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90주년에 되짚는:
스페인 내전과 혁명
〈노동자 연대〉 구독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은 곧 스페인 전역을 휩쓴 내전으로 번졌다. 1939년 4월 1일 프랑코가 승리를 선언했을 때 끝난 것은 내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농민이 일으킨 혁명의 패배였고, 동시에 유럽 파시즘의 승리였다. 스페인 내전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나 당시 모든 이데올로기가 충돌한 “마지막 위대한 대의”로 불렸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무엇보다 스페인 사회의 계급 투쟁, 미완의 개혁, 혁명적 열망, 반혁명적 폭력이 한데 뒤엉켜 폭발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개혁주의, 파시스트 반동, 혁명적 좌파라는 세 정치 세력이 충돌한 장이었던 것이다.
전사(前史): 제2공화국과 그 위기
스페인 내전은 1936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20세기 초 30년 동안 스페인 자본주의는 완만하지만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은 미해결의 역사적 과제들(민주주의적 요구들)의 해결로 이어지지 못했다.
스페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전쟁 중인 유럽 국가들에 수출해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자본가들은 부유해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경제 호황도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덮쳤고, 노동자들은 굶주렸다. 마침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자극받은 스페인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을 일으켰다.
게다가 모로코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가 선주민 반군에게 대패해 1만 명이 넘는 군인이 사망했다. 이 책임이 국왕 알폰소 13세에게까지 번지며 왕정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러자 왕정과 군부는 의회 정치를 정지시키고 군사 독재라는 극약 처방을 택했다.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육군 중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군사 정부는 모로코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1920년대 세계 호황에 힘입어 도로를 닦고 댐을 짓는 등 경제를 안정시키며 잠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29년 전 세계를 덮친 대공황 앞에서는 무력했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실업자가 쏟아지자, 지지하던 군부와 지주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1930년 1월 리베라는 퇴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가 끝나자, 스페인 국민들은 이 모든 난맥상의 원흉이 왕정이라고 생각했다. 무능해서 독재를 끌어들여 방조하던 국왕은 정치적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일찍이 1917년에 촉발된 위기가 독재 정권 덕에 잠시(1923~1930년) 지연됐다가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곧바로 재현됐다. 혼란에 빠진 지배계급은 왕정이 정당성을 잃어 자신들의 이익을 더는 보호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왕정을 포기했다. 그들이 선택한 대안은 공화정이었다.
공화정으로의 전환은 극적으로 이뤄졌다. 1931년 4월 선거에서 공화파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압승을 거두자, 국왕 알폰소 13세는 더 버티지 못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그리고 1931년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제2공화국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들이 시도한 해결책이었다.
제2공화국 하에서 자유주의적 개혁가들은 “지난 30년간 나라를 망쳐 놓은 군부, 지주, 가톨릭 교회 등을 이번에야말로 뿌리 뽑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하려 하는 사회는 극도로 불균등했다. 스페인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였으나 산업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데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농업은 낙후한 데다, 남부의 대토지 소유제는 수많은 농업 노동자를 반실업과 빈곤 상태에 묶어 두었다. 가톨릭 교회는 교육과 도덕, 사회 질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지주와 교회, 군부는 아주 미미한 개혁조차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부르주아지는 개혁을 공화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공화주의자들은 좌파와 우파(또는 중도)로 깊게 분열돼 있었다. 당시 ‘공화주의자’라는 말은 “국왕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세우자”라는 대전제에만 동의했을 뿐,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크게 두 정당으로 갈라져 서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먼저, 좌파 공화주의로 ‘공화좌파’가 있었다. 핵심 인물은 마누엘 아사냐로, 제2공화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고질적인 문제(가톨릭 교회의 과도한 권력, 대지주들의 토지 독점)를 해결하지 않으면 스페인에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없다고 봤던 진보적 지식인·전문인 중심의 부르주아 정파들이었다.(여러 갈래였다가 훗날 주로 ‘공화좌파’로 통합된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인 서유럽식 민주공화국을 꿈꿨다. 정교분리, 군대 개혁, 온건한 토지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회 내에서 보수파를 누르고 개혁을 추진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노동자 정당인 사회노동당(PSOE: 이하 사회당)과 연합해야 했다. 이 때문에 우파로부터 “빨갱이들과 손잡은 배신자들”이라는 매도를 당했다.
그다음, 중도 우파 공화주의로 급진당이 있었다. 이름은 ‘급진’이지만, 실제 성향은 중도 우파 정당이었다. 그들의 노선을 요약하면 이렇다: 왕정은 싫지만,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득세하거나 부자들의 재산(토지)을 빼앗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즉, 기존 자본주의 체제와 지주들의 이익을 그대로 지키는 선에서 공화국을 원했다. 1931년 제2공화국 수립 때는 좌파 공화주의자들과 손을 잡았으나, 가톨릭 교회 규제와 토지 개혁이 본격화되자 바로 우회전했다. 결국 후에 언급할 1933~1935년 ‘암흑의 2년’ 동안 가톨릭 극우 정당인 CEDA와 연립정부를 세워 좌파 개혁을 뒤엎는 주역이 됐다.
요컨대 공화주의 정당들은 재산권과 가톨릭 교회를 지키며 안정을 원했던 우파 공화주의와 스페인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해 종교·토지 개혁을 원했던 좌파 공화주의(아사냐)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이 분열이 양극화해 중간 지대가 사라졌고, 결국 좌파 공화주의자는 사회주의자들과, 우파 공화주의자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과 손을 잡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아무튼 좌파 공화주의자들의 임무는 개혁을 완수하는 일이었고, 개혁의 목표는 스페인 사회를 근대화하고 노동자 혁명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제2공화국은 개혁에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정교분리를 단행하고 보통선거를 시행했으며,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교육제도도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시켰고, 이혼을 합법화했다. 그러나 역사적 과제는 단순히 개혁 입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토지, 교회, 군대, 지역 자치, 노동조합 등 스페인 사회의 권력 구조 전체와 충돌하는 일이었다. 초기 2년간(1931~1933년) 집권한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 연립정부가 근대화의 핵심으로 여긴 네 가지 개혁(토지, 교회, 군부, 지역 자치)은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실패했다. 농업 개혁은 농촌 부르주아지를 자극했을 뿐 토지를 수용하지 못했다. 땅 없는 농민의 불만은 폭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 정책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인 가톨릭 교육을 섣불리 건드려 반동 세력이 결집하는 빌미만 제공했다. 당시 스페인 교회는 수도사 2만 명, 수녀 6만 명, 신부 3만 5,000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이었다. 헌법 조항 하나(26조, 교회 특권 제한)를 놓고 정부가 분열됐고, 아사냐가 절충안을 내놨지만 가톨릭 계열 장관들은 줄줄이 사퇴했다.
