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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혁명과 반혁명: 1936~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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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최일붕의 기사 ‘스탈린주의의 스페인 내전사 다시 쓰기를 반박한다’와 함께 읽으면 유익할 것이다.
올해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해다. 1936년 7월 스페인에서는 역사적 사건 두 가지가 일어났다. 하나는 카나리아제도 군사령관 프랑코 소장의 군사 쿠데타다.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해 40년 동안 파시스트 통치를 이어 갔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봉기다. 노동자들은 주요 도시에서 쿠데타에 맞서 싸우며 파시스트의 최종 승리를 3년 가까이 지연시켰다.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노동계급이 도시를 장악하고 운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페인 내전은 좌파에게 잊힌 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전선이 발행하는 《현장과 광장》(14호)에 스페인 내전을 다룬 번역 글 네 편이 실린 점이 눈에 띈다. 그 글들은 모두 스탈린주의 관점에서 스페인 내전을 바라본다. 그중에는 스페인 공산당의 실수를 비판하는 글도 있으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노선을 분명하게 옹호한다. 그 글들은 진영 논리(세계를 미국 ‘진영’과 중국·러시아 등 반미‘진영’의 대립으로 환원하는 관점)가 득세하는 흐름과 맞물려 스탈린주의를 복권하려는 ‘역사 다시 쓰기’의 일환으로 보인다.(관련 기사로 최일붕의 ‘스탈린주의 노정협의 스페인 내전사 다시 쓰기를 반박한다’를 보시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스탈린주의의 진정한 본질이 소련 밖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트로츠키는 1937년 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에서의 사건들은] 국제 무대에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성격을 결정적으로 확정하는 구실을 했다.”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스페인 내전을 단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립 구도로만 바라보는 것은 극도로 협소한 시각이다. 스페인 내전은 노동자 혁명이 본질이었다. 그 혁명이 패배한 결과, 수십 년 동안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가 이어졌다. 이길 수도 있었던 혁명이 어떻게 패배하게 됐는지를 살펴보자.
혁명이 시작되다
1936년 당시 스페인 공화국은 수립된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았다. 1931년 알폰소 13세가 퇴위하면서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이후 정치 권력은 좌파와 우파 사이를 오갔다.
당시 스페인은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었다. 산업은 일부 도시에만 국한돼 발전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반도 취약했다. 대기업과 교회, 군대, 지주 세력은 노동자 투쟁과 사회 개혁을 두려움과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계급 양극화와 정치적 불만이 깊어지던 1936년 2월 총선이 치러졌다. 공산당과 사회당, 공화좌파당은 선거 협약을 맺고 연합 공천을 하며 민중전선을 구축했다.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들조차 연합 공천 후보들을 지지하라고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민중전선이 선거에 승리했다.
이때만 해도 민중전선의 핵심 축은 사회당이었다. 사회당의 기반은 조합원 150만 명을 거느린 온건 성향의 노동총연맹(UGT)이었다.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 라르고 카바예로는 “스페인의 레닌”이라는 걸맞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새 정부 각료는 모두 공화좌파당 정치인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이미 1931~1933년 집권 당시 실정으로 대중을 실망시킨 전력이 있었다. 공화좌파당의 목표는 스페인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세계적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유럽 최빈국에서 안정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보수파 의원은 새 정부가 그해 4월 발표한 정책을 두고 이렇게 일갈했다. “당신들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대중을 통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민중전선이 승리하자마자 개혁 입법을 기다리지 않고 교도소를 습격해 전임 우파 정부가 수감한 좌파 정치수들을 석방했다. 전례 없는 투쟁이 일어났다. 임금 인상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사회적 성과를 쟁취했다. 남부 농촌 지역에서는 대규모 토지 점거 운동이 일어나 혁명 직전의 상황으로 갔다. 가톨릭 교회의 반동에 맞서 수도원과 교회 건물을 불태우기도 했다.
지배계급 대부분은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분쇄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면 군사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공화파 정부는 장군들의 반혁명보다 사회 혁명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전국노동자연맹(CNT)과 UGT가 요구한 무기 지급을 거부했다. 반혁명 음모 모의자들도 처벌하지 않았다. 곳곳에 붙은 극우 벽보를 제거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월 18일과 19일, 프랑코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는 당시 모로코에 주둔하던 부대의 사단장이었다.
