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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 특집:
2008 촛불시위를 돌아보며, 또 다른 저항의 미래를 생각한다

5월 2일 촛불 1주년을 맞아 마지막 촛불 수배자이자 광우병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인 김광일 씨가 <레프트21>에 촛불을 평가하는 편지를 보내 왔다. 얼마전에 보석으로 석방된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박원석·한용진 공동상황실장의 인터뷰와 함께 싣는다. <레프트21> 독자들이 촛불 주역들의 평가와 전망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8년 5월 2일부터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했다 ― 촛불이라는 유령이.

한국 지배계급의 모든 세력이 이 유령의 사냥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명박, 어청수, 신영철과 검찰, 조중동, 전경련 등 자본가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든 촛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먼저, 촛불시위가 폭발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겠다.

폭발 배경

새 천년 이후 벌어진 거리의 대중적 정치 운동들 ― 2002년 말 여중생 압사 항의 운동, 2003∼2004년 파병반대 반전 운동,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운동 등 ― 이 2008년 촛불시위의 중요한 역사적 연료다.

촛불시위는 또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강화했지만, 사실 이 정책들의 기반은 모두 10년 동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닦아 놨다. 시위의 촉발점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체가 노무현 정부가 체결한 한미FTA의 선결 조건이었다.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연속성을 띈다면, 반신자유주의 저항의 연속성도 따져 봐야 한다.

2007년 여름 뉴코아·이랜드 여성 조합원들의 매장 점거 투쟁도 높은 지지 속에 비정규직 고용의 문제점을 전 사회적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한미FTA 반대 투쟁은 공공 서비스 문제와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등 식품 안전 문제를 제기한 중요한 투쟁이었고 신자유주의 정책 일반에 반대하는 운동의 토양을 마련했다.

요컨대, 전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환멸, 그것에 맞선 저항과 투쟁이 2008년 촛불시위의 또 다른 자양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시위 직전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이명박 우파 정부가 집권하고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런 선거 결과에 주요 진보 단체 ― 시민단체,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 들은 ‘진보·개혁세력의 패배’와 ‘보수화론’ 등을 제기하며 사기저하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주요 진보 단체들이 주춤하는 사이 이명박의 공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 갔다. 인수위 시절의 ‘어륀지’, ‘고소영·강부자’ 내각에 대한 반감으로 대중은 싸울 태세를 갖춰 갔다. 당시 대중의 정서는 기존 주요 개혁주의 사회운동 단체 지도부보다 왼쪽에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주요 사회운동 단체들은 단체로서 뒤늦게 운동에 참가했고 중요한 논쟁에서 시위 참가자들의 뒤를 좇기 급급했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 직후 다른 대응을 보여 준 그림도 있다. 이명박 당선이 결코 운동의 후퇴가 아니며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위가 이어졌다. 조직된 저항들이 이후 저항의 발판을 차근차근 마련했다.

먼저 급진좌파들이 치고 나갔다. 이명박 당선 직후 첫 번째 열린 시위는 1월 26일 세계사회포럼 국제공동행동이다. 이 시위는 다함께,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힘, 전국빈민연합 등이 주도했다. 2월 말에는 여수 외국인수용소 참사 1주기 집회가 열렸다. 한국 사회에서 끔찍한 착취와 핍박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과 급진좌파들이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파병반대국민행동이 개최한 이라크 개전 5주년 규탄 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가해 친미주의자 이명박 정부의 전쟁 지원 정책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고 거리 행진을 했다.

그 뒤에 이명박 정부가 체포전담반을 투입하며 위협했지만 3월 28일 ‘등록금넷’이 주최한 등록금 문제 해결 전국 집회에 대학생 1만여 명이 참가했다.

5월 2일 첫 촛불시위 전날인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는 민주노총 노동자 2만여 명이 참가했다. 이날 거리 행진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분위기를 보면서 5월 2일 시위의 성공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개 시위에 우호적이 않은 종묘공원의 보수적인 할아버지들까지 시위대에게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5월 2일 시작된 폭풍은 그렇게 자라난 것이다.

촛불시위의 성과

촛불시위의 성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장집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많은 에너지가 투여돼 굉장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었는데 오늘의 시점에서 촛불이 만든 결과는 너무 허망하다. 오히려 정부는 더 자신감을 얻고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레디앙〉 2008년 9월 18일치)

거리 시위와 저항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6월 10일 시위 이후 일찌감치 ‘대의 민주주의’와 ‘제도정치적 대안’을 강조한 최장집 교수가 촛불시위 성적표에 이명박 강화를 넣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더 자신감을 얻고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맞지 않다. 촛불시위의 영향으로 이명박 정부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촛불시위 최고조기에 기록한 ‘7퍼센트 지지율’도 놀랍지만, 이제 겨우 1년 된 정부의 지지율이 30퍼센트대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정부측 인사들이 괜히 ‘촛불 때문에 1년 허송세월했다’고 한탄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촛불은 이명박 불도저를 어느 정도 저지하기도 했다.

