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세계의 주인〉:
올해의 영화, 연대와 공감의 영화
〈노동자 연대〉 구독
올해의 드라마가 〈소년의 시간〉이라면 올해의 영화는 〈세계의 주인〉일 것이다.
저예산 영화라서 상영관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호평과 입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윤가은 감독은 언론에 스포일러 자제를 공식 요청했다(한 달은 지켜지리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이제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은 뒤라서 영화 내용이 이미 많이 공개되어 있다.
만약 감독의 처음 제안처럼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려면, 이 글 역시 전혀 읽지 않는 게 좋다.
올해의 영화
이주인은 고등학교 2학년, 학급 반장,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청소년이다.
그에겐 연애 얘기까지 서슴없이 나누는 엄마, 어리지만 속 깊은 남동생, 함께 불공을 드리는 외할머니, 문자를 보내도 계속 답이 없는 아빠가 있다.
학교엔 절친과 남친도 있다. 태권도장엔 도장을 마음껏 쓰게 해주는 관장님이 있고, 봉사모임에는 태권도 선배인 미도 언니와 연령과 직업이 다양한 회원들이 있다.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삶에 집중한다.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다른 누구나처럼 삶의 희로애락이 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폭력은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기며,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는”게 아님(아니어야 함)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미도와 주인이 속한 봉사모임은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자조모임이다. 일상의 얘길 나누고 서로 응원하고 함께 재판을 방청한다.
폭력의 고통은 거의 생존자, 종종 가족들, 때로 친구들까지의 것이지만, 생존하고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힘과 용기가 된다.
세계의 주인
내 경험도 그러하다. 나는 직업적으로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폭력, 성착취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쓰고, 인터뷰 하고, 시위에 나서거나, 다른 피해자들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배운 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들이다.
피해 여성 쉼터 생활인들은 때로 생애 최초로 미술관이나 오페라를 관람하는 기회가 있다. 주로 노동계급 가정 출신인 이 여성들은 진정한 감동을 받는다. 정말로 편한 마음으로 예술을 향유해보는 것이 처음인 것이다.
11세부터 9년간 아빠(목사)에게 강간과 온갖 가학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을 당했지만 엄마(교사)에게 외면당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김영서 씨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절한 지원만 해주면 잘들 살아요.”
〈세계의 주인〉은 연대와 공감의 영화다.
“뉴스화되지 않는, 보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아주 엄청난 기적”(윤가은 감독)을 담고자 했다. 다 보고나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에게 억압받고 학대받고 상처 입지만,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연대를 얻고 살아가는 평범하고 영웅적인 우리들이다.
OTT에서 윤가은 감독의 전작인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찾아서 봐도 (이 영화와는 톤이 꽤 다르지만) 평범한 아이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겪어보는 특별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아동 성학대, 성착취는 왜 일어나는가?
아동학대의 뿌리는 사회에 있다. 따라서 아동학대가 가정뿐 아니라 국가기관, 학교와 스포츠클럽, 교회까지 사회 전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착취, 억압, 불평등, 위계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아동학대는 이 질서에서 가장 취약한 아동의 지위를 반영한다.
지배자들이 원하는 사회 모델은 가정과 학교에서도 구현된다. 남성은 가장 중요하고 강하고 여성은 부차적이고 아동은 지위가 가장 낮다.
아동, 청소년은 너무 자주 부모의 그림자나 복제품쯤으로 여겨진다. 독립된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대우받지 못한다.
청소년 교정시설과 보호시설에서도 아동학대가 반복된다. 위계 문화가 강할수록 학대의 기회가 생기기 쉽고 학대와 괴롭힘이 경시되기도 쉽다.
가정 밖에서 이뤄지는 아동 성착취는 종종 특정한 대가로 유인된 형태다. 물건이나 금전적인 게 아니어도 애정과 관심을 받을 가능성만으로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어리거나 젊은 여성(과 남성)들은 교육기관과 사법기관에게 무시당하거나 오히려 문제아나 범죄자로 몰린다.
가난하고 취약한 아이일수록 마치 투명인간처럼 여겨질 수 있다. 여성과 아이와 빈자의 가치를 낮게 보는 지배자들의 사고방식이 이들이 겪는 학대와 폭력을 더욱 경시한다.
이 사회에선 가난 자체가 결함이 되고, 따라서 빈곤 아동은 학대당하기 더 쉽다.
열악한 환경, 방임, 정서적·신체적 학대까지 광범위한 아동학대 중에서 성학대는 심각한 한 형태다.
2022~2024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성폭력 피해 상담 통계에 따르면, 친족 성폭력 피해 상담은 1만 7045건이었고, 그중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51.2퍼센트였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범죄 통계에서도 전체 성범죄 통계가 그렇듯, 가해자는 주로 아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영국의 아동 성학대 관련 전문기관의 2023년 보고서에서, 가정 내 아동 성학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경찰에 신고된 모든 성범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 보고서는 “10명 중 1명의 아동(여아 15퍼센트, 남아 5퍼센트)이 16세 이전에 성적 학대를 경험한다”고 추정한다.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과 연관된 아는 사람에 의한 학대와 폭력은 피해 아동이 도움을 구하는 데 엄청난 장벽이 된다.
따라서 가정 내 아동 성학대나 친족 성폭력은 다른 성범죄 피해보다 훨씬 늦게 신고되는 경향이 있다.
왜 아이들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가정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까?
자본주의적 핵가족은 체제의 단순한 산물이 아니고 체제를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즉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아동, 노인, 병자, 장애인을 돌보는 기능을 개별 가정, 그중에서도 주로 여성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계급은 재정적 책임을 회피한다. 성인을 잘 착취하고 아동을 싸게 양육하는 이러한 구조는 자본가 계급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
그것이 진정한 유대관계를 훼손하고 개인들을 극한 위험에 빠뜨린다고 해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내에서 행복과 위안을 얻는다. 가족은 가혹한 세상에서 버티는 힘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가족은 끝없는 의무감과 부담, 긴장과 스트레스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족이 사회에서 하는 구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족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도 힘들어 한다. 그래서 어떤 가정은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은 게다가 가난, 실업, 고된 노동, 열악한 주거처럼 부자들은 겪지 않는 스트레스까지 겪는다.
물론 학대는 노동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온갖 긴장과 압박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사람들은 인간관계와 성을 왜곡하는 사회 속에 산다.
특히, 자본주의는 성을 상품으로 취급한다. 성을 사고팔거나 훔치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사회 전반의 불평등, 억압은 성적 관계와도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자 아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폭력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계급 사회에서 등장한 사회 문제다. 계급 사회 이전 사회들에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양육의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생물학적 부모뿐 아니라 집단 내 모든 성인에게 돌봄을 받았고 아이들은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성 역할도 선택할 수 있었다.
5,000여 년 전 계급 사회의 출현이 이런 생활방식을 점차 끝장냈다. 대다수 남성과 여성은 소수의 지배계급에게 종속됐다.
아동학대를 끝낼 열쇠는 이러한 사회관계의 변혁에 있다. 평등과 존중을 토대로 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그런 사회였다는 사실에서 자신감을 얻어야 한다. 폭력적인 개인의 행동을 규탄하는 동시에 왜 그런 행동이 벌어지는지 구조적 원인을 살피고 전혀 다른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