려가 일주일 동안 돈으로 어르고 달랜 뒤 지부장 선거 투표일에 투표장 바로 앞에 내려 주면서 사용자 측 후보에게 투표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1979년에는 민주파 후보를 중심으로 뭉친 대의원들이 버스에 타지 않기 위해 숨어 버렸다. 일주일 뒤 치른 지부장 선거 결과는 박빙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또 사용자 측 후보가 재선됐다. 대의원 명단에 문제가 있었다. 알 수 없는 대의원들의 투표 덕분에 어용 지부장이 1위가 된 것이다.

민주파 대의원들과 조합원들이 반발했고 상급 노조도 문제를 인정했다. 어용 지부장의 자격이 박탈됐고 재선거가 결정됐다.

그런데 어용 지부장은 막무가내로 1년 이상 자리를 지켰다. 회사와 강원도청, 중앙정보부, 경찰이 뒷배였다. 심지어 1980년 임금 인상률까지 직권조인 해 버렸다(사실상 지부장 자격이 없으니 직권조인이라 말할 수도 없다).

1979년에서 1980년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심각한 경제 위기였다.

동시에 박정희의 독재 정치가 김재규의 암살로 막을 내리면서 오랜 권위주의 체제에 다소간 이완이 있었다.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계엄령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4월은 이 모든 유동성이 마지막 정점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런 모순적 상황에서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불붙었고 노동자들 고유의 투쟁이 활기차게 기지개를 켰다.

1980년 1월부터 4월까지 불과 4개월 동안의 노사 분규가 1979년 한 해 일어난 노사 분규의 7배가 넘었다. 파업 건수는 유신 시대 전체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한편, 전두환의 신군부는 2월부터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시켰다. 충정훈련은 전투 훈련이 아니라 시위 진압 훈련이다.

서울의 봄

권위주의적 착취 체제를 재정립하려는 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아래로부터 투쟁 세력 간의 긴장이 점차 더 날을 세우고 있는 동안, 완전히 파열될 5월을 바로 목전에 두고서 강원도 산간의 탄광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미 앞으로 가 지나온 사람의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면, 4월의 사북은 5월의 광주를 예고하는 듯하다.

1980년 4월의 사북 항쟁은 ‘막장 인생’이라 불리는 천대받는 하층 노동자들이 서슬 퍼런 신군부의 공권력을 감히 물리친 것이다.

따라서 신군부가 광원들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의 솔직한 진상은 권력 기관들을 꽁지 빠지게 도망치게 만들고 광원들에게 고개 숙이게 만들었던 강렬했던 저항 그 자체였다.

억눌린 기나긴 세월에 비하자면 아주 짧은 4일이었다. 게다가 곧 국가는 사북 광원들과 가족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보복했다.

1980년 봄 임금 협상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소속 광원들뿐 아니라 전국의 다른 광원들에게도 특히 중요했다.

경제 위기와 고물가가 맞물려 전국광원노조연맹의 42.75퍼센트 임금 인상 요구안이 달성된다고 해도 겨우 최저생계비 수준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동원탄좌의 어용 지부장이 20퍼센트 인상률에 동의해 버렸다. 가장 큰 민영 탄광이자 흑자인 광업소 노조가 광원들의 간절한 요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4월 18일 직원 민방위 교육 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어용 지부장은 임금협상 결과를 20퍼센트 인상으로 못 박았다. 분노한 광원들이 노조 사무실로 몰려갔다. 현장에 나타난 사북지서장이 “불법집회 해산”을 명령했다. 광원들이 불응하자 경찰은 지부장과 민주파 대의원을 연행해 갔다.

광원들이 경찰서까지 따라가자 사북읍장이 중재에 나섰다. 어용 지부장은 민주파에게 4월 21일 집회를 열어 해명하겠다고 각서를 써 줬다. 경찰도 21일 집회를 허가해 줬다.

하지만 집회는 불허됐다. 계엄하에서 경찰이 집회를 허가할 수도 없었다. 당장에 광원들의 분노를 피해 보려는 경찰의 꼼수였다.

집회가 불허된 줄 모르고 광원들은 21일 노조 사무실로 모였다. 1년을 질질 끌어 온 지부장 퇴진 문제가 해결될 걸로 기대했다. 하지만 지부장은 없었고 광원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원들의 분노는 일촉즉발이었다.

광원들은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회사 건물 주변에 전경들을 배치했고 광원들 사이에 사복 경찰 수십 명을 심어 놨다. 오후 5시가 되자 주간조가 퇴근했고 농성자 수가 더욱 불어났다.

