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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극우 최일붕 글 모음 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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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민중전선인가, 노동자 권력인가

1936년 7월 17일은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날이다. 90년 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의 교훈을 되새긴다. 이 글은 찰리 호어가 쓴 소책자 《Spain 1936: Popular Front or Workers' Power?》를 번역한 것이다.

들어가는 말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은 한 세대 사회주의자들의 희망을 고취했다.

1923년 독일 혁명의 패배 이후 세계 노동운동은 거듭 패배를 겪었다. 이어 대불황으로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자본가들의 노동자 탄압이 격화됐다. 소련에서는 노동자 권력이 스탈린 치하에서 부상한 새로운 지배계급에 의해 분쇄됐다. 나아가 포르투갈,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 아무런 저항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스페인의 저항은 발흥하는 파시즘에 맞설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외부 세계의 눈에 스페인 내전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전쟁으로 보였다. 그러나 파시스트 군사반란을 물리친 주역은 바로 스페인 노동계급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히 이전 질서를 수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공장 등 일터에서는 노동자 집산체가 이윤 논리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새로운 공화국에 필요한 일들을 위해 생산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 위원회가 식료품, 의약품, 기타 일상용품의 배급을 통제했다. 그리고 수많은 농촌 마을에서는 농민들이 수 세기에 걸친 지주의 권력을 전복하고 토지를 공동으로 일궜다.

파시스트에 맞선 전쟁도 주로 노동조합이나 좌파 정당 소속 시민군이 수행했으며, 장교는 선출됐고 전투 계획은 다수결로 결정됐다.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한 파시스트 패배는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이 글은 혁명이 일어나 전개된 과정, 패배의 원인, 그리고 오늘날 사회주의자가 얻어야 할 교훈을 설명한다.

민중전선과 프랑코의 반란

1930년대 스페인은 계급 갈등이 점점 고조되던 나라였다. 1936년의 사건(내전과 혁명 시작)은 5년 전부터 시작된 계급투쟁의 필연적 결과였다. 스페인 산업 노동계급은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성장했다. 그들은 1910년과 1930년 사이에 갑절로 성장해 노동인구의 4분의 1를 차지했다. 산업화는 매우 불균등하게 진행됐다. 스페인 산업은 4개 주요 지역에 집중됐다. 제철·제강·조선 생산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바스크 지방, 석탄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스투리아스 지방, 수도 마드리드 시, 그리고 노동계급의 절반 이상이 집중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카탈루냐 지방이 바로 4대 산업 지역이었다. 그 밖에,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지주들의 대규모 가축·곡물 농장에서 일하는 80만 명 이상의 일용직 농업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계급 운동은 두 개의 유력한 노동조합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큰 조직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이하 사회당)이 지도하는 노동조합총연맹(이하 UGT)이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대다수 노동자가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자연맹(이하 CNT)에 속해 있었다. 공산당은 1935년에 UGT와 통합하게 될 노동조합을 조직했으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산업화를 늦게 시작한 데다 그마저도 외국 자본에 깊이 의존했기 때문에 스페인에는 중앙집권적 지배계급이 없었다. 1931년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국왕이 통치했고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돼 신흥 기업인들은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1931년 선거와 총파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새로운 지배계급을 결집해 스페인 국가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만들고자 한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공화정부의 정책들은 노동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중간계급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영세한 토지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수백만 농민에게 토지개혁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카탈루냐 지방 주민에게는 자치권을 주었지만, 민족의식이 더 투철했던 바스크 지방 주민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임금 인상 등 노동조건 개선을 약속하면서도 세계 대불황으로 인한 실업자 급증에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1931년 7월, 1932년 1월, 그리고 1933년 1월, 노동자들이 약속받은 개혁 조치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을 때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고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와야 했다.

환멸이 커진 노동자들과 점차 우경화하는 중간계급 사이에 끼여 정부의 입장은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1934년 10월 정부는 붕괴했고 권력은 새로운 파시스트 정당의 손에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사회당은, 그해 연초 오스트리아에서 노동자들이 나치의 권력 장악에 맞서 저항한 것을 가리키는 “베를린보다는 빈”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면적인 저항을 호소했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싸우지도 않고 무기력하게 굴복한 독일(베를린)의 전철을 밟지 말고, 총을 들고 끝까지 맞서 싸운 오스트리아(빈)의 노동자들처럼 결사 항전을 하자는 의지를 담은 슬로건이었다. 이 호소는 대규모 파업을 동원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 신속하게 진압됐다. 오직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만 노동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UGT, CNT, 공산당의 공동 동원으로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광원 2만 명이 봉기했다. 이들은 프랑코 소장의 대대적인 군사 반격에도 불구하고 2주 동안 광산을 장악했다. 항복 후 3,000명이 넘는 광원들이 사살됐고, 이어진 탄압으로 스페인 전역에서 투사 4만 명이 구속됐다. 새 정부는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1931년의 제한적인 개혁 조처들을 폐지했다.

탄압 속에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단결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35년 노동절(메이데이)에 민간 부문의 하루 총파업을 이끌어내며 힘을 과시했다. 정부가 저지하지 못한 이 단결을 기반으로 민중전선 연합은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민중전선은 선거 1년 전 주요 중간계급 정당들과 노동자 조직들이 결성한 선거운동 연합이었다. 공화파 진영에는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좌파’와 ‘공화연합’, 카탈루냐 지방의 두 주요 민족주의 정당, 그리고 바스크 민족주의 정당 중 소수파인 ‘바스크 민족행동당’이 참여했다. 노동자 진영에는 사회당, 공산당, 그리고 훗날 카탈루냐 통일사회당(이하 PSUC), 즉 카탈루냐 공산당으로 통합될 카탈루냐 좌파 정당들이 있었다. 비록 몇몇 유보를 표명하기는 했으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하 POUM)도 이 협정에 서명했다.

투표 결과로 볼 때 1936년 2월의 승리는 근소한 차이였다. CNT가 선거 불참이라는 기존 전통을 깨고 투표에 참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새로 출범한 정부는 모든 좌파 정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총리가 된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중간계급 공화파로만 구성됐다. 정부의 강령은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계급 동기가 아니라 국민과 사회의 진보라는 동기로 추동되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체제”를 건설한다는 것으로, 극도로 온건했다.

이런 추상적인 개념은 소수 중간계급 지식인층 외에는 스페인 사회에서 아무런 기반을 얻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투쟁할 태세가 돼 있다는 뜻으로 민중전선에 투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된 개혁을 기다리고만 있으려 하지 않았다. 마드리드 시의 한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노동자들)은 더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들은 1934년 10월 혁명적 봉기의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과 정치범의 석방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비록 권력을 쟁취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평의회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은 공화국 선언으로 시작된 혁명을 전진시키려고 앞으로 나아갔다.” 1

선거 다음 날 노동자들은 발렌시아, 오비에도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교도소를 공격해 수백 명의 투사를 구했다. 파업 물결은 나라 전체로 확산돼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주에서 적어도 한 번은 총파업이 일어났다. 6월 10일과 24일, 그리고 7월 초에 벌어진 파업에는 1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임금 인상 요구뿐 아니라, 1934년 해고된 투사들의 복권 같은 정치적 요구도 내놓았다.

농촌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열기를 띠었다. 스페인 동부와 남부 지방에서는 토지가 없는 농업 노동자와 빈농들이 지주들로부터 대대적으로 토지를 몰수했다. 5월부터 7월까지 임금 인상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잇따라 일어나, 전통적인 마을 경계를 벗어나 지역 또는 주 전체로 퍼졌다.