프랑코의 운동은 파시즘 운동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프랑코의 운동이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치즘과는 다르다고 부정확하게 주장했다. 1930년대 스페인은 후진국이었으나, 발달한 산업 중심지와 소수였지만 강력한 노동계급이 존재했다. 지배계급과 중간계급은 반혁명 투쟁의 최신 기법을 동원해 이에 맞섰다. 프랑코의 운동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전형적인 파시즘을 모방했다. 비록 완벽히 복제하지 못해 다양한 전통과 대자산가 계층이 뒤섞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작고한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이를 두고 트로츠키가 언급한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이 적용된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프랑코의 쿠데타는 이전의 그 어떤 군사 쿠데타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계급의 조직망을 뿌리째 파괴할 진정한 대중 운동을 탄생시켰다.
프랑코 정권의 승리 이후 약 50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0년이 넘도록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 사상조차 표현하는 것이 금지됐다. 노동운동은 1960년대에야 비로소 겨우 회복됐다.
1936년 7월에 일어난 쿠데타는 초기에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다. 장군들은 단 몇 시간이면 권력을 장악하리라 예상했다. 민중전선 공화파 정부가 장군들을 달래려 타협을 시도하면서 이러한 낙관의 여지를 제공했다.
프랑코의 쿠데타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것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반파시스트 봉기 때문이었다.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이 무기 지급을 거부하자 UGT와 CNT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더 나아갔다. 스페인 본토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병영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군대를 무장 해제했다. 또, 반파시즘 위원회를 결성했다.
급히 결성된 노동자 시민군은 쿠데타 세력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트럭을 징발해 전선으로 떠났다. 절정기에 아라곤 전선에는 약 2만 5,000명, 전국적으로 약 15만 명의 노동자 시민군 전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36년 7월경 프랑코 군대는 스페인 국토의 절반도 채 장악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부는 군대와 무장한 대중 사이에 끼어 무력화됐다. 마드리드에 공식 정부가 존재했으나, 각 지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은 혁명위원회였다.
혁명위원회가 의료, 식량, 교통, 치안을 직접 담당했다. 혁명위원회의 지도 아래 노동자와 농민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해 집산화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산업의 80퍼센트가 집산화됐다. 아라곤 지역에서는 최대 400개의 집단농장이 조성됐다.
얼마 전까지 극도로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나라에서 여성들은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협동조합, 반파시즘 위원회, 시민군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선에서 남성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제한적이나마 낙태도 합법화됐다. 결혼식은 시민군 본부에서 열렸으며, 동거 커플도 법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프랑코의 쿠데타 직후 카탈루냐 자치정부 대통령 류이스 쿰파니스(카탈루냐 공화좌파당 소속)는 CNT 지도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시의 주인이요, 카탈루냐의 주인입니다. … 만일 여러분에게 제가 필요하지 않다면, 제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반파시즘 투쟁에 백의종군할 것입니다.”
이제 스페인은 ‘이원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파 정부와 달리 혁명위원회들은 중앙집권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했다.
파시스트 군대는 중앙집권적이어서 전국 어디에서든 단일한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반파시스트 세력의 취약한 전선이 어디인지를 파악해 전력을 집중 투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반파시즘 운동도 중앙집권적 구조를 갖춰야 했다. 그러자면 혁명위원회들이 한데 결집해야 했다. 여러 지역의 반파시스트 시민군들을 아우르는 조정위원들은 있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소비에트와 비교할 만한 전국적 병사·노동자 대표위원회는 설립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반파시스트 세력인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들의 노선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혁명을 이끄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 조직은 CNT였다. CNT는 19세기부터 스페인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조직이었다. 특히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에서 기반이 강력했다. 내전 발발 당시 CNT 조합원 수는 약 100만 명에 달했다.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들의 아킬레스건은 권력 문제였다. 그들의 핵심 사상은 권력의 중앙집중과 정치(국가를 둘러싼 권력 투쟁)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정당과 선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혁명이 전개되면서 권력 문제는 더는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위에 언급된 쿰파니스의 권력 이양 제안을 두고 CNT 지역위원회는 토론을 벌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 권력 장악을 반대했다. 새 국가도 노동자 탄압을 자행할 또 다른 독재에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세 명을 쿰파니스 정부에 입각시켰다. 쿰파니스 정부를 그대로 둔 채 그 정부와 협력하겠다는 것이었다.
