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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그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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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적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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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혁명적 좌파에게 이제 낡은 과제가 됐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그 상당 부분이 시작됐던 곳인 프랑스에서는 한물간 지 좀 됐다. 역사가 토니 저트는 미국을 여행하는 프랑스 학자들이 거기서 프랑스 사상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지적했다(Past Imperfect, NYU Press, 2011, p.300).
한편, 프랑수아 퀴세는 프랑스 사상이 미국 대학교에서 하나의 세련된 지적 자본이자 문화적 상품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꼬집었다(《루이비통이 된 푸코?: 위기의 미국 대학 프랑스 이론을 발명하다》 난장, 2012). 퀴세에 따르면, 미국 학자들은 프랑스 철학을 단순히 ‘재활용’하기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게 완전히 새로 요리해 ‘프랑스 이론’이라는 새로운 미국산 브랜드로 ‘재발명’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의 사상이 점차 힘을 잃어갈 때 미국에서는 비판적 인종 이론이나 퀴어 이론, 젠더 이론 등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사상이 가진 본래의 맥락은 사라지고 오직 ‘급진적인(때로는 괴상하고 기이한) 스타일’만 남게 됐다.
1980년대 이후 미국 대학교를 장악하고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좌파로까지 파고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계급 투쟁의 언어를 해체하고, 혁명의 전망을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로 분산시키며, 자본주의에 맞서는 집단적 정치 실천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했다. 이 사조에 맞서 뒤늦게라도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 일은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방법과 내용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더 심한 이론적 혼란과 정치적 퇴보를 낳을 수 있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가 2026년 펴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하 ‘비판서’)은 바로 이러한 위험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저작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좌파, 정체성 정치, 트로츠키주의를 한데 묶어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도구라고 비판하는 한편, 옛 소련과 “북조선”(이하 북한)의 사회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로 옹호하는 스탈린주의적 저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는 명분 아래 이 책은 실제로는 스탈린주의 정치의 고전적 레퍼토리를 되풀이한다. 음모론적 역사 해석,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중상, 정체성 정치에 대한 조야한 계급 환원론, 그리고 북한 체제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이 그것이다.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책갈피, 2014)과 노동자연대 여성 기자들이 공저한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책갈피, 2023)이라는 두 가지 준거 틀에 기초해 노정협의 ‘비판서’를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캘리니코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1968년 운동의 최종(1970년대 말) 정치적 패배와 이데올로기적 조건에서 비롯한 역사적 현상이며, 그에 대한 유효한 비판은 스탈린주의 사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과제는 단순히 노정협의 나름 급진적인 문구를 반박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내부의 갈림길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하나의 길은 총체성과 보편성을 복권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주의와 관료 지배를 재활성화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차이와 특수성을 인정하되 그것을 자본주의 총체성과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의 문제에 다시 연결하는 길이다. 노정협의 ‘비판서’는 전자의 길을 걷고 있고, 캘리니코스와 노동자연대의 문제설정은 후자의 길을 제시한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한국 좌파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 문제를 둘러싸고 빠지기 쉬운 혼동을 걷어 내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구분은 오늘의 현실 때문에도 중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해도, 그것이 남긴 파편화된 정치 감각과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1 보편성에 대한 불신, (‘국익’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국가주의적 반발의 상호작용은 여전히 좌파의 실천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구조와 계급을 말하는 것이 곧 낡은 ‘거대서사’처럼 취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반작용으로 민족과 국가, 질서와 권위를 내세우는 조야한 반포스트모더니즘이 고개를 든다. 노정협의 ‘비판서’는 바로 이 두 번째 경향의 명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비판하는 일은 과거 철학 논쟁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좌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싼 실천적 분기점과 맞닿아 있다.
2. 서평 대상 도서의 성격
노정협의 ‘비판서’를 평가하는 데 맨 먼저 필요한 일은 이 책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 비평서라기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좌파 다원주의 전반을 하나의 적대적 사상 조류로 규정하고 그것에 맞서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의 언어를 재권위화하려는 강한 정치적 선전 문서에 가깝다.
책의 발행사 서문은 이 책의 기본 도식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한 흐름으로 뭉뚱그리면서, 이 흐름이 ‘계급과 계급투쟁, 착취와 불평등, 분단과 민족, 제국주의와 민족 억압, 노동과 노동자 중심성, 계급동맹과 통일전선, 집단과 집단주의’를 시대착오적인 거대담론으로 폐기한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핵심은 거대담론 일반의 이론적 정당화 여부가 아니라, 계급과 민족을 사회 분석과 정치 실천의 중심 축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이다. 동시에, ‘비판서’는 ‘현실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지 못하고 다당제와 사유화로 해체된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 전도된 인식을 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그 해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했다고 단정한다.
책은 3부로 이뤄져 있다. 1부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2부는 제국주의 프로파간다 비판(번역물), 3부는 민족과 계급으로 이뤄졌다. 그 안에는 정체성 정치, 동물권, 탈민족주의, 사회(주의) 애국주의, 미국 패권, 남북관계 등의 주제가 하나의 일관된 정치적 관점 하에 배열된다. 이처럼 노정협 ‘비판서’는 단순히 도그마적인 데다 부분적으로는, 캘리니코스와 같은 방향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매개로 스탈린주의 정치 전체를 새삼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이 책의 논조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비판의 대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도 봐야 한다. 노정협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철학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 NGO화된 운동, 탈민족주의, 심지어 트로츠키주의까지 포괄하는 넓은 적대 범주다. 이런 구성은 얼핏 보면 논쟁의 전선을 넓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사조와 실천을 하나의 정치적 낙인 아래 밀어 넣음으로써 분석 대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결국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기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경유해 자신들이 오래전에 가지고 있던 스탈린주의적 정치 도식을 다시 승인받으려 한다.