자본가들과 지주들은 민중전선이 이러한 노동자 반란의 물결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전혀 믿지 않았다. 그들이 신봉하는 사적 소유의 신성불가침, 스페인의 통합, 교회, 가족 등 모든 가치가 아래로부터의 반란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군부와 파시스트 세력만이 노동자 반란을 진압할 힘이 있다고 판단했다.

중간계급 청년들은 거리에서 좌파와 격렬한 무장 충돌을 벌이던 공공연한 파시스트 정당 팔랑헤 당으로 몰려들었다. 2월 선거부터 7월 프랑코 반란까지 이러한 충돌로 하루 평균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극우는 또한 투사들을 살해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군부에 비밀 조직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좌파가 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좌파 군 장교들도 극우의 공격에 동일한 방식으로 맞섰다.

관련된 세력은 모두 좌우 양측의 무장 대립을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세계 시장에서 스페인 자본주의의 경쟁력은 세계 경제 침체와 노동자 투쟁이라는 이중고로 인해 급격히 저하했다. 자본가들은 이제 노동자 운동의 완전한 파괴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은 외통수에 몰렸다.

많은 스페인 노동자들도 이 싸움이 끝장을 봐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예컨대 4월 14일에는 공화국 선포를 기념하는 무장 행진이 열렸다. 파시스트 세력이 설치한 폭탄이 관람석 밑에서 터졌으나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폭탄 테러는 정부 인사들을 살해하려는 시도였다. 말라가 인근 남부 해안의 소도시 미하스의 시장은 행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폭발 소식을 들었다. 군부 쿠데타가 시작됐다고 판단한 무장 노동자들은 시장에게 시내의 모든 극우 인사를 체포하라고 압박했다. 2

민중전선도 극우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극우를 자극하지 않도록 요구 수준을 낮추라고 타협을 권고하며 대응했다. 사회당 기관지는 농업 파업의 물결을 이렇게 비난했다. “파업은 진정으로 무정부주의적이며 우익의 분노를 자극한다.” 공산당 기관지인 〈노동자의 세계〉도 마드리드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이렇게 주장했다. “2월 16일 이후 파시스트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투쟁 선언을 유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투쟁 선언은 정부와의 대립을 의미하며, 이는 쿠데타를 유발하는 조건이 된다. 이제는 파업을 끝내야 할 때다.” 〈노동자의 세계〉는 한 발 더 나아가, 파업 지속을 주장하는 CNT가 파시스트와 야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7월 17일 아침, 프랑코 소장은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의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지방의 군대에도 쿠데타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소식은 몇 시간 만에 정부에 전달됐으나, 정부는 하루 종일 이를 비밀에 부쳤다. 이후 침묵을 깼지만 그 내용은 쿠데타가 스페인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8일 오후에야 정부는 세비야 주, 사라고사 주, 나바라 주의 함락 등 반란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긴 공문을 발표했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정부는 전 반도의 절대적인 평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정부는 [노동자 조직들의 — 찰리 호어] 지지 제공 의사를 알고 있고 이에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정부를 돕는 최선의 방법은 일상 생활의 정상성을 보장함으로써 평정심을 모범적으로 유지하고 국가의 군사력에 큰 신뢰를 보내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거짓된 담화에 대한 사회당과 공산당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UGT조차 요구한 노동자 무장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을 반복했다.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정부가 이러한 범죄적 음모를 극복할 능력이 있음은 확실하다. 설령 정부 역량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공화국은 민중전선의 엄숙한 약속에 기댈 수 있다. 민중전선은 필요한 즉시 투쟁에 개입할 것을 평온하고 침착하게 결의한 스페인 프롤레타리아 전체를 자신의 규율로 규합했다. 정부가 명령하면 민중전선은 복종할 것이다.” 3

민중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공화국 방어를 호소하기는커녕, 17일 저녁 프랑코와 교섭해 군사 반란을 중지하는 타협안을 제안했다. 그들의 배신이 무산된 것은 단지 프랑코가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완전 항복을 요구했다. 성명서를 발표할 당시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정부의 호소만을 기다리고, 이미 배신을 꾀하는 정부를 신뢰하라고 지지자들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이틀을 허비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프랑코가 확실하게 통제하는 세력은 아직 2만 5,000명의 아프리카 부대뿐이었다. 나바라 주, 레온 주,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그리고 대부분의 안달루시아 지방 소재 부대처럼 반란에 즉각 동참한 부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은 반란의 성공 여부를 관망하고 있었다. 해군은 전체가 반란 가담을 거부했고, 우익 장교들은 수병들에 의해 곧바로 무장 해제당했다. 군함 여섯 척이 아프리카 부대의 모로코발 스페인행을 차단하고자 지브롤터 해협을 막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함대는 동해안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만약 함대가 곧바로 남해안으로 파견됐다면 반란은 초기에 진압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지중해를 봉쇄해 영국과 프랑스의 무역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다. 두 국가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민중전선 정부로서는 그런 조처를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부가 이처럼 우왕좌왕하는 사이,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지원한 비행기로 병력을 대량 공수해 본토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할 시간을 벌었다. 전쟁이 터진 순간부터 민중전선은 자신들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7월 19일 아침, 무장 노동자들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병영을 봉쇄하고 병영 내 병사들에게 장교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온종일 전투를 벌인 끝에 바르셀로나의 병영이 함락됐고, 이튿날에는 마드리드 수비대도 투항했다. 병영이 함락되자 노동자들이 줄지어 서서 당원증이나 노동조합원증을 제시하고 총기를 지급받았다. 군에 장악되지 않은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장 노동자 자치 조직이 파시스트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동안, 노동조합과 정당은 주변 농촌으로 시민군을 보냈다. 카탈루냐 지방에서 파견된 부대들은 일주일 만에 이웃 아라곤 지방의 절반을 확보해 혁명에 필수적인 식료품 공급원을 마련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남부 지방에서는 농업 노동자들이 마을을 차례로 장악해 나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겨우 갈퀴만 들고 맞서기도 했다.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광원들은 오비에도 주의 주도(州都)인 오비에도 시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주도를 포위하는 와중에도 마드리드를 방어하고자 6,000명 규모의 부대를 파병했다.

7월 말 전선이 그어졌다. 스페인 중동부 지방, 남부 지방의 상당 부분, 북부 해안의 상당 부분(주요 노동계급 지역)은 군부 반란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신속한 쿠데타를 노렸던 음모는 이제 장기 내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랑코의 진격을 막아 낸 것은 자동차 전조등에 놀라 마비된 토끼처럼 행동했던 민중전선 정부가 아니라, 결단력 있게 행동한 무장한 노동자들 덕분이었다. 노동자들의 용기와 의지, 그리고 즉각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정세 인식 덕분에 주요 도시의 군과 경찰 상당수도 이들을 지지했다. 농민과의 결정적인 연대도 이때 맺어졌다. 이로써 노동자들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했다.

공화파 정부는 살아남았으나 그들이 기댔던 국가 기구는 해체됐다. 군대는 군사 반란이나 노동자 저항 중 어느 한쪽에 가담했다. 경찰과 습격대가 전선에 투입되자, 그 빈자리를 무장 노동자 자치 조직이 메우며 질서를 유지했다. 대다수 공장주와 지주, 고위 공무원은 반란군 장악 지역으로 도주했다.