군 개혁은 군 상층부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군주제 말기 스페인군은 병사 15만 명에 장교 17,000명, 장성만 195명에 달했다. 장교 대 사병 비율이 1 대 9, 즉 서유럽 어느 군대보다도 기형적이었다. 이 군대는 대외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내 질서 유지, 즉 피지배 계급 통제를 위해 유지됐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더 역설적인 것은, 개혁이 공화파 장교들에게만 퇴직 후 전액 급여 수령이라는 인센티브를 제공해 그들을 오히려 군대 밖으로 내보냈다는 점이다. 왕당파와 훗날 팔랑헤 지지자가 된 장교들은 자리를 지켰다.
지역 자치는 카탈루냐에서만 시행했고 바스크에서는 실현하지 못했다.
개혁의 한계는 두 사건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1932년 8월, 군대 감축 개혁과 카탈루냐 자치 인정에 반발한 산후르호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 정부가 신속히 진압했지만, 군부 내 반공화국 정서가 얼마나 깊은지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이듬해 1933년 1월에는 안달루시아의 카사스 비에하스 마을에서 아나키스트 농민들이 느려터진 토지 개혁에 지쳐 봉기를 일으켰다. 정부가 파견한 진압 부대는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며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이 사건은 개혁 정부가 정작 가장 억압받는 농촌 노동자들을 총칼로 진압했다는 오명을 남기며 정부의 좌파적 지지층이 정부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개혁가들은 개혁 과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데다, 상황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 권력은 정부 수중에 있었으나 경제 권력은 정부 수중에서 빠져나갔다. 자본가들이 투자를 거부하고 자본을 해외로 도피시킨 탓이다.
이런 점들을 보면, 스페인 내전은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지배계급이 극히 제한적인 개혁조차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다. 개혁은 속도가 느렸고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지주와 보수파에게는 그마저도 과도했다. 반면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너무 적고 너무 늦었다. 남부 농업 노동자들은 땅을 원했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비롯한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 정의를 요구했다.
정부는 사회당의 협조를 얻어 조직 노동계급의 절반을 한동안 통합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인 아나키스트(정확히는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세력은 새 정권에 선전포고를 하고 2년 동안 세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사회당의 연립정부 참여는 두 노동자 조직 간의 해묵은 갈등을 심화했고,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연맹(이하 CNT)의 입지를 강화했다. 사회당이 노동자 대중의 열망을 외면한 채 새로운 자본주의적 개혁 정부를 옹호한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1934년 무렵 정부에 실망한 노동자 대중이 먼저 급진화·좌경화하자, 온건하고 합법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사회당 지도부마저 표심을 잃지 않으려 대중의 정서를 따라 급진화했다. 이는 CNT 내부에서 무모한 봉기 모험주의 노선이 득세하는 빌미가 됐고, 결국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사회당과 CNT 모두 개혁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CNT는 1910년 바르셀로나에서 창립된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으로, 20세기 전반기 스페인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계열 노동조합과 달리 국가·정당·의회 정치를 거부했으며, 노동조합 자체를 혁명과 미래 사회의 조직 단위로 삼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노선을 추구했다. 직접행동, 총파업, 선거 불참을 핵심 방침으로 삼았고,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배제한 노동자·농민의 자주관리 연합체인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를 지향했다. 카탈루냐의 산업 노동자와 아라곤·안달루시아의 농업 노동자를 주요 기반으로 삼아, 1936년 무렵에는 조합원 100만~150만 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1927년 결성된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는 CNT 내부의 강경파 조직으로서 노조가 온건 개혁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봉기적·혁명적 노선을 고수했다. 이에 따라 두 조직은 흔히 ‘CNT-FAI’로 묶여 불렸다.
CNT는 사회당 계열의 노동조합총연맹(이하 UGT)와 라이벌 관계였다. UGT가 정당·의회·국가를 매개로 삼은 반면 CNT는 반정치·반국가 노선을 고수해 두 조직은 전술과 전략을 놓고 자주 충돌했다. 특히 1933년 총선에서 CNT가 벌인 선거 불참 운동은 좌파 표를 분산시켜 우파의 승리를 도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반작용으로 1936년 선거 때는 공식적으로 기권을 호소하지 않고 사실상 선거 참여를 묵인해 민중전선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좌파 승리의 진정한 기반은 이 시기 내내 CNT가 봉기와 파업을 거듭하며 대중을 동원한 것이었다.
개혁의 한계가 명확해질수록 노동운동 내에선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전망이 힘을 얻었다. 결국 군사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저항의 주도 세력은 공화좌파의 자유주의자들도, 사회당이나 공산당도 아니라, 거리와 공장, 농촌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반동 세력의 전열 재정비
대중이 사회당의 대정부 협조 노선과 아나키스트들의 무모한 봉기 모험주의 노선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우익 반동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톨릭 교회 계열의 우익 단체인 스페인우파자율연합(이하 CEDA)을 통해 의회 정치와 국가 권력에 접근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영향력을 확보하는 길을 마련하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혁명을 두려워한 부르주아지가 아사냐 정부(1931년 10월 14일 ~ 1933년 9월 12일)의 역할을 확신하지 못해 그조차 불확실한 길이었다. 그들은 정부가 혁명의 위험을 막아 줄지, 오히려 부추길지 판단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부가 혁명을 막아 낸다고 판단했다면 부르주아지는 위기 해결책으로 의회 제도를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선진적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형식적인 의회주의에 그쳤을 것이다.
CEDA는 제2공화국 시기(1931~1936년) 합법적 의회 정치를 통해 가톨릭·보수 질서를 복원하려 한 최대 우파 연합이었다. 그들의 부상과 내각 참여는 좌파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내전으로 치닫는 양극화를 가속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정작 내전이 발발하자 팔랑헤 당과 군부에 주도권을 내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의회를 매개로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얻어 통치하는 관행에 서툴렀던 스페인 지배계급은 물리력에 의존하는 지배에 더 익숙했다. 그래서 그들은 강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서유럽 부르주아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19세기 후반 스페인 부르주아 혁명이 구 지주 계급과 대부르주아지만을 위한 제한적 민주주의를 낳은 데서 비롯됐다. 당시 스페인 부르주아 혁명은 새로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지 못한 채 과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했다. 종교(가톨릭 교회)는 빈농을 비롯한 피지배 계급을 결속하는 이데올로기적 접착제 역할을 했다. 반동 세력은 자신들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협하는 개혁에 맞서 가톨릭 교회에 의지했다. 그들에게 종교 방어는 곧 사유재산과 가족, 나아가 기존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일과 직결돼 있었다. 그 결과 스페인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 없이 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대항해야만 세울 수 있었다.