CNT는 혁명을 정치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단지 거리와 공장, 토지를 통제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공장과 토지의 집산화는 스페인 혁명의 가장 위대하지만 부족한 특징이었다.
통신, 무역, 금융, 그리고 무엇보다 군사 조직은 공화파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개별 기업이나 토지를 접수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신용, 외화, 원자재, 유통망, 군수 산업을 통합적으로 통제해야 했다. 이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CNT가 주도한 카탈루냐 경제평의회 활동은 결국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재정 통제에 막혀 무너지고 말았다.
CNT가 가장 위대한 혁명적 기회 앞에서 이토록 비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아나키즘 사상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CNT가 실패한 핵심 원인은 국가에 대한 태도였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중앙집권화, 즉 효과적인 정치 권력 창출이 필요했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 국가도 “국가는 국가다” 해서 건설하기를 꺼린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들은 결국 옛 국가 체제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부 참여는 혁명을 파괴하는 결정적인 약한 고리가 됐다. 노동계급 다수가 지지하지 않는 정부에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산당과 그 동맹 세력은 비교적 쉽게 혁명을 파괴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들이 권력 장악을 회피한 노선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은 그 권력을 휘두를 착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넘겨주는 일이다. 모든 혁명의 본질은 새로운 계급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 삶 속에서 자신들의 강령을 실현하게 하는 데 있다. 전쟁을 치르면서 승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권력 장악을 준비하지 않은 채 대중을 반란으로 이끌 수는 없다. ... 결국 권력 장악에 반대해 아나키스트들은 그 수단인 혁명마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또 다른 중요한 혁명 조직은 신생 소규모 정당인 POUM이었다. 전직 교사이자 언론인, 전 공산당원인 안드레우 닌이 POUM을 이끌었다. 그는 스탈린에 맞선 좌익 반대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소련에서 추방됐다.
그러나 POUM은 혁명과 민중전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1936년 1월 POUM은 좌파 선거 협약(민중전선)에 서명했다. 하지만 협약안을 작성하는 회의에서 사회당 우파와 공산당이 공모해서 POUM을 은밀하게 배제한 탓에, 협약 작성 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이어 1936년 9월에 POUM은 카탈루냐 정부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POUM이 기회주의적이고 중간주의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POUM은 한편으로 민중전선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농민·시민군 위원회에 기반한 대안적 혁명 권력을 건설해야 한다고 모순되게 주장했다. 나아가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이끌었던 군대를 본떠 적군을 창설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당원이 약 3,000~5,000명에 불과했던 POUM은 승리를 거두기에는 너무 작은 조직이었다. 결국 고립을 두려워한 나머지 POUM은 CNT를 추수하는 데 그쳤다. 1936년 9월 POUM은 아나키스트들을 따라 카탈루냐 정부에 입각했다.
안드레우 닌이 카탈루냐 정부의 경제 강령을 작성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POUM은 혁명적 대안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붕괴해 가는 공화국 체제를 떠받쳤다.
스페인 공산당(PCE)
스페인 공산당은 내전 초기에만 해도 비교적 소규모 정당이었다. 당원 수는 2만~3만 명 수준이었다. 이처럼 당세가 약했던 것은 그들의 종파주의 정치, 즉 ‘사회파시즘’론에 기인한 결과였다.(‘사회파시즘’론은 사회민주주의도 파시즘의 일종으로, 어쩌면 더 위험한 세력이라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공산당은 혁명에 반대하며 오직 민중전선 전략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원들은 헌신적이고 용감했으나, 소련과 일체감을 갖고 혁명이 ‘비현실적’이라는 스탈린의 노선을 따랐다.
민중전선은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행동은 중간계급을 소외시키고, 이들이 파시스트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기업주들마저 돌아서게 만들 뿐이라는 논리였다. 한 공산당 간부는 사회화와 집산화를 두고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썼다.
