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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대변동

20년 전, 1989년 12월 25일에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민중봉기를 피해 전용 헬기를 타고 도주하다 붙잡혀 그의 처 엘레나와 함께 5분 안에 즉결 처형됐다.

이 글은 2000년에 작고한 영국의 국제 사회주의자이자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저자 토니 클리프가 20년 전에 한 연설을 옮긴 것이다. 애초 《소셜리스트 워커 리뷰》 제126호(1989년 12월)에 실렸고, 한국어로는 《동유럽은 어디로?Ⅰ》(신평론)에 번역 소개된 바 있다. 국가자본주의를 쉽고 탁월하게 설명하는 글이어서 독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라 판단돼 약간의 교정만 봐 싣는다.

우리는 동유럽에서 사회와 정치 질서의 가장 엄청난 격변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1848년과 1917년을 연상시키는 정도의 규모다.

1848년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다른 곳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훨씬 큰 규모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다.

대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제 내부의 압력을 관찰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회체제가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이 될 때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진술로 요약된다.

마르크스는 “시대”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하루이틀, 혹은 일이 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체제가 생산력에 질곡이 되는 동안인 수십 년이 걸리는 장기적 과정이다.

왜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이 질곡으로 작용하는가? 소련의 경우에는 1950년부터 1959년 사이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5.8퍼센트였다. 1970~78년에는 3.7퍼센트에 머물렀으며, 1980~82년에는 1.5퍼센트로 떨어졌다. 내 짐작으로는 지난 3~4년 동안에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련의 제조업 노동자 계급은 미국보다 3분의 1가량 더 많다. 소련의 제조산업 기술자의 숫자는 미국의 두 배지만, 생산량은 미국의 절반이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미국이 4퍼센트인데 소련은 30퍼센트다. 그러나 그 4퍼센트가 미국 내에서 필요한 식량을 넉넉히 생산함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소련은 소비 수준이 훨씬 낮은데도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의 경기 하락과 침체는 성장률이 대단히 높았던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 경제의 경험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탈린은 중공업과 자본재에 치중함으로써 그렇게 높은 성장률을 이룩했다. 자본축적이 체제의 중심이었다 ─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

문제는 그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강조점이 생산의 양에 있었기 때문에 체제가 아주 경직됐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강산업을 보라. 기업들은 아주 무거운 원료인 석탄과 철광석의 수송비를 절약하기 위해 해안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에 반해서 다이아몬드 생산의 중심지는 남아프리카이지만 그 유통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이다. 이 두 곳이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작은 양이 높은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철강산업의 경우는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기업은 우랄 지방의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있다. 그곳에는 석탄이 없기 때문에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육로로 석탄을 운반해 온다.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 기업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에 있다. 그곳에는 석탄이 풍부하지만 철광이 없기 때문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철광석을 운반해 온다.

수송비가 틀림없이 최종 생산물의 가격보다 30~40배 또는 50배 정도 더 높을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낭비다. 철강 제품의 가격은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 산업에 대한 엄청난 보조금은 전체 경제에 만만찮은 부담이 돼 왔다.

비합리성의 또 다른 예는 러시아의 두 공장에서 12mm 60mm 크기의 볼트를 생산할 때, 한 공장에서는 10코페이카(소련의 화폐 단위로 100코페이카는 1루블 ─ 옮긴이)의 가격을 매기는데 반해서 다른 공장에서는 똑같은 볼트에 14배나 더 비싼 1.40루블을 매긴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다즈사와 퍼실사의 가격 차이는 아마 5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만약 가격 차이가 1천3백 퍼센트나 된다고 하면 둘 가운데 한쪽은 파산할 것이다.

