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옛 소련 블록은 사회주의 사회였는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전후 유럽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동유럽에서 일당독재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동유럽의 혁명들은 마침내 옛 소련의 운명을 결정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충격파가 지금도 국제적 풍광을 바꾸는 중이다.

〈레프트21〉은 두 차례에 걸쳐 1989~91년에 일어난 동유럽 혁명들과 옛 소련 블록 붕괴의 의미를 다룰 예정이다. 이번 호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이어졌는지, 옛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옛 소련 블록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가

1989~91년 동유럽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제2차세계대전 뒤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생애 최대의 정치적 사건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자처하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붕괴하자 국제 좌파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공산당들은 붕괴하거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에서도 그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커다란 사기저하와 방향감각 상실을 겪었다. 일부는 개혁주의(예컨대, 진보신당의 주요 리더들)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또는 자율주의(예컨대,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로 변신했다. 일부는 아예 우익(한나라당 의원 신지호 등)으로 변신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회 변화에 회의를 느끼며 단순히 운동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서방’은 승리를 선언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도전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대안은 패배했고, 거대 대안들의 투쟁 서사로서 역사는 끝났다. 미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이익을 따르는 세계 시장과 다국적 기업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선언은 단명했다. 1990년대 후반에 세계 도처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기업 세계화 반대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이 융합하기 시작했다. 그 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체제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 때문에 세계 주요 지배계급은 1989~91년 옛 소련 블록의 붕괴 이래 가장 커다란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아닌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한지를 토론할 때면 어김없이 “소련 문제”가 쟁점이 된다. “소련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까닭이다.

옛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 또는 적어도 “노동자 국가”나 “탈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옛 소련을 지지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사회주의적 미래를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반혁명, 옛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최일붕의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을 추천합니다.

반대로, 옛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이기는커녕 자본주의보다 더 퇴보한 사회였다면, 그 논리적 결론은 퇴보를 저지하기 위해 서방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 블록이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회라면, 옛 소련 블록의 몰락은 오히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수 있음을 뜻한다.

지금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북한·중국·쿠바 등 잔존하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본떠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문제”는 이론 그 자체를 위한 이론적 주장이 아니다. 거대한 실천적 함의들을 담고 있다.

옛 소련 블록은 전체주의 사회였는가

보수주의자들은 옛 소련을 흔히 전체주의 사회로 그린다. 즉, 지도부·이데올로기·탄압에 의한 상명하달 등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전체주의 이론은 냉전 때 서방의 보수주의자들이 처음 만들었다. 전향한 옛 공산주의자들도 이 주장을 수용했다.

그 핵심은 사회의 급진적 변화 가능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즉, 볼셰비즘의 원죄는 무력을 통해 세계에 평등과 정의라는 새로운 이상을 부과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의 본질과 1917년 혁명 당시의 사상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급진적 이상을 전혀 고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보수적이고 계급 지배적인 교리였다.

옛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지도부와 비밀 경찰(옛 소련의 게페우나 옛 동독의 슈타지 등)의 절대적 구실을 강조한다. 전체주의 이론도 동일한 특징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는 달리 그 특징들을 비난한다. 사회주의가 억압적인 전체주의 사회라는 믿음을 유포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과 특권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이론은 사회 내부의 자체 변화 가능성을 부정한다. 탄압을 특별히 부각한다. 그 때문에 인구 대중은 원자화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체제에 맞서 조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옛 소련 블록을 전체주의 사회라고 비난하는 것은 언뜻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보수적이다.

전체주의 이론은 또한 연속성을 주장한다. 레닌의 러시아와 스탈린·후르시초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등의 러시아를 동일시한다. 1917년 이래 옛 소련 사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소련을 탐구한 최상의 역사가 중 한 명인 모셰 레윈은 전체주의가 “소련의 변화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역사 과정을 어렴풋하게 나타내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에서 비롯했는가

소비에트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가장 흔한 오류는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간상 선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중에 일어난 일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비논리적 접근이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주장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17년 2월 1차 혁명은 차르(러시아 황제)를 타도했다. 1917년 10월 2차 혁명을 통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를 바꾸고자 했다. 또, 국제 혁명을 고무해 불평등과 전쟁과 계급 갈등이 없는 세계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혁명 세대 대부분이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스탈린 치하에서 옛 소련은 열강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정권은 ‘사회주의’를 자처했지만, 대내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광범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봉쇄하거나 방해했다.

요컨대, 러시아의 역사는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단절)과 관계 있다. 1917년에 진정한 노동자 혁명이 있었다. 그 뒤 혁명은 다른 무엇으로 변질했다. 1917년 혁명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로 귀결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닌에서 스탈린으로”는 논리적 진행이 아니었다.

피터 세즈윅은 스탈린주의의 기원을 레닌의 이데올로기적 논리에서 찾는 것을 비판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이라는 ‘객관적인’ 사회 조건들이 대중적 혁명 물결의 쇠퇴를 위한 충분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그 원인을 레닌의 초기 공식에서 나타나는 ‘주관적’ 결함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1917년의 염원과 희망이 타락하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내전으로 경제가 파탄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에 했던 것과 나중에 일어난 것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스탈린 정권은 혁명의 타락 한복판에서 등장했다. 그 요인들은 명백히 관련돼 있다. 그러나 예정된 결말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혁명에 내재된 논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출신의 볼셰비크였던 빅토르 세르쥬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주의의 모든 세균이 애초 볼셰비즘에 있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글쎄, 이견은 없다. 단지 볼셰비즘은 다른 많은 씨앗도 갖고 있었고, 승리한 혁명 5년 동안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씨앗은 잘 자랐는데, 나머지 씨앗들은 왜 그렇지를 못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그 씨앗들이 재배된 토양을 조사해야 하고, 어떻게 재배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옛 소련 블록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

혁명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혁명이 무엇으로 변질됐는지를 묻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권이 발전시킨 것은, 타락했든 타락하지 않았든 간에, 모종의 사회주의와 전혀 상관없었다. 정확히 말해, 20세기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였다.