일상 생활을 지탱하던 기관들이 해체되자 새로운 조직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시민군 모집, 식료품 배급, 교통, 보건 등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노동자 위원회가 곳곳에 들어섰다. 공장, 사무실, 광산 등 일터에서는 노동자 통제로 생산이 계속됐다. 아라곤 지방과 일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주민들이 집단농장을 조직해 땅을 일궜고, 생산물을 카탈루냐 지역위원회들과 물물교환하거나 판매했다. 전선에서는 시민군이 직접 장교를 선출했고, 경례를 금지했으며, 군사 전술을 투표로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불균등하고 파편화돼 있었다.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취약했던 반면, 카탈루냐 지방의 주도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강력했다. 스페인의 일터는 명목상 대부분 이전 소유주들의 소유였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섬유업과 건축업에서부터 경마장과 극장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이 집산화됐다. 노동자들이 일터를 직접 운영했고, 곧이어 CNT는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도시 전역을 아우르는 집산체를 구성해 생산을 중앙집권화함으로써 실업을 해소했다.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됐으며, 다양한 차원의 사회복지가 제공됐다.

일상 생활의 혁명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크게 진전됐다. 여성은 지역위원회에서 남성과 똑같은 역할을 했으며 시민군에도 입대했다. 백화점 노동자들의 총회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용기를 내어 성희롱 문제를 안건에 부쳤다. 낙태는 합법화됐고 피임에 관한 정보가 보편화됐다. CNT는 “폭력 없이 자유롭게 남성과 여성을 결합하는” 새로운 결혼제도를 확립했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열등하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혁명의 격변 속에서 사라졌다. 여러 달 동안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높았다.

혁명이 일어나고 6개월 후에 기록한 조지 오웰의 묘사는 혁명적 바르셀로나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대표적인 글이므로 상세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도시를 본 것은 이번이 난생처음이다. 크기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건물을 노동자들이 장악했고, 건물마다 적기 또는 아나키스트들의 적흑기가 꽂혀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다 파괴됐고 성상들은 불태워졌다. 이곳저곳에서 교회들은 노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됐다. 모든 상점이나 카페에는 집산화됐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으며, 심지어 구두 미화원들도 집산화해 상자를 적색과 흑색으로 칠했다. 웨이터와 백화점 점원은 우리와 얼굴을 마주 보았고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노예근성이나 격식을 차린 말들은 당분간 사라졌다. ... 팁을 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됐다. 내가 거기서 처음 겪은 일은 엘리베이터 운전자에게 팁을 주려 했을 때 호텔 지배인에게 훈계를 들은 일이었다.

이곳에 개인 차량은 없었다. 모두 징발됐으며 모든 전차와 택시 그리고 다른 모든 교통수단은 적색과 흑색으로 칠해졌다. 선명한 적색과 청색으로 칠해진 혁명의 포스터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그것들은 마치 벽면에서 불타오르는 듯해 옆에 붙은 다른 광고들을 흙탕물처럼 보이게 했다. 도시 중심가인 람블라스에서는 많은 군중이 끊임없이 오갔으며 확성기에서는 혁명의 노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나왔다. 외관상 그곳은 부유층이 사실상 더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됐다. ...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 즉 갑자기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한 부품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려 했다. 4

오웰의 반응은 당시 모든 능동적 사회주의자들의 반응과 같았다. 서유럽과 미국 전역에서는 스페인 민중의 투쟁을 지지하는 운동이 대중 집회, 시위, 목격자들의 순회 연설 등으로 조직됐다. 파시스트와의 무역 보이콧에 대한 노동조합의 공식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지원 운동은 스페인으로 보낼 자금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비록 운동은 민중전선의 관심사를 반영해 조직되는 바람에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을 피했지만, 스페인 투쟁은 한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을 고무했다. 이들은 스페인 민중의 투쟁이 파시스트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현실화한다고 봤으며, 그러한 승리와 함께 노동자 권력이 건설된다고 믿었다.

비록 바르셀로나에 대한 오웰의 묘사가 스페인 공화국 전체에 해당하지는 않았지만, 바르셀로나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불균등한 과정은 치명적인 잘못이 아니었다. 혁명 자체가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노동계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가장 투쟁적이며 경험이 풍부했기에 지도적 위치에 섰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다른 지역의 관계는 1917년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다른 지역의 관계와 같았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당처럼 스페인 전역으로 혁명을 확산시킬 수단이 있었다면 혁명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빠져 있었다.

첫째, 당시 스페인에 이원 권력 상황이 존재할 때 ─ 정부가 한편에 서고 노동자 위원회와 집단농장이 다른 한편에 섰다 ─ 국가 기구는 노동자 조직의 급증 앞에서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 반면 노동자 권력은 여전히 파편화돼 하나로 결속되지 못했다. 각 집단농장, 지역위원회, 일터는 자율적이었으며, 일상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계만 맺고 있었다. 노동자 권력의 다양한 기구를 중앙집권화해 전쟁을 수행하고 사회 전체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일상 생활 통제권을 지배계급으로부터 빼앗았지만, 그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단은 없었던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결여 요인인데, 노동자 권력을 위해 노동계급 내부에서 조직된 정치 세력이 없었다. 항쟁은 급박한 위협 앞에서 자발적이고 무계획적이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는 명확히 알았던 반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싸우는 목적이 단순히 공화국을 방어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는 것인가? 이 질문의 답에 전쟁의 결과가 달려 있었다.

전쟁과 혁명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공산당, 사회당, 코민테른, 스탈린, 그리고 공화국의 거의 모든 해외 지지자들이 내놓았다. 공산당 기관지 편집자인 헤수스 에르난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방어하겠다는 열망만으로 움직이고 있다.” 스탈린은 군부 반란 초기에 프랑코와 협상하려 했던 아사냐가 정부에 남아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스페인의 적들이 스페인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민중전선 지지자들은 사회주의를 추구하기에 앞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프랑코에 반대하는 세력 모두와 광범하게 단결해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중간계급과 상층 계급의 지지를 되도록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를 얻고 유지하려면 그들 계급의 이익을 노동계급과 빈농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봤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프랑코 지지에 항의해 교회를 불태우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발렌시아 전역으로 확산했을 때 공산당은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우면 지지 여론이 반혁명 세력으로 기울 것임을 명심하라.” 5

더 심각한 점은 민중전선이 삶의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중전선은 농촌의 가난한 소작농들이 프랑코 반란에 노골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지주들의 토지를 접수하는 것에 반대했다. 도시에서도 똑같은 제한이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운동에 적용됐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기업의 재산은 건드릴 수 없도록 했다. 외국 기업의 지사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제한을 프랑코 반란 직후 완벽히 실행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정부가 전반적으로 무력했고 민중전선이 미미한 영향력만 미치던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좌파적 반대 세력의 정치적 약점이 분명해지자, 민중전선은 노동계급의 성과를 말로만 반대하던 데서 벗어나 이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민중전선의 가장 큰 노동계급 정당은 사회당이었다. 그 당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처하며 영국 노동당이나 프랑스 사회당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게다가 날카롭게 분열돼 있었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이끄는 우파와, 지지자들 사이에서 ‘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리던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좌파로 분열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우파는 중간계급 공화당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말로는 우파에 반대했으나 그들과 결별하기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지지자들에게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지지자 다수는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사회당의 무능함은 1936년 5월 당 청년 조직이 공산당 청년 조직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통합 조직은 라르고 카바예로 지지자들의 저항 없이 그해 11월 공산당의 완전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그때부터 사회당은 사실상 독자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제 공산당이 전면에 나설 차례였다.