촛불시위가 끝났지만 그 여파는 이명박 정부를 불안정하게 했다. 한미FTA, 대운하, 의료·공기업 민영화 등은 중단되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추진됐다. 한나라당이 주력한 방송법 개악은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에 부딪혀 두 번이나 처리가 좌절됐다. 어청수의 뒤를 이은 ‘심복’ 김석기가 낙마했다. 경찰국가를 만들려는 이명박에게 매우 중요한 경찰 수장이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온갖 반민주 악법을 추진하며 칼을 드는 것이 기세등등하게 보이지만, 이는 자신감이 있어서라기보다 오히려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는 저항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익 소설가 이문열은 이렇게 탄식했다.

“[이명박 정부 1년에 대해]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바뀌어진 게 없다. … 춘래불사춘 같은. 그 기분으로 별로 바뀐 걸 느끼지 못한다.”(〈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치)

하나의 저항과 투쟁을 분석할 때 구체적 요구의 성취 여부뿐 아니라 의식의 변화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촛불시위는 매우 중요한 퇴적물을 남겼다.

8월 말까지 총 1천5백24명 연행, 구속 32명, 수배 22명, 부상 2천5백 명이라는 수치는 시위대의 용기와 의지가 얼마나 굳건했는지 보여 준다.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 싸워야 함을, 또 그럴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것이야말로 촛불시위의 최대 성과다. 다음번 저항과 투쟁이 분출할 때 2008년 촛불시위는 그 의의와 역사성을 다시 아로새길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냉정해서, 단순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음번 저항의 분출을 앞당기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저항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또 다른 저항의 ‘봄’을 위해 촛불시위의 성과와 약점을 집단의 기억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자발성주의

촛불시위는 6월 10일 전국에서 1백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이는 위대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6월 10일 이후 저항은 정권 퇴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의제를 실질적으로 확장하며, 조직 노동자들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몇 가지 약점이 운동을 발목 잡았다.

첫번째 문제는 자발성주의다. 촛불시위라는 위대한 저항의 중심에는 대중의 뛰어난 자발성이 있었다. 그러나 자발성을 고무하고 강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발성과 의식성(지도적 요소, 리더십)을 분리해 대립시키고 전자만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문제다.

촛불시위에도 리더십은 존재했다. 5월 2일 최초 시위의 제안자는 인터넷 커뮤니티 ‘안티2MB카페’였다. 이것은 리더십이 아닌가? 그리고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5월 6일 발족한 이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시위의 구심이 됐다. 공개 토론회나 언론에서 우석균·박상표·우희종 같은 전문가들은 정부의 논리를 반박하고 운동의 대의를 지켜내며 이데올로기 지도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경향신문〉과 〈한겨레〉 같은 자유주의 신문부터 극좌파까지 ‘지도에 대한 거부, 대의에 대한 거부’나 ‘집단지성’(‘다중지성’이나 ‘집단이성’라는 단어로도 표현됐다), ‘인터넷 민주주의’ 등을 강조하며 자발성주의의 포로가 됐다.

자발성주의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주요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중요한 전략·전술 문제를 회피하는 근거가 됐다. 예컨대, 거리 행진 초기(5월 25∼28일)에 행진 조직을 회피한 것과 정권 퇴진 같은 운동의 단일한 목표 설정을 거부한 것 등이 그렇다.

자발성주의는 운동 전체의 전략·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해, 적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킨다. 우리가 맞서 싸우는 이명박 정부와 자본주의 체제는 결코 자발성주의를 전략으로 삼지 않는다. 청와대와 경찰, 검찰, 사법부, 자본가와 보수 언론은 서로 견해차도 있지만, 한 계급으로 행동할 때는 대단히 의식적이고 일사불란하다.

자발성주의는 운동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자발성주의는 조직된 사회 세력과 급진좌파 들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는다. 운동이 더한층 정치화하고 심화하는 데 제어장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 언론은 순수한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에 불순한 배후가 있고, 그래서 폭력시위로 변질됐다고 촛불시위를 공격했다. 5월 말에는 다함께를, 6월 말부터는 이 배후의 고리로 한국진보연대를 지목해 탄압했다.