부지부장과 광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자 사복 경찰들이 사진 채증에 나섰다. 항의하는 광원 한 명과 사복 경찰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경찰이 광원의 뺨을 때렸다. 곧 상황이 험악해지자 경찰들은 건물 밖으로 도망쳐 주차된 지프차에 올라탔다.

광원들이 따라가 차를 가로막았지만, 그대로 차로 밀고 나가면서 광원 4명을 치었고 그중 2명에게 심각한 중상을 입혔다.

경찰들의 차에 깔려서 죽은 듯이 널브러진 동료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광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노동자들의 등에 칼을 꽂는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꿔서 겹겹이 지독하기 짝이 없는 착취의 사슬을 어떻게 좀 해 보자고 나선 노동자들의 노력이 대체 왜 이런 취급까지 당해야 할 일인가.

그동안 아무도 차마 공공연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국가도 회사도 노조도 광원들을 보호해 주지 않으며 경찰들은 광원들의 적이라는 진실이었다.

당시 노조 건물 2층과 앞마당에는 60여 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있었지만, 경찰은 중상을 입은 광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 버렸다.

항쟁

“경찰이 광원을 죽였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사북을 휩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광원들은 현장에 있던 사북지서장을 끌고 가서 사북 경찰지서를 박살 냈다. 경찰들이 도망쳤다.

경찰지서를 점거한 뒤, 광원들은 평소 악독했던 자들, 즉 광원들의 채탄량을 조작했던 검수과장, 바가지 가격의 양곡과 판잣집에 불과한 사택을 배급했던 직원 등을 찾아내서 폭행했다. 광업소 보안실 비품들도 박살 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오랜 세월 악명을 떨친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나섰다. 중앙정보부 조정관, 육군보안대 정선 파견대장, 장성경찰서장, 정선경찰서 정보과장, 동원탄좌 광업소 비상계획부장 등이 평소 손님 접대용으로 운영되는 동원탄좌 객실에 ‘사태 해결’을 위해 모여 앉았다.

시위대가 몰려갔다. 시위대는 무궁화 4개가 달린 정복을 뽐내고 있던 경찰서장을 마구 구타했다.

“지부장 쫓아내고 40프로 쟁취하자!” 사람대접도 못 받고 물 부족과 고물가에 시달려 온 광원 가족들, 퇴직자와 주민들까지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 규모는 민주파 대의원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많아야 1,500명쯤 모일 줄 알았는데 6,000명쯤 되는 시위대가 사북 지역 전체를 반나절 만에 장악했다.

4월 22일 계엄 당국은 시위대 진압을 위해 강원도 내 경찰 병력을 사북의 안경다리 부근에 포진시켰다. 최루탄을 터뜨리며 광업소 진입을 시도했지만, 갑자기 역풍이 불어 최루가스가 경찰들을 덮쳤다. 광원들과 부녀자들은 안경다리 위 철길을 점거한 채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철길의 돌들과 갱목을 다리 아래 경찰들에게 집어 던졌다.

파죽지세로 경찰들이 밀려났다. 순경 한 명이 사망했고 경찰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광원들은 도망치는 경찰들도 쫓아가서 때려 줬다.

4월 23일 경찰은 헬리콥터로 합의문 전단을 살포했다. 엉터리 합의문은 사람들을 더욱 자극했고 공수부대 투입설이 돌면서 더욱 결연한 저항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항쟁 기간 치안과 질서 유지는 시위대가 담당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 투입에 대비하는 동시에 최후의 저항 수단을 지키기 위해 조를 짜서 교대로 무기고와 화약고를 지켰다.

광원들이 점거한 사북지서 무기고와 동원탄좌 예비군 무기고에는 소총 1,362정과 실탄 10여만 발이 있었다. 탄광의 갱도마다 화약고가 있었고 다량의 다이너마이트가 비축돼 있었다.

공수부대 투입 계획은 사실이었다. 육군본부와 기무사 기록에 따르면, 4월 23일 계엄사는 공수부대 투입을 결정했고 출동 준비 대기를 지시했다.

발포까지 가능한 출동 지시였고 나중에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이 대기했다.

사북은 광주처럼 대도시가 아니라 작은 골짜기였다. 공수부대가 날뛰면 결과는 더욱 치명적일 터였다. 광원들은 굴복하지 않기 위해 사북을 날려 버릴 각오를 했다.

결국 계엄 당국이 물러섰다. 24일 새벽 최종 협상이 있었고 광원들의 요구가 거의 다 관철됐다. 24일 아침에는 항쟁이 마무리됐다. 광원과 부녀자들은 광업소 주변과 경찰지서 등을 청소해 줬고 업무 복귀 준비까지 마쳤다.

