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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1979년 12·12부터 1980년 5·17까지:
윤석열 이전 마지막 쿠데타를 돌아본다

윤석열 이전에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전두환의 신군부였다.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곧장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신군부는 5·17 계엄 확대라는 ‘2단계’ 쿠데타를 해야 했다.

1979년 12월 12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반년은, 권력의 핵을 잃은 지배계급이 동요를 수습하고 통제력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이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인가 하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윤석열 퇴진 투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신 정권의 분열

1970년대 말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한국도 경제 위기에 빠졌다.

불황 속에 1979년 물가 상승률은 22퍼센트에 달했다. 대중의 고통과 불만이 점점 커졌다. 경제 성장으로 독재를 정당화한 박정희 정권은 통치 명분을 잃었다.

유신 정권에 맞선 여성 노동자들 1979년 YH무역 노동자 투쟁 ⓒ출처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1979년 YH무역 노동자 투쟁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을 향한 대중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정권의 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기존의 강압적 지배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중의 분위기를 상대적으로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던 터라 강경 탄압이 더 큰 반란을 촉발할 수 있다고 봤다.

1979년 부마항쟁 ⓒ출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박정희의 방식으로는 체제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살해했다.

군부 내 분열

박정희 살해로 지배계급 내 분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동시에 유신 철폐와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기대감이 자라났다.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분출하기 전에 통제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박정희 살해 다음 날 곧장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하에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은 군부에 있었다. 그런데 군부 내에서 정국 안정 방안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대중의 변화 열망을 의식해 유신 체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방식의 통치를 추구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정승화를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군인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정승화는 ‘김대중 비토’를 주장하고 대중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애초에 정치적 중립이란 게 가능하지 않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정승화의 상대적 ‘온건함’에 불만이 있었다. 지배 질서를 수습하려면 계엄을 강력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봤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5·16 쿠데타 지지 시위를 조직했던 전두환은, 군부 내 박정희 친위 세력인 하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1979년 3월 박정희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하면서,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흡수해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도록 하는 비공개 대통령령을 내렸다. 이후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돼 군부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할 만한 전두환은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를 원했다.

신민당

그럼에도 공식 지휘계통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정승화의 계엄사령부였다. 군부와 정부·여당의 합의에 따라 11월 10일 최규하가 특별 담화를 발표해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 헌법을 개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규하의 특별 담화는 민주주의 염원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은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청년협의회의 한 회원이 증언했듯, 당시 신민당은 “모든 정치 일정을 최규하 과도 정부와 계엄사령부와의 협의 아래 이끌어 나가려 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군부·정부와 협의만 잘 한다면 대통령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낙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김영삼에게 중요한 것은 지배계급에게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박정희의 장례식이 끝난 11월 3일 하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김영삼은 옛 유신 세력들과의 밀실 협의를 중시하며 최규하 정부와 군부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최규하 정부와 군부에 맞서기 시작한 것은 재야와 학생들이었다.

11월 24일 재야 단체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은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 헌법에 따른 대통령 보궐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YWCA 국민대회).

1979년 11월 24일 YWCA 국민대회

11월 19일 박정희 사망 이후 한 달 만에 대학교가 전면 개교하면서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 투쟁과 학생자치조직 건설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야는 12월 7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속자 68명이 석방되고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신군부의 군권 장악

그 사이 신군부 세력의 불만은 점점 커졌다. 신군부는 정승화 등 계엄사령부의 장성들처럼 온건하게 대응하면 군부가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정국을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단행했다.

신군부는 군부 내에서 정승화 세력을 축출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했다. 전두환은 정승화를 제치고 군부 내 권력을 장악했다.

1단계 쿠데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청와대 구본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신군부 실세들

12·12 쿠데타가 성공했지만, 신군부의 집권이 예정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은 지배 질서가 이완돼 있던 분위기를 곧장 역전시키지 못했고, 대중의 변화 염원을 꺾지도 못했다. 신군부조차 제적 학생 복학, 해직 교수 복직, 김대중 등 687명 복권 같은 일부 유화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신군부는 군권 장악을 발판 삼아 정부와 사회 전체로 자신들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려 했다.

양김

12·12 쿠데타 이후에도 김영삼은 낙관적 착각에 빠져 있었다.

김영삼은 “최규하 정부를 상대로 박정희 대통령 때와 같은 투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신군부가 잔혹한 폭동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 명령을 내린 2월 18일, 김영삼은 최규하를 만나 5시간 동안 회담을 했다.

김영삼은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을 때도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낙관했다.

이에 반해 김대중은 상대적으로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

4월 17일 한 강연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정국을 볼 때 많은 걱정을 느낀다. 유신 세력은 10·26 사태로 빚어진 돌파구를 다시 메우려고 온갖 계획을 꾸미고 있으므로, 모두가 파수병이 돼야 한다. 유신 세력들의 이 같은 반역사적·반민주적 흉계를 국민의 힘으로 분쇄해야 한다.”

유신에 맞서 싸우고 1971년 대선에서는 박정희를 거의 이길 뻔했던 김대중은 재야 단체와 공조했고 학생과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다. 김대중의 이런 기반 때문에 군부와 관료 집단은 김대중을 한사코 배척했다.