3. 방법 문제: 역사유물론 대 음모론
노정협 ‘비판서’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왜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에게 지적으로 설득력을 가졌는지를 사회적·역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과 확산을 CIA와 제국주의 정보기관의 자금 지원, 그리고 ‘부르주아 프로파간다’의 결과로 환원한다.
책의 2부는 CIA가 문화자유회의(CCF)를 창설하고,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 미국 민주주의기금(NED), 국제개발처(USAID) 등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를 전파했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와 소련을 동일시하는 양비론’으로 비판받고, 칼 포퍼는 소로스의 사상적 스승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로 묘사되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OSS와 국무부 산하 정보연구실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CIA 요원처럼 분류된다. 신좌파, 트로츠키주의, 정체성 정치, ‘워크’(인권 의식 있음)가 모두 하나로 묶여 ‘제국주의 프로파간다’로 규정된다.
이 설명 방식의 문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역사유물론이 아니라 음모론이다. 역사유물론은 이데올로기를 계급 구조와 생산관계, 그리고 역사적 세력 관계의 산물로 설명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정 사회집단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거나, 특정한 역사적 패배의 산물이라는 것은 유물론적 설명이다. 그러나 CIA가 자금을 지원한 덕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됐다는 주장은 그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진 내적 이유를 무시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단순히 외부에서 주입된다고 해서 광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특정 사회적 경험과 공명할 때 비로소 확산되는 것이다.
더욱이, 노정협의 방법은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귀결로 이끌린다. 스탈린주의 비판 일체, ‘현실 사회주의’ 비판 일체, 정체성 정치 일체를 CIA의 음모와 연결지으면, 좌파 내부에서 진지하고 솔직한 이론적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스탈린주의 체제의 관료적 변질을 지적하는 것도, 여성 차별이나 인종차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트로츠키주의 혁명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모두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는 혁명적 좌파 내부의 비판적 지성을 질식시키는 방법이다.
음모론이 특히 해로운 것은 그것이 설명의 수준을 낮춘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것은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외부 조종자의 문제로 바꿔 버린다. 예컨대 정체성 정치가 왜 자유주의 쪽으로 포섭되기 쉬운지, 왜 좌파 내부에서도 차별 반대 요구가 종종 계급 문제와 분리돼 제기되는지, 왜 일부 지식인들이 옛 동구권 체제의 실패 이후 보편성 자체를 의심하게 됐는지를 설명하려면 운동 내부의 약점과 역사적 패배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제국주의 문화공세로만 설명하면, 자기 정치세력 내부의 실패와 책임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방식은 자기비판을 차단한다는 점에서도 반마르크스주의적이다.
더 나아가 이런 설명 방식은 왜 포스트모던 담론이 특히 1970년대 후반 이후 강한 공명력을 얻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옛 동구권 체제의 억압, 1968년 세대의 패배, 노동운동의 후퇴, 신중간계급의 확대, 대학과 문화산업의 재편 같은 조건들이 없었다면, 외부의 후원과 선전만으로는 결코 그런 이론적 유행이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설명해야 할 것은, 누가 뒤에서 조종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 언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는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정협은 역사적 설명을 포기하고 정치적 낙인에 의존한다.
4.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우리는 이와 전혀 다른 방법론적 출발점을 취한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단일하고 자명한 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캘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에서의 특정 변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사조, 그리고 우리가 전혀 새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회이론, 이 세 흐름의 수렴으로 파악된다. 이런 중층적 관점의 강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히 선언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 논리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론적 막다른 길을 들춰 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캘리니코스는 리오타르의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 테제가 자기모순적임을 보여 준다. ‘모든 거대서사는 거부돼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서사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판을 제기한다. 만약 기호가 현실과 무관하다면, 보드리야르의 이론 자체도 어떤 현실에 대한 진술일 수 없고, 따라서 참인지 거짓인지도 판단할 수 없다. 이처럼 상대주의의 자기논박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전체의 아킬레스건이다. 노정협 ‘비판서’에서는 이런 내재적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은 1968년 세대의 정치적 패배와 관계있다. 1968년의 봉기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고양된 계급 투쟁의 표현이었지만, 그 유력한 조류들은 혁명을 완수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 프랑스 공산당(PCF)과 노동조합총연맹(CGT)은 총파업을 협상 카드로 제한하며 드골 정권을 구해 냈다. 그 결과 1968년 투쟁에 직접 참가했던 지식인들이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고, 1970년대 후반경 이 패배의 산물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또한 1960~70년대의 교육 확대로 급증한 ‘전문직·관리직’ 중간계급의 사회적 경험과 이해관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게 됐다.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패배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라는 객관적 사회 관계를 분석하는 유물론적 설명이다.
더구나 캘리니코스의 장점은 상대를 효과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상대를 가능한 한 강한 형태로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기반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이 제기한 합리성 비판과 주체 비판, 재현 비판이 어떤 철학적 매력을 가졌는지도 진지하게 다룬다. 그래야만 그 매력이 어디서 한계에 부딪히는지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정협의 텍스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판결이 내려진 피고처럼 다뤄진다. 이런 식의 서술은 당파적 확신을 강화할 수는 있어도, 독자를 설득하거나 이론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직한 접근법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반동적 거짓말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와 좌파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 생겨난 왜곡된 시대의식이다. 따라서 비판도 그것을 낳은 조건을 해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캘리니코스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약점을 드러내면서도, 왜 그것이 한 시대의 상식처럼 보이게 됐는지 설명한다. 반면 노정협은 상대를 탐구하기보다 먼저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그 판결에 맞춰 대상을 재구성한다. 이 차이는 단지 이론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마르크스주의가 실제로 설명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다.