CEDA의 장기적 구상은 서로 다른 계급이 단일 구조 안에서 협조해 계급투쟁을 지양하는 강제적 조합주의인 코포라티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회제라는 수단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아스투리아스에서 민중전선으로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무장 봉기는 이 과정의 전환점이었다. 1934년경 지배계급에게는 (1933년 총선에서 승리해) 기회가 열려 있었으나, 피지배 계급에게는 더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CEDA가 정부에 참여하자 노동자들은 이를 파시즘의 초입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반감 속에서 사회당은 10월에 미숙하게나마 총파업을 조직했다. 아스투리아스 광원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아스투리아스 봉기로 부르주아지는 크게 놀랐으나, 자신들의 이익을 전통적으로 수호해 온 군부가 이번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에 적잖이 안도했다. 그들은 장차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군부가 그것을 분쇄할 것이라 확신하며 곧 자신감을 되찾았다.
아스투리아스 봉기 경험으로 양측 모두 급진화했다. 우파는 노동자 운동을 공화국 질서 안에서 통제할 수 없는 위협으로 봤고, 좌파와 노동자들은 합법적 개혁의 한계를 더욱 절감했다.
스페인 노동계급은 유럽 노동운동에서 가장 선진적인 집단이었으나 단결하지 못했다. 1934년 여름 농업 노동자 파업은 산업 노동자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같은 해 10월 사회당 봉기는 농업 노동자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훗날 내전 발발 후 전선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데 차질을 빚는 원인이 됐다.
우파 연립 정부는 1935년 말 스스로 무너졌다. 집권 중도우파 정당인 급진당 지도부가 불법 도박기 도입 로비와 관련된 부패 스캔들(‘스트라페를로 스캔들’)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도덕적 치명상을 입은 연립 정부는 와해됐고,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결정했다. 이 공백이 민중전선 결성의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스투리아스 봉기 진압 후 이어진 정부 탄압에 반격하면서 민중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6년 2월 민중전선이 비록 근소한 차이지만 (득표율 차이가 1퍼센트에 불과했다) 선거에서 승리했다. 민중전선은 두 부르주아 정당과 사회당, 공산당, 아나코-신디컬리즘 조직인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FAI), 마르크스주의적 통합 노동자당(이하 POUM)으로 구성됐다.
그러자 억눌렸던 기대가 분출했다. 노동자 파업 물결이 일었으며, 농민은 토지를 점거했다. 선거 후 5개월 동안 총파업이 113건, 부분 파업이 228건 발생했다. 6월 10일에는 약 100만 명, 7월 초에는 그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다. 농촌에서는 19만 가구가 약 60만 헥타르의 토지를 스스로 접수했다. 공화국 정부가 2년 반에 걸쳐 이전한 땅이 겨우 45,000 헥타르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압력이 개혁의 틀을 이미 넘어섰다는 신호였다.
파시스트 정당 팔랑헤는 불법화됐다. 팔랑헤는 CEDA의 합법적·종교적 가톨릭 보수 노선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노골적인 파시스트 운동이었다. 스페인 제국의 영광 재현과 단일 조국을 내세운 극우 민족주의, 반마르크스주의·반자유주의·반의회주의를 표방했다. 수사적으로는 반자본주의와 계급 초월을 내걸며 코포라티즘 국가를 지향했다.
팔랑헤는 1936년 2월 민중전선이 승리하기 전까지는 의석이 거의 없는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선거 패배에 좌절한 CEDA 청년 회원과 우익 청년층이 대거 합류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좌파를 겨냥한 거리 폭력과 테러에 깊이 가담하며 내전 직전의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겼다.
출범 초기 정부는 공화주의 부르주아 정당으로만 구성됐으나, 사회당과 공산당 등이 외곽에서 정부를 확고히 지지했다.
POUM은 규모는 CNT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보다 작았으나, 혁명적 강령에 더 가까워 극좌파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특히 지도자 안드레우 닌은 레온 트로츠키와 친분이 깊어 POUM은 흔히 ‘트로츠키주의 정당’으로 불렸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닌은 한때 소련 공산당 내 좌익 반대파에 속했으나 POUM의 노선을 둘러싸고 트로츠키와 결별했다. 트로츠키는 닌이 민중전선 협정에 서명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POUM을 혁명과 개혁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간주의 정당으로 평가했다.
민중전선은 부르주아지 내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반자본주의적 요구를 배제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노동계급의 주도성을 강조한 스탈린주의자들(예컨대 공산당 사무총장 호세 디아스나 공산당 소속 의원 헤수스 에르난데스)의 주장은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이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은 ‘파시즘에 맞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밀려 빛이 바랬다. 후자를 위해 노동계급은 중간계급과 일부 부르주아지를 반파시스트 진영으로 끌어들여야 했고,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양보를 감수해야 했다. 사안에 따라 그러한 제휴가 때로 불가피할지라도, 문제는 전략 자체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는 데 치우쳤다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의 논리를 “단순 산수”에 비유했다. 공산주의자 더하기 사회주의자 더하기 아나키스트 더하기 자유주의자는 그들의 합보다 크다는 것이 민중전선 지지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여기에 “평행사변형의 법칙”을 대입했다. “방향이 반대인 두 힘의 합력은 오히려 더 짧아진다. 근본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정치 동맹은 혁명적 역량을 마비시킬 뿐이다.” 더구나 스페인의 경우 민중전선 안에는 부르주아지 자체가 사실상 없었다. 실제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압도 다수는 프랑코 진영으로 이미 이동했고, “그림자 부르주아지”만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민중전선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질적 부르주아지도 없이 그들의 대리인들에게 스스로 종속되는 기괴한 구조였다.
1936년 4월 12일 트로츠키는 “스페인 상황이 다시 혁명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노동자와 빈농 등 피억압 민중 사이에서는 개혁 정부가 들어서 진정한 개혁을 단행할 것이라는 희망과, 과연 공화주의자들이 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공존했다.