그러나 ‘양김’ 사이에는 중요한 근본적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학생과 노동자 등 대중의 투쟁을 자제시키려 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학생과 노동자의 투쟁이 신군부에 정치 개입의 빌미를 준다고 봤다. 김대중은 “폭력이나 물리적인 힘의 행사를 자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영삼은 “학원 및 노사 문제”를 “민주화에 저해 요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련의 사태”라며 “국가 안정화 차원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1980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신군부를 막기 위해 단결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김이 기반과 정세 인식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신군부가 행정부와 국회를 무시한 채 무력으로 권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양김의 단결이 대중 행동을 자제시키는 그들의 정치적 약점을 해결할 수는 없다.

‘서울의 봄’ 상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 행위 주체는 신군부와 민주주의 염원 대중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결하면 민주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에게 의존하면서 정작 지배 체제를 타격할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를 낳는다.

노동쟁의

신군부의 유화 조처로 숨통이 트인 노동자와 학생들은 투쟁에 나섰다.

임금 인상 시기인 3월 들어 노동자 투쟁이 분출했다. 1980년 초부터 5월 17일까지 900여 건의 노동쟁의가 벌어졌는데, 이는 1979년 105건이었던 것의 9배에 달하고 유신 기간 전체 동안 발생했던 노동쟁의 건수와 비슷한 수치였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쟁취했고, 1970년대에 투쟁해 온 경험이 있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퇴직금제 같은 자신들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요구 외에 노동 3권 보장과 해고·구속 노동자 복직과 석방도 요구했다.

1980년 4월 16일에 시작된 사북항쟁은 ‘서울의 봄’에 벌어진 가장 격렬한 노동자 투쟁이었다.

사북탄광 광원과 가족들은 친사용자 측 노조의 형편없는 임금 인상안에 반발해 나흘 동안이나 사북읍을 장악하고 거세게 저항했다. 정부는 강경 진압이 저항을 더 키울 것을 우려해 기만적 합의로 투쟁을 종료시켰다. 투쟁을 주도한 노동자 100여 명은 연행된 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사북항쟁은 인천제철과 동국제강 등 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 ⓒ출처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서울의 봄’에 벌어진 노동자 투쟁은 유신 체제하 노동자 투쟁과 비교했을 때 괄목할 성장을 보여 줬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진 혹독한 억압으로 한국 노동계급은 투쟁 경험을 쌓고 조직과 의식을 성장시킬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1980년 노동자 투쟁은 사태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의 투쟁 경험은 1980년대 벌어질 노동자 투쟁의 자양분이 됐다.

학생

3월부터 학생들의 투쟁도 시작됐다. 서울대에서 6년 만에 학생회가 부활했고, 24개 대학에서 학원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다.

노동자 투쟁에 학생 투쟁까지 분출하자 최규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해 학생 투쟁에 유감을 표하며 자제를 요구했다.

4월 30일 계엄사령부는 노동자·학생 투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현상 유지를 바랐다. 재야 인사들도 비슷한 입장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군부에 빌미를 주지 말라며 자제를 당부했다.

그러나 학생과 노동자 투쟁은 위축되지 않았다. 노동쟁의가 계속 이어졌고, 학생들은 5월 1일부터 학원 민주화 투쟁을 사회 민주화 투쟁으로 전환했다.

신민당은 5월 8일에야 계엄 해제와 학원·노사·경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제의했다. 그마저도 임시국회 날짜가 5월 20일로 정해지자 신민당은 일주일 넘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5월 9일과 12일 총학생회장단은 신군부에 쿠데타 명분을 주지 말자며 가두 투쟁은 하지 않고 교내 시위만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야당과 재야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에 동의하지 않은 6개 대학 학생들이 5월 12일 밤 기습적 거리 시위에 나섰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한 신군부 성토대회

이런 압력 속에 총학생회장단은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장시간 논쟁 끝에 가두 투쟁을 결의했다.

14일 서울 21개 대학 7만 명과 지방 11개 대학 3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5일에는 서울 35개 대학과 지방 24개 대학으로 확산됐다. 서울역 광장에 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계엄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농성했다.

서울역 회군

같은 날 신군부는 소요 진압 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 진압 부대 투입을 지시했다.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퍼뜨리며 학생 시위가 북한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미국 국방부는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발표해 신군부를 거들었다.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학생들을 자제시키라고 요청했다.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남침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5월 13일 김대중은 “북한측에 오판의 자료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학생들의 투쟁을 만류했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서울의 학생 지도부는 효창운동장에 군이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해산을 결정했다. 바로 ‘서울역 회군’이다.

광주에서만 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 3만 5000명이 집회를 벌였다.

일각에서는 학생들만의 시위로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을 수 없었다며 서울역 회군을 비판할 수 없다고 본다. 《최근 한국 현대사》(책갈피)는 전반적으로 널리 추천하고 싶은 명쾌한 책이지만, 아쉽게도 ‘서울역 회군’에 대해 이런 관점을 공유한다.

물론 군부를 물리치려면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대파업 같은 노동계급의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울의 봄’이라고 할 만큼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광범한 상황에서, 대중 저항을 더욱 키우기보다 자제하기로 한 선택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 정치인들로부터 독립적인 정치를 갖고 투쟁을 이끌 지도부의 부재가 아쉬웠다.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공동으로 “시국 수습 6개 항”을 발표해 평화 유지를 촉구했다.

그러나 5월 17일 신군부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투쟁 자제를 호소하던 김대중은 내란 혐의로 구속됐고 김영삼은 가택 연금을 당했다.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정치 권력 장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두환은 곧장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호남인 차별을 당해 온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 총칼에 맞서 들고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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