5. 포스트모더니즘 규정의 지나친 단순화
노정협의 ‘비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현실의 본질적 모순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규정한다. 이 규정에는 부분적 진실이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던 담론의 여러 버전은 계급, 역사, 총체성,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에 회의적이었고, 때로 거대서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노정협의 이 규정이 성기고 도식적이라는 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말 ‘계급은 없다’, ‘착취는 끝났다’, ‘제국주의는 환상이다’라고 일관되게 말해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흔한 경우는, 그런 거시적 범주들의 보편성이 특정 지배 형식과 결부돼 왔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노정협은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정체성 정치, ‘워크’를 거의 하나의 연속체로 다룬다. 서로 다른 경향과 논점들이 ‘계급 부정’, ‘현실 사회주의’ 부정, ‘제국주의에 유리한 사상’, ‘부르주아 정치’라는 이름으로 재빨리 뭉뚱그려진다. 그러나 푸코의 권력 개념과 데리다의 차연 개념, 제임슨의 후기 자본주의 문화론과 자유주의적 다양성 정치,2 흑인 해방 운동의 자기조직화와 기업 주도의 대표성 정치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이들을 전부 하나의 ‘다원주의 이데올로기’로 묶는 것은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대상을 재단하는 방식이지, 대상의 복잡한 실체를 직시하는 방식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사상과 정체성 정치가 일정한 힘을 얻은 이유 하나는 당시 좌파의 보편주의가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이고 유럽 중심적이며 이성애 규범적이고 때로는 국가주의적이었다는 비판이 일부 타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비판은 종종 상대주의와 파편성의 정치로 미끄러졌고, 계급과 구조를 지워 버리는 자유주의적 형태로 수렴했다. 하지만 그 출발점 자체를 모조리 허위라고 하면, 왜 차별받는 많은 집단들이 그런 언어에 끌렸는지 설명할 수 없다. 노정협의 ‘비판서’는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패한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덩어리로 취급하는 태도는 현실 인식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푸코가 규율권력과 미시권력을 분석하면서 제기한 문제, 데리다가 재현과 의미의 안정성에 대해 던진 질문, 라클라우와 무페가 계급 환원론을 비판하며 헤게모니를 재정식화하려 한 시도에는 서로 다른 이론적 맥락과 정치적 함의가 있다. 이들의 결론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런 차이를 지워 버리는 순간 비판도 피상적이 된다. 대상을 구분할 능력을 잃은 비판은 결국 가장 손쉬운 낙인과 과장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 분석의 정밀함이 중요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요소가 똑같이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근대 보편주의 내부의 배제와 폭력을 폭로한 문제 제기, 문화와 담론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 통찰, 차별받는 집단의 경험과 언어가 그 나름의 고유한 정치적 성격을 가진다는 주장에는 일정한 현실적 근거가 있었다. 문제는 이런 통찰이 자본주의 총체성과 계급 관계, 국가와 제국주의의 구조 분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종종 차이의 찬양과 파편의 병치에 머물렀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 폐기가 아니라, 어느 문제 제기가 현실의 모순을 비추고 어느 지점에서 이론적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지를 구분하는 작업이다.
6. ‘현실 사회주의’ 옹호와 스탈린주의의 딜레마
노정협 ‘비판서’의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는 스탈린 시대 소련을 옹호하고 트로츠키주의를 제국주의의 동조자로 비방하는 방식이다. ‘비판서’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반혁명의 시작으로 규정한다. 스탈린 시대 소련을 비판하는 것은 ‘소비에트의 영상을 흐리는 반공주의적 행위’로 간주된다. 트로츠키가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것도 ‘혁명을 배반한’ 것으로 규정되며,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반스탈린주의, 반관료제를 내걸고’ 스탈린을 ‘도살자’로 묘사한 것은 소련 ‘사회주의’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행위로 비판된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1930년대에 약 70만 명이 총살됐고, 굴라크 노동수용소에는 수백만 명이 수감됐다. 레닌이 공동 설립한 볼셰비키당의 구세대 지도자들이 조작된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학살됐다.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개입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고 혁명적 좌파를 분쇄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비춰 볼 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단지 ‘사회주의 부정’으로 치부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설이 드러난다. 노정협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실 사회주의’를 불신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주의가 파고들었던 실제 역사적 약점이었다.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많은 나라에서 노동계급 자력 해방 정치는 당·국가 관료의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 주객전도(主客顚倒)로 대체됐다. 노동자 평의회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관료적 명령 체계에 종속됐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는데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 부정이다’라고만 말하면,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지는 않고 신조(信條)와 교의(敎義: 도그마)를 암송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공격할수록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거대서사를 불신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스스로 재현한다. 이것이 스탈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역설이다.
트로츠키가 제출한 ‘노동자 국가의 관료적 변질’ 테제는 이 문제에 대한 만만찮은 마르크스주의적 응답이었다. 이것은 소련이 더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국유화라는 소련의 소유관계는 보존돼 있지만 그 위에 스탈린 관료집단이 특권층으로 자리잡았다는 분석이었다. 노정협은 이 분석을 ‘혁명 배반’으로 규정하지만, 이 규정의 논리를 따라가면 실제로는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모든 비판이 ‘반혁명’이 된다. 노동계급의 권력이 특정 집단에 의해 찬탈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노동자 국가도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사실상 일당/관료 지배를 사회주의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 이론적 전도다.
