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과 혁명, 반혁명
〈노동자 연대〉 구독
90년 전인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개전됐다. 내전은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전개됐다.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그 과정을 살펴본다
1930년 1월 프리모 데 리베라 군부 독재가 붕괴하고, 이듬해 4월 국왕 알폰소 13세가 축출되면서 스페인은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왕정은 붕괴했으나 왕정을 떠받치던 사회 세력은 건재했다. 대지주, 가톨릭 교회, 군 장교단, 국가 관료는 여전히 막강했다.
산업은 바르셀로나, 빌바오, 마드리드 등 일부 도시에 집중됐으나, 인구 대다수는 여전히 반봉건적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농민과 농업 노동자였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지에서는 민족 억압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스페인 자본가 계급은 지주 세력과 긴밀히 유착돼 있었다. 그래서 토지 분배, 교회와 군부의 특권 폐지,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 보장 등을 실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트로츠키는 바로 이 모순에서 스페인 혁명의 성격을 포착했다. 스페인에서는 토지 개혁, 민주주의 쟁취, 민족 문제 해결, 교회와 군부의 지배 철폐 같은 민주주의적 과제조차 노동계급이 농민을 이끌고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면 혁명은 민주주의적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 도전하게 된다. 이것이 트로츠키가 강조한 연속혁명론의 핵심이다.
그는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적 요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지의 급진적 재분배, 민족자결권 옹호, 군주제와 교권에 맞선 투쟁을 노동계급 자체의 요구와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공장, 지역사회, 군부대의 투쟁을 하나로 결속할 노동자 평의회, 즉 스페인 혁명 전통의 용어인 ‘훈타(Junta)’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화국이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들
1931년 수립된 공화국은 대중에게 엄청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공화국은 어떤 근본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토지 개혁은 지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지지부진한 절차에 가로막혔다. 2년 반 동안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6,000~7,000명에 그쳤고, 분배된 토지도 450제곱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모순은 여전했다.
군대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공화국 정부는 일부 장교에게 봉급을 보장하며 퇴역을 유도했으나, 장교단의 반동적 핵심부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당시 군대는 외적을 막기보다 국내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기 위해 비대해진 기구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세속 교육, 예수회 해산 등의 조치도 보수 세력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스페인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었다. 토지와 교육을 장악하고 기존 질서를 신성한 것으로 포장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보루였다.
세계 대불황까지 겹치며 실업과 빈곤이 늘어났다. 노동자와 농민은 파업, 토지 점거, 무장 봉기로 맞섰다. 하지만 공화국 정부에는 사회당 소속 장관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라르고 카바예로 노동장관은 파업 사전 통고 의무를 부과하는 등 노동자 투쟁을 국가 통제 아래 두려 했다.
1933년경 감옥에 갇힌 정치범은 약 9,000명에 달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나키스트였다.
공화국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우파가 반격에 나섰다. 1933년 말부터 이른바 ‘암울한 2년’이 시작됐다. 임금이 깎이고 소작농과 농업 노동자는 다시 쫓겨났다. 앞서 도입한 개혁 입법도 폐기되거나 무력화됐다.
1934년 10월 우익 연합체 세다(CEDA)가 정부에 참여하자 사회당은 총파업과 봉기를 촉구했다. 가장 치열한 투쟁은 아스투리아스 광산 지대에서 일어났다. 광원들은 무장하고 지역을 장악했으나 고립됐고, 군대의 잔혹한 진압으로 패배했다.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만 명이 수감됐다. 하지만 아스투리아스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저항과 뒤이은 탄압은 전국의 노동자와 농민을 급진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 패배는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 1936년 대폭발을 예비한 서곡이었다.
혁명적 지도력을 만들지 못한 비극
스페인에는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는 조직도 있었다. 좌익반대파 조직은 1930년대 초 빠르게 성장해 한때 활동 당원이 1,000여 명에 달했다. 중심 인물은 소련에서 좌익반대파로 활동하다 귀국한 안드레우 닌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닌은 혁명적 당 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번번이 대립했다.
닌은 규모가 작고 영향력이 미약한 스페인 공산당 내부에서 분파로 활동하라는 트로츠키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 카탈루냐에서 공산당보다 영향력이 훨씬 컸던 호아킨 마우린의 ‘노동자농민블록’에 기대를 걸었다. 문제는 이 조직이 일관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부하린주의, 카탈루냐 민족주의, 중간주의 사이를 오가며 흔들렸다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더 넓은 조직에서 공동 활동을 하더라도 독자적인 강령과 공개적인 혁명적 분파를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권고했다. 작은 조직일수록 투쟁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세력의 압력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결정적인 기회는 1934년에 찾아왔다. 사회당과 사회주의청년단이 급속히 좌경화하며 혁명과 노동자 권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청년단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입당해 당을 레닌주의 정당으로 함께 개조하자고 공개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그러한 대중적 좌경화 흐름에 동참해 혁명적 경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드레우 닌과 그의 동료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 빈자리를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메웠다. 공산당은 사회주의청년단과 통합하며 비로소 대중적 기반을 확보했다.