운동의 좌경화를 바라지 않는 것은 정부와 보수 언론 같은 외부세력만이 아니다. 운동 안의 온건세력도 자발성주의와 ‘정치 배제’를 강조한다. 온건 세력들은 운동이 적당한 항의 수준에서 멈추길 바란다. 정권 퇴진 운동과 노동자 파업 같은 격렬한 투쟁으로 번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2008년 5월 말 다함께를 의식적으로 비난한 사람들 중에는 친민주당이나 친문국현 성향이 다수 있었다(또 다른 의식적 집단은 경찰 ‘알바’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부화뇌동한 좌파들에게 유감이다). 2004년 탄핵 반대 시위 때도 온건 NGO들과 노사모 쪽은 ‘정치 배제’란 명분으로, 다함께를 연단에서 배제하거나 다함께가 발행한 신문 판매를 금지하는 등 통제하려 했다. 다함께가 탄핵에도 반대하고 노무현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자발성주의의 약점으로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민주성이다. 짐짓 개인들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비칠 수 있다. 운동의 중요한 덕목은 단결이다.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함께 토론하고 논쟁하고 행동의 목표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현실에서 결정은 반드시 존재한다.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라도 일종의 결정이고 지침이다. 자발성의 권위 뒤에 숨어서 누군가는 결정하고 지침을 내놓는다. 이런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아고라가 싫어하는 것: 계몽, 간섭, 지도 … 아고라가 좋아하는 것: 연대, 지혜, 토론 … ”(《대한민국상식사전 아고라》)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지도”와 “연대”·“토론”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발성과 리더십 둘 다, 동시에 필요하다.

그 리더십은 자발성을 키우고, 그 자발성에서 배우고 대화하며 동시에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투쟁하는 리더십이어야 할 것이다. 굳건하고 민주적이며 급진적인 리더십 말이다. 그리고 그런 리더십은 개인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투쟁에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은 집단적인 경험과 기억을 일반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둘째 약점은 개혁주의였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주요한 개혁주의 단체 ― 시민단체와 한국진보연대 등 ― 들은 운동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 약점 때문에 운동과 저항이 더 심화하는 것을 제어하는 구실도 했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반대하고 변혁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일련의 정책을 통해 개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부문주의’나 ‘단일쟁점주의’라고 불리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제 확장을 둘러싼 논쟁의 배경이다. 주요 개혁주의 단체들은 운동의 성격을 ‘광우병 쇠고기 반대’만으로 한정하려 했다. 게다가 의제 확장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총체적 반대를 의미하고 결국은 정권 퇴진이라는 논리적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혁주의 단체들은 의제를 제한하려 애썼다.

개혁주의의 다른 특징은 ‘국민주의’다. 좌파적인 국민주의는 보통 ‘민중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NGO의 경우, ‘시민’이란 개념이 ‘국민주의’를 나타낸다. 물론 촛불시위는 말 그대로 ‘범국민적인 투쟁’이었다. 심지어 민주당조차 시위에 참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회 변혁과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도 그 투쟁의 효과를 전략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이 있다. 바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그렇다.

‘국민주의’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힘을 그저 ‘국민’ 중 한 요소로만 여기기 때문에 이 무기를 사용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게다가 ‘국민주의’는 모든 구성 요소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태도 때문에 운동에 온건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명박 퇴진 논란이 벌어졌을 때, 반대론자들의 주요한 논거 중 하나는 ‘시위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이명박 퇴진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혁주의의 중요한 한계는 저항과 투쟁이 급격하고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투쟁을 더욱 심화시키기보다 적절한 시점에서 정리·타협하는 게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 10일 이후 주요 개혁주의 단체들이, 이명박 퇴진을 앞세우고 노동자 파업을 조직·확대하는 등 운동을 심화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7월 초 ‘사회원로’들의 “국민 승리 선언” 제안을 받아들여 촛불시위를 정리하려 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반제국주의 활동가이자 소설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개혁주의의 약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알고 보면 압력솥의 삑삑대는 경보음이 담당하는 기능과 흡사하다. … 정치적 분노를 위무하고 승화시켜 그러한 분노가 결정적 국면에 이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개혁주의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일상적 시기에는 개혁주의 단체 지도자들뿐 아니라, 대중의 의식도 개혁주의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이것의 뿌리는 바로 자본주의 체제다.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착취와 소외, 억압은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에 총체적으로 맞서는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파편화하고 분절된 개혁주의에 이끌리게 한다. 노동자들이 단결해 싸우기도 하지만, 착취는 노동자들을 파편화시키고 경쟁에 내몬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어 노동에서 소외를 느끼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된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노동자들은 체제의 틀 안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에 이끌리게 된다. 심지어 혁명적 시기에도 그렇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8월에 가서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개혁주의 세력이었던 사회혁명당이나 개혁과 혁명 사이를 오락가락한 중간주의 멘셰비키가 다수파였다.