한편 농촌 부르주아지는 농업 개혁이 실제로 진전되면 자신들의 소유권이 크게 위협받을 것임을 알았다. 농업 개혁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소토지 분할)이냐 ‘사회주의적’(집산화)이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공리공론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는 애초에 그들의 해결책이 돼 본 적이 없었다. 농업부 장관은 “농업 개혁을 통해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쿠데타에서 내전으로
그러나 군부와 우익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1936년 총선에서 패배한 부르주아지는 의회 제도가 더는 혁명을 예방하는 보증수표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자 CEDA를 저버렸다. 농촌 부르주아지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군부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신속한 쿠데타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의회 외곽 세력에 의존했다. 군부, 팔랑헤당, 카를로스파, 왕정복고파 등이 바로 그러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강제적 코포라티즘 국가를 통해 계급투쟁을 지양하겠다고 표방했다.
7월에 발생한 칼보 소텔로 암살 사건은 군사 반란의 명분으로 악용됐다. 호세 칼보 소텔로는 의회 내 강경 우파를 이끌며 사실상 군부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대변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7월 12일, 공화국을 지지하던 치안대 장교 호세 카스티요가 출근길에 우익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했다. 분노한 동료들이 이튿날 새벽 보복에 나서 칼보 소텔로를 집에서 연행한 뒤 차 안에서 사살했다. 1936년 7월 13일 좌파 세력이 제1야당의 거물 정치인인 그를 납치·살해하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 일었다. 정부가 정적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거나 범행에 개입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는 우익 세력에 ‘합법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분이었을 뿐, 반란 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에밀리오 몰라 준장이 쿠데타 계획을 주도하고 있었다. 암살 사건은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망설이던 장교들을 결집해 거사를 앞당긴 촉매제라고 할 수 있었다. 반란의 근본 원인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기득권 수호에 있었다. 실제로 며칠 뒤인 7월 17일과 18일, 모로코 주둔군을 시작으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코 세력은 이 사건을 빌미로 군사 반란을 “방어적 반란”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축했다.
이전에도 군사 반란이 일어난 적은 있으나 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군사 반란 세력이 처음부터 전면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반란군은 신속한 쿠데타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주길 거부했다. 총리는 노동자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자는 총살하겠다고 공표했고, 마드리드 라디오는 “스페인 어디서도 반란에 가담한 자는 없다”고 방송했다. 반란이 안달루시아 전역으로 퍼지는 와중에도 정부는 “반도 전체가 완전히 평온하다”는 발표를 이어갔다. 이 무장 거부 정책은 수십 개 도시에서 파시스트 승리를 보증해 줬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등지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쿠데타는 좌절됐고, 반란은 결국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 시점은 결정적이었다. 진정한 혁명적 상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기존 국가 기관들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대신 무장한 노동자와 시민군(민병대), 지역 반파시스트 위원회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대중의 저항은 단지 내전을 초래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대중 저항은 공화국 국가 기구의 해체와 함께 공화국 지역 상당 부분에서 광범한 사회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무장 노동자와 시민군 조직, 식료품 및 치안 대책 마련, 여성 삶의 변화, 산업과 토지의 집산화 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혁명의 폭발
혁명이 시작됐다. 혁명은 국가 권력의 붕괴와 노동운동의 오랜 열망이 맞물려 갑작스럽게 분출했다. 노동자와 빈농이 공장과 농장을 혁명적으로 장악했을 때, 정당이나 노동조합 지도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CNT조차 그러한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발적인 그 힘은 엄청났으나 동시에 분산돼 있었다.
카탈루냐와 동부 아라곤에서는 CNT의 강력한 전통에 힘입어 혁명이 가장 역동적으로 전개됐다. 공장, 교통, 서비스 부문이 노동자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농촌에서는 토지 집산화가 확산됐다. 발렌시아와 아스투리아스에서도 노동자 조직들이 후방을 장악했다.
반면 마드리드는 전선과 인접한 데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 혁명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지역별 차이는 스페인 혁명이 하나의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결집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1936년 스페인의 이원 권력(“이중권력”) 상황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이원 권력 상황에 비해 더 불안정했다. 더구나 공화국 진영의 권력이 하나의 대안 국가로 통합되지 못하고, 수많은 위원회와 시민군으로 파편화돼 있었다. 실제로 공화국 지역에서는 그 어떤 계급도 국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민중전선 정부를 가리켜 “그림자 부르주아지”라 불렀다. 실제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압도 다수는 이미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고, 민중전선 정부 안에 남은 것은 공화국 헌법에 서명한 변호사들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정부는 자신이 대표하는 계급(부르주아지)을 잃었고, 오직 공산당·사회당·아나키스트의 지지에 의존해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이원 권력 상황이 특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두 권력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든지, 아니면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 장악을 포기하고 기존 국가 기구의 재건을 허용하든지 하는 결말만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혁명은 공화국을 수호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단순히 기존 공화국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군사 반란을 자신들의 해방을 가로막는 위협으로 인식해 그에 맞서 무장했다. 바로 이 점에서 전쟁과 혁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을 토지의 집산화 여부와 개별 농가 분배를 두고 시민군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그 장면이 암시하듯 스페인 내전의 진정한 쟁점은 후방의 혁명적 성과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였다.
그러한 혁명적 성과에 힘입어 내전 초기 노동계급과 빈농은 투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들은 전후에 누릴 계급 차별 없는 삶을 동경하며, 현재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또한 전시 통제를 통해 투기와 매점매석을 억제했으며, 전선에 보낼 잉여 생산물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방에서는 대체로 집산화가 실행됐지만, 그 외 지역은 편차가 컸다. 안달루시아의 민중전선 정부 통제 지역에서는 버려진 토지에만 아나키스트 집단농장이 들어섰다. 집단농장 참여를 거부한 소농들은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빈농이 희생을 감수하며 집산화된 생산을 유지했기에 내전은 32개월 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
전쟁과 혁명이 결국 분리의 길을 걷다
민중전선의 사실상의 핵심 세력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력한 중앙 정부와 정규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자체는 타당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혁명을 미루고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계급과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외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는 대외 정책도 이 편협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반면 CNT와 POUM은 혁명이 낳은 대중적 열정을 전쟁 수행에 결합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민중전선 정부에 참여했다. 일반 노동자들이 이미 혁명에 돌입한 상황이었는데도 혁명을 추동하기보다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CNT는 사실상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장악을 거부했다. 이처럼 CNT가 권력 문제를 회피한 반면, POUM은 혁명적 대안을 관철할 뚜렷한 노선과 세력이 부족했다.