이것은 소련 관료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당시 소련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방 ‘민주주의’ 정부들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스탈린은 스페인 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운 민중전선은 혁명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공산당은 내전 기간에 급격히 성장했다. 직업 군인, 프티부르주아지, 중농 등 중간계급 소속의 출세주의자들을 당원으로 대거 받아들였으나, 공산당은 공화국 정부의 다른 세력들과는 다르게 인식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소련이 공화국을 지원하는 유일한 강대국이라는 사실이 공산당의 위상을 높여 줬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정당이라는 이미지, 중앙집권적인 조직력, 그리고 전투적인 언행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시즘을 막아야 한다는 대중의 소박한 염원은 민중전선 전략과 부합했다.
이런 이유로 공화 정부 내 소수파였던 공산당의 위상과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공산당은 이 영향력을 혁명 반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데 활용했다.
특히 CNT와 사회당 좌파가 공화 정부 참여를 두고 갈팡질팡할 때, 공산당은 그들에게 혁명 논의를 중단하고 연립정부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1936년 9월 사회당 좌파의 라르고 카바예로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각료 대다수는 공화파와 사회당 우파였다. 연립정부의 슬로건은 “먼저 전쟁에서 이기고 그다음에 혁명을 논하자”였다. 사회당 좌파에 이어 CNT 지도자들도 그 노선을 수용했다. 그들 중 세 명이 카탈루냐의 쿰파니스 정부에 참여했고 곧이어 마드리드에서는 네 명이 장관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공화파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사적 소유의 존중과 유지였다. 그들은 사회 혁명에 맞서 공화파 장군들과 경찰 간부들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그동안 쟁취한 성과를 포기하는 것을 수반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혁명 반대 정책은 결국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을 촉발했다. 이 사건은 분수령이었다. 공산당은 혁명을 억누르고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동자 시민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5분의 4는 아나키스트와 POUM 시민군의 수중에 있었다.
‘내전 속의 내전’이었다. 그것은 소련에서 스탈린이 선임 볼셰비키를 모조리 유혈 숙청하고, 특히 ‘트로츠키’를 ‘파시스트’로 몰아 중상모략하던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공산당은 내전에서 승리하려면 프랑스, 영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규율을 갖춘 상비군으로 재래식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군사 노선에 따라 전쟁을 치러 공화국을 재건하려 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였다.
닷새 동안 이어진 전투로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CNT와 그 정치 조직인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처음부터 휴전을 촉구했다. 이것은 구체적 맥락에 비춰 보면 회피에 불과했다. 아나키스트 장관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몬세니가 현장에 급파돼 무장 대원들이 무기를 내려놓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전투가 끝나자 중무장한 경찰 증원군 5000명이 도시를 점령했다. 이는 아나키스트 장관들의 약속과는 정반대 결과였다.
그 결과 1936년 7월에 이룩한 혁명적 성과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집산화한 토지는 개인 소유자에게 반환됐고, 공장은 공화 정부가 통제했으며, 가톨릭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다. 후방의 노동자들은 무장 해제됐다. POUM은 불법화됐고, 그 지도자인 안드레우 닌은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고문당한 뒤 살해됐다.
스탈린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에 대해
소련은 공화국에 무기를 제공한 유일한 국가였다. 반면, 영국, 프랑스, 미국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주저했다. 프랑스는 당시에 민중전선 정부였는데도 그랬다.
쿠데타 직후인 7월 20일 새벽, 호세 히랄 총리는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의 레옹 블룸 총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무기 불지원 결정을 내리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공화파 장악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혁명 때문에 지원을 더욱 꺼렸다. 이들 강대국은 냉소적인 비개입 정책을 고수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비개입위원회에 가입했으나 합의 사항을 무시했다.
스탈린도 처음에는 재정과 의료 지원조차 반대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것을 빌미로 파시스트 세력 지원을 정당화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권의 개입으로 힘의 균형이 프랑코 쪽으로 급격히 기울자, 소련은 공화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결정했다. 그 대가로 스페인의 금 보유고를 담보로 챙겼다.
소련은 2년간 군사 고문과 조종사 등 2,000명을 파견하며 군사를 지원했다. 그와 함께 소련 보안경찰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개입했고, 혁명 운동을 중단하라는 스탈린의 요구가 뒤따랐다. 스탈린이 스페인을 지원한 목적은 독일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에 대비해 시간을 버는 한편, 스페인 민중이 승리할 유일한 희망인 혁명적 전쟁(혁명과 내전을 동시에 수행하는)을 억누르는 데 있었다. 결국 스탈린은 공화국이 패배하지도, 승리하지도 못하도록 교묘하게 개입했다.