공산당은 1930년 당원 800여 명으로 창립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4개 분파가 통합한 결과였다. 1934년 봉기 전쯤 2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다른 좌파 세력을 ‘사회주의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는 스탈린의 ‘제3기’(1928~1934) 정책 탓에, 노동계급 내에서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확대할 기회를 놓쳤다. 1934년 공산당은 노선을 완전히 바꿨다. 그들은 중도좌파 성향의 조직 모두와 민중전선 연합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사회당이나 중간계급 공화당에 대한 온건한 비판조차 거두었다. 1936년에 이르러서는 중간계급과 사적 소유 보호가 이들 전략의 핵심이 됐다. 그들의 입장은 명확했다. 스페인에서는 사회주의가 당면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좌파의 임무는 단지 공화국을 수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광범한 계급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스페인 공산당 자체 내에서 채택한 입장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결정한 결과였다. 10년 전부터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국제적 전복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조직이 더는 아니었다. 오히려 소련 대외 정책의 기구로 전락했다. 1936년 소련 대외 정책에서 스탈린과 새로운 지배 관료는 독일 나치에 반대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추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페인 혁명은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의 안정을 위협해 그러한 동맹을 불가능하게 만들 터였다. 더구나 스페인 혁명은 유럽의 세력 균형 전체를 뒤흔들고, 어쩌면 소련이 전쟁 준비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혁명을 저지하는 것이 스탈린의 핵심 이해관계였다.

공산당의 공격은 자신들의 왼쪽에 있는 세력을 향했다. 1936년 소련의 모스크바 재판과 유혈 대숙청으로 스탈린이 평생 혁명가로 살아온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수천 명의 평당원 투사들에게 히틀러의 지원을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워 옛 볼셰비키 당 간부들을 살해했듯이, 스페인 공산당도 스페인 혁명가들이 프랑코와 결탁했다는 터무니없는 비방을 매일같이 되풀이했다. 공산당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라는 문구는 사형을 의미하는 정치적 폭언으로 수없이 사용됐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의 패배를 공산당의 배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이 전쟁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혁명가를 자처한 사람들이 일관된 전략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내에는 노동계급의 승리를 확대하고 확산하는 것만이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한 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을 계급 협조가 아닌 명확한 대안으로 발전시키지 못해, 결국 민중전선 전략을 지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혁명적 조직을 자처한 가장 커다란 단체는 CNT였다. 1911년 창설된 이 조직은 카탈루냐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이었으며,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 즉 아나키즘을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CNT는 공장에서 자본가를 몰아내고 거리에서 군대를 격퇴한 뒤, 새 국가 건설 없이 곧바로 공산주의 건설로 나아가는 것만을 혁명으로 여겼다.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교훈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국가는 노동계급이 직접 통제하는 국가, 일터에서 직접 선출되고 즉각 소환될 수 있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에 기반한 국가다. 오직 그러한 국가만이, 옛 질서 수호 세력이 재결집해 권력 공백을 틈타 지배력을 다시 확립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옛 지배계급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프랑코의 반란이 이 사실을 생생하게 입증했다. 무장한 반혁명 세력은 새로운 형태의 권력인 노동자 권력으로 퇴치돼야 한다. 승리하려면 노동자 권력을 사회 모든 차원에서 조직해야 한다.

아나키즘 사상이 득세한 CNT는 이러한 입장을 배격했다. CNT가 보기에 모든 권력과 정치는 똑같이 부패했으며 독재였다. 따라서 노동자 권력의 다양한 기구를 중앙집권적 체제로 연결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식적인 정책이었다. 그러한 약점은 스페인 혁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카탈루냐의 CNT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정부가 여전히 존재하며 명령을 내릴 수는 있었으나, CNT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 명령은 집행되지 못했다. 그러한 이원 권력 상태는 필연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의지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분쇄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CNT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옛 지배계급은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7월 20일, CNT 지도자 세 명이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반인 류이스 쿰파니스의 요청으로 회동했다. 수반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당신들이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 시의 주인이오. 당신들이 장악했고 모든 것이 당신들의 권력 아래 있소. 만약 당신들이 나를 카탈루냐의 수반으로 필요로 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말하시오. 반면 나의 직책과 당원, 이름과 명예가 투쟁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카탈루냐가 사회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정치인인 나와 나의 충실함을 믿어도 좋소.

CNT 지도자들은 당황했다.

쿰파니스는 시가전 한가운데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보다 상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 중 하나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소. 그래서 답을 줄 수 없소. 우리는 CNT로 돌아가 보고해야 하오. 이것은 새로운 전환이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은 쿰파니스가 카탈루냐 주민과 CNT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그가 의장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6

선택지가 더할 나위 없이 첨예하게 제시됐다. CNT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옛 지배계급의 지속적인 통치를 받아들이는 길뿐이었다. 중간은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여러 전선에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급하고, 군사 전략을 통합적으로 지휘할 권위가 있는 단일한 중앙집권적 지도부가 필수적이었다. 만약 CNT가 그러한 권력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상황에 떠밀려 기존 국가 권력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7월에 CNT는 노동자 권력 조직화를 거부했다. 8월에는 중간계급 민족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바스크 지방정부에 참여했다. 그 민족주의자들은 다음 달 산세바스티안 시를 아무런 저항 없이 프랑코군에 넘겨주었다. 9월에는 카탈루냐 정부에 참여했고, 11월에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첫 전국적 민중전선 정부에 입각했다.

노동자 권력을 위해 싸우는 유일한 정당임을 자처한 POUM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POUM은 1935년 스탈린주의와 결별한 공산당 출신자들이 창당했다. 그들은 흔히 “트로츠키주의 정당”으로 불렸으나, 트로츠키는 그들의 정치 노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POUM 지도부도 트로츠키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 했다.

POUM은 민중전선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초기에는 계급 협조 노선을 형식적으로나마 올바르게 비판했으나, 결국 민중전선 선거연합에 참여해 중간계급 정당들에 다수 의석을 양보하는 지분 분배를 수용했다. 7월 항쟁 당시 카탈루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급성장했다. 1936년 7월과 8월 사이 POUM 당원 수는 4배로 늘었고, 1만 명이 넘는 투사들이 당의 시민군에 입대했다. POUM은 카탈루냐에서 CNT 다음으로 큰 노동계급 조직이 됐으므로, 민중전선 정치를 대체할 원칙 있는 대안을 제시할 최적의 위치에 있었다.

그들이 이에 실패한 것은 근본적으로 CNT에 직접 도전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POUM 지도부는 오히려 CNT 지도부를 설득해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이는 되레 CNT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키워 줬을 뿐이다. 7월에 POUM이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하자고 한 것은 지지자들을 향한 행동 지침이 아니라 CNT에 대한 요구였다. CNT가 이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공화정부에 참여했을 때 POUM의 입장은 논리상 그들을 따르는 것이었다. 8월에 POUM은 발렌시아 지방정부에 참여했고, 다음 달에는 막 카탈루냐 정부에 들어간 CNT와 동행했다. 그들이 전국적 민중전선 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늦게나마 혁명적 원칙으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당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됐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로는 혁명을 확산시켜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세력마저도 실천에서는 민중전선 전략을 지지했다. 민중전선에 맞설 대안 야당이 될 수도 있었던 CNT와 POUM은 카탈루냐 노동자 사이에서 가진 영향력을 이용해 민중전선 내 극좌파 노릇을 했다. 그들은 프랑코를 패퇴시키려면 혁명을 저지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거짓말을 실천으로 강화해 줬다.