물론 노동자연대는 트로츠키의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이 1920년대 말부터는 적실성(適實性)을 잃었다고 본다. 그때부터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국가가 생산수단을 가졌어도 실제 운영권은 당 관료들이 가로챘고, 노동계급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당과 국가가 노동계급을 대리한다며 실제로는 억압했고, 소유는 국가가 하지만(국유) 실제 권한과 혜택은 노동자가 누리지 못하게 돼 이름뿐인 국유화일 뿐, 노동자의 삶은 옛 사회 체제 하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게 됐고, 결국 군대처럼 경직된 국가 통제 아래 노동자들이 부속품처럼 동원되는 처지로 내몰렸다. 노동자 통제가 없는 국유화 조치는 노동자를 생산의 주인이 아닌, 국가 계획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 민간 자본의 착취가 국가 자본의 착취로 대체된 것일 뿐, 노동자의 소외는 서방 자본주의 하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이제 국가는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서사 뒤에 숨어, 일터와 지역사회의 생동하는 노동자 자치를 억압했다. 이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국가 기구의 자기영속화를 위한 기만적인 재편에 불과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탈린주의 비판이 곧바로 반공주의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스탈린 체제의 범죄와 관료 지배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를 국가와 당의 자기영속화와 동일시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진 억압을 직시하지 않은 채 국민국가적 성취만을 찬양하는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주의가 제기한 ‘보편성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라는 문제 제기에 가장 취약한 형태로 맞서는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노정협의 스탈린 옹호는 단지 과거 해석의 오류가 아니라, 오늘날 보편성과 해방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기 발밑을 스스로 허무는 태도다.
이 대목은 단지 소련 사회의 성격 논쟁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국유화와 계획경제, 강한 국가권력의 존재로 치환하면,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재와 관료적 억압은 부차적 흠결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마르크스 말대로 노동자의 해방이 노동자 자신의 행위라면, 사회주의의 기준도 생산수단의 법적 소유형태뿐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통제, 정치적 자유, 집단적 자치의 실질적 존재에 놓여야 한다. 이 기준을 버리는 순간,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주의가 공격해 온 ‘억압적 보편성’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는 설득력 있게 답변할 수 없게 된다.
7. 정체성 정치 비판의 조야함과 차별 반대 투쟁의 분리 불가능성
노정협의 ‘비판서’는 정체성 정치를 ‘공동의 적에 대한 계급연대 대신 노동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특정한 성별, 성적 지향, 인종, 민족, 종교 집단 등의 구성원으로 먼저 정체화하도록 장려함으로써 그들을 분열시키고 정복하는 정치’라고 묘사한다. 나아가 그것을 ‘부르주아 정치’라고 규정하고, 때로는 심지어 ‘우익과 파시즘의 성장에도 적합한 토양이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 문장이 겨냥하는 현실의 일부는 분명 존재한다. 자유주의적 다양성 산업, 경쟁적 피해자성, 제도권 엘리트 대표성 정치(주류화 전략), 계급을 지워 버리는 문화주의적 정체성 담론은 실제로 대중 저항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은 동시에 중요한 것을 놓친다. 사람들은 단지 누군가의 선동 때문에 자신을 여성, 흑인, 성소수자, 트랜스, 이주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실제로 그 범주를 통해 차별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저항도 종종 그 범주를 둘러싸고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이 흑인을 흑인으로, 성차별이 여성을 여성으로, 트랜스 혐오가 트랜스인을 트랜스인으로 표적 삼을 때, 그 범주를 둘러싼 자기조직화는 허위의식이 아니라 현실적 대응이다.
여성 해방 운동은 단지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는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운동과 좌파 내부에서 여성의 노동, 재생산, 가사, 성폭력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 온 현실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흑인 해방 운동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백인 중심 노동운동과 자유주의 정치가 구조적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비판서’가 이러한 역사를 무시한 채 정체성 정치 전체를 ‘부르주아 분열 정치’로 매도할 때 그 비판은 극우의 보수 반동적 담론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이 점에서 노동자연대의 정체성 정치론은 노정협보다 정교하다. 우리는 정체성 정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별받는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싸우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고 실제로 진보적 성과를 낳았다고 본다. 흑인 해방 운동, 여성 해방 운동, 성소수자 해방 운동은 사회를 실제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비판하는 것은 구조적 차별의 근간을 공격하기보다 기존 제도 안에서 대표성과 가시성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와, 차별 반대 투쟁을 계급 투쟁과 연결하지 못하고 제도적 포섭으로 귀결되는 정치다.