1935년 닌의 조직은 마우린의 조직과 통합해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하 POUM)을 창당했다. POUM은 흔히 트로츠키주의 정당으로 오인되지만, 실제로는 트로츠키주의와 거리가 먼 중간주의 정당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언사를 구사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개혁주의와 민중전선의 압력에 타협했다. 1936년 1월에는 공화파 자본가 정당 및 사회당·공산당이 맺은 민중전선 선거 협정에 서명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노동계급을 부르주아 세력에 종속시키는 배신 행위라며 격렬히 비판했다.
선거 승리에서 사회혁명으로
1936년 2월 민중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공화파 지도자들은 온건한 질서 회복을 바랐으나, 노동자와 농민은 선거 결과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대중은 정부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교도소 문을 열어 1934년 봉기의 수감자들을 석방했다.
해고자 복직, 체불임금 지급,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선거 후 다섯 달 동안 총파업 113차례, 부분파업 228차례가 일어났다.
농촌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농민들은 대지주의 토지를 점거하고 직접 경작에 나섰다. 약 19만 농가가 6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지를 차지했다. 공화국 정부가 수년간 시행한 개혁보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단 몇 달 만에 더 많은 토지를 재분배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를 ‘무질서’와 ‘혼란’으로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수백 년 묵은 토지 문제를 아래로부터 해결하기 시작한 혁명이었다. 1936년 봄과 여름의 스페인은 이미 ‘소규모 내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지배계급의 대다수는 의회제 공화국으로는 더는 노동자와 농민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월 17일 프랑코를 비롯한 군 장성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본토 수비대들이 즉각 호응했다.
공화국 정부는 반란 규모를 파악하고도 이를 국민에게 숨긴 채 상황이 평온하다고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무기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지급을 거부했다. 노동자 무장이 사회혁명을 촉발할까 군사반란보다 두려워한 탓이다. 결국 여러 도시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말라가, 발렌시아,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들은 정부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병영을 포위했으며,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반란군의 무기를 빼앗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병들이 장교를 제압하고 노동자들에게 총을 넘겼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이하 CNT)과 POUM 노동자들이 군사반란을 격퇴했다. 프랑코의 쿠데타를 저지한 힘은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스스로 무장한 노동계급이었다.
두 권력이 맞선 순간
군사반란을 분쇄한 지역에서는 기존 국가기구가 사실상 붕괴했다. 공장 위원회, 밀리시아(이하 시민군) 위원회, 코미테스(지역 반파시스트 민중 위원회: 이하 지역위원회)가 생산과 치안, 식량 배급, 교통, 주택, 교육을 관장했다. 대지주의 토지는 몰수됐고 공장, 호텔, 상점, 운송기관은 노동자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조합의 승인이 없는 정부 문서는 효력이 없을 정도였다. 거리에서는 계급적 서열이 사라지고, 실업자와 빈민을 위한 공동 급식과 지원 체계가 마련됐다.
그렇다고 공화국 정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와 지주 대부분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으나, 아사냐 스페인 공화국 대통령과 쿰파니스 카탈루냐 자치정부 대통령 등 공화파 정치인들은 국가의 외형을 유지했다. 트로츠키가 이들을 ‘부르주아지의 그림자’라고 부른 이유다. 한쪽에는 무장한 노동자의 실질적 권력이, 다른 쪽에는 사회적 기반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합법 정부를 자처하는 공화국 정부가 대치했다. 이것은 바로 이원 권력(‘이중권력’) 상황이었다.
이러한 대치 국면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노동자 권력이 전국적 평의회로 통합돼 기존 국가를 대체하거나, 아니면 공화국 정부가 권력을 회복해 위원회와 시민군을 해체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 위원회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며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다.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모든 국가에 반대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노동자 국가 건설을 거부했으나, 모순되게도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했다. POUM도 1936년 9월 카탈루냐 자치정부에 참여했고 닌은 법무장관이 됐다.
이 선택은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CNT와 POUM이 참여한 카탈루냐 정부는 시민군위원회와 지역위원회를 해산했다. 노동자 무장해제 법령이 공포됐고, 구 경찰 기구가 재건됐다. 시민군은 위계적인 정규군 체제로 개편됐다. 공장과 토지에 대한 노동자와 농민의 통제권도 제약을 받았다. POUM 지도부는 노동계급이 이미 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했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이 참여한 정부가 그 권력을 차례로 무력화하고 있었다.