대중이 개혁주의에 끌리는 또 다른 요소는 개혁주의 지도부들이 투쟁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요소, 즉 대중의 개혁주의적 의식과 개혁주의 지도부의 투쟁 지도를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의 의식이 자신의 행동과 투쟁을 통해 변한다고 여긴다. 이것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전선’이다. 공동전선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확대하려 노력하면서 이 투쟁의 전망을 제시하고, 가장 적극적인 투쟁 부위가 돼 변혁적 대안의 올바름을 대중에게 입증하는 전략·전술이다. 촛불시위에서 대다수 극좌파가 자인한 ‘무능’은, 바로 이 공동전선의 중요성을 간과한 탓이었다.

개혁주의 문제의 또 다른 쟁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1백10여 년 전에 던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질문의 유효성이다.

운동 그 자체만을 만능으로 여긴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질문은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저 현실의 투쟁이 중요할 뿐 거대한 목표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향점과 원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현실 투쟁의 전략·전술을 좌우한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게다가 경제 위기 때문에 개혁의 여지가 더 줄어든 지금, 근본적 변혁 원칙을 현실에 적용해 투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졌다.

조직 노동계급

셋째 약점은 조직 노동계급의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다. 6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제공한 매우 중요한 기회 ― 이명박의 후퇴, 운동의 자신감 증대와 비옥한 정치적 토양 ― 를 조직 노동계급은 살리지 못했다.

이는 운동 전체에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에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집단적 규율에 묶여 있고, 체제의 작동을 마비시킬 힘이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면, 어느 순간에는 항의가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당시 거리 시위와 항쟁의 중요한 약점이었다.

촛불시위는 6월 10일 정점에 이른 후, 완만하게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백만 거리 시위는 거리의 미조직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업적이었다. 이 업적을 이어받을 주자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조직 노동계급이었다.

게다가 6월에 화물연대 파업과 덤프·레미콘·굴삭기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져, 파업을 확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왜 기회를 놓쳤을까? 몇 가지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민주노총 지도부의 보수성 문제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촛불시위 초기 국면에 ‘민주노총 조합원은 “시민”으로 참가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다행히 5월 31일부터 노동조합 차원으로 조직해 대열을 갖추고 촛불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요한 타이밍에서 파업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7월 2일 ‘상징적인’ 두 시간 파업에 머물렀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연맹별로 하루 파업을 벌이는 ‘순환파업’을 계획했고, 이것을 이석행 위원장은 순번제로 타석에 나서는 “야구 파업”이라 불렀다. 그러나 당시는 9회까지 균등하게 기회가 보장된 야구에 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온 힘을 다해 역공을 퍼붓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야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론》에서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파업을 ‘위급할 때를 대비해’ 호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 두었다가 마음먹으면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주머니칼처럼 생각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했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관한 것이든, 자기 작업장의 고유한 요구든 이명박에 맞서 조직된 노동계급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에 노동자들의 힘을 충분히 모아내지 못한 것은 노동조합의 특성과 한계를 보여 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즉자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기구다.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분업체제가 형성된다. 정치투쟁은 개혁주의 정당이,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맡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가 항상 칼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중요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정치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도 있다. 1996년 말∼1997년 초 민주노총 파업이 그렇다.

그러나 2008년 촛불시위에서 조직 노동계급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근본적 변혁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 벌어질 투쟁과 저항을 위해 광범한 행동을 조직하는 공동전선뿐 아니라, 근본적 변혁이라는 이상과 원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 원칙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과 전망, 구체적 투쟁의 전략·전술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촛불시위에서 벌어진 여러 논쟁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도, 근본적 변혁 원칙이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경제 위기 하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근본적 변혁이라는 이상과 원칙이 더욱 중요하다. 더 첨예하고 격렬해지는 투쟁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이에 도전할 것인가하는 양자택일 상황에 이를 것이다.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이명박의 정책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더 나은 세계를 꿈꿨던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여전한 과제를 남겼다. 우리에게는 절망하거나 좌절할 권리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쟁취해야 할 세계를 위한, 근본적 변혁을 위한 저항의 의무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