이 구분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흑인 노동자가 인종차별에 맞서 조직하는 것은 계급 투쟁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급 내부의 분열을 만들어 내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인종차별은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로 노동계급 전체를 약화시키는 무기다. 따라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 노정협의 ‘비판서’는 이 섬세한 구별을 하지 못함으로써,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차별 반대 투쟁의 정당성도 훼손한다.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이 점에서 더 나은 균형을 보여 준다. 정체성은 해방 정치의 출발점일 수 있지만 종착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받는 집단이 스스로 조직하고 말할 권리는 인정돼야 하지만, 그 정치가 자본주의와 계급 차별에 맞선 집단적 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제도적 대표성과 상징적 인정의 정치로 굳어질 위험이 크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정체성 정치 일반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차별 반대 투쟁을 더 넓은 계급 정치와 연결시키는 전략이다. 노정협은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채 차별 반대 정치 전체를 불신하는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또한 정체성 정치 비판은 언제나 두 층위를 분리해 다뤄야 한다. 하나는 억압받는 집단의 자기조직화와 자기명명의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과 국가, 제도권 정당이 그것을 흡수해 대표성과 다양성의 언어로 바꿔 버리는 자유주의적 포섭이다. 전자를 후자와 동일시하면, 실제 차별에 맞선 저항의 동력을 잃게 된다. 반대로 후자를 비판하지 않으면, 정체성의 언어는 체제 비판을 누락한 채 승진 기회와 상징적 인정의 경쟁으로 축소되기 쉽다. 노정협의 문제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통째로 ‘부르주아 정치’로 처리한다는 데 있다.
8. 계급을 전략적 범주로 보기
노정협의 ‘비판서’는 거듭 노동계급 중심성과 계급연대의 필요를 말한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계급이 실제로 어떤 의미의 범주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연대의 정치는 계급을 전략적 범주로 본다. 이는 단지 ‘가장 중요한 모순은 계급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재생산을 실제로 담당하는 집단인 노동계급이 체제 전체를 멈출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계급 담론은 그 노동계급이 이미 분열돼 있고, 인종차별·성차별·성소수자혐오·국적차별·장애차별이 그 내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계급을 전략적 범주로 이해하는 노동자연대의 정치는 여기서 강점을 가진다. 우리는 노동계급이 자동으로 더 도덕적이거나 더 진보적인 집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계급 내부에도 인종차별, 성차별, 트랜스 혐오가 존재하며 좌파는 그런 편견과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동계급이 잠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덕적 우월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 재생산을 담당하는 위치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위치 때문에, 차별 반대 투쟁도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과 결합될 때 근본적인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
노정협에게는 계급이 종종 이미 정해진 진리의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차별 문제는 계급이라는 더 큰 진리에 종속되거나, 때로는 계급연대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계급 정치의 진짜 어려움은 바로 그 반대에 있다. 노동계급 내부의 차별과 차등, 파편화된(정체성적) 분열을 실제로 극복하지 않으면 계급은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계급을 추상적 단결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쉽다. 계급 내부의 차이를 무시한 채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만 외치는 걸로는 부족하다. 자칫 여성 노동자가 겪는 성차별이나 이주 노동자가 겪는 인종차별 문제를 ‘계급의 이름으로 참아라’, 심지어 ‘분열을 조장하지 마라’며 억제하기 쉽다. 겉으로는 단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의 불평등과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어 위기가 닥치면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단결이 된다. 그러나 연대는 자연발생적 상황이기보다는, 계급 내부의 불평등을 제거해 나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계급 내부에 존재하는 성별 차등, 인종적 편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급 내부의 암적 존재로 여기고 함께 싸워 없애는 것이다. 동료 노동자가 겪는 차별에 함께 분노하고 싸워 줄 때 비로소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강철 같은’ 신뢰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실제 계급연대다. ‘실제 계급연대’는 정체성 문제를 무시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싸우면서만 생긴다. 노정협은 계급을 강화하려다가 오히려 계급을 약화시킨다.
오늘날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노동계급은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뿐 아니라 서비스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돌봄노동 종사자, 공공부문 노동자 등으로 폭넓게 이뤄져 있다. 이 다변적 구성 속에서 차별은 단지 부수적 경험이 아니라 노동계급 형성 자체를 규정하는 요소다. 따라서 계급 정치를 진지하게 말하려면, 노동계급 내부의 균열(파편화)을 도덕적으로 꾸짖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는지를 분석하고, 그 균열을 넘는 공동 투쟁의 방식을 실제로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도 노정협의 계급론은 지나치게 선언적이다.
여기서 계급을 전략적 범주로 본다는 말의 뜻을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계급이 다른 차별보다 더 도덕적으로 숭고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실제로 멈추고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의 소재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계급 정치는 차별 문제를 뒤로 미루지 않는다. 오히려 차별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실제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과제로 삼는다. 여성 노동자의 재생산, 이주노동자의 법적 불안정, 성소수자 노동자의 천대받은 경험은 계급 정치 바깥의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계급 형성과 단결의 조건을 직접 규정하는 요인이다.
9. 민족, 계급, 국제주의
노정협의 ‘비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민족과 계급을 거대담론이라며 부정한다고 비판하고, 민족 개념의 실재성과 자주성을 강하게 강조한다. 여기에는 피압박 민족의 저항과 반제국주의의 정당성을 방어하려는 문제의식이 있다. 이것 자체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 억압과 제국주의 지배를 진정한 문제로 본다. 따라서 민족 문제를 단지 낡은 서사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노정협의 민족론은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기운다. 그들은 민족과 계급의 긴장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예컨대, 반제국주의 국가가 국내 노동계급을 억압할 수 있다는 문제, 민족해방 담론이 내부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문제, 지정학적 대립 속에서 노동계급 국제주의가 국가적 충성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 결과 민족은 종종 계급 아래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대신하는 구실을 한다.