스페인 혁명은 전쟁 승리와 혁명 완수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지 못해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부르주아 국가의 잔재를 분쇄하며 지역적 분산성과 파편성을 극복한 집중된 혁명적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내전 승리라는 과제에 노동자와 빈농 대중의 총력을 결집해야 했다. 내전은 혁명적 민중(노동자와 농민) 전쟁이 돼야 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세력(스탈린, 코민테른, 스페인 공산당)은 정규군(인민군) 중심으로 전쟁을 치르며, 혁명을 중간계급과의 동맹 및 민주공화국이라는 틀 안에 가두는 전략을 고수했다. 그 결과 민중과 무장세력은 융합하지 못하고 분리됐으며, 전쟁과 혁명은 겉돌았다. 마드리드 공방전이 이를 뚜렷이 보여 주었다. 결국 후방의 혁명은 전방의 전쟁을 지탱하지 못했고, 혁명과 전쟁은 이론과 달리 실제로는 따로 움직였다.
중앙집권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권력으로 중앙집권할 것인가
여기서 쟁점은 단순히 중앙집권이 필요한가, 정규군이 필요한가가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생산, 보급, 군사 지휘를 조율할 중앙 권력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중앙 권력이 노동자·농민의 위원회와 시민군을 기반으로 세워질 것인가, 아니면 무너진 부르주아 공화국 국가를 되살리는 방식으로 세워질 것인가였다. 사회당·공산당 지도부는 후자를 택했고, 바로 그 선택이 혁명의 동력을 약화시켰다.
1936년 7월 이후 공화국 지역에서는 공식 정부와 별개로 무장 노동자에 근거한 비공식 권력이 출현했다. 지역 위원회들은 치안, 가격 통제, 공장과 토지 접수, 은행 계좌와 주거 문제, 교육과 복지까지 처리하며 사실상의 ‘정부 위원회’ 구실을 했다.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이원 권력이었다.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을 제압해야 했다. 그런데 공산당, 사회당, 아나키스트 지도부는 위원회들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거나 큰 영향력을 갖고도 기존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다. 그 결과 노동자 권력이 스스로를 전국적 권력으로 조직할 기회를 놓쳤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혁명적 전술은 노동자 위원회와 시민군을 해산하거나 기존 국가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선출·소환 가능한 대표 체계로 통합하는 것이어야 했다. 병영과 모든 무장 부대, 공장과 농촌 위원회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지역·전국 위원회 대회를 건설해 공화국 정부를 대체해야 했다. 공장 위원회는 생산을 장악하고, 전국적 경제 계획을 세워 전선 보급과 후방 생활을 함께 조직해야 했다. 군사적으로도 시민군의 혁명적 기반을 보존하면서 통일 지휘와 규율을 결합한 혁명군을 건설해야 했다. 이는 무질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친정부 장교단과 경찰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방식의 중앙집권이었다.
POUM 내부에도 이런 방향을 어렴풋이 제기한 흐름이 있었다. POUM 마드리드 지부는 병영과 모든 무장 부대에서 출발하는 민주적 선출 위원회, 그 위원회들의 대회, 공장 위원회의 생산 장악, 시민군을 기반으로 하되 통일 지휘와 군사 규율을 갖춘 혁명군을 요구했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와 적군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POUM 중앙 지도부는 이런 노선을 일관되게 추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POUM 지도부는 1936년 1월 민중전선 협정에 서명했고, 9월에는 카탈루냐 자치정부인 헤네랄리타트에 참여했다. 더 나쁘게도 그 정부는 곧 반파시스트 시민군 위원회를 해산했다. POUM은 한편으로 카바예로 정부를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권력의 기관을 해체하는 정부에 참여했다. 이런 오락가락이 중간주의의 핵심 약점이었다. 혁명과 개혁주의 사이에서 둘 다 붙잡으려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개혁주의에 끌려간 것이다.
CNT 지도부의 약점은 더 결정적이었다. CNT는 카탈루냐에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실제로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 때도 노동자들은 거의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나 CNT 지도자들은 권력 장악을 ‘독재’로 여기며 거부했고,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일터로 돌아가라고 했다. POUM도 CNT 지도부를 비판하며 독자적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전술 문제는 추상적 논쟁이 아니었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노동자들이 이미 권력 문제를 제기했을 때, 지도부가 그 투쟁을 전국적 권력 장악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해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반면 스탈린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의 전술은 일관됐다. 그들은 민중전선을 ‘덧셈’으로 이해했다. 공산당, 사회당,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를 합치면 반파시스트 진영이 커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힘의 합성’ 역학을 들어 비판했듯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계급 세력들의 동맹은 단순한 덧셈이 될 수 없었다. 지주와 자본가의 ‘그림자’를 안심시키려는 순간,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는 희생돼야 했다. 실제로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압도 다수는 프랑코 편에 섰고, 공화국 안에 남은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런 세력을 붙잡으려 노동자 혁명을 억제한 것은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얻으려면 사회 개혁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비개입’을 내세워 합법 정부에 무기 판매조차 거부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에게 대규모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국제 외교를 위해 혁명을 억제한다는 전략은 외교에서도 실패하고 국내에서도 대중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반대로 토지와 공장을 노동자·농민이 장악했다면, 병사와 농민 대중을 프랑코의 후방에서 흔들 훨씬 강력한 호소력을 얻을 수 있었다.
1936년 10월 이후의 조처들은 이 전략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 준다. 카탈루냐 정부는 지역 위원회를 해산하고 기존 지역 자치 기구를 복원하려 했다. 10월 말에는 노동자 무장 해제를 명령했고, 노동자 순찰대와 시민군이 맡던 치안 업무는 부르주아적인 공식 경찰로 넘어갔다. 네그린 아래서는 카라비네로스 같은 무장 경찰력이 급팽창했고, 노동자 조직과 정치 활동에서 분리된 국가기구가 재건됐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기술적 조처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을 해체하는 정치적 반혁명이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전화국 사태는 그 축약판이었다. PSUC 계열 공안 책임자가 CNT-UGT 위원회가 운영하던 전화국을 무력 접수하려 하자, 노동자들은 조직의 지시 없이 총파업과 바리케이드로 대응했다. 며칠 동안 혁명적 노동자들이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두루티의 친구들’과 소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무장력 해체, 노동계급의 전면 무장, 혁명 방어 위원회 건설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너무 작았고, CNT와 POUM 지도부는 후퇴를 명령했다. 그 결과 5월 사태는 혁명의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혁명의 종결점이 됐다.
이후 네그린 정부는 POUM 기관지 《라 바탈랴》를 폐간시키고, POUM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닌을 NKVD 손에 넘겨 살해하게 했다. 노동조합 회의 허가제, 검열, 라디오 방송 독점, 특별재판소, 군사정보국(SIM) 같은 억압 장치가 강화됐다. 시민군은 낡은 군법과 부르주아 장교단 아래 재편됐고, 병사들의 정치 활동도 금지됐다. 공장과 토지는 예전 소유주에게 되돌려지거나 국가 통제로 넘어갔다. 네그린이 자처한 “승리의 정부”가 거둔 유일한 승리는 프랑코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승리였다.