소련의 문제는 자원의 사용을 늘려가는 동안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좀더 많은 원료를 사용하며, 좀더 많은 공장을 지음으로써 성장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생산의 강도, 혹은 생산성 ─ 노동자 1인당 생산량 혹은 자본 1단위당 생산량 ─ 을 증대시킬 필요가 생기면 다시 말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생기게 되면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양적 방법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농업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라. 스탈린 치하에서 농업의 총생산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 1953년에 그가 죽었을 때 러시아의 농업총생산은 집산화(集産化) 이전인 1928년보다 좀 적었다. 그러나 집산화는 수많은 사람들과 식량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농촌으로부터 식량을 짜내기 위해서 그는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조직해야만 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숨기려고만 할 것이므로 2천6백만 가구의 농민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곡물을 공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20만 개조차도 통제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각 농장의 5백 가구 농민들이 1천 톤을 생산하고는 6백 톤밖에 생산하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려고 곡물을 숨기기로 합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농기계국’을 설치해 집단농장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 국가기관 각각이 20~30개의 집단농장을 관리하면서 파종과 수확을 담당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보다는 1만 개의 ‘농기계국’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문제는 트랙터 운전수가 고랑을 깊게 갈 것인가 얕게 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얕게 간다면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고, 따라서 더 많은 상여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운전수가 한 일을 측정하러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5개월 후에 수확이 나빴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것이 운전수의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날씨 탓으로 돌려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런 경직된 체제의 최종 결과는 농업을 통제하려는 스탈린의 시도가 생산량을 늘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9년 집단농장원들의 개인 경작지는 전체 경작지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개인 경작지에는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쟁기조차도 쓰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 노동자들이 없기 때문에 영농법은 아주 원시적이었다. 그런데도 1959년에 이 개인 경작지에서 러시아 전체 육류 생산의 46.6퍼센트, 우유의 49.2퍼센트, 달걀의 82.1퍼센트가 생산됐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농업 노동력을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서 예를 들어 10퍼센트로 줄일 수 있다면 공업생산을 늘릴 수 있는 큰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공업 생산성의 향상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를 합리화해 군살을 빼고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대처는 1979~1981년에 영국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했다. 그는 제조업의 노동력을 5분의 1 이상이나 줄였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본가들이 공장문을 닫고 새 공장을 열었으며 기계를 바꿨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영국 경제보다 훨씬 현대적이기 때문에 경제 개혁의 상처가 훨씬 덜할 수 있다. 러시아 경제는 대처가 실시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요구한다.

카갈리츠키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관료집단 내의 주요한 세 그룹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한 그룹은 “우리는 합리화와 시장이 필요하며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모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그룹은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대처류의 시장경제론자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카갈리츠키에 따르면, 가장 큰 그룹은 ‘피노체트류의 시장경제론자들’로 불리는 그룹으로서 이들은 대처가 너무 온건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이 실시했던 것과 같은 급진적인 조처들을 도입하려 한다.

채널4 방송은 폴란드 경제를 다룬 최근 프로그램에서 카토비체에 있는 한 철강공장의 경영자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는 “우리는 맥그리거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력의 철저한 감축을 주장하고 자신은 한 일자리를 놓고 두 명의 노동자가 취직하려고 할 경우에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따라야만 하는 논리다. 영국에서는 제조업 생산설비의 20~25퍼센트를 폐쇄했다. 러시아에서는 그 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결과로 1천6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계산은 어떻게 보면 좀 적게 산정한 것이다.

최초의 저항은 공장의 관료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둘째로, 그런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개방, 글라스노스트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폭력과 설득,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지배한다. 그들은 채찍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나 당근이 충분히 크지 않을 때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정치적 변동의 기준에서 볼 때 여전히 무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에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하고 약간의 민주화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8개월 후 헝가리 봉기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평의회를 설치했으며 헝가리의 경찰과 군대를 분쇄했다. 흐루시초프는 그들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는데, 그들은 손을 덥썩 잡았다. 물론 그 뒤 흐루시초프는 탱크를 보냈다.

이런 결과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2세는 1855년에 러시아 황제에 등극하여 농노들과 지방정부에 자유를,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당시의 지도적인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던 헤르쩬은 알렉산더 2세를 ‘해방자 차르’라고 불렀다. 단 한가지 문제는 차르가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토지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방정부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폴란드의 민족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 결과 나로드니키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운동을 형성했고 알렉산더 2세는 1881년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한 황제가 됐다.

오늘날 러시아의 지배자들에게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온갖 요구들이 쏟아지는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불법 파업을 감행한 보르쿠타의 노동자들을 보라.

글라스노스트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저항과 분노의 봇물을 터뜨렸다.

위기의 확산은 무척 빠르다. 그러나 위기의 해결은 장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과거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엄청난 노동자 계급을 창출함으로써 역사를 거대한 규모로 진전시켰다. 오늘날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은 규모나 집중도, 그리고 힘의 측면에서 1917년의 노동자 계급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상, 조직, 생활관습의 측면에서 엄청나게 퇴보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노동자들은 지극히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 전인 1848년에 제기됐던 지극히 초보적인 것들 ─ 민주적 권리, 집회의 자유,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권 ─ 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후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의 인적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혁명정당은 계급의 기억’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기억’이 단지 허공에 매달린 그 무엇이 아니고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 자신들이 읽은 책 등에 관하여 서로 얘기하기 마련이다.

퇴보의 한 예는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브에서 있었던 11월 7일의 시위에서 사람들이 차르의 현수막을 들고 있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보다 더욱 나빴던 것은 지난 여름 서부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사람들이 1919년에 15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페틀루라의 청백(靑白)기를 들고 있었던 사실이다.