‘비판서’의 3부는 북한 체제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와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사상의 정당화로 가득 차 있다. 소련 붕괴 후에도 옛 사회 체제를 고수하며 핵무력을 개발한 북한은 ‘자주성을 끝까지 옹호’한 사례로 찬양된다. 그러나 이 논의는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어떠한 역사유물론적 분석도 없이 이뤄진다. 북한의 사회 구조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관으로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북한 노동 대중의 노동조건, 정치적 억압, 주민 내부 차등 문제는 ‘비판서’의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는 민족 문제를 무시하지 않지만, 민족 범주에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지도 않는다. 국제주의는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면서도, 그 투쟁이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과 분리되지 않도록 하려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스탈린주의 전통은 오히려 실패했다. 그 전통 속에서 반제국주의는 단순히 특정 국가에 대한 지정학적 지지로 바뀌었고, 국제주의는 국가 간 진영 논리 속에 흡수됐다. 노정협의 민족론은 그 오래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과 스탈린주의 지배 관료를 지지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반제국주의는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국제주의에 바탕을 둬야 한다.
이 문제는 북한 평가에서 더욱 첨예해진다. 북한이 미국 제국주의 압박에 맞서 왔다는 사실이 곧 그 사회 내부의 계급 관계와 억압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반제국주의는 외부 지배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노정협은 북한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북한 노동자·민중의 자체 활동과 정치적 자유라는 기준을 지워 버린다. 그 결과 반제국주의는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가 지지의 언어로 변질된다. 이는 스탈린주의 전통의 오래된 약점이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사례다.
이 점은 한국 좌파에서 특히 중요하다. 분단 현실과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반미와 반제국주의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정당한 문제의식이 곧바로 어떤 국가든 미국과 대립하면 진보적이라고 보는 진영논리로 옮겨가면, 민족해방과 사회주의의 관계는 거꾸로 뒤집힌다. 국제주의는 제국주의 국가의 간섭에 반대하는 동시에, 피압박 나라 내부의 노동자·민중이 자기 지배 관료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싸울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민족을 특권화하는 순간, 바로 이 두 번째 측면은 사라진다.
10. 거대담론 옹호가 고스란히 총체성의 변증법은 아니다
노정협의 ‘비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대담론을 부정한다고 비판하며, 계급, 계급투쟁, 제국주의, 민족, 노동자 중심성, ‘통일전선’(실제로는 계급협력적 민중전선) 같은 범주를 적극 옹호한다. 여기까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국가와 계급, 노동과 착취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노정협이 총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총체성을 말할 때의 핵심은 모든 것을 하나의 큰 이름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별 현상들이 어떤 구조적 관계 속에 있는지, 서로 어떤 매개를 통해 연결되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총체성은 차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 속에 위치 짓는 것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를 특정 결론의 목록이 아니라 역사적 총체성과 매개를 파악하는 비판적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면 노정협의 ‘비판서’에서 거대담론은 종종 분석의 원리라기보다 위계의 원리 구실을 한다. 더 크고 더 본질적인 모순이 있다는 주장 속에서, 구체적 차별과 억압의 경험은 쉽게 부차화되거나 추상적 총체성 속에 흡수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계급은 전략적 범주다. 이 말은 계급이 언제나 더 ‘숭고한’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계급을 전략적 범주로 불러들이는 것은 자본주의하의 생산과 재생산을 실제로 담당하는 위치에 있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 없이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성소수자 혐오와 트랜스 혐오를 근절시킬 수도, 약화시킬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계급은 특수한 차별들을 압도하는 상위의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 차별들을 실제 사회 변혁의 문제로 묶는 매개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노정협에게서는 볼 수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한 사조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로 규정했다. 총체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파편만 남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이 더 거대하고 불투명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파편만이 직접 경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전히 체제 외부의 비판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낳은 인식의 한 형태로 이해돼야 한다. 이런 정교한 접근은 노정협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노정협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외부에서 주입된 이데올로기로만 볼 뿐,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변화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묻지 않는다.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의 관점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총체성은 현상을 추상적으로 상위 범주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의 현실이 어떻게 매개돼 있는지 파악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성차별과 인종차별, 국가와 민족, 문화와 경제를 하나의 위계 속에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국가 권력, 노동계급 형성 과정 속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이 점에서 노정협이 말하는 거대담론은 총체성의 복원이라기보다 위계 질서의 복원에 가까워진다.
요컨대 거대담론을 옹호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변증법적 총체성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총체성 추구는 더 큰 이름을 내세우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적 층위와 경험을 매개하는 분석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으면 계급, 민족, 국가, 제국주의 같은 거시 범주는 개별 현실을 밝히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반론을 눌러 버리는 권위주의적 상징어가 되기 쉽다. 노정협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바로 이 위험을 보여 준다. 총체성을 방어하려다가 실제로는 총체성과 변증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11. 왜 스탈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기지 못하는가
이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스탈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가?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명확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틀고 왜곡한 문제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스탈린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성과 보편성, 계급과 역사, 진리와 주체를 해체하는 경향이 있었고, 많은 경우 정치적 무력감과 상대주의로 귀결됐다. 그러나 그 회의주의가 힘을 얻은 배경에는 20세기 좌파(공산당이든 사회민주당 좌파든)의 실패,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등장, 해방의 이름으로 자행된 차별, 여성과 소수자의 경험을 주변화한 전통적 좌파의 문제 같은 실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스탈린주의는 이 역사적 문제들에 대해 일관된 자기비판을 보여 주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주의적 성취, 반서방 진영론, 국유화, 중앙계획경제라는 몇몇 표지를 내세워 문제 전체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관료 지배와 민주주의 결여 문제, 차별받는 집단의 해방 문제, 계급의 자체 활동과 당·국가의 대리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보편성과 총체성을 말하면, 그것은 너무 쉽게 국가주의적 교의(도그마)로 들린다. 바로 이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할수록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먹혀들 수 있었던 이유를 스스로 재생한다.
