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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후 30년, 동유럽은 어떻게 변했을까?

3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유럽의 소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친자본주의 논평가들은 섣부르게도 “역사의 종말”,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운운하며 자축의 팡파레를 울렸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 동유럽에서 달콤한 승리와 약속된 번영의 증거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아, 그 궤적을 훑어본다. (1989년 동유럽 혁명 자체에 관해서는 본지 299-1호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 30년: 동유럽 독재 정권들은 어떻게, 왜 붕괴했는가’(정선영)를 보시오.)

오늘날 체코의 수도 프라하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인기 있는 저가 관광지 중 하나다. 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이들 도시는 거대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들끓었고, 그전에는 옛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철의 장막’ 저편의 불가침 영역이었다.

지금은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훗날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뉜다)·헝가리·루마니아·러시아(소련)는 자칭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다. 오늘날 이들 나라에는 대략 3억 명이 산다.

냉전기에 동구권은 서방과의 경쟁에 몰두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자처했지만, 노동계급의 해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중의 생활수준은 극도로 열악했고, 사회의 우선순위는 제국주의의 경쟁에 맞춰졌다. 동구권 경제는 1970년대를 지나며 거대한 침체를 맞았고, 1980년대가 되자 곳곳에서 반란이 터져 나왔다. 1989년 9~12월 민주주의 혁명은 그 절정이었다.

마침내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권은 완전히 무너졌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듯했다.

좌절된 희망

그러나 서방이 약속했던 번영은 동유럽에 찾아오지 않았다. 혁명 전에도 심각한 불황이었던 경제는 그 후에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9년 혁명이 염원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정의·평등도 구현되지 못했다.

폴란드가 두드러진 사례다. 1980~1981년 폴란드에서 분출한 위대한 연대노조 운동은 동구권 붕괴의 서막을 여는 투쟁이었다. 한때 인구 3500만 명 중 1000만 명 이상이 이 운동에 참가해 “진정한 변화는 사회의 덜 유복한 부위를 위한 진정한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은 서방식 자본주의로 “진정한 평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89년 이후 폴란드에 시장자본주의를 대거 도입했다. 소수는 어마어마한 부를 누렸지만 대다수 민중은 극도로 가난해졌다.

몸이 불편한 체코의 한 노숙자 동유럽 노동계급에게는 국가자본주의도 시장 자본주의도 가혹한 체제다 ⓒ조승진

오늘날 폴란드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다.(다른 동유럽 나라들보다는 나은 편인데도 그렇다.) 폴란드의 지니계수(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는 집계를 시작한 1993년 직후 10퍼센트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청년 실업이 특히 심각해, 21세기가 된 이래 청년실업률이 줄곧 20퍼센트를 웃돌았다. 전체 인구 6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로, 13퍼센트가 극빈층으로 살게 됐다. 경제난을 피해 사람들은 서방으로 대거 이주했고, 출산율도 격감했다. 이 때문에 2019년 현재 폴란드 인구는 30년 전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다.(같은 기간 남한 인구는 약 1000만 명 늘었다.)

폴란드에서만 인구가 감소한 것이 아니었다. 2008년 통계에 따르면, 2025년까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는 5퍼센트, 헝가리는 13퍼센트, 불가리아는 18퍼센트, 러시아는 20퍼센트 이상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추산됐다.(이후 이 추정치는 소폭 개선됐는데, 서방으로 이주했던 동유럽계 이주민들 중 많은 수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일자리를 잃고 출신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구권 붕괴 직후 서방 지배자들은 “체제 전환 비용” 운운하며 동구권이 ‘일시적’ 어려움 후에는 불황에서 벗어날 것이라 둘러댔지만, 어려움은 결코 한때의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경제 위기가 세계 자본주의를 타격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동유럽을 두고 “자본주의의 승리” 운운하는 낯뜨거운 자화자찬은 쑥 들어갔다. 세기말 위기를 거친 동유럽 나라들 상당수는 2000년대 중반이 돼서야 1989년(이미 심각한 위기였다)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가까스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동계급의 고통이 있었다. 개방된 경제로 온갖 서방 상품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선전됐지만, 대중의 생활수준은 턱없이 낮게, 거의 옛 소련 시절만큼이나 억눌렸다. ‘혁명’ 덕분에 등장한 동유럽 정부들은 저임금과 형편 없는 노동조건을 유인책 삼아 서방의 투자(와 공장 설립)를 유도했다. 동유럽에 세워진 서유럽 기업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동유럽 기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보다 아주 약간 나았지만) 같은 기업에서 일하는 서유럽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처지를 감수해야 했다.

유럽연합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2004년에, 루마니아·불가리아가 2007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경제 규모를 키워 세계 자본주의에서 경쟁력을 얻고자 하는 서유럽 열강의 프로젝트로, 동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 가입은 저임금을 노린 서방 다국적기업의 투자, 투기자본 유입, 동유럽 금융시장에 대한 서방 은행들의 지배 심화를 뜻했다.(동구권 정권들 자신이 이런 추세를 앞장서 부추겼다.)

동유럽 경제는 값싼 노동력을 앞세워 서방 경제의 제조기지 구실을 주되게 맡았다. 이들 나라 은행의 80퍼센트를 외국계 은행들(특히 독일·스웨덴·오스트리아)이 지배했다. 막대한 환율 차익 때문에 금융 투기자본들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동유럽 경제가 (서유럽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서) 세계 자본주의와 더 긴밀히 연결됐고, 그 때문에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타격을 막대하게 입었다. 2008년 한 해만 해도 GDP가 17.7퍼센트(폴란드), 17.2퍼센트(헝가리)씩 격감했다.

IMF와 유럽연합은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세르비아·우크라이나 등에 차관을 제공했지만, 대가가 따랐다. 애초부터 복지 수준이 형편없던 동유럽 나라들에 더한층의 혹독한 긴축이 강요됐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꿨는데 힘든 것은 그대로’라는 혼란이 온 사회를 덮쳤다.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는 좌파보다 ‘외국인들’에 책임을 돌린 극우·파시스트가 위기에서 먼저 득을 봤다. 유럽연합의 “요새화한 유럽”(난민·이주민 탄압 강화) 기조는 이들 극우파에 날개를 달아 줬다.

2010년 헝가리 총선에서 강경 우파 오르반 빅토르가 이끄는 동맹당이 집권했고, 공공연한 파시스트 정당 요빅당도 제3당 지위에 올랐다. 이후 요빅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파시스트 정당 중 하나가 됐다. 폴란드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중도우파 정당 법과정의당이 집권한 2015년 이후 외국인 천대, 유대인 차별이 팽배해진 틈을 타 국수주의 우파가 성장할 수 있었다.

옆걸음

동유럽 나라들은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 노동계급 삶의 파괴, 극우·파시즘의 부상이라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전형적 문제를 겪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패’의 증거는 아니다. 1989년 이전 동구권의 관료적 지령 경제와 엄격한 국가 통제는 마르크스·엥겔스가 설명한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없는 사회였다. 〈노동자 연대〉는 동구권 사회가 또다른 형태의 자본주의(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음을 거듭 주장해 왔다.(관련 기사: ‘옛 소련 블록은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경쟁을 위한 강박적 축적이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보다 우선하는 것은 옛 소련 사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89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당국가 체제는 무너졌지만, 그 체제는 시장자본주의로 옆걸음질쳤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시절 지배자들이 시장 자본주의의 큰손이 된 것이 부지기수라, 그런 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올리가르히)가 생길 지경이었다. 한 러시아 경제학자의 지적처럼 “이런저런 사적 소유를 포함한 온갖 새로운 소유 구조가 생겨났[지만] … 새로 생겨난 사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 대중은 공정성과 경제적 평등을 갈망한다.”

그런 갈망 때문에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노동자 대중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보수적 가톨릭 국가이자 강성 우파가 득세한 폴란드에서 대중적 ‘검은 시위’로 낙태죄 강화 시도를 물리쳤고, 유례가 드문 대규모 교육 노동자 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경 우파 대통령이 지배하는 헝가리에서도 (남한 노동자들처럼) 탄력근로제 도입에 맞선 투쟁이 분출했다. 소수지만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좌파들이 주도해 폴란드에서 작지만 중요한 반(反)파시즘 운동에 착수했다.

이제는 세계 자본주의의 병폐가 집약돼 있는 동유럽을 보며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기리는 사람은 없다. 노동계급과 억압받던 대중의 투쟁이 1989년 독재 체제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아래로부터 투쟁에 변화의 동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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