문제는 진정한 공산주의, 계획, 그리고 적기(赤旗)가 모두 억압적 체제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카갈리츠키나 그와 비슷한 수많은 동유럽 혁명가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들은 사상의 측면에서 자신들의 길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명확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정치적 분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카갈리츠키의 그룹에는 무정부주의자들도 있고 갖가지 종류의 정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결별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나는 오늘날 서방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함께 있는 조직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분화의 과정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발전이 아주 빠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느리다. 왜냐하면 극복해야 할 60년 간의 단절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에 노동자 대중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사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어떤 측면들은 지극히 빨리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두 과정 사이의 불균형도 있다. 대중의 머릿 속에 있는 모순은 그들의 경험 속에서의 모순의 결과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많은 연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민주적 요구들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성장해 나올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원한다.

문제는 쟁점이 직접적인 공장의 문제를 넘어서서 좀더 일반적인 것으로 될 때에는 모든 것이 온데간데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외국과 비교할 때면 언제나 서독의 생활수준과 비교한다.

만약 그들이 모스크바의 주택 사정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캘커타와 비교한다면 그들은 캘커타에는 시장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서독과 비교할 경우에 시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레닌이 혁명 사상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경험의 바깥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로서 좀더 높은 임금을 위해 싸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자동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러시아에서는 사제이면서 경찰 첩자였던 가퐁 신부가 이끌었던 동궁으로의 행진이 있었다. 대중은 그가 경찰 첩자였다는 것은 물론 몰랐지만, 그가 신부고, 그것도 교도소 순회 신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적기가 아니라 성상을 들고 있었으며 “차르 타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황제를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혁명가들은 극소수여서 기껏해야 2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군대가 5백 명의 사람을 사살하자 대중은 변하기 시작했다.

1월 9일에 시작해서 그해 말 소비에트 구호 ─ “8시간 노동”과 “무장” ─ 로까지 변화한 것은, 매우 신속한 도약이었다. 대중이 과도기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은 그 과도기가 5백 년쯤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적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하루만에(일상적 시기의 ─ 옮긴이) 한 세기 동안보다도 더 많이 변한다.

동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엄청난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왼쪽으로 움직이는 중도파와 섞일 것이며, 뚜렷한 구분선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도파가 좌향하면서 분화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다.

폴란드의 경험은 무력이 사용될 때마다 그 무력이 약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0~1981년에 지배계급은 1956년만큼 자신이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개입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들이 동독에 있는 38만의 러시아 군대를 사용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개량과 억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광부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지배계급은 부랴부랴 광산, 철도, 동력 산업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광부들은 그 법을 깨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보르쿠타에서는 단지 18개 갱의 광부들만이 파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투쟁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방통행 과정이 아니다. 시베리아 쿠즈바스의 광부 파업위원회는 파업에 반대했다. 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투사들 사이에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

동유럽 사태는 서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흔히 시장을 지지하는 대처와 키노크가 옳으며 계획은 불가능하고 사회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폴란드의 한 경제학자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중간 단계라고 비꼬았다. 서방에서 볼 때(동유럽의 ─ 옮긴이) 정권들이 산산조각났듯이 사회주의도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익에게 엄청난 응원이 되고 있다.

많은 좌익이 동유럽 체제에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유럽 노동자들의 파업이 활성화되면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에서 계급투쟁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론으로서 국가자본주의는 절대 중요하다. 러시아에 어떤 형태로든 사회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곤경에 빠져 있다. 에르네스트 만델조차도 195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은 수십년 동안의 [경제 개발] 계획을 거치면서 과거의 진보가 미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은 채 안정적인 경제성장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 경제성장 속도를 저하시키는 모든 자본주의 경제발전 법칙들은 사라졌다.

같은 해 아이작 도이처는 10년 이내에 소련의 생활수준이 서유럽을 능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들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풀이 죽어 있다. 러시아가 보통 자본주의로 지칭되는 나라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동유럽 경제가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자본축적을 강조함으로써 엄청난 성장률과 미래의 성장에 대한 장애를 모두 설명한다. 나는 1963년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만약 우리가 계획경제라는 말을 단일한 리듬으로 모든 구성 요소들이 조정되고 규제되기 때문에 [구성 요소 간] 알력이 최소화되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결정에서 예측이 주된 요인인 경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러시아의 경제는 결코 계획경제가 아니다. 진정한 계획 대신 정부의 지령이라는 경직된 방법이 그 정부의 결정과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내부의 결함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계획경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지령 경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체제의 동력, 자본축적, 노동자 계급의 창출을 설명해 준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의 강점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생산력 ─ 가장 중요한 생산력은 노동자들 자신이다 ─ 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

다음으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지나친 인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

스탈린이 초래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은 아직 살아 있다. 보르쿠타에는 그곳의 가장 큰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던 옛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광부인 그들의 손자·손녀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카갈리츠키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사상은 탱크, 곧 폭력만으로는 분쇄될 수 없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마치 시냇물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물의 흐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도 수 마일 지난 곳에서 다시 나타난다. 시냇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땅 밑으로 스며들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트로츠키는 1939년에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막강한 서기장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훨씬 더 무섭다.” 그가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스탈린은 죽었고 트로츠키는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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