캘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가 이 함정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되, 그 비판을 살아 있는 철학적 논쟁과 사회이론 속에 위치시킨다. 그는 예술의 변화가 정말 근대의 종말을 뜻하는지, 후기 자본주의의 변화가 정녕 새 시대를 의미하는지, 포스트구조주의의 합리성 비판이 자기파괴적이지 않은지 따져 묻는다. 다시 말해, 그는 교의를 반복하지 않고 설명을 제공한다. 그 설명은 때로 상대의 논점 일부를 인정하고, 그 인정 위에서 반박한다. 캘리니코스의 이론적 개입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노정협은 상대를 탐구하기보다는 적대 진영 전체를 하나의 이름 아래 묶고, 그 이름에 대한 규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당파적 열정은 드러낼지 몰라도, 지적 설득력은 약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기려면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더 빈약한 이론으로는 안 된다. 정체성 정치의 자유주의적 왜곡을 넘어서려면 차별 반대 투쟁 자체를 의심하는 정치로는 안 된다. 국가주의와 관료 지배를 해방의 본령으로 제시하는 한, 보편성과 총체성을 옹호할 도덕적·정치적 권위도 약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진다. 근대적 주체와 보편성의 이름이 실제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식민주의, 성차별, 관료 지배와 결합해 왔는가 하는 질문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경험에서 보편성 일반의 불가능성으로 너무 성급히 나아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반대로 그 경험을 부정하거나 덮어 버린다. 이 둘 모두는 해방적 보편성을 재구성하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보편성의 포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노동계급 자력 해방)와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통해 보편성을 다시 정초하는 작업이다.
결국 스탈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싸우면서도 그 토양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 국가권력에 대한 혐오,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억압에 대한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채 그것을 단순한 반동이라고만 부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이론적으로 허약하더라도 경험 차원에서는 여전히 설득력을 갖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기려면 단지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왜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됐는지, 그 믿음의 현실적 근거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12. 더 나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위해
그렇다면, 어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 필요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는 점 자체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그것이 계급 투쟁의 언어를 해체하고, 혁명적 전망을 무력화하며, 자본주의에 맞서는 집단적 행동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스탈린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첫째,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분석적이어야 한다. 예술 양식의 변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후기 자본주의 문화,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 NGO화된 운동, 국가와 기업의 다양성 담론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각각의 층위를 구분하고, 그 연관을 실제 역사적 매개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 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토대를 1968년 세대의 정치적 패배와 전문직·관리직 중간계급의 구체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설명했듯이,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설득력을 얻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분석돼야 한다.
둘째, 유효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차별 반대 투쟁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정체성 정치의 자유주의적 수렴을 비판할수록, 여성 해방, 인종차별 반대, 성소수자 해방, 트랜스 해방, 이주민 권리, 장애 해방 투쟁의 정당성을 더 분명히 옹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극우도 자기 나름의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으며,3 좌파가 이 영역에서 후퇴할수록 배타적 애국주의와 인종주의, 성차별적 가족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셋째, 계급을 고정된 틀이 아니라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계급은 다른 차별을 용해시켜 버리는 거대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제 변혁의 문제로 연결하는 사회적 동력의 근원이다. 따라서 계급 정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과 트랜스 혐오, 국경 분할 체제와 장애 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자기 중심 과제로 포함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는 계급 정치는 계급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한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스탈린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관료 지배와 국가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결국 획일적인 보편성의 되풀이로 들리기 쉽다. 노동자 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자력 해방, 관료 체제 반대, 국제주의 없는 ‘총체성’(통합)은 쉽게 차별의 언어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를 넘어선다고 해서 국가주의적 절대주의로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
다섯째, 제국주의에 대한 설명을 음모론으로 치환하지 않아야 한다. 냉전기 문화공세와 자유주의로의 포섭은 실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왜 어떤 담론이 공명을 얻는지, 왜 어떤 운동이 급진적이 되거나 아니면 제도화되는지, 왜 어떤 계급(또는 그 일부)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끌리는지는 더 구체적인 구조 분석이 필요하다. 설명력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배후를 찾는 데서가 아니라 조건과 매개를 해명하는 데서 설명력이 있게 된다.
또한 더 나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를 사유하는 현대 철학의 여러 시도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최근의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메타모더니즘 같은 흐름은 저마다 물질, 실재, 정동, 보편성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만, 그 자체로 적절한 대안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총체성, 계급적 적대, 국가와 헤게모니, 집단적 실천의 문제를 회복하지 못하면, 이런 이론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피로를 달래는 사상적 이동에 그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흐름을 무조건 하나의 적대 범주로 묶어 폐기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문제 제기를 흡수하되, 그것을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과 역사유물론의 틀 속에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여섯째,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반동적 반포스트모더니즘과도 선을 그어야 한다. 자유주의적인 다양성 정치에 대한 반감이 곧바로 여성 해방과 인종차별 반대, 성소수자 해방 요구 전체에 대한 냉소로 바뀌는 순간, 좌파는 우파 문화전쟁의 후방부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반대로, 국가와 민족, 보편성과 질서를 내세우는 언어가 곧장 해방의 언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모두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마르크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자기 고유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더 나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더 넓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운동 내부에서 차별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을 ‘분열 조장’으로 낙인찍기보다는 그 문제가 왜 계급 단결의 필수 조건인지를 토론하고 실천으로 입증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비판을 억누르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자체 조직화와 비판의 자유가 왜 해방 정치의 핵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보편성은 차이를 침묵시키는 명령으로가 아니라, 차이를 가로지르는 공동 투쟁의 과정 속에서만 다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또, 이런 비판은 태도 문제와도 연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면서 실제로는 토론과 비판, 자기교정의 공간을 좁히는 정치문화가 자리잡는다면, 그 조직은 해방의 주체를 키우기보다 복종하는 당원을 재생산하게 된다. 반대로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서로 다른 경험과 위치를 가진 활동가들이 함께 논쟁하며 공동 실천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계급 정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전략이 된다. 이 점에서도 노정협식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정치적으로 빈곤하다.