따라서 스페인 혁명의 전술적 교훈은 분명하다. 반파시즘은 계급 협력으로 강해지지 않았다. 파시즘에 맞선 군사적 승리는 노동자와 농민이 자력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확신, 즉 토지와 공장과 권력을 실제로 장악한다는 전망과 결합될 때만 대중적 에너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혁명적 좌파의 과제는 공화국 국가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위원회를 통합해 그 국가를 대체할 권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그 과제가 실패했을 때, 전쟁도 끝내 승리할 수 없었다.
공화국 진영의 운명을 크게 좌우한 내부 갈등
1936년 9월 4일부터 사회당의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축이 돼 공산당, 공화좌파와 함께 내각을 구성했다. 카바예로 정부는 노동자의 신뢰를 회복할 지도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으나, 개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전쟁과 혁명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화국 국가 기구는 재건됐고, 시민군은 정규군으로 통합됐으며, 중앙집권적 통제는 강화됐다.
카바예로 내각에는 1936년 11월 CNT 인사 4명이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CNT는 카탈루냐 자치정부에도 참여했다. 국가 자체를 부정해 온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에 참여한 이 결정은 지금까지도 혁명적 좌파에 의해 가장 거센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전쟁과 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이견으로 노동자 조직의 분열은 깊어졌다. 1936년 7월 공산당은 1931년 4월 14일 수립돼 1936년 2월 16일 부활한 공화국을 수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37년 3월 공산당은 혁명이 “민중전선 정부 통제 지역의 옛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기존 공화국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또한 혁명이 “심오한 사회적 내용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민주 의회 공화국을 창출하고 있다”며 농촌과 도시의 중간계급을 적극 옹호했다. 게다가 군사 반란에 가담한 지주의 토지만 수용하려 한 그들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적 농민은 방치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전쟁 전 노동자와 빈농을 착취하고 탄압한 토호 세력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집산화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혁명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적 통제였다. 예컨대 스탈린주의자들은 아라곤의 집산화를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아라곤 평의회를 해산해 해당 지역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통제권을 박탈했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공산당은 아나키스트와 POUM이 주축이 된 극좌파를 상대로 무자비하고 종파적인 유혈 투쟁을 전개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당의 개혁주의 주류, 사회당이 통제하는 UGT(노동조합총연맹), 자유주의자들인 공화좌파에 의존해 혁명을 가로막았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전쟁 승리에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CNT 조합원들과 소수 사회당원들을 제거했다. 공산당은 혁명적 잠재력을 경시하고 억누름으로써 노동계급 내부에 존재하던 역사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 결과 전쟁 승리에 필수적이었던 목표의 단일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자체의 계급 구성이 급격히 변화했다. 1934년 2만 명이던 당원은 1937년 중반 공산당·PSUC 합산 100만 명으로 폭증했다. 그러나 1938년 마드리드 공산당 당원 63,426명 가운데 실제 노동자는 10,16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소상공인, 자영농, 경찰, 하급 장교, 사무직이었다. 공산당은 “법과 질서”를 표방하며 혁명적 노동자가 아니라 혁명이 두려운 중간계급을 끌어모은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이 혁명을 억압한 것은 외부 소련의 압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당원들의 계급 이해관계가 이미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 속에서 반파시스트 부르주아 세력과 노동계급의 동맹은 결국 부르주아 세력이 투쟁을 주도하는 결과로 귀결되기 쉬웠다.
이는 위에 언급된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전화국) 사태와 네그린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충돌은 누적된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한편의 혁명 세력과 다른 편의 민중전선 지지자들, 특히 공산당과 카탈루냐 스탈린주의 정당인 PSUC가 영향력을 두고 맞섰다. 5월 3일 봉기가 시작되자 바르셀로나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어떤 조직도 행동 지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총파업이 도시를 덮었고, 하룻밤 사이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노동자들은 도시의 약 10분의 9를 장악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전투 결과가 아니라 CNT 지도부의 대응이었다. CNT 전국위원회는 “무기를 내려놓으라,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파시즘이다”라는 방송을 반복했고, 아나키스트 장관들이 비행기로 날아와 직접 라디오에서 “광기”를 멈추라고 호소했다. 바르셀로나 밖에서 진격 준비를 마친 민병대 부대들도 CNT 대표들에 의해 저지됐다. 5일간의 전투로 50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했다. “6일간의 거리 진압은 경찰의 행동이 아니라 CNT 지도자들의 연설 덕분에 이루어졌다”는 목격자의 말은 이 역설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POUM과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했다. POUM은 불법화됐고 안드레우 닌은 살해됐다. 곧이어 정부 수반(총리)이 라르고 카바예로에서 후안 네그린으로 교체됐다. 전선에서의 승리에만 집착한 공산당은 후방을 등한시했고, 이는 대중의 사기 저하를 초래했다.
닌은 체포된 뒤 소련 보안경찰 내무인민위원부(NKVD) 요원들에게 비밀리에 고문당한 뒤 살해됐으며,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민중전선 정부는 그가 파시스트 진영으로 도주했다고 발표했으나, 실상은 스탈린주의 보안기관이 자행한 정치적 암살이었다. 이는 공화국 진영 내부에서 일어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꼽힌다. 1938년 10월에 열린 POUM 지도부 재판에서조차 스페인 법원은 ‘파시스트 첩자’라는 핵심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질서 교란과 반란 관련 경미한 죄목으로만 유죄를 선고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의 분위기와 5월 사태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정영목 옮김, 민음사, 2014)가 생생히 보여 준다.
후안 네그린은 사회당 소속이었으나, 당 내에서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좌파보다 온건하고 실용주의적인 우파에 속했다. 그는 1936년 9월부터 라르고 카바예로 내각의 재무장관을 맡아, 소련제 무기 대금을 치르고자 스페인은행의 금 보유고를 소련으로 이전한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조치를 주도했다. 당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통로가 소련뿐이었으므로, 이 조치는 공화국 재정을 소련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월 사태 직후 혁명파에 유화적이던 라르고 카바예로가 물러나고 네그린이 부상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소련 원조의 통로인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당원임에도 공산당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도구’이자 ‘냉소적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PSUC(카탈루냐통합사회당)는 실질적으로 카탈루냐의 공산당이었다.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먼저 전쟁에서 이긴다’는 전략을 견지해 (민중전선) 정부를 옹호하고 혁명과 집산화에 반대했다. 그들도 질서 회복과 중앙 권력 강화를 우선시했다. 카탈루냐에서 이 노선은 CNT-FAI의 혁명적 집산화에 위협을 느낀 소상공인, 자영농, 사무직 등 중간계급을 결집시켰다. 이로써 PSUC는 CNT-FAI와 POUM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5월 시가전의 직접적 발단도 PSUC 계열 공안 책임자 에우세비오 로드리게스 살라스가 CNT가 통제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무력으로 접수하려 한 데 있었다. 소련의 무기 지원을 등에 업은 PSUC는 카탈루냐 혁명을 제압한 주축이었다.