민중전선과 스탈린주의 반혁명
민중전선의 논리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 정당이 ‘민주적’ 자본가와 단결하고 사회혁명을 뒤로 미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자본가 계급은 거의 다 프랑코 편에 섰다. 공화 진영에 남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실체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회당, 공산당, 아나키스트 지도부는 노동자들을 그 그림자에 종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급성장했다. 소련이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공산당은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공산당은 토지를 지키려는 부농, 상점주, 관리, 장교, 전문직 종사자들을 흡수하며 ‘법과 질서’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변모했다. “공산당의 우선순위는 프랑코가 장악한 사라고사 탈환보다 혁명의 중심지 바르셀로나를 제압하는 데 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공산당은 혁명을 확대하고 심화하면 영국과 프랑스 등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를 자극해 원조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표방하며 합법적인 공화국 정부에 대한 무기 판매를 거부했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에게 대규모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를 억제한다고 서방 열강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노동자와 농민이 토지와 공장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확신을 앗아가 공화 진영의 전투력과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트로츠키는 내전을 단순한 군사 기술의 대결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정치가 중요했다. 프랑코군 병사의 대다수도 농민과 노동자였다. 공화 진영이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을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사회혁명적 강령을 내걸었다면 프랑코군 내부를 뒤흔들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전선 정부는 사유재산 수호에 집착했다. 혁명을 억제하는 대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했다.
1937년 5월, 마지막 기회
1937년 5월 3일, 카탈루냐의 스탈린주의 경찰 책임자가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점거하려 했다. 그 전화국은 1936년 7월부터 CNT 조합원들이 운영해 온 혁명의 상징적 거점이었다. 노동자들은 즉각 저항했다. 정당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총파업이 일어났고 도시 전역에 바리케이드가 구축됐다. 이튿날 노동자들은 바르셀로나의 약 90퍼센트를 장악했다. 무장한 노동자들의 전력은 정부군을 압도했다.
이는 1936년 7월에 이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다. 그러나 CNT 지도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기를 내려놓고 일터로 복귀하라고 호소했다. 전선에 있던 CNT와 POUM 부대가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을 지원하려 했으나, 지도부가 이를 가로막았다. POUM 지도부도 처음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지켰으나, 이내 CNT 지도부의 방침을 따라 철수와 업무 복귀를 명령했다.
아나키스트 운동 내 ‘두루티의 친구들’과 수십 명에 불과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무장해제 거부, 반동 경찰 해산, 혁명위원회 설립, 노동자 권력 수립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대중을 견인할 조직적 역량이 부족했다. 안드레우 닌과 그의 동지들이 독자적인 혁명 조직을 해산한 결과, 결정적인 순간에 트로츠키의 전략을 실행할 세력은 30여 명에 그쳤다.
CNT와 POUM 지도부의 후퇴로 결국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닷새 동안 이어진 전투와 뒤이은 암살 공작으로 약 500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트로츠키는 카탈루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면 스페인 전역의 노동자와 농민을 고무하고 프랑코군 병사들을 동요시켜 반혁명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었으리라 판단했다. 이것이 승리를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싸우지도 않고 권력을 돌려준 결과보다는 훨씬 더 유리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지적이다.
혁명을 억제하면서 전쟁에서도 패배하다
5월 패배 이후 반혁명의 기세가 급속히 번졌다. POUM 기관지는 강제 폐간됐고 지도부는 체포됐다. 안드레우 닌은 소련 보안경찰에 납치돼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트로츠키는 닌의 정치적 오류를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그가 프랑코의 첩자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모략은 단호히 규탄했다. 닌과 POUM 투사들은 파시즘에 맞서 용감히 싸운 혁명가였으며, 닌의 실제 ‘죄’는 스탈린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 것뿐이었다.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가 붕괴하고 후안 네그린 정부가 들어섰다. 특별법원과 검열, 보안경찰이 확대됐으며, 노동조합 집회와 언론은 통제됐다. 시민군은 해체돼 정규군의 구태의연한 규율과 장교 위계 아래 편입됐다. 노동자가 장악한 공장과 농민이 점거한 토지는 원소유주에게 반환되기 시작했다. 혁명을 진압한 국가는 강화됐으나, 프랑코 세력에 맞선 전쟁 역량은 강화되지 못했다. 혁명을 위해 투쟁하던 대중에게 남은 것은 오직 희생과 복종의 요구뿐이었다.
트로츠키가 분석한 스페인 혁명의 비극은 단순히 군사력 부족으로 프랑코에게 패배했다는 단편적인 진단이 아니다. 1936년 7월 노동자와 농민은 쿠데타를 저지했을 뿐 아니라, 새 사회의 맹아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은 파시즘 반대 투쟁을 사회혁명과 분리했고, 혁명을 뒤로 미루며 부르주아 국가 체제를 복원했다. 그 결과 노동자 권력이 먼저 무너졌고, 뒤이어 공화국도 패배했다.
트로츠키는 이 과정을 멀리서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올바른 분석만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의 지지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고, 닌을 비롯한 과거의 동지들은 결정적인 기회에 독자적인 혁명 정당을 건설하지 않았다.
스페인 혁명과 내전은 노동계급의 영웅적 헌신과 창조적 역량이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동시에 혁명적 위기 국면에서 올바른 지도부와 조직, 명확한 전략이 없다면 대중이 이미 쟁취한 권력조차 다시 빼앗길 수 있음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