13. 결론: 빈곤하지 않은 이론, 폭넓은 민주주의, 일면적이지 않은 계급 정치
노정협의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 정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비판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심각한 약점을 드러낸다. 그 저작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층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자유주의적 다양성 정치와 차별받는 집단의 해방 지향 정치를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며, ‘현실 사회주의’의 관료 지배와 국가주의 문제를 회피한다. 또한 제국주의와 문화정치의 관계를 설명할 때 구조적 매개보다 배후와 의도에 대한 환원으로 기울고, 민족과 계급을 말하면서도 국제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 글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정협의 약점이 단지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들이 강경함을 위해 분석을 희생한다는 데 있다. 강한 적대감은 반드시 강한 이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을 조급하게 규정할수록, 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이해는 얕아질 수 있다. 노정협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 NGO화된 운동, 신좌파 다원주의를 하나의 연속체처럼 뭉뚱그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구체적 차이와 작용 메커니즘을 놓친다. 이는 단지 이론적 엄밀함의 결여가 아니라 정치 전략의 결여다.
반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비판의 대상을 복합적으로 규정하고, 세계관의 막다른 골목과 역사적 조건을 분석하며, 후기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과장된 시대 진단을 비판한다. 또,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 비판과 차별 반대 투쟁 옹호를 동시에 수행하려는 더 나은 정치적 균형을 제시한다. 정체성은 출발점일 수 있지만 종착점이 아니며, 계급은 다른 차별을 지우는 범주가 아니라 그것들을 구조적 비판과 집단적 힘의 문제로 연결하는 전략적 범주라는 통찰이 여기에 있다.
노정협을 비판한다는 것은 단지 ‘스탈린주의는 틀렸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반포스트모더니즘이 필요한가를 가리는 일이다.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총체성과 보편성을 포기한 채 파편성과 상대주의의 정치에 머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체성과 보편성을 국가주의적 교의로 굳혀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이 둘 모두를 넘어야 한다. 그것은 차이를 지우지 않는 총체성, 차별을 부차화하지 않는 계급 정치, 국가를 숭배하지 않는 반자본주의, 관료 지배를 비판하는 혁명 정치,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자력 해방에 기초한 보편성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좌파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 문제를 다룰 때 반복해서 빠지는 함정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자유주의적인 다양성 정치에 대한 혐오가 차별 문제 전반에 대한 냉소로 옮겨 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주의적 ‘현실 사회주의’ 향수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전자의 함정은 우파 문화전쟁과 접속하기 쉽고, 후자의 함정은 국가주의와 관료 지배를 미화하기 쉽다. 노정협은 특히 후자에 더 가깝고, 그 과정에서 전자의 언어 일부를 빌려 오기도 한다. 이 조합은 정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퇴보적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이론, 더 넓은 민주주의, 일면적이지 않은 계급 정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는 길은 스탈린주의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캘리니코스가 보여 준) 분석적 엄밀함과, 차별 반대 투쟁과 계급 정치의 변증법을 더 발전시키는 데 있다. 노정협에 대한 비판은 단지 과거의 오류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해방 정치를 더 명료하고 더 전투적이며 더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제시된 빈약한 반포스트모더니즘을 걷어 내고, 더 설득력 있고 더 해방적인 반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노정협 비판의 진정한 의미는 어느 한 조직의 과오를 지적하는 데만 있지 않다. 이것은 한국 좌파가 어떤 종류의 이론을 필요로 하는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분석 없는 강경함, 차이를 지워 버리는 총체성, 국가를 중심에 놓는 반제국주의, 차별 문제를 부차화하는 계급론으로는 오늘의 복잡한 자본주의와 그 속의 분열을 설명할 수 없다. 반대로 차이만을 끝없이 증식시키며 구조를 놓치는 정치도 자본주의를 넘어설 전략을 제공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이 둘을 넘어서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이고, 이 글은 그 필요를 확인하는 하나의 논쟁적 사례로 읽힐 수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단지 철학 용어의 선택이나 특정 저자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좌파가 패배와 후퇴의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국가와 혁명, 차별과 계급, 민족과 국제주의를 어떤 언어로 다시 묶어 낼 것인가 하는 실천적 문제와 직결돼 있다. 그래서 잘못된 반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한 지적 오류를 넘어 운동의 방향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 총체성과 보편성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비판과 민주주의를 억누르면, 결국 남는 것은 해방의 정치가 아니라 복종의 정치다. 이 점에서 노정협에 대한 비판은 오늘의 좌파 정치가 어떤 언어와 어떤 방법을 통해 다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하는지를 묻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이 글의 결론은 단순한 반박을 넘어선다. 필요한 것은 상대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국제주의적이며 반관료주의적인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허점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파고든 실제 역사적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정체성 정치의 자유주의적 왜곡을 비판하면서도 차별받는 사람들의 자기해방 투쟁을 방어하며, 계급을 추상적 진리의 이름이 아니라 현실 변혁의 전략적 범주로 재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더 나은 반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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