이후 네그린 정부 아래서 공화국은 더 강력한 국가 권력, 엄격한 군대 규율, 커진 공산당 영향력, 노골적인 반혁명 조치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했다. 오히려 초기에 전쟁을 지탱한 혁명적 열정만 약화시켰다.
국제적 요인
공화국의 패배를 국내 정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국제적 요인도 중요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비개입’ 정책은 사실상 중립이 아니었다. 그 정책은 공화국을 고립시키고 프랑코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 권력층은 스페인 공화국을 볼셰비즘의 위협으로 바라보며, 공화국이 소련 편에 설 것을 우려했다. 프랑스는 영국의 압력에 밀려 비개입 정책을 주도했다. 27개국이 참여한 비개입위원회는 실제로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손을 떼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그사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에 무기와 병력, 공군력을 지원했다.
프랑코의 승리는 이러한 국제적 지원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독일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원정군의 파병, 무기 및 공군력 지원은 반란군에게 결정적인 우위를 안겨주었다. 반면 공화국은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소련에 의존해야 했다. 소련의 지원은 공화국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나, 국제 혁명에 대한 헌신보다는 소련의 외교적 이해관계에 좌우됐다. 코민테른의 민중전선 노선은 파시즘에 맞선 광범한 동맹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스페인의 혁명을 억제하고 공화국 국가를 재건하며,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승인을 얻으려는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국제여단의 헌신과 희생은 위대했으나, 그 영웅주의는 전략적 한계 앞에서 무력했다.
국제여단은 공화국 편에서 싸우고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 의용병 부대다(1936~1938년). 50개국 이상에서 약 3만 5,000~4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한다. 노동자와 지식인, 작가, 망명자가 뒤섞였다. 특히 이미 조국을 파시즘에 빼앗긴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 망명객이 많았다. 1936년 11월 수도 함락 직전의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공화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며 방어선을 지킨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이후 하라마, 과달라하라, 브루네테, 벨치테, 에브로 전투를 치렀다. 그런 국제여단을 조직하고 통제한 곳은 코민테른이었고 각국 공산당이 모집 창구였다. 이 때문에 의용병 개개인의 동기가 순수한 반파시즘 이상주의였을지라도 지휘 체계는 공산당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네그린 총리는 1938년 9월 국제연맹 연설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군의 동반 철수를 유도하고자 국제여단 철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상호 철수로 이어지지 못했다. 국제여단 의용병들은 귀국한 뒤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소련에서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반면 프랑코를 지원한 나치 독일의 콘도르 군단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의용군(CTV)은 자발적인 의용군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가 파견한 정규 군사력으로, 규모와 장비 면에서 국제여단을 압도했다. 악명 높은 게르니카 폭격이 바로 콘도르 군단의 소행이었다.
프랑코 진영: 전쟁과 반혁명의 일치
좌파 진영에서 혁명과 전쟁이 어긋난 반면, 우파에서는 전쟁과 반혁명이 일치했다. 프랑코 진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처음부터 좌파와 전투적 민중을 체계적으로 학살하며 후방을 진압했다. 프랑코 통제 지역의 계급투쟁은 철저히 계산된 야만적 탄압에 직면했다. 반란군의 테러는 단순한 보복이나 전시의 일탈이 아니었다. 이는 공화국의 사회적 기반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고 심리적으로 분쇄하려는 계획적인 폭력이었다.
대중에게 쓰라린 패배를 거듭 안기지 않는 한 속전속결은 프랑코에게 불리했다. 오히려 지구전이 파시스트 세력에게 유리했다. 또한 파시스트들에게는 오직 섬멸전과 무조건 항복만이 의미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승리는 언제나 공화국 진영의 반격에 흔들릴 만큼 취약했다. 그렇기에 후방의 계급투쟁은 더욱 중요했다.
공화국 지역에서도 군사 반란 직후 폭력과 처형이 자행됐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약 3만 8000명이 처형됐다. 공화국 진영의 폭력이 국가 기구 붕괴, 사적 보복, 반란에 대한 대중적 응징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면, 프랑코 반란 세력의 테러는 옛 질서를 강제로 복원하려는 핵심 수단이었다.
반란 세력은 스스로를 ‘국민파’라 불렀다. 그들은 가톨릭 스페인, 민족 전통, 통일 조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국민과 민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공화국 진영을 공산주의, 분리주의, 무신론, 프리메이슨에 물든 ‘반(反)스페인’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표방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나치 독일(콘도르 군단)과 파시스트 이탈리아(CTV), 포르투갈 살라자르 극우 독재 정권의 군사 지원을 받았다.
국민파 테러의 이데올로기는 주목할 만하다. 프랑코 진영은 공화국 지지자들을 단순한 정치적 반대자가 아닌 ‘반스페인’, ‘비인간’, ‘외래적 오염’으로 규정해 폭력을 정당화했다. 일부 현대 연구자들이 국민파의 테러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적을 비인간화하고 사회를 정화하려는 논리는 제노사이드와 분명한 유사성을 보여 준다.(다만 유엔 협약상 제노사이드는 민족·종족·인종·종교 집단을 정체성 때문에 말살하려는 의도를 핵심으로 삼는다. 정적이나 이념적 적 같은 정치적 집단에 대한 학살은 법적 정의에서 제외됐다. 국민파 테러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한 축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는 프랑코 체제의 형성 문제로 연결된다. 프랑코의 권력은 기획된 설계도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 형성됐다. 프랑코를 비롯한 반란군 지도부는 초기에 구체적인 사회 체제 수립에 합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단일한 군사·정치 지도력이 필요해졌고, 프랑코가 파시스트 대중 운동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했다. 프랑코는 팔랑헤와 왕정 복고주의자들을 강제로 통합했다. 팔랑헤는 대중 동원과 선전에 앞장섰으나, 새 체제의 성격을 최종 규정한 것은 군부, 전통 우익, 교회, 대지주와 자본가의 이해관계였다.