진실은 그 반대였다. 오직 혁명의 확산만이 프랑코를 패배시킬 수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 대중의 용기와 결의야말로 프랑코의 반란이 급속히 승리하는 것을 막은 원동력이었다. 그 용기와 결의는 옛 질서를 수호하는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했다. 여기서 ‘더 나은 것’이란 1936년 7월에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가 승리를 통해 공고해져, 마침내 오웰이 바르셀로나에서 목격한 새로운 사회 질서가 완전히 구현되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프랑코가 장악한 지역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하려면 농민 대중이 그에게 맞서도록 만드는 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이는 공화국이 승리하면 무언가를 주겠다는 추상적인 약속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공화국 정부는 1931년부터 농민들에게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은 전력이 수두룩했다. 오직 진정한 변화만이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토지가 경작자에게 주어지고, 공장 등 일터가 노동자 손에 넘어가며, 모로코가 독립한다면(프랑코 군대의 대다수가 모로코인이다), 즉 혁명이 연속된다면 파시스트 반란의 기세가 꺾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런 일들 가운데 단 한 가지라도 현실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민중전선 정치와의 분명한 결별이었다. 노동자 운동이 중간계급 및 지배계급 정당들과 연합하는 것은 혁명 운동의 발전에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그 정당들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존속을 프랑코만큼이나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프랑코의 차이는 필요한 정부 형태, 경제 위기 해결 방식 그리고 노동자 운동 대응 방식에 있었다. 실상 민중전선은 프랑코의 득세보다 노동자 혁명의 성공을 더 두려워했다.

혁명의 패배, 마드리드

12월까지 전쟁은 공화국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프랑코는 대부분의 육군과 공군을 통제하고 독일·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원조를 받은 덕분에 전쟁 초기에 상당한 군사적·기술적 우위를 누렸다. 여름과 가을 동안 프랑코 군은 스페인 북부와 남서부의 방비가 허술한 농민 지역으로 꾸준히 전진했다.

군대의 전진 뒤에 이어진 탄압은 극도로 무자비했다. 예컨대 마드리드 북쪽의 한 작은 산마을에서는 민중전선에 투표한 31명이 모두 체포됐다. 심문을 받은 이들 중 13명은 트럭에 실려 마을 밖으로 끌려간 뒤 길거리에서 총살당했다. 세비야 부근의 인구 1만 1,000명 소도시인 로로 델 리오에서는 파시스트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300명이 넘는 주민을 총살했다. 도시 지역의 탄압은 한층 더 심해 현재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수를 집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7

11월 프랑코군은 마드리드 인근에 도달했다. 마드리드가 함락된다면 이는 프랑코의 결정적인 승리인 동시에 민중전선 정부 정통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마드리드 방어는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떠올랐다.

수도 마드리드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민중전선 정당 및 노동조합 지도부)의 인식 수준은 발렌시아로의 다급한 도주로 여실히 드러났다. 마드리드의 자위 능력에 대한 지도부의 명백한 신뢰 결여로 도시는 닷새가량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마드리드 방어의 필요성을 7월부터 경고해 온 공산당 통제하의 방위 기구가 구성되면서 불확실성은 비로소 사라졌다. 공산당은 마드리드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참호를 파는 등 방위 준비를 해 나갔다.

공산당은 소련에서 보내온 첫 대규모 무기 수송품의 도착과 국제여단의 출현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주가가 올라갔다. 두 요인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 효과는 심대했다. 한 UGT 투사는 당시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가 우리가 소련인들을 좋아하게 됐던 때다. 소련 전투기들이 독일 비행기들을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모습은 정말 훌륭했다. 거리에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소련인들이 우리를 지키러 온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깊이 감사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정은 달라졌다. …” 8

소련에서 온 무기가 그토록 환영받은 것은 그때까지 공화국이 해외에서 무기를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8월에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는 다른 유럽 열강에 스페인에 대한 “비개입 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누구도 어느 한쪽에게 무기나 병력을 공급하지 않게 돼 있었다. 이것이 체결됐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나치 정권들은 거의 즉시 협정을 어겼다. 그러나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12월까지) 소련은 협정을 지켰다. 스탈린의 대외정책은 스페인 혁명의 성공을 원하지 않았지만, 프랑코의 빠른 승리도 원하지 않았다. 마드리드가 함락된다면 프랑코가 승리를 거둘 것임은 명약관화했다. 그러므로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는 또한 공화국이 스탈린의 계획에 순종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국제여단을 조직한 것도 똑같은 냉소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비록 여단에서 싸운 2만 5,000명의 지원자 대부분이 오직 파시스트를 무찌르겠다는 열망으로 싸웠지만, 스탈린은 전쟁을 길게 끌고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그들의 군사적 기여는 결정적이지는 못했지만 중요했으며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이뤄졌다. 2,700명의 영국인 대원 중 500명이 사망했고 1,70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여단에 대한 신화와는 달리 실제 그들의 주된 역할은 혁명을 방해하려는 스탈린의 뜻을 관철하는 선전 무기였다.

마드리드 방어의 결정적 요인은 소련의 무기나 국제여단이 아니라 마드리드 노동자들의 용기와 행동이었다. 시민군은 거리와 집을 오가며 치열하게 싸웠고, 참호에서 함께 싸운 지역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지원받았다. 평생 총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수많은 노동자가 총을 들고 노면전차를 타고 전선으로 나아가 전사하거나 교대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군사적 열세는 대중의 동참으로 극복됐다.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방위군은 수제 폭탄으로 대응했다. 대중 집회에서 집회 참가자들의 요청을 받은 한 시민이 그 사용법을 설명했다. “아주 쉽다. 폭탄을 들고 땅에 엎드려 있다가, 탱크가 3미터 앞까지 다가왔을 때 바퀴를 향해 던지면 된다. 폭탄이 터지면 그 자리에서 탱크도 폭발한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지 않으면, 만약 터지지 않는다면…” 그는 말문이 막혔다. 다음 설명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만약 안 터지면,” 그가 끝내 덧붙였다. “탱크에 깔리는 것이다.” 9

한 달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파시스트의 공세는 꺾였고, 그들은 점령했던 마드리드 일부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공화국의 유의미한 첫 군사적 승리였으며, 프랑코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고무했다. 그러나 동시에 민중전선, 특히 공산당이 혁명을 더한층 거세게 공격하는 계기가 됐다. 비록 승리를 쟁취한 것은 마드리드 노동자들이었으나, 저항을 조직하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공산당 지도부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선전 기구는 그 공로를 모두 공산당의 몫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운 명성과 소련제 무기 배급권을 무기로 정부 내에서 전례 없는 발언권을 얻었다. 그리고 그 발언권을 이용해 사적 소유의 가장 열성적인 수호자로 처신하며 좌파 측의 비판을 엄중히 단속했다.

1937년 2월 발렌시아의 스탈린주의 일간지를 제외한 카탈루냐 외곽의 모든 POUM 신문이 검열로 폐간됐다. CNT 신문도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2월에 발렌시아의 한 아나키스트 일간지가 문을 닫았다. 이어 3월에는 바스크 지방의 CNT 신문이 폐간됐고, 그 지도자들과 상근자들이 구속됐다. 인쇄기는 바스크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이 일은 정부가 지원하는 가톨릭 성주간(부활절 전주) 행진에 CNT가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구실 아래 벌어졌다. POUM 투사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의 보안경찰인 GPU(국가정치총국)에 납치돼 사라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의 노동자 시민군은 무장 해제를 당하기 시작했다. 집산화된 공장과 노동자 위원회는 권한이 크게 제한됐고, 공장주들은 전쟁 후 모든 재산을 돌려받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

이러한 우경화는 군대에서도 나타났다. 민주적 시민군이 허술한 무장과 군사 경험 부족에도 최전방에서 6개월 동안 우세한 적들에 맞서 싸워 왔음에도 공산당은 시민군에 반대하며 중앙집권적 지도부 아래 ‘인민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군은 1937년 1월, 초기에는 거의 전적으로 공산당 산하 시민군으로 구성됐다. 새로운 군대는 소련이 공급하는 무기를 거의 독점했고, 시민군보다 더 좋은 급여와 장비를 받았다. 그러나 인민군은 매우 엄격한 위계 질서로 운영됐다. 장교와 병사 사이에 엄청난 급여 차이가 존재했고, 정식 군복과 경례, 장교에 대한 절대 복종, 그리고 일반 부르주아 군대의 모든 격식과 치장을 다시 도입했다. 인민군에 편입되는 것은 혁명적 사상과의 결별임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신병 모집은 징병제에 의존해야 했다.