2000년에 작고한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제2차세계대전 직후 이런 관점에서 옛 소련에 관해 가장 조리 있는 이론을 제시했다.

옛 소련이 자본주의였다는 것은 그 사회에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들 ― 경쟁, 착취, 계급, 소외 등 ― 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임금 노동이 존재했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자유는 제약돼 있었지만, 법률적으로는 자유로왔다. 생산수단을 통제하거나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관료가 지배하는 국유 기업에 고용돼야만 했다.

이런 자본주의적 특징들은 더 많이 들 수 있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단체협약 폐지,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국내통행허가증제 도입, 여성의 예속, 농업의 강제 집산화, 강제노동수용소, 소수민족 억압 등등.

특히, 소련과 나머지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경쟁이 중요했다.

스탈린은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뒤졌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서방]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부분적으로 경제적 경쟁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군사적 경쟁이었다. 이것이 소련의 발전 패턴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이다.

옛 소련은 단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이 협소한 법률적 관점에서 사적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로 표현됐다는 점에서 국가 자본주의였다. 체제 내 메커니즘의 핵심 성격이 매우 융통성 없고 경직돼 있으며 관료적이라는 의미에서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였다.

흔히 옛 소련에만 있다고 여겨진 것들 대부분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요소들의 확장이었다. 좀더 격렬한 형태로 있었지만 말이다.

예컨대, 국가라는 핵심 문제를 살펴보자. 옛 소련에만 특수하게 있고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잘못 믿었던 것들 대부분을 현대 자본주의의 군사 부문들에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 미국의 급진 경제학자 하워드 셔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소련을 제외하면 … 미국 국방부는 세계 최대의 계획 경제다. 미국 국방부는 전체 미국 기업의 순수입보다 더 많이 지출한다. 1969년에 4백70개의 주요 시설들과 6천 개의 부수 시설들을 보유했고, 3천9백만 에이커의 땅[여의도 면적 2백54만 평의 1만 8천7백95배]을 소유했으며, 연간 8백억 달러를 지출했으며, 미국 노동력의 10퍼센트에 이르는 군인들과 군수품을 사용했다.”

사실, 자본주의 역사 내내 자본주의는 국가에 의지해 필요한 구조들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국가는 직접 생산자, 공장 소유주 구실을 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기업과 국가가 경쟁하는 세계다. 기업과 국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는 훨씬 더 중요해졌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 주도 전쟁 경제들의 경쟁 체제가 된다.

따라서 정도는 다를지라도, 국가자본주의는 언제나 체제의 일부였다. 20세기 동안 국가의 구실은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다. ‘사적 자본’은 이런 국가의 부상에 맞서 투쟁하기는커녕 종종 그것을 지지했다. 세계화의 충격 때문에 국가가 “후퇴”했다는 지난 20년 동안에도, 국가의 경제적 구실은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 통제’와 관계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당찮은 말이다. 국가 통제가 자본주의와 모순된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이런 주장들은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리고 1917년에 볼셰비키가 분명하게 반대한 것들이다.

국가 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1991년 옛 소련 체제의 붕괴와 뒤이은 이행은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다. 1989~91년은 정치 혁명과 자본주의 형태의 변화 ― 국가에서 좀더 시장 형태로 이동 ― 가 결합된 것이다.

정치 혁명이 있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따라서 자주적 대중 조직이 등장할 가능성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커다란 성과다.

한편, 자본주의 형태의 변화라는 생각은 이행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서 핵심이다.

옛 소련 블록 상층부에서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지배의 연속성이 있었다. 옛 소련의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강조한다면, 자본주의가 그때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 옛 체제를 운영한 바로 그 집단들이 어떻게 새로운 체제를 운영할 수 있게 됐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인민위원회 부서는 폐지될 것이고, 그 해체 위에서 (똑같은 건물, 똑같은 가구, 똑같은 사람이 있는)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체들이 생겨날 것이다. 인민위원은 사임할 것이다. … 대개 폐지된 인민위원회 부서의 제2, 제3의 인물이 기업체의 수장이 될 것이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의 올가 크리쉬타노프스카이야)

1989~91년 옛 소련 블록에서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가령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또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가령 1917년 러시아 혁명)에 해당하는 사회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1928~29년 스탈린의 반혁명에 필적할 만한 변화도 아니었다.

이행의 결과, 러시아에서는 광범한 경제적·사회적 붕괴가 나타났다. 옛 체제의 희생자였던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이행의 희생자가 됐다. 그러나 옛 질서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질서에서도 지배력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개인적 부를 쌓았다.

이것은 옛 체제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회 변화의 비전이 협소해졌고 두 가지 대안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옛 질서로 복귀하거나 서방 자본주의와 좀더 비슷하게 체제를 개조하거나. 옛 소련 블록의 인구 대중에게 그 결과는 거의 비극이었다.

옛 소련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사태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전진만이 아니라 어떻게 전진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특히, 국가 권력에 의지해 위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대안 세계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기억 상실과 기억은 다르다. 기억 상실은 잊는 것이다. 일부 좌파는 옛 소련을 잊으려 한다. 기억은 과거를 잊지 않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

주제
이메일 구독, 앱과 알림 설치
‘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매일 아침 7시 30분에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빠짐없이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