이 과정에서 CEDA는 소멸했고, 팔랑헤는 명칭과 상징만 남긴 채 실체는 프랑코 권력에 종속됐다. 스페인 파시즘이 이탈리아나 독일처럼 ‘당이 국가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군부 지도자 프랑코가 당을 장악’한 형태였다는 점은 자주 지적된다.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프랑코 반란을 정당화했다. 가톨릭 노동헌장은 계급투쟁 폐지를 선언했으나, 실제로는 노동자의 독립적 조직을 무력화하고 사용자와 국가에 종속시키는 장치에 불과했다. 교회는 프랑코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었다. 내전을 새로운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고 교육, 도덕, 가족, 젠더 질서의 재편을 주도했다. 국민파 장악 지역에서는 공화국 측 교사들이 대거 숙청됐으며, 교육은 다시 가톨릭 교리와 ‘국민 정신’을 주입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는 프랑코 체제가 단지 군사 독재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계와 복종, 가톨릭적 질서 아래 재편하려는 반혁명 체제였음을 보여 준다. 프랑코 사망 이후 이른바 ‘민주주의 이행기’(1975~1982년)가 도래했다. 파시즘 체제의 붕괴 없이 위로부터의 합의로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독특한 서사가 형성됐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었다, 내전은 집단적 광기였다,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라는 서사다. 프랑코 체제 후기 인물들부터 중도·우파(현재의 국민당 PP 계열), 안정을 위해 타협한 주류 사회당 세력까지 이에 동의했다. 이 서사의 제도적 표현이 바로 ‘망각의 협정(Pacto del Olvido)’과 1977년 사면법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결정적인 비대칭성을 은폐한다. 첫째, 한쪽은 선거로 선출된 합법 정부였던 반면, 다른 쪽은 이를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 세력이었다. 둘째, 공화국 진영의 폭력은 상당 부분 통제 불능의 산발적·자발적 성격이었던 반면, 프랑코 측의 백색테러는 처음부터 위에서 조직한 체계적인 말살 정책이었다. 셋째, 한쪽은 40년간 권력을 쥐고 기억과 무덤까지 지배했으나, 다른 쪽은 패배와 처형, 매장, 침묵을 강요받았다.
물론 전쟁은 스페인 사회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양측 모두의 폭력을 유발했다. 그러나 혁명과 반혁명, 계급 이해관계와 정치적 책임이 흐려져서는 안 되며, 양측의 지향점과 폭력의 성격 또한 모호해져서는 안 된다. 공화국 진영의 대중은 군사 반란에 맞서 삶을 주체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 반면 프랑코 진영은 그 가능성을 짓밟으며 구질서를 한층 잔혹한 방식으로 복원하려 했다.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향한 열망이 끓어올랐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지주, 교회, 군대, 자본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독재가 군림했다.
결론
우리가 내릴 결론은 냉정하다. 내전의 패배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다. 프랑코의 쿠데타는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민중전선 정부는 이를 즉각 대중에게 알리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기는커녕 사태가 통제되고 있다는 식의 안심시키는 발표만 했다. 총리를 비롯한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했고, 심지어 무기를 주는 자는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에서 파시스트가 쉽게 승리했다. 반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말라가, 발렌시아 등지에서는 노동자들이 정부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무장하거나 바리케이드를 세워 반란군에 맞섰다.
내전의 승패는 단순한 군사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였다. 공화파가 프랑코보다 군사적으로 약하더라도 토지, 공장, 상점을 자본가에게서 빼앗아 민중에게 넘기겠다고 선포하고 노동자 권력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즉각 실행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혁명 강령은 프랑코 군대 내부 병사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 병사들이 장교를 결박해 노동자 시민군에 넘기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민중전선과 양립할 수 없었다. 민중전선 내부의 부르주아 장관들이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강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왜 모로코에서 시작된 프랑코의 기반을 정치적으로 흔들지 못했는가’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민중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개혁을 제한해야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부, 그리고 스페인 부르주아지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완전히 틀렸다.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압도적 다수는 이미 프랑코 편에 섰고, 영국과 프랑스 정부도 ‘비개입’을 내세워 합법 정부인 공화국에 무기 판매조차 거부했다. 반면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막대한 군사 지원을 받았다. 즉, 혁명을 억제해 부르주아 동맹을 얻는다는 전략은 실제로는 동맹도 얻지 못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사기와 주도권만 꺾은 셈이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사태를 다룰 때도 이 논리를 강조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카탈루냐 노동자들이 1937년 5월에 권력을 장악했다면 스페인 전역에서 지지를 얻었을 것이며, 프랑코 점령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도 카탈루냐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돌아섰으리라 판단했다. 그랬다면, 파시스트 군대는 고립돼 ‘저항할 수 없는 와해’를 겪었을 것이며, 외국 정부의 직접 개입도 훨씬 위험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프랑코의 힘은 단순한 군사력 자체보다 공화파 지도부가 노동자, 농민, 식민지 피억압 민중에게 혁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 민중전선 정부는 프랑코의 출발지인 모로코를 겨냥해 반식민지·사회혁명 선동을 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키는 한편, 토지와 공장을 민중에게 넘겨 프랑코 진영의 병사들을 동요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전선의 계급 협조 노선은 이러한 전술을 가로막았고, 결국 프랑코의 군사적 기반을 내부에서부터 뒤흔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1939년 프랑코의 승리는 단순한 질서 회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와 공산당원뿐 아니라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자치 염원, 여성 해방의 싹, 세속 교육 등 진보적 가치 전체에 가해진 야만적이고 가혹한 보복이었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40년 가까이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철저히 억압하며 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단순한 과거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역사는 개혁이 지배계급의 저항에 부딪힐 때 필요한 결단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또한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대중의 혁명적 동력을 억제하는 전략이 치러야 했던 참혹한 대가를 증명한다. 나아가 민주주의 수호가 철저한 사회 변혁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혁명이기도 했다. 혁명의 패배는 내전 패배의 주변적 배경이 아니라 핵심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은 전쟁 초기에 프랑코 세력을 저지한 결정적 주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정치적·군사적으로 최대한 동원되지 못하고 오히려 공화국의 국가 재건과 외교적 계산 속에서 제약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의 가장 비극적인 교훈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혁명을 두려워한 공화국은 혁명이 창출한 방어 능력마저 약화시켰다. 반면 반혁명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프랑코는 지배계급의 폭력과 국제 파시즘의 지원을 총동원했다.
따라서 1936년의 스페인을 단지 패배한 공화국의 이름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한때 노동자와 농민이 사회 전체를 새로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혁명의 이름으로 기억돼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최일붕의 ‘스탈린주의의 스페인 내전사 다시 쓰기를 반박한다’도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