1937년 2월, 이론상 모든 군사력은 인민군으로 통합됐다. 그리고 인민군의 모든 불평등이 시민군에도 강요됐다. 이는 여전히 혁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자임하는 아라곤 전선의 카탈루냐 시민군에게는 문서상의 변화에 불과했다. 그들을 대체할 인민군 병사가 부족해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훈련되지 않고 규율 없는 시민군으로 묘사하며 인민군의 장점만을 강조하는 정부의 비방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언급했다. “이런 선전을 본다면 사람들은 자원해 전선으로 가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징집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영웅적 행위로 보게 될 것이다.” 10

민중전선 정부가 시민군 체제와 노동계급이 1936년 7월 이후 거둔 승리를 공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중전선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이 거둔 부분적 승리를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가 모든 계급의 연합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중간계급과 자본가 계급에게 그들의 이익을 충분히 보장해 줘야 한다. 노동자의 승리는 바로 이들의 손해이므로 이 계급들의 첫 번째 요구는 1936년 7월 이전의 조건으로 원상복귀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가 충족될수록 ‘원상복귀’의 진행은 빨라졌다. 민중전선 정부와 공산당이 노동자 권리를 체계적으로 공격했으나 (혁명을 지지한다는 세력인) CNT와 POUM이 저항을 거부하면서 이 과정은 더욱 가속됐다.

1937년 봄에는 카탈루냐와 아라곤을 제외한 공화국 통치 지역 전반에서 이 과정이 거의 완료됐다. 카탈루냐와 아라곤에서는 노동자들이 이미 획득한 권리를 빼앗겼는데도 혁명의 열기가 여전히 뜨거웠고 옛 질서로의 회귀를 거부했다. 그 지역에 남아 있는 혁명적 사상의 힘이야말로 민중전선 앞에 놓인 마지막 장애물이었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피할 수 없었다.

혁명의 패배,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1936년 7월에 얻은 성과를 카탈루냐 지방정부가 빼앗아 갈 수 있었던 것은 CNT와 POUM이 정부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10월에 지역위원회들은 자진 해산하고 정부가 임명한 지방자치 당국으로 대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지방자치 당국은 정부와 같은 비율로 구성됐다. 그에 따라 다양한 중간계급 정당에서 5명, CNT에서 3명, PSUC에서 2명, POUM에서 1명이 선임됐다. 3주 후에는 노동자 시민군을 해체하고 모든 무기를 지방자치 당국에 인도하라는 또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그 명령을 어기는 행위는 모두 “파시스트적 행위”로 규정됐다. CNT와 POUM은 그 명령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신문에 아무런 논평 없이 명령문만 게재했다.

카탈루냐 지방의 스탈린주의 정당인 PSUC는 노동계급 속에서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UGT에 가맹한, 소상점 주인과 소기업인 ‘조합’ 안에서 강력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조합’에 미치는 영향력과 소련제 무기 통제권을 바탕으로 그들은 정부 내 발언권을 얻었다. 1936년 12월 공산당은 POUM을 정부에서 축출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키웠다. (이에 대해 CNT는 항의하지 않았다.) 다음 달 한 공산당원이 식료품 배급 책임을 맡으면서, 공산당은 아라곤 지방의 마을 집단농장과 직결된 노동자 배급 위원회를 해체시켰다. 그들은 이 역할을 소상점들에 넘겼고, 그 결과 식료품 가격이 폭등했다.

1937년 3월, 경찰이 다시 거리를 순찰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국가에 노동자 시민군 무장해제 명령을 실행할 군사력이 없어 그 명령은 사문화된 문서에 불과했다. 이제 경찰이 그 명령을 집행하려 했다. 이로 인해 거리에서 정기적으로 무장 충돌이 발생했다. 4월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매일 밤 이러한 충돌이 일어났다.

1937년 4월 전선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조지 오웰은 당시 혁명적 분위기가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는지 기록했다.

처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도시를 계급 구분과 부의 격차가 거의 없는 곳으로 생각했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말쑥한’ 복장은 비정상이었으며 어느 누구도 굽실거리거나 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웨이터나 구두 미화원조차 서로 눈을 똑바로 보고 ‘동지’라고 불렀다. …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화려한 레스토랑과 호텔은 비싼 음식을 먹는 부자들로 꽉 차 있으며, 노동계급 주민들의 식품 가격은 임금이 그에 맞춰 오르지도 않았는데 어마어마하게 뛰었다. 모든 것이 비싸다는 점 외에도 오늘은 이것이 없고 내일은 저것이 없는 거듭되는 물자 부족은 당연하게도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강타했다. 레스토랑과 호텔은 부자들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노동계급 거주지에는 빵, 올리브유, 그리고 다른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한 줄이 몇 백 미터나 늘어섰다. 예전의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거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그러나 이제는 거지들이 많아졌다. 11

그러나 혁명적인 카탈루냐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는 노동자 시민군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무장해제당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시가전이 계속됐다.(언제나 경찰이 이기지는 못했다.) CNT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압력에 밀려 3월 CNT 소속 장관들이 “더는 개혁주의에 양보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사임하도록 했다. 장관들은 3주 후에 정부에 복귀했는데 아무튼 CNT 내부의 열기는 이런 제스처로 가라앉지 않았다.

4월 초 CNT 소속 장관들이 사임했을 때 카탈루냐 아나키스트 청년연맹의 공식 신문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노동계급에게 자행되는 범죄와 배반을 저지르지 않을 것임을 굳게 다짐한다. …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만자, 민중의 폭군, 비열한 정치 장사꾼들에 맞서 지하투쟁으로 다시 돌아갈 태세가 돼 있다.” 다른 사설에서 그들은 이렇게 격렬하게 성토했다. “달래는 말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마시오.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관료의 관용차와 안락한 삶에 현혹되지 않는다.” 12

더 중요한 것은 같은 달에 ‘두루티의 친구들’이라는 조직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두루티는 유명한 시민군 부대의 지도자였고 마드리드를 방어하다가 죽었다. 그들은 단순히 CNT의 아나키즘 원칙을 반복하는 데서 더 나아갔다. 그들은 혁명의 승리가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고 노동자 권력을 굳히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이것은 CNT가 전통적으로 혐오해 왔던 사상이었다. 4월 말 그들은 ‘CNT 지도부와의 공식적 결별’, ‘모든 권력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노동자·농민·병사의 민주적 기구인 노동자 평의회’를 요구하는 포스터를 바르셀로나에 붙였다.