항쟁 기간 계엄 당국의 보도 통제로 언론 보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항쟁이 끝난 24일부터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언론들은 게시판 기둥에 묶인 어용 지부장의 부인 사진을 전면에 앞세워 ‘폭력,’ ‘난동,’ ‘공포’를 포함한 제목을 달았다.

광원 부인들과 광원들에게 둘러싸여서 나무에 묶여 있는 여성은 이른바 ‘사북 난동 사건’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보복

안경다리 전투에서 패한 경찰은 광원들에게 잠시 동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사북에 집결했던 경찰 병력은 해산하지 않고 있었고 군 병력도 사북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5월 6일부터 5월 26일까지 20일간 최소 149명의 광원과 가족들을 정선경찰서 임시 조사실에 잡아들여 잔인하게 고문했다.

영화 〈1980 사북〉은 국가 폭력의 종합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악랄한 고문들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육군보안대와 경찰은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피해자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잡아 와서 고문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잡아 오길 반복했다.

사북 사람들은 늦은 밤과 이른 새벽마다 이웃이 잡혀가는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정선경찰서에 끌려갔다가 ‘병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그때가 광주항쟁 기간이었다. 육군보안대 요원들은 글자도 잘 못 읽는 광원에게도 ‘고첩[고정간첩]’이라느니, 너희를 조종한 게 누구냐고 캐물었고 광원들을 통닭구이처럼 묶어서 거꾸로 매달고 입과 코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부었다.

하도 무릎을 짓밟혀서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도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니 ‘간첩’이니 하는 말들로 빨갱이 사냥을 시도했고 전라도 출신 광원을 고문해서 ‘간첩들이 일으킨’ 사북과 광주의 폭동이라고 날조하려고 했다.

영화는 광원들의 아내들에 가해진 너무도 끔찍한 성고문들에 대한 증언들을 전한다.

149명의 고문 피해자 수는 계엄 당국의 행위들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폐기된 상황에서 일부만 확인된 수치다. 끌려간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음은 확실하다.

수백 명 중에서 2020년까지 사북항쟁동지회가 직접 확인한 피해자는 47명이다. 40년이 지난 뒤에도 당시를 떠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증언을 포기한 피해자들도 있다.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들도 많을 것이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고 자기 말로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는 극소수다.

피해자들에게 국가 폭력은 1980년 4월 24일이나 5월 26일에 끝나지 않았다. 일부는 풀려나서 곧 유명을 달리했거나 인생 자체가 파탄 났다.

많은 이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지고, 희생됐다. 피해는 자녀들에게까지 끼쳤다.

국가는 피해 배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죽고 잊히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

산 자의 과제

사북항쟁 두 해 전에는 동일방직 투쟁이 있었고 한 해 전에는 YH무역 투쟁이 있었다. 사북항쟁은 광주항쟁으로, 다시 1987년 7, 8월 전국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1987년 7, 8월 (사북을 비롯해) 강원도 탄전지대 광원들은 작업장부터 먼저 점거하면서 요구를 내걸었고 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시위했고 또 점거했다.

이를테면, 강원탄광 광원들은 태백역을 점거했다. 한때 영동선이 불통됐다.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와 명주 강릉광업소 광원들은 동명의 고속도로를 점거했다.

고한의 경일탄광 광원들은 고한과 사북 간 국도를 점거했다. 한나절 동안 차량 통행이 불가했다.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광원과 가족 2,000여 명은 하루 동안 고한역을 점거했고 다시 3,000여 명이 사북역을 점거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원들과 가족들은 태백선 철도를 3일간 점거해서 44시간여 동안 열차 운행을 중단시켰다.

안경다리 위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으로 앰뷸런스에 실려 온 고령의 동원탄좌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늦게 와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전국의 수백 개 탄광들에서 들불처럼 투쟁이 불붙었다.

철학자로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자 발터 벤야민의 유작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는 ‘역사철학테제’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18개 테제 가운데 상당수는 산 자들의 과제에 대해 말한다. 죽은 자들이 겪었던 고통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얘기한다.

6번 테제는 “적이 승리한다면 죽은 자들도 그 적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 점을 완벽하게 확신하는 역사가에게만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일으키는 재능”이 주어진다고 한다.

희생된 피억압자들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오늘날 투쟁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도덕적, 정신적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특히 12번 테제에는 다음의 정언이 있다.

“패배한 세대들의 이름으로” 노동계급은 “해방의 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하는” “복수하는 계급”이 될 것이다.

기억하고 투쟁하라. 이것이 후손들이 해야 할 역사의 복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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