소련이 제공한 무기 배분을 통제한 덕분에 공산당은 공화국 장악 지역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부는 참호전에 절실히 필요한 무기를 지급하지 않았다. … 15세 소년들에게 40년 된 소총을 쥐여 전선으로 보내면서, 건장한 병사들과 최신 무기를 후방에 남겨 둔 정부는 명백히 파시스트보다 혁명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한편, 소련은 국제여단을 창설했다. 물론 국제여단을 순전히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군대로만 볼 수는 없다. 53개국에서 온 3만여 명이 스페인에서 싸웠고, 수많은 지원병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노동계급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국제주의 사례의 하나다.
국제여단 창설은 소련에 몇 가지 이점을 안겼다. 소련의 ‘국제주의’와 반파시즘을 보여 주는 근거가 됐으며, 스탈린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공산당원뿐 아니라 사회당원, 무소속, 심지어 자유주의자까지 모집한 것은 민중전선 정치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실제로는 각국 공산당이 국제여단을 조직했고, 각 당에는 모집해야 할 자원병 할당량이 배정됐다.
이처럼 국제여단이 남긴 유산은 모순적이다. 정치적 한계가 명백했음에도 국제여단은 노동계급 국제주의와 반파시즘을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이고 영웅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결론: 어떻게 싸워야 승리할 수 있었는가?
반파시스트들은 프랑코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스페인 내전은 영웅적이지만 운명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투쟁이었는가?
스페인 내전의 결과는 노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정규전이어야 했을까? 아니면 혁명적 전쟁이어야 했을까?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주지하듯이 내전은 군사 무기뿐 아니라 정치적 무기로도 수행된다. … 이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혁명의 강령을 전진시키는 것뿐이다.”
프랑코 측은 토지의 5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적 전쟁 세력은 농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토지 재분배 강령을 포함할 수도 있었다. 또한 카탈루냐와 바스크에 독립을 약속했다면 그 지역의 동요하는 지지자들을 붙잡아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코가 작전 기지로 이용하던 스페인령 모로코에 독립을 부여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 열강, 특히 모로코 영토의 대부분과 알제리를 지배하던 프랑스를 자극할까 우려해 배제했다.
1936년 11월 마드리드 공방전은 공산당이 대중 동원과 게릴라전 같은 혁명적 방법을 활용한 유일한 전투였다. 당시 공산당 지역위원회는 공동 식당·세탁소·탁아소 운영 등을 조직했다. 혁명적 선전도 활용했다. 공산당 지도자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노 파사란”(No Pasarán: 파시스트들은 절대 못 지나간다)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대중을 동원했다. 이 전투는 공산당이 혁명적 방법을 사용한 유일한 경우였고, 의미심장하게도 그런 식의 전투로 파시스트의 진격을 저지했다.
놓쳐 버린 다른 기회도 있었다. 해군 병사들은 재빨리 해군을 공화국 통제 하에 뒀다. 프랑크 휘하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이동을 막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화 정부는 서방 열강이 지중해의 이해관계를 위협받는다고 여길까 우려해 해군 투입을 거부했다.
이 모든 기회는 특히 ‘민주주의 정부들’의 지원을 얻으려는 소련과 공산당의 시도로 유실됐다. 그러나 서방 정부는 애초부터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스페인 자본주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네그린(사회당 우파 소속 1937~1939년 공화 정부 총리)이 아니라 프랑코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 노동계급은 제국주의자, 스페인 공화파,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좌파 측인 POUM으로 구성된 연합의 희생양이 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1917년에 시작된 혁명적 주기의 종말을 뜻했다. 민중전선은 반파시즘의 유일한 대안이기는커녕 혁명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대안은 있었다. 1936년 7월부터 1937년 5월까지 카탈루냐에서 전개된 혁명을 전국으로 확대시켰다면 프랑코 세력을 분쇄하고 사회주의적 변화를 이끌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유주의, 개혁주의, 스탈린주의, 아나키즘이 아닌 혁명적 대안을 세웠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