5월로 접어들 무렵, 일주일에 걸친 CNT와 경찰 간의 충돌로 긴장이 크게 고조돼 정부가 전통적인 메이데이 시위를 불허하기에 이르렀다. 이틀 후 위기는 터지고 말았다. PSUC 소속 장관이 직접 지휘한 트럭 3대 분량의 습격대가 총구를 겨누며 CNT 지도하의 노동자들을 중앙전화교환국에서 쫓아냈다. 이것은 선전포고였다. 전화교환국은 7월 항쟁 당시 처음으로 점거된 건물 중 하나였다. 그후 전화교환국은 줄곧 노동자들의 통제로 운영됐다. 그곳은 카탈루냐에 아직 남아 있는 이원 권력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남아 있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몇 시간 만에 노동계급 지역에 바리케이드가 들어섰고, 무장한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해가 질 무렵에는 중심지를 제외한 도시 전역이 이들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 다른 카탈루냐 도시에서도 경찰이 무장 해제됐고, PSUC와 정부 건물이 점거됐다. 카탈루냐 노동자 권력은 지난 9개월 동안 끊임없이 침식당했으나, 여전히 정부와 공산당보다 강력했다. 이제 노동자 권력을 향한 정부의 모든 공격에 반격을 가할 때가, 기존 국가 기구를 무장 노동자 위원회로 대체할 때가 그리고 카탈루냐의 힘을 사용해 혁명을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해야 할 때가 왔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비참한 패배를 맞이할 것이었다.

이원 권력은 혁명기에 어느 한쪽도 상대방을 파괴할 힘이나 확신이 없는 한 한동안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군사적 시험대에 오르면 유지될 수 없다. 카탈루냐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뿐이었다.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권력을 세우느냐,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과 조직이 파괴되느냐였다. 혁명이냐 반혁명이냐, 양자택일뿐이었다.

바르셀로나 봉기가 첫 번째 길을 택했더라도 그것이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프랑코를 상대로 승리하고 혁명을 생존시킬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가 이미 봤듯이, 프랑코에게 승리하려면 전쟁의 목표가 노동자와 농민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임을 대중이 확신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더욱이, 승리의 가능성은 실제로 상당했다. 1936년 7월부터 노동자와 농민 대중은 단순히 민주주의 혁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싸웠다. 이는 공산당과 사회당조차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구호는 “전쟁에서 먼저 승리한 뒤에 혁명을 실행하자”였다. 혁명적 대안이 없는 덕분에 그들은 당면 투쟁의 목표를 제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착취자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단지 미루는 것일 뿐이라는 핑계로 가능했다. 만약 혁명적 카탈루냐가 두 투쟁이 같은 것이며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면 이런 변명은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혁명을 찬성하든가 반혁명을 찬성하든가 양자택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혁명의 승리를 위한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어 있었다. 결정적으로 없었던 것은 노동계급 속에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반란 세력을 지도하고 이끌 세력이었다. 수천 명의 개인들이 모두 같은 시각에 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쌓았으므로, 봉기는 순전히 자발성에 기댄 행동은 아니었다. 각 지역의 CNT 위원회와 일부 지역의 POUM이 자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봉기를 조직했다. 그러나 방어를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다른 위원회들과의 연계는 없었다. 바르셀로나의 각 지역과 외곽 마을은 모두 고립돼 싸웠다. 싸움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는 지역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혁명적 조직도 존재했다. ‘두루티의 친구들’은 국가 군사력의 완전한 무장해제와 함께, CNT와 UGT에 기반해 혁명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전화교환국이 습격당한 다음 날, 바르셀로나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바리케이드 주변에 다음과 같은 전단을 배포했다. “혁명적 공격을 개시하라. 타협은 금물이다. 국민공화수비대와 반동적인 습격대를 무장해제하라. 지금이 결정적인 시기다. 이 시기가 지나면 늦는다. 전쟁 관련 산업을 제외한 모든 산업은 반동적 정부가 사임할 때까지 총파업에 돌입해야 한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권력만이 군사적 승리를 보장한다.”

또한 “노동계급의 완전 무장, CNT-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와 POUM의 공동 행동,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선 구축, 상점·공장·지구별 혁명 방위 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13

그러나 ‘두루티의 친구들’과 바르셀로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규모가 너무 작아 사태에 미미한 영향만 미쳤을 뿐이다. 당이 노동자 봉기를 성공적으로 지도하려면 당을 따를 태세가 돼 있는 수만 명의 투사를 당원으로 확보해야 한다. 불과 며칠 사이에 노동자들이 기존의 정치적 배경과 단절하도록 설득할 수는 없었다. 온갖 타협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노동자 대중은 여전히 CNT를 굳건히 지지했다. 그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POUM도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이 조직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CNT 지도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바리케이드를 치울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동요가 아니었다. 그 호소는 봉기 기간인 5일 동안 끝없이 반복됐다. 지역 CNT 지도부의 호소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자, 그들은 발렌시아에 있던 중앙정부의 CNT 소속 장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전국 일간지는 중앙전화교환국 습격 소식을 묻어둔 채 단순히 ‘진정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정부와 협상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CNT가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시킨다면 모든 요구를 들어줄 태세가 돼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과 괴리된 채 노동조합 관료가 된 CNT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조직을 보호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됐다. 그들은 조직력이 조합원들이 얼마나 싸울 태세가 돼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CNT 지도부의 태도는 이때야말로 노동자 운동이 전진하느냐 아니면 파괴되느냐를 가르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주장하는 POUM 지도자 두 명과의 대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한 CNT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 모두 흥미롭군요. 그러나 일이 너무 복잡해지면 안 됩니다.” 다른 CNT 지도자가 덧붙였다. “조합원들은 이미 힘을 과시했습니다. 쿰파니스[카탈루냐 지방정부 수반]는 이제 다시 상황을 판단할 것이며 상황은 아마 변할 것이고 변화가 급격해질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된 후에 우리는 PSUC와 그 밖의 세력들과 충돌할 것입니다.” 안드레우 닌[POUM 지도자]이 다시 설명했다. “… 혁명은 더 진전된 단계로 이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닌은 강령을 제시하고 권력 문제를 다루며 투쟁을 지도할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을 더 역설하지 않고 CNT 지도자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안 됩니다.” CNT 지도자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닌이 늘 흥미로운 말을 한다며 고맙게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합의하기를 거부했다. 14

POUM의 역할이 노골적인 배신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재앙을 초래했다. 바리케이드가 설치됐을 때 POUM은 당원들에게 거리의 노동자들과 합세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막연히 노동계급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그들을 지도하거나 전투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 생각은 없었다. ‘두루티의 친구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CNT 지도부와 결별할 것을 주장한 반면, POUM은 이들과 토론하는 데 모든 희망을 걸었다. CNT 지도부가 수동적인 태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자 POUM은 토론 내용을 신문에 보도하지 않았다. CNT 지도부에 정책 전환을 호소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 조합원들에게 직접 호소하지 않은 채 그들은 CNT를 따라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을 저버렸다.

도시 북쪽에서는 CNT-POUM 공동 일선 부대가 정부가 장악한 도시 중심부로의 행진을 조직했다. 그들은 안드레우 닌이 CNT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뒤 내린 명령에 따라 무장 해제됐다. 이어 POUM은 전투를 끝내고자 하는 CNT를 뒤따랐다. 봉기 넷째 날, POUM은 당원들에게 바리케이드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사태는 정부와 공산당 쪽으로 기울게 됐다.

지도자 없이 그리고 혁명적 지도부로 믿었던 자들에게 배반당한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은 그럼에도 닷새 동안 투쟁을 지속했다. 투쟁 중단을 주장하는 CNT 신문 뭉치가 갈기갈기 찢기거나 바리케이드에서 불태워졌다. CNT 지도자들의 호소를 방송하던 라디오는 총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외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이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5월 8일 금요일, 대부분의 바리케이드가 철수됐다. 닷새 간의 전투는 500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뒤따른 야만적인 탄압은 그보다 더했다.

바리케이드가 철거되던 날, 발렌시아에서 온 완전 무장 습격대 5,000명이 마치 정복군처럼 바르셀로나로 진입했다. POUM은 불법 단체로 선언됐고, 그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보안경찰 GPU에 납치돼 비밀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당한 뒤 총살됐다. POUM과 CNT 투사들은 거리에서 사냥당해 처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아라곤 전선에 있던 POUM 병사들은 인민군에 강제로 편입됐으며, 고위 지휘관과 정치위원들은 체포됐다. 그 뒤 몇 달 동안 정부나 공산당, 혹은 소련을 비판하는 좌파 세력은 모두 ‘트로츠키주의 파시스트’라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투사들은 집에서 끌려 나와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쓰고 조작된 재판을 받았고, 다음 날 아침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두 달 뒤 아라곤 집단농장이 해체됐고, CNT가 이끌던 아라곤 의회도 해산당했다. 수백 명의 CNT 투사들이 체포됐다. 공산당이 지도하는 인민군에 의해 혁명의 마지막 교두보마저 무너졌다. 이제 공산당은 공화국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짓게 됐다.

결론

스페인 혁명의 패배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당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전은 모두가 알다시피 군사전일 뿐 아니라 정치전이기도 하다. 순수한 군사적 관점에서 스페인 혁명군은 적군보다 훨씬 약했다. 혁명의 힘은 거대한 대중을 행동으로 이끌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 힘은 반동적인 군 장성들에게서 군대마저 빼앗아 올 수 있다. 이를 실현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의 강령을 진지하고 용기 있게 제시해야 한다.

이제 토지, 공장, 상점이 자본가의 손아귀에서 민중의 손으로 이전돼야 함을 선포해야 한다.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지역에서 당장 이 강령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파시스트 군대는 이러한 강령의 영향력을 단 24시간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15

비록 프랑코와의 전쟁이 1939년 4월까지 이어졌지만, 바르셀로나의 5월 사건은 이미 노동자 권력의 가능성이 종말을 고했음을, 즉 스페인 혁명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는 프랑코에 맞선 공화국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뜻하기도 했다. 혁명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은 공화국의 파멸을 결정지었다.

만약 이 전쟁이 단순히 서로 맞붙는 군대 간의 전쟁, 즉 옛 지배계급의 어느 분파가 스페인을 통제할 것인가를 겨루는 전쟁이라면 결정적 요인은 순전히 기술적인 차원에 머물 것이다. 즉, 누가 더 잘 무장했는가, 더 많은 병력을 보유했는가, 더 우수한 전략을 구사하는가, 공군력이 우세한가 등의 문제다. 전쟁이 이처럼 단순화된다면 프랑코의 승리는 자명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게 필요한 만큼 무기를 지원할 의사가 있었고, 다가올 세계 대전에 대비해 자신들의 군사력을 훈련하는 데 스페인을 이용할 용의가 있었다. 반면 공화국은 그런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멕시코 말고는(멕시코의 지원은 미미해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는 수준에 그쳤다) 모두 공화국을 외면했다. 그들은 노동자 혁명의 위협보다 차라리 파시스트의 승리를 바랐다. 소련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투쟁을 끌기 위해서만 무기를 공급할 태세가 돼 있었으며, 그마저도 스페인 내 소련 요원들이 통제하는 세력에게만 공급할 태세가 돼 있었다.

프랑코의 승리가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프랑코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민중전선에 참여한 정당들의 비겁하고 배신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먼저 전쟁에서 이기고 다음에 혁명을 완수하자’고 약속해 1937년에도 노동자들의 열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하고 혁명 초기에 쟁취한 성과들을 빼앗으려 하자, 그 약속은 단지 텅 빈 말장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노동자들은 사기가 떨어졌고 전쟁에 점차 지쳐 갔다.

이러한 비겁하고 배신적인 행위는 민중전선 전략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한계였다. 투쟁이 옛 질서의 틀 안에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들은, 노동자들에 의해 이 질서가 공격받을 때 적극적으로 질서를 수호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권력이 실현될 가능성은 프랑코에게 위협이 되는 것만큼이나 공화국에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이 전쟁 결과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공화국이 노동계급 조직을 가로막으려 했다면, 프랑코는 아예 완전히 분쇄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최우선 과제는 명백히 프랑코를 패배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코를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전선이 강요한 한계를 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예는 모로코다. 프랑코 군대의 기반은 모로코인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으로 프랑코 군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모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해 온 오랜 전통이 있었다. 1937년 말, 민족주의 지도자 아브드 엘크림은 프랑코에 맞선 봉기를 지도할 수 있도록 모로코 귀국을 허가해 달라고 민중전선 정부에 요청했다. 이러한 봉기는 우익 세력에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봉기로 발생할 국제적 마찰을 우려해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스페인 공화국의 ‘책임성’을 보여 주어 안심시키는 일이 프랑코를 실질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요구는 실제로는 민주주의 혁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농업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통해서만, 거대한 농민 대중은 파시즘에 맞서는 강력한 보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주들은 상업·산업·금융 부르주아지 및 이들에게 의존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당(공산당)은 농민 대중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중 어느 쪽과 함께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농민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동시에 연합에 포함시킨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부르주아지가 농민을 기만하고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것을 도우려는 것일 테다. 농업 혁명은 부르주아지에 맞설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 조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여기에는 제3의 중간적 체제란 존재할 수 없다. 16

공화파 정당들은 노동계급 내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노동계급 내부에서 계급 타협을 주장한 것은 공산당과 사회당이었다. 그리고 CNT와 POUM은 민중전선 정치에 맞설 만만찮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노동계급을 무장 해제시켰다. 트로츠키가 주장한 강령이 승리하려면 민중전선 전략으로부터 확실한 독립성을 유지해야 했다. 또한 노동계급 운동의 모든 주요 세력에게 계급 타협의 진실을 말하고, 자신들의 원칙을 전술과 전략으로 전환해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킬 수 있는 혁명적 당이 필요했다. 민중전선 전략이 답하려는 질문 자체는 정당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파시스트를 패배시킬 것인가? 노동자들을 대안으로 이끌려면 혁명적 사회주의가 이 질문에 더 나은 답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예컨대 CNT와 POUM이 보여 준 것처럼 공산당에 대한 추상적인 정치적 반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혁명적 당의 전략과 전술은 기존 노동자 권력 기구를 애초부터 출발점으로 삼아야 했다. 스페인 혁명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하나는 노동자에게 옛 지배계급 없이도 사회를 운영할 힘과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위원회, 집단공장, 집단상점, 집단농장, 민주적 시민군은 당시 스페인을 사로잡은 살아 숨 쉬는 혁명적 열기와 상상력의 표현이었다. 이 기구들은 비록 파편적이고, 조직적이지 못하고, 임기응변에 많이 기댔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따라 협동하며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아나키스트 지도자 두루티는 죽기 한 달 전 인터뷰에서 “당신이 승리한다면 폐허 위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에 이렇게 응수했다. “우리는 항상 판자촌이나 구멍 난 벽에 기대어 살아 왔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안다. 하지만 우리가 건설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야말로 스페인, 미국 등 세계 곳곳의 궁전과 도시를 건설한 당사자다. 우리 노동자는 그것을 대체할 더 좋은 것을 건설할 수 있다. 우리는 폐허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상속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새 세계를 여기 우리 마음에 품고 있으며, 그 세계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 17

이러한 새 세계는 저절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노동계급 대중의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로만 실현된다. 그러므로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 투쟁에 참가해 당면 투쟁의 승리뿐 아니라 최종 목표를 위해 노동자의 자신감과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 혁명적 당의 과제다.

출처: Charlie Hore, Spain 1936: Popular Front or Workers' Power? (1986)
번역: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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