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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⑤:
중국의 ‘국공합작’이 민중전선의 성공을 보여 줬는가?

지금 대다수 진보진영 지도자들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자유주의 세력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가리키는 민중전선의 한국판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민중전선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프랑스, 스페인, 해방 정국의 조선을 차례로 다뤄 왔는데, 이번 호에는 자주파 지도자들이 민중전선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주장하는 중국 국공합작의 경험을 통해 민중전선이 왜 대안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본다. 

지금 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하는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중국의 항일 국공합작을 비슷한 사례로 언급한다. 좀더 사악하고 강한 적(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진보적’, 혹은 ‘민족적’ 부르주아와 연합했기 때문에 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덕분에 나중에 국민당을 물리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공합작은 두 차례 — 1920년대와 1930년대 — 였다. 그중 첫 번째 것은 철저히 실패로 끝나면서 중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꿨다. 또, 두 번째 것도 민중전선 정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제1차 국공합작은 참담한 비극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1927년 4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을 대학살했다. 장제스와 연관된 깡패 조직인 두예셩의 청방은 노동조합 사무실을 급습해서 조합원들을 마구 죽이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사실, 수적으로 열세인 국민당 군대가 당시 서구 열강과 손을 잡고 중국을 분열시킨 군벌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노동계급이 지원한 덕분이었다. 노동자들이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당할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일이 발생하기 직전에 노동자들은 공산당 지도부의 권고에 따라 스스로 무장해제를 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민중전선의 정치 자체에 그런 비극이 잉태해 있었다. 1차 국공합작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민중전선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이전에 시작됐지만 기본 원리는 동일했다. 즉, 공통의 적에 맞선다는 명분 아래 이른바 ‘진보적’, 혹은 ‘민족적’ 부르주아의 이해에 노동계급의 이해를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이것이 원래 레닌의 1921년 ‘민족과 식민지에 관한 테제’를 중국에 적용한 것이었다고 강변했지만 레닌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 공산당과 노동계급 운동이 부르주아와 일시적 동맹을 결성할 때도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조건으로 국공합작을 결성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형식적 제약이 아니라 정치적 자기 제약이었다.

1925년 2월 말 상하이의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5월 30일 중국시위대를 향한 영국군의 발포로 촉발된 ‘5·30 사태’를 계기로 급진화돼 심지어 일부 작업장에서는 노동자 자주 관리 요구가 제기됐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계급투쟁이 상호결합하면서 노동계급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노동계급의 힘

중국 노동계급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전통적 수공업에 고용된 경우가 많았지만, 그중 일부는 상하이와 같은 연안 공업 지역의 경제적으로 중요한 대형 공장에 밀집돼 있어 막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후난성 등 일부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군벌뿐 아니라 지주들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노동계급이 토지 개혁 요구를 내걸고 싸운다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농과 빈농, 농업 노동자들을 든든한 원군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자들은 국민당과의 연합을 깨지 않으려고 이들의 투쟁을 자제시켰다. 공산당 서기장 첸두슈가 코민테른에게 국공합작을 깨거나 최소한 정치적 독립성을 늘릴 것을 요청했지만 스탈린 일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국민당의 부르주아들은 공산당처럼 합작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국민당 내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급진화에 경각심을 드러내면서 운동을 파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자신이 지주이거나 지주와 연관된 자본가 인사들이 많았던 국민당 자본가들은 기층 투쟁이 일부 확산되자 위협감을 느꼈다.

예컨대, 일본인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졌을 때는 그것을 지지하던 상하이의 부유한 중국인 상인들은 파업이 확산되자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주와 연관된 상하이의 부유한 금융 투기꾼인 군인 장제스가 이 상황을 다룰 적임자라고 여겼다. 장제스는 총부리를 노동자와 공산당 활동가에게 돌렸다.

중국 국공합작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통 1937년부터 시작해 1945년까지 지속된 제2차 국공합작(항일 통일전선)은 1차와 달리 성공으로 여겨진다.

공산당은 항일 전쟁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성장해서 이후 민중전선의 동맹이었던 국민당과의 내전에서도 승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전선은 잘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차 국공합작의 내용은 다른 민중전선과 달랐다. 예컨대, 공산당은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하거나 국민당의 움직임에 종속되지 않았다. 무장해제를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총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1935년 마오쩌둥은 좀더 민중전선에 가까운 정책 — 공산당군의 국민당 소속 — 을 요구하는 장궈타오의 주장을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이 지킨 것은 노동계급의 자율성이 아니라 당의 군사적 자율성이었다. 전자는 민중전선의 틀 내에서 지킬 수 없지만 후자는 가능하다.

사실, 공산당은 더는 지킬 만한 노동계급 정치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산당은 1920년대 후반 노동계급 기반을 완전히 잃고 농촌 변두리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이 주로 관계를 맺는 주요 집단은 노동자에서 다양한 농민 집단으로 변했다. 공산당은 게릴라 전투와 반제 민족주의를 뼈대로 한 정당으로 변모했다. 처음에는 노동자 운동의 패배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지도부가 의식적으로 이 방향을 추구했다.

예컨대, 1920년대 말 마오쩌둥 등은 리리싼이 대표하는 도시 노동계급을 조직하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리리싼이 재앙적인 스탈린주의 3기 정치에 물들어 실수를 반복한 덕분에 마오쩌둥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따라서 1930년대 일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때때로 격렬한 파업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오지에 근거지 — ‘소비에트’라 잘못 부른 — 를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것에 역량을 집중했다.

동시에, 지식인 출신이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계급 투쟁과 유리되면서 자신들이 원래 가진 민족주의 정치로 후퇴했고,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정서에 공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자신이 능동적인 민족주의의 수호자가 됐다.

물론, 공산당의 정책에 급진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주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럴듯한 토지 개혁안을 전혀 내놓을 수 없었던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은 토지 분배 정책을 내놓고 실천했다. 전체 인구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을 봤을 때 급진적 토지 개혁 입장을 취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 자기 땅을 갖는 것’ 이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국공합작 직전에 공산당은 숨 돌릴 여유가 절실히 필요했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국민당 공격에 밀려 정신없이 후퇴하는 과정이었던 ‘대장정’ 동안 공산당은 대부분의 당원을 잃었다.

난징 함락

그때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점령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일본은 다른 열강을 제치고 중국을 독식할 작정으로 1931년부터 도발을 감행했고 1937년에는 전면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무기력한 국민당 군을 물리치고 난징을 함락했고 6주 동안 민간인 30만 명을 학살했다.

평범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람들은 장제스 정부가 일본과 싸우기보다 공산당을 공격하는 데 더 열심인 것에 분노했고 단결을 요구했다.

국민당의 청년 장교들도 장제스를 납치했고 그가 항일 전쟁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장제스가 살아남은 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당 지도부가 청년 장교들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달랬기 때문이었다. 결국 1937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2차 국공합작을 선언했다.

그러나 사실, 국공합작은 항일 투쟁에 별로 기여한 것이 없다. 국민당은 국공합작을 시작한 뒤에도 항일 전쟁을 제대로 벌이지 않았다.

장제스는 여전히 ‘내부의 적’(공산당)을 제1의 적으로 삼는 정책을 버리지 않아 1938년 이른바 ‘반일 용공 단체’를 금지했고 반정부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률을 정했다.

국민당 최정예 부대 50만 명은 공산당 근거지인 연안과 화북 지역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충칭의 꼭두각시 정부와 끊임없는 비밀협상을 벌였고 일본의 전면 침략이 시작된 지 5년 뒤인 1941년에서야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반면에 공산당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자들은 항일 의지가 박약하고 부패한 국민당의 약점을 이용하고 국민당 치하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이런 정책은 국민당의 부패와 억압 정책이 민중의 반일 의지를 꺾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실제로, 1944년 일본군이 허난성을 공격했을 때 주민들은 부패한 국민당 지휘관의 군대가 참패하는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했고 심지어 반국민당 소요를 일으켰다. 오직 일본 제국주의의 끝없는 만행이 대중의 투쟁 의지를 유지시켰을 따름이다.

공산당이 이런 정책을 편 근본적인 이유는 군사적 고려를 우선시하는 공산당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도시에서 참을성 있게 아래로부터 노동계급과 민중 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향은 공산당이 1946년부터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는 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공산당은 주된 작전지역인 농촌에서는 토지 개혁을 급진화했다. 반면에, 몇몇 용감한 공산당원들이 벌인 개별적 노력을 제외하면, 도시 노동계급을 조직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뒷전이었다.

장제스가 도시 지역에서 통제력을 완전히 잃게 된 것은 측근 4대 가문이 연루된 엄청난 부패와 물가폭등 등 자체의 모순 때문에 통치 체계가 내부적으로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공산당 지도부의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미온적 입장이 단지 군사적 편의성의 문제만은 아님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상명하달식 군사 작전에 익숙해지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흠뻑 젖으면서 공산당이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한 것이었다.

1949년 승리 이전에도 공산당은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을 꺼려 했는데,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계급 운동이 크게 성장하면 이후 자신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들은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종종 갈등을 빚었지만 ‘제국주의 열강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강국 건설’이라는 궁극적 목표는 동일해졌다. 부강한 민족국가 건설에서 전투적 노동계급의 존재는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이 추구한 것은 민족해방 혁명이었지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1949년 국민당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한 중국 혁명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을 희생시킨 권위주의 정권의 탄생과 또 다른 착취 체제로 왜곡되면서 빛